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마지막 전투 (1)
멀쩡해진 위리놈을 보며 아시테르도 허탈하게 웃었다.
어쩐지 위리놈은 계속해서 수비보다는 공격하는 쪽을 택했다.
덕분에 아시테르의 몸에도 상처가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한 강자가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만을 강행해오니 상대하기가 더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시테르는 공격과 동시에 수비를 생각해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위리놈이 아시테르를 인정했던 부분은, 다른 이들이라면 공격에 망설임을 가져가기 시작했을 텐데 아시테르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격하면 자신의 몸에도 상처가 생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시테르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죽더라도 위리놈을 쓰러트릴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는 기세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시테르의 모습에 위리놈 또한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자신과 동귀어진할 생각을 하고 있는 아시테르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싶었다.
네가 나의 이 힘을 보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좌절하고 있을 아시테르를 생각하며 웃음을 참고 또 참았다.
전투가 자신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을 거라 착각했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었다.
이 전투는 처음부터 위리놈의 판이었던 것이다.
―소감이 어떤가? 네놈과 달리 나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위리놈이 한껏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상처 입은 맹수의 꼴을 한 아시테르는 자신의 상처를 움켜쥐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위리놈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물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섬뜩하리만치 그의 눈동자는 힘 있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네 눈동자는 희망을 보고 있는 것인가.
위리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멀쩡할 때도 자신과 호각을 이루던 아시테르인데 지금은 조금 전과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다.
누가 봐도 아시테르가 불리한 상황.
그런데도 아시테르의 얼굴에는 절망이나 두려움 따윈 한 점도 보이질 않았다.
차분히 숨을 고른 아시테르가 다시 검을 겨누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고? 그 말은 나만한 강자들을 만나왔다는 것이냐?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강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내 한계를 넘고 또 넘어왔다. 지금까지 나보다 강한 상대를 이기기 위해 발버둥도 많이 쳐봤어.”
아시테르의 검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위리놈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로군.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 너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지금까지 너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의미가 있다.”
스르륵―
아시테르가 서서히 기수식을 취했다.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저런 몸 상태로 이만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느새 아시테르가 위리놈의 지근거리로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위리놈과 함께 공간을 통째로 잘라버렸다.
위리놈의 몸에 사선이 그어지며 그대로 어긋나버리는 모습이었다.
덥석!
위리놈의 손아귀가 아시테르의 어깻죽지를 잡았다.
―그런 몸 상태로도 이런 공격이 가능한 거냐. 역시나 네놈은 재밌구나.
위리놈의 몸이 또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빠르게 거리를 벌린 아시테르가 팔뚝으로 턱을 쓸었다.
핏물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아예 공격을 막아낼 생각조차 없는 거냐.”
―몇 번을 공격해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
아시테르가 다시 발을 내딛으려는 때 복부에서부터 무언가 차올라더니 이내 핏물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크학!”
피를 한움큼 쏟아낸 아시테르가 순간 휘청거렸다.
위리놈이 그런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인간은 역시나 나약하군. 겨우 뱃가죽이 뚫렸다는 이유로 저런 모습인가…….
그의 말에 아시테르가 시선을 배 쪽으로 향했다.
엄지 마디만한 구멍이 배의 정중앙에 뚫려 있었다.
그곳을 통해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번에도 내가 공격할 때 당한 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뜨거운 고통이 밀려왔다.
겨우 배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렸다고 이런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아닐 터다.
어쩌면 위리놈의 마기가 자신의 몸 내부를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크읍……!”
그래도 정신력으로 버텨내야 한다.
자신이 여기서 쓰러지면 위리놈은 분명 다른 동료들에게로 향할 터다.
놈은 카이드와 비슷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쉬웠다.
분명 자신이 죽으면 위리놈은 다른 즐거움을 위해 동료들을 죽일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아시테르가 두 눈을 부릅뜨며 두 다리를 딛고 섰다.
그때 그의 몸에 따스한 바람이 전해졌다.
밀려들던 고통도 조금씩 완화되고 있었다.
“이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숱한 전투를 치르며 자신을 치유해준 익숙한 기운이니까.
“죄송해요 아시테르님… 지금은 이것밖에는…….”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먼발치서 들려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시테르와 율리아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거기다 주변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율리아의 목소리가 아시테르의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다.
“충분해 율리아. 너무나 고맙다.”
콰아아앙!!!
다음으로 이어진 위리놈의 공격을 아시테르가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크하하하! 이걸 막아내다니!
위리놈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아시테르의 검이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수십 개의 선이 위리놈의 몸에 그어졌다.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위리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같은 결과일 뿐이다.
위리놈의 핏줄이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가 다른 마수들의 마기를 흡수했다.
다시 몸을 회복하는 위리놈을 보며 언노운 기사단은 치가 떨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건 너무 사기잖아!”
“저렇게 계속해서 회복하면 우리 대장은…….”
“스승님이 먼저 쓰러지겠습니다…….”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이러다 먼저 쓰러지는 건 우리겠다!”
그들이 앓는 소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누구 하나 멀쩡하게 서 있는 이가 없었다.
카이드가 무리해서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누군가는 마수들의 손에 당했을 터다.
“흐아아아아아아!”
먼발치서 마수들과 전투를 치르던 카이드가 괴성을 내질렀다.
이제는 인내와 끈기였다.
몸은 한계에 부닥친 지 오래고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부터가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발은 감각조차 없다.
그래도 어찌어찌 움직이며 마수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반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기는 카이드의 의지로 움직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체 네놈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냐.”
뭐가 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아득해져 올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완전히 낯설다기보다 최근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그 순간 푸른 물결이 파도치며 주변 마수들을 휩쓸어버렸다.
“이 검술은…….”
창을 멈춘 카이드가 시선을 돌렸다.
그 옆에는 검을 든 르노어가 서 있었다.
“망할 할배… 내 사냥감을…….”
“시끄럽다. 도와주러 와도 그런 말투라니.”
르노어가 혀를 차며 말했다.
르노어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로얄나이츠들도 속속들이 도착하며 언노운 기사단을 도왔다.
“우와아아아아!”
“마수들을 죽여라!”
“언노운 기사단을 지켜라!”
“마수들을 모조리 죽이는 거다!”
“웨스트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웨스트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기사들의 엄청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이는 듯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로얄나이츠와 웨스트 왕국 기사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마수들을 공격했다.
오랜 전투로 지쳤을 법도 하건만 그들의 면면들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전의에 가득 찬 얼굴들이었다.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카일라이드가 언노운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전투 성과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고작 열 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서 이토록 많은 마수들을 상대해낸 것이다.
로얄나이츠들이 모두 모인다 해도 과연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두두두두두두―――!!!
동쪽에서도 인간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들은 한눈에 보이는 전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얄나이츠에 이어 이스트 왕국의 군사들도 마침내 합류한 것이다.
“저 앞에 마수들의 왕과 싸우고 있는 아시테르는 우리 왕국을 구해준 영웅이다! 영웅께 힘을 보태는 거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이스트 왕국군 모두 진격이다!”
마법기사단과 함께 기사들이 돌격했다.
그들의 반대편에서는 사우스 왕국 트럼프 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사이 병력을 조금 회복한 트럼프 군이 마수들을 향해 진격했다.
“다들 잘 들어라. 동료들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
“마수들을 모조리 죽여 동료들의 넋을 위로하겠다.”
“가서 웨스트 왕국을 도와라! 이것은 인간과 마수들의 전쟁이다! 다른 것들은 전혀 신경쓰지마!”
지휘관들의 명령에 사우스 왕국군도 우렁찬 함성을 터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미리 가져왔던 마도공학 무기도 아군 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사우스 왕국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병장기의 공급이었다.
그들은 다행히도 늦지 않게 새로운 마도공학 무기들을 대량 제작해 이곳으로 보내주었다.
“여기 마도공학 무기들이 있습니다! 서둘러 가져가십시오!”
“웨스트 왕국군에도 보급품을 가져왔습니다!”
“이걸 들고 있으면 마수들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사우스 왕국 기사들이 전장 곳곳을 누비며 무기를 전했다.
마침내 시작된 마지막 전쟁을 보며 첼룬 왕국 군사들도 무기를 꽉 쥐고 있었다.
“헬라이번님께서는?”
“마수들중 대장격으로 보이는 자와 치열하게 싸우고 계십니다.”
“이쪽 사정은 어때 보이나?”
“솔직히 말해 인간들의 수도 마수들 못지않게 많아서 이곳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다. 그럼 우리들은 헬라이번님의 곁을 지킨다.”
“예!”
“예!”
헬라이번과 오르카이우스도 아시테르만큼이나 중요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결과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또다시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첼룬 왕국은 과감하게 그곳의 전투를 돕는 것을 택했다.
어느새 이곳까지 도착한 밤의 일족은 조용히 전황을 살폈다.
“여왕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은 마수들이 이기든, 인간들이 이기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레큐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 이미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해주었다.
마수들의 여왕을 죽였으니 아시테르에게 받은 은혜는 모두 갚은 셈이다.
그래도 최전선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아시테르를 보니 괜히 마음이 동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조금은 도와주도록 할까.”
슈슈슈슉―――!!!
퍼르륵!!! 후우우웅―――!!!
레큐니아의 손짓에 밤의 일족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일족의 원수인 마녀여왕이 죽었고, 오랜 숙원이었던 늑대인간도 멸족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레큐니아의 기분은 사실상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건 서비스로 해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