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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413화 (413/424)

413화 의지 (3)

붉은 피가 바다를 이루고 죽은 인간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시체와 붉은 피로 이루어진 강산은 지켜보기에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었다.

쌓인 인간들의 시체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마수, 아드레말레이크가 아래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너희들과 우리들이 갖고 있는 힘의 차이다.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두거라.”

아드레말레이크의 군대가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저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꺾이지 않는 마음만 갖고 있다면 계속해서 마수들에게 검 끝을 겨누었다.

그러니 그 마음을 꺾는 것이 중요했다.

그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겠지만 사실상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이들의 마음에 압도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다.

마수들이 아무리 인간들에게 잘해줘봤자 이들의 환심을 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아드레말레이크는 더욱더 공포스러운 방법으로 인간들을 압도했다.

파쿠황을 따라 출전했던 십만의 군사들 중 이제 살아 숨 쉬는 자들은 삼만도 채 되지 않았다.

파쿠황의 온몸은 붉은 피로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한평생 투기를 갈무리해오며 무의 길을 걸어왔던 파쿠황이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마수는 당해낼 수 없었다.

놈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파쿠황의 공격이 녀석을 뚫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이 파쿠황을 분노케 만들었다.

“여기서 쓰러질 순 없다.”

이미 수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여기서 멈추면 노스 왕국군은 그야말로 전멸이었다.

그때 아드레말레이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보던 파쿠황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아니면 아드레말레이크를 막아낼 수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때 뒤편에 있던 이그트가 함께 나섰다.

“아버지.”

“이그트. 너는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저 또한 노스 왕국의 투사입니다.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일 순 없습니다.”

단호한 어조였다.

그의 의지가 드러나는 말투에 파쿠황도 잠시 말을 멈추었다.

“미안하구나. 너도 이제 어리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실언을 하였다.”

“후후, 저희들이 이곳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해도 노스 왕국에는 강한 뿌리가 있습니다. 그 뿌리가 있는 한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다 컸구나.”

파쿠황과 이그트가 동시에 투기를 폭사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엔 아드레말레이크가 있었다.

아드레말레이크가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너라 인간들이여.”

* * *

마수들과 인간들의 전쟁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는 게이트에서 마수가 아닌 인간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시테르와 다른 선발대를 돕기 위해 합류하는 병력이었다.

군사들은 본능적으로 이번 전쟁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승패에 따라 인류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고, 희망 가득한 미래를 지켜낼 수도 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게이트를 넘어오는 인간들의 눈빛엔 힘이 있었다.

거듭된 전투로 몸은 지쳐있을지 모르나 그들의 의지만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웨스트 왕국군에 이어 첼룬 왕국의 병력들도 게이트에서 빠져나와 전장에 합류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종족들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마수들이었다.

인간이 아닌 인외종이 나타나 특수한 능력들을 사용하며 전투에 임하니 마수들도 전투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후방을 휘저어 놓던 타르탄의 마수들도 더는 크게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제 그들을 막아서는 것은 로얄나이츠와 첼룬 왕국의 최강 헬라이번이었다.

특히나 헬라이번은 본신의 힘을 온전히 드러내며 마수들을 도륙내고 있었다.

그래도 위리놈이 관리하기 어려워하는 마수들인 만큼, 타르탄의 마수들도 쉽게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위험한 능력을 지닌 놈들이 많은 탓인지 그들은 여전히 인간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특히나 두 개의 검을 들고 날뛰는 마수와 몸을 숨기는 능력을 지닌 마수, 고목처럼 생긴 마수는 인간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하고 있었다.

거기다 아이처럼 생긴 마수는 자신의 몸을 분열시키며 인간 군사들을 공격했다.

헬라이번이 곧바로 두 개의 검을 들고 날뛰는 마수를 맡았다.

인간처럼 생긴 녀석은 팔 대신에 두 개의 검이 달려 있었다.

이 마수가 위험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팡!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동시에 놈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르르륵―――!!!

카가가가강!!!

헬라이번의 팔뚝과 등에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놈이 헬라이번을 공격하고 지나간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저 녀석이 움직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인간들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저 엄청난 속도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없었다.

심지어 처음 저놈을 상대하던 로얄나이츠도 결국엔 저 속도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당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헬라이번이 이 녀석을 가장 먼저 맡은 이유였다.

다행히도 녀석의 공격은 헬라이번의 비늘을 한 번에 뚫지는 못했다.

물론 공격이 거듭되면 제아무리 헬라이번이라 해도 배리어가 뚫리고 비늘도 뚫릴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놈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때 게이트가 한 번 더 요동쳤다.

역으로 어비스 던전 안으로 들어올 것은 인간들밖에 없다.

때문에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군이 더 합류한다면 전투는 더더욱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게이트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마수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인간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수들이 게이트를 통해 역으로 이곳으로 들어온단 얘기는 바깥의 누군가가 마수들에게 당해버렸다는 얘기다.

쿠구구구구구궁―――!!!

게이트가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어 그 안에서 거대한 괴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딱딱한 비늘로 이루어진 피부, 툭 삐져나온 턱과 우뚝 솟은 뿔.

녀석의 입에서는 연신 잿빛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놈을 본 마수들이 흉포한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드레말레이크!”

“아드레말레이크!”

“아드레말레이크!”

그들이 계속해서 괴수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거대 괴수가 포효했다.

―인간들이여, 모두 죽여주도록 하마.

흉흉한 안광이 뿜어져나갔다.

놈이 손아귀에 쥐고 있던 것들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수많은 인간들의 목이 우수수 굴러 떨어졌다.

그 중에는 파쿠황과 이그트의 목도 있었다.

그것을 알아본 몇몇 지휘관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노스 왕국은 투사들의 나라로 결코 약하지 않은 강국이었다.

그럼에도 아드레말레이크의 군대에 죽음을 맞이하고만 것이다.

“으아아아!”

“마수들을 죽이자!”

“돌격하라!”

“진격이다!”

아드레말레이크가 노스 왕국 군사들의 수급을 가져온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인간들의 사기를 꺾기 위함이었다.

공포를 각인시키면 인간들은 자연스레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그런 인간만큼 상대하기 쉬운 것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행동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드레말레이크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인간들은 바닥을 뒹구는 목들을 보며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공분을 일으킨 마수들을 향한 살의가 전장에 가득해졌다.

헬라이번이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대지가 몸을 일으키며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덕분에 빠르게 움직이던 마수도 움직임에 제약이 생겨버렸다.

“인간들이 저렇게나 많이 죽었나. 하지만 저 녀석은 정말로 위험해보이는군…….”

헬라이번의 시선이 아드레말레이크를 향해 있었다.

마수들 사이에서도 폭군이라 불리는 아드레말레이크였다.

그가 본신의 모습을 드러낸 상태로 도약하자 지축이 울렸다.

콰아아아앙―――!!!

다시 대지를 두드렸을 땐 주변의 모든 생명체가 휘청거렸다.

뒤이어 발생 된 파장이 인간들의 몸을 격했다.

“크하아악!”

“으헉……!”

고통 어린 비명을 토해낸 그들이 피를 내뿜었다.

엄청난 마기가 그들의 내부를 진탕시킨 것이다.

그때 아드레말레이크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그를 향해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앙―――!!!

격렬한 파공음이 들리고 헬라이번과 아드레말레이크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헬라이번을 상대하던 검을 든 마수가 다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화르륵!

그 순간,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불줄기가 일었다.

불줄기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라였다.

“너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온몸에 불길을 뒤덮은 테오도라가 마수를 향해 말했다.

사실 아드레말레이크의 병력에 가려졌지만 다른 한쪽에서도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을 통해 들어온 이스트 왕국 병력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드레말레이크에게 전멸당한 노스 왕국 군대와 달리 이스트 왕국은 테오도라를 비롯한 귀족 가문의 가주들과 마법기사단이 힘을 합쳐 마수 군대를 이겨내었다.

물론 여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유미르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스트 왕국도 곤혹을 치를 뻔했다.

거기에 이스트 왕국에는 또 다른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키이이이잉―――!!!

콰라라랑!!! 파콰과과과강!!!

환한 빛무리가 마수들 사이로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번뜩이는 빛이 창이 되어 마수들의 몸을 꿰뚫고 송곳처럼 생긴 빛들이 마수들의 몸을 관통했다.

길게 이어진 빛의 줄기는 달아나는 마수들을 붙잡아 가둬버렸다.

“이렇게 당신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흥. 나는 너희들을 위해 나선 게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내 친우가 왜 이스트 왕국을 그렇게까지 지켜내려 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번 너희들의 모습을 보며 그 이유를 조금 깨달을 수 있었다.”

키이이잉―!!!

파콰과광!!!

수많은 빛줄기가 마수들을 도륙내었다.

그들의 한 가운데에 있던 오르카이우스가 계속해서 초위 마법을 펼쳤다.

타르탄의 마수들이 오르카이우스의 존재에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수준이 엄청났던 탓이다.

이제는 테르세우스만큼이나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 오르카이우스였다.

그가 펼치는 빛의 마법은 마수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성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마수들의 공격이 점차 오르카이우스를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

쩌저저저정!!!

파콰와아아앙―――!!!

오르카이우스가 있는 곳으로 빛줄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를 향해 뭣 모르고 뛰어들던 마수들의 몸이 그대로 난자(亂刺)되었다.

곁에 있던 히스링도 오르카이우스의 힘에 감탄했다.

초대 여명의 마법기사단을 이끌었던 만큼, 그가 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다만 희대의 천재 테르세우스라는 인물에 가려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저런 실력과 힘을 지녔으면서도 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다면, 자신이라도 묘한 감정들이 들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오르카이우스가 히스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바로 테르세우스가 가장 아꼈던 수하라지?”

“예……?”

“흐흐. 모르고 있었나? 유미르는 아들과 같았던 놈이라면 자네는 모든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동료라고 하더군.”

“테르세우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러니 자신 이후에도 그대에게 군단장을 맡기려 했겠지. 사실 자유분방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미르보다는 한곳에서 모든 이들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자네가 더 군단장에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더군.”

오르카이우스의 말에 히스링도 순간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이에 오르카이우스가 피식 웃었다.

“이후 지켜보니 테르세우스가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알 것 같더군. 그래서 궁금해졌네. 마수들과의 전쟁 이후로 자네가 주도하는 이스트 왕국은 과연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콰가가가강!! 파콰아아앙!!!!

차르르르르르릉―――!!!

수많은 빛줄기가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질 법한 절경이었다.

그런 초위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낸 오르카이우스가 히스링을 돌아보았다.

“그런 미래를 고작 마수들 따위에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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