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하이시아 린
콰라라라라랑―――!!!
쿠르르릉!!! 파콰과과광!!!
엄청난 굉음이 연신 울렸다.
르노어와 카일라이드가 위리놈을 막고 있는 동안 언노운 기사단은 한데 모여 있었다.
“반키라스… 살 만하냐?”
“죽을 것 같은데… 나 곧 죽는다.”
“크흐흐흐… 그런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살 만하구나 너.”
“아니 죽을 것 같다니까…….”
반키라스와 크로마제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둘 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뒤이어 달려온 치유 마도사들이 두 사람을 치유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회복될지는 미지수였다.
“크으으음…….”
가이우스는 쓰러진 아시테르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몸 상태로 보면 가이우스도 심각한 중상이건만 그는 고집스럽게 아시테르의 곁에 머물고자 했다.
“가이우스 아저씨… 카이드는 괜찮을까요?”
“…장담할 수 없다.”
가이우스가 카이드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테르만큼이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카이드였다.
위리놈에게 벌써 두 명의 강자가 당해버렸다.
무엇보다 아시테르가 넘을 수 없는 산이란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지금이야 로얄나이츠와 다른 이들이 위리놈을 막아서고 있지만 이 전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주군…….”
가이우스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 머물렀다.
긴 꿈을 꾸고 있는 듯 아시테르는 두 눈을 감고 희미한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언제 끊길지 모르는, 얕은 숨소리였다.
그래도 그의 숨소리가 이어지는 한 희망은 이어질 거라 믿고 있었다.
“제길… 이럴 때 린 누님이라도 있었다면…….”
“대체 언제 오시려는지…….”
“금방 오시겠지. 믿고 기다려보자.”
린과 세아츠리스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쯤은 언노운 기사단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다.
문제는 그런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갔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인지 걱정이기도 했다.
“그쪽에도 무시무시한 존재가 갔다던데…….”
“한참 전에 받은 보고에 따르면 마수들의 여왕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여왕? 그럼 저 무지막지한 놈의 아내라는 소리인가?”
“정식 아내겠어? 그런 거랑은 조금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그들이 한창 떠드는 동안 멀리서부터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우웅!!! 쿠우웅!!!!
처음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을 땐 또 다른 초거대 마수가 출현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지켜보니 그것은 마수가 아닌 골렘이었다.
“저만한 골렘이 있었나?”
“뭐야 저건…….”
“와…….”
그들이 놀란 것은 비단 골렘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골렘은 막강한 힘으로 주변 마수들을 무차별하게 깨부수고 있었다.
골렘이 휘두르는 주먹에 마수의 몸이 터져나갔다.
몇몇 마수들이 골렘에게 공격을 가해봤지만 소용없었다.
흠집조차 남질 않는 골렘을 보며 마수들도 은근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골렘이 주먹을 번쩍 들어 내리치자 엄청난 마력이 지면을 휩쓸었다.
자세히 보니 골렘 위에는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그들을 보며 언노운 기사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세아츠리스님과 린님이 아닙니까!?”
“와… 말도 안 돼…….”
“마침내 와주었구나……!”
“다행이네. 살아 있어서.”
저마다 한마디씩 해대며 웃었다.
다 같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주제에 그들은 결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런 언노운 기사단을 보며 플레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는 분들이라니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듯 웃고 계시는 건지…….”
“후후. 나는 좋아 보이는데. 저게 저분들만의 극복 방법이 아닐까.”
“흐음… 저는 솔직히 걱정입니다. 이대로 검제님이 일어나지 못하실까 봐…….”
“그러게. 제아무리 린님이라고 해도 지금의 아시테르님을 고칠 수 있을지… 고친다 해도 또다시 싸울 수 있을까… 의문이야.”
로얄나이츠들의 걱정을 한몸에 받고 있는 아시테르는 정작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그의 전신을 보호하는 영기가 은은하게 피어났다.
아시테르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있었다.
위리놈에게 입은 상처들이 생각보다 그의 몸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나 몸에 남은 마기는 독처럼 스며들어 아시테르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속에서 아시테르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평소라면 보지도 못했을 빛이다.
그러나 어둠으로 가득한 이곳에서는 누구보다 밝은 빛이었다.
아시테르는 본능에 이끌려 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작정 걸어가다 보니 빛은 점점 더 아시테르와 가까워졌다.
“아…….”
가까이로 다가온 아시테르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자그마한 불씨였다.
그리고 그 불씨가 무엇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했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느낌이었다.
“프로메테 가문의 불꽃…….”
불씨가 남아 있는 한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아시테르는 순간 멍하니 이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불꽃이 일렁였다.
‘아들.’
그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들었다.
영기로 이루어진 형상이 그리운 얼굴을 그렸다.
그녀의 얼굴을 본 아시테르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꿈속에서라도 계속해서 만나보고 싶었던 존재.
아레나가 그곳에 있었다.
아레나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또 다른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할아버지…….”
늙수그레해진 얼굴이었지만 아시테르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비체가 아시테르를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분이 제 눈에 보인다는 것은… 저 또한 죽었다는 말일까요…….”
아시테르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죽음 따위는 이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위리놈을 궁지로 몰아넣고 목숨을 잃었어야 했다.
놈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빼놓고 이렇게 되었어야 다른 인간들에게 더욱 큰 희망이 남았을 터다.
“그게 너무 아쉽네요…….”
아시테르는 어느새 자신의 말을 두 사람에게 내뱉고 있었다.
대답은 안 들려와도 좋았다.
그저 두 사람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순간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그때 아레나가 아시테르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때가 아닌 것 같구나.’
아시테르가 놀라 아레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비체도 아시테르의 손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잘하고 있다. 아시테르, 내 손자…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노력해주지 않겠느냐? 아직 세상은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단다.’
비체의 음성까지 들리자 아시테르의 두 눈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오열했다.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감정선이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생각들보다 지금은 하염없이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체가 그런 아시테르를 안아주며 말했다.
‘자랑스러운 나의 손자야. 너는 나의 자랑이니라. 아무것도 없이 떠났을 내 비루한 삶에 너는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이었다. 네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듯, 너 또한 세상에 그리하고 오거라.’
아시테르가 비체의 팔을 붙잡았다.
어느새 아레나도 아시테르를 끌어안았다.
‘언제 어디서든 잘 자고 잘 챙겨 먹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엄마는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꼭 널 똑 닮은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렴. 그리고 네 못난 아빠도 잘 보살펴주고.’
아레나의 말에 아시테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품에 안겼다.
몸도 성장하고 나이도 들어찼지만 두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아들이고 손자였다.
아레나와 비체는 그런 아시테르를 사랑스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후후.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비체가 아시테르를 먼저 놓아주었다.
아시테르가 그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레나도 이제는 한발 물러서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널 데리러 온 모양이구나.’
아레나가 뒤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제야 아시테르도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의 눈에 비치는 사람은 린이었다.
흑발을 곱게 빗어넘긴 그녀가 단아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아시테르의 말을 받기 전에 린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레나와는 구면이었고 비체와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반가웠다.
비체도 린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손자를 잘 부탁하겠다는 무언의 메시지 같았다.
아레나도 린에게 고개를 숙이며 이내 모습을 감췄다.
어느새 비체의 형상도 안개처럼 사라졌다.
떠나가버린 두 사람을 보던 아시테르가 눈물을 훔쳤다.
“어머님 할아버님과는 잘 인사를 나눴어?”
“응… 근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너를 치유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나도 이곳으로 빨려들어 왔어.”
“나를 치료하려고 했다고…?”
“그래. 난 또 깊은 심연에 빠져서 혼자 또 우울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따뜻한 위로를 받고 있었네. 다행이야.”
린이 아시테르의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이 웃음에 반했다.
티 없이 맑고 해맑은 미소.
저 미소를 바라보고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든 잘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린이 아시테르의 손을 잡고 나아갔다.
“이만 가자. 너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구.”
“아…….”
“그리고 꼭 이겨서 할아버님과 어머님 바람대로 너 닮은 아들딸 낳고 잘 살아보자?”
“뭣……!?”
아시테르가 순간 얼굴을 붉히며 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린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사랑스러운 공주님은 날 닮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린… 무슨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뭐 어때? 죽자살자 오열한 사람도 있는데. 나도 답지 않게 내 감정에 솔직해져 보는 거지.”
린은 그대로 아시테르를 밝은 빛이 있는 곳까지 이끌었다.
환한 빛무리가 두 사람을 감싸 안을 때 린이 환하게 웃으며 아시테르와 입술을 포갰다.
마치 꿈만 같은 순간 속에서 아시테르도 순간적인 행복에 젖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이어 따스한 손길이 그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일어났어?”
“아… 응.”
“몸은 어때?”
린의 다정한 목소리에 취해 순간 아시테르가 멍하니 있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것이다.
그때 린이 아시테르와 입을 맞추었다.
“꿈 아니니까 빨리 일어나.”
“어떻게 내 생각을…….”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정신이 없겠지만… 이 전정에는 네가 필요해 아시테르.”
그녀의 말에 순간 아시테르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위리놈.”
몸을 일으킨 아시테르가 위리놈부터 찾았다.
느껴지던 엄청난 고통이 사라졌다.
게다가 몸도 훨씬 가벼워졌다.
“다행이네.”
린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아시테르의 모습을 보았을 땐 린도 아찔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누워있는 아시테르의 모습은 꼭 시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바깥에 보이는 상처들보다 그의 내부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 살아 있는게 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진짜 사랑의 힘인 건지… 아니면 언니가 대단한 사람인 건지…….”
그런 아시테르를 다시 일으킨 린을 바라보며 세아츠리스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