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새로운 시작
마수들이 모두 물러가고 아포칼립스 문은 완전히 닫혔다.
이제 다시 저 문을 열고 마수들이 몰려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아츠리스와 카일라이드, 히스링, 제이스쿠스 등은 한자리에 모여 아포칼립스 문을 다시 봉인할 방법을 찾았다.
발라크가 떠나기 전 아포칼립스 문을 봉인하겠다 말했지만 이곳에 마수의 말을 순순히 믿을 사람은 없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그들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바로 레큐니아였다.
고대 마법을 여러 가지 알고 있는 레큐니아였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세아츠리스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순순히 도와줄 것 같지는 않고, 원하는 게 있으시죠?”
“어머? 대화가 빨라서 좋구나. 우리 종족의 터전을 마련해줘. 그럼 인간들에게 따로 피해를 입히지 않고 살아갈 것을 약속할게. 뭐… 인간들에게 따로 밉보여서 좋을 것도 없으니.”
레큐니아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세아츠리스가 순순히 레큐니아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레큐니아가 본격적으로 합류하고 아포칼립스 문을 봉인하는 작업은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이루어졌다.
그동안 다섯 개 국가는 어비스 던전을 개방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과거 발할라 왕국에서 했던 중요한 임무를 이제는 다섯 개 국가가 나눠서 수행하기로 얘기를 끝마쳤다.
아포칼립스 문이 열리는 것은 일개 국가급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였다.
그러니 만약 그런 비상상황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모든 것을 멈추고 모든 국가가 서로에게 협조할 것을 약조했다.
각국의 정상들은 급한 것부터 약조를 마치고 이제는 내정에 힘을 썼다.
세계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탓에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들의 공백을 채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나 노스 왕국은 이번 사태로 상당한 국력을 잃고 말았다.
거기다 국왕과 함께 차기 국왕 후보까지 이번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후계 문제가 빚어졌다.
노스 왕국 왕자와 공주들끼리 곧 치열한 후계 다툼이 벌어졌다.
다른 왕국에서 나서서 도와줄 순 없는 문제였기에 남은 이들도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사우스 왕국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마도공학 무기에 관심을 보인 드워프 족이 그들을 찾아온 것이다.
사우스 왕국 국왕은 드워프 족을 격하게 환영했다.
마도공학 기술에 드워프 왕국의 기술이 합쳐진다면, 그것만큼 설레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 두 기술이 온전히 합쳐져 더 많은 가치들을 창출한다면 그게 곧 사우스 왕국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사우스 왕국은 군대 개편에도 들어갔다.
기존의 트럼프를 없애고 다른 방식으로 군을 만들어갔다.
제이스쿠스가 첫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뒤이어 바이헤른과 아일리시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새로운 인재를 뽑은 시험도 만들어졌다.
하이트레이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웨스트 왕국으로 향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하야트의 묘였다.
그에게 처음으로 묵직한 충격을 안겨주었던게 하야트였다.
거기다 하야트는 적임에도 불구하고 하이트레이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하이트레이스는 은근하게 하야트를 자신의 마음속 스승이라 여겼다.
“후후. 이것 참… 다른 국가의 지휘관이 이렇게 예를 차려 보러 와주고… 내 친우도 성공한 인생이로구먼.”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르노어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이트레이스가 그에게 예를 차렸다.
“어르신…….”
“검제님의 제자가 되려 찾아왔다고?”
“예. 근데 받아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네.”
“네?”
“검제님께서는 이곳에 안 계시네.”
“예에?”
“후후후 모르고 있었나보군. 검제님께서는…….”
르노어가 아시테르와 린 공주에 대해 얘기를 해줬다.
마수 전쟁이 끝나고 각국 정상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아시테르 일행도 묻어두었던 슬픔을 꺼내었다.
전쟁 중에 사망한 소중한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예를 다해 대지의 품으로 보내주었다.
특히나 데미리우스의 시신을 묻을 때는 언노운 기사단 모두가 울음 바다가 되었다.
카이드조차 그날은 애써 울음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눈을 일부러 손가락으로 찔렀을 정도다.
“괜찮아요?”
“그냥 눈이 아파서 그래.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라고.”
말과 다르게 그의 표정은 너무나 슬픔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날 가장 슬픔에 잠긴 이는 아시테르였다.
그는 데미리우스 시신 앞에서 한참을 오열했다.
린이 그런 아시테르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뒤이어 에스파도 다가와 아시테르의 고개를 끌어안았다.
“마음껏 슬퍼해라… 형은 분명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데미리우스를 바라보는 에스파의 시선도 슬픔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데미리우스를 보내주고 테오도라도 이만 웨스트 왕국에서 떠날 채비를 마쳤다.
테오도라의 옆엔 세밀리아가 함께였다.
“정말 이스트 왕국으로 올 생각은 없는 거냐?”
“응. 내가 이스트 왕국으로 가면 또다시 혼란만 벌어질 거야.”
“후후. 네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왕국은 혼란에 빠져가는 중이다.”
테오도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밀리아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든 찾아오세요. 두 분 모두.”
세밀리아와 린이 시선을 마주쳤다.
린이 고개를 숙여보이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테오도라가 아시테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언제든 들려. 너도 알다시피 이제 나는 프로메테 가문의 가주다. 우리 가문이 너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수 있어.”
테오도라가 린을 한번 바라보곤 웃었다.
“뭐… 네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만… 그래도 고모부는 다르실지도 모르잖아?”
“고마워 형.”
“그래. 그럼 우리는 이만 떠나보마. 다음에 또 보자 아시테르.”
두 형제가 손을 맞잡았다.
이별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린과 세밀리아도 눈으로 인사를 나눴다.
이미 전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한 잔 기울이며 아주 친해진 상태였다.
테오도라나 아시테르나 같은 피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공감하는 바가 많아 더욱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혼식 때 꼭 불러줘야 해요. 잊지 말아요.”
“물론이에요.”
세밀리아의 말에 린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보니 아시테르와 린의 결혼식이 멀지 않았다.
“아, 네 결혼식 선물은 뭘로 해야 하려나…….”
“조카?”
“야, 이 짜식이…….”
“후후후후. 선물은 무슨. 형이 와주는 것만으로도 선물이지.”
“하긴, 내가 너한테 무슨 선물을 주겠냐. 맘만 먹으면 네가 다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니까 조카. 이왕이면 형수님을 닮은.”
“아니 근데 이게?”
테오도라가 주먹을 한 대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해맑게 웃으며 도망쳤다.
테오도라가 있기에 볼 수 있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었다.
“간다!”
“응!”
짧고 쿨한 인사를 마치고 테오도라는 세밀리아와 함께 이스트 왕국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헬라이번도 첼룬 왕국 국민들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후후. 결혼식 때 보지.”
“오오, 헬라이번님께서도 와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헬라이번이 떠나고 로얄나이츠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모두가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아시테르는 웨스트 왕국 수도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사코 말렸지만 언노운 기사단원들도 그 근처로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에이브릴과 라빈 자매는 에스파, 자비토와 함께 이곳에서 합동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 거기는 잘 돼가요?”
“할만한데?”
아시테르와 린은 유미르를 모시고 살았다.
처음에는 유미르도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린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한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
“아버님이 원하시는 농사도 돕고 싶어요.”
“뭐? 린 네가?”
“네! 저도 꼭 해보고 싶었는걸요.”
“아버지 한번 지켜보세요. 생각보다 린이 더 잘할 수도 있어요.”
아시테르의 말에 유미르가 긴가민가한 얼굴을 보였으나, 곧 아시테르의 말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린은 야무진 솜씨로 경작지를 곧잘 관리했다.
오히려 서툴러서 사고치고 있는 것은 아시테르와 유미르였다.
“와아… 며느리 아니었으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 것 같다 아들…….”
“아버지 생각도요? 저도요…….”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처참하게 망가진 땅을 보며 유미르와 아시테르가 실룩거리며 웃었다.
“이봐 거기 대장! 내가 도와줄까!?”
마기를 모두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카이드가 소리쳤다.
그의 곁에는 율리아가 서 있었다.
마수 전쟁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하게 발전했다.
연애라곤 전혀 모를 것 같았던 카이드가 율리아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카이드가 농사일을 도와주고 모두 한데 모여 즐거운 식사 자리를 가졌다.
이후 린과 아시테르는 잠자리에 누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마수 전쟁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웨스트 왕국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사우스 왕국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노스 왕국에서는 최초의 여왕이 탄생했다.
이그트의 여동생이 노스 왕국의 여왕으로 올라선 것이다.
정령술사인 그녀는 이번에 최상위 정령과 계약하면서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이스트 왕국이네. 당신 정말 안 가봐도 괜찮겠어?”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그래도…….”
“히스링님과 형의 선택이야.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게 따로 연락을 취하겠지. 하지만 내가 개입하는 순간, 두 분의 뜻이 퇴색되어 버릴 걸 아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그나저나 우리도 얼마 안 남은 것 알지?”
“잘 알고 있지. 근데 정말 괜찮겠어?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남들 눈에 잘 보이려고 하는 결혼은 아니니까? 너무 성대하고 화려한 것보다는 소중한 사람들을 초대해서 단란하게 즐거운 결혼식을 하고 싶어.”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
아시테르가 린을 끌어안았다.
“어머나… 두 사람 사이가 너무 가까워진 것 아닌가요?”
그때 한쪽에서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왔어?”
“두 분이 이렇게 뜨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봐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후후. 질투나? 세아츠리스.”
“뭐… 제가 다음 부인이 될 테니까 지금은 봐 드릴게요.”
세아츠리스의 짓궂은 농담에도 린은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아츠리스도 린을 마주 끌어안았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저도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어라? 그니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뭐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린과 세아츠리스를 보며 아시테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린과 세아츠리스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비 남편은 잠깐 빠져줄래?”
“미래의 제 남편은 잠깐 빠져주세요.”
“아?”
* * *
화르르릉!!!
퍼버버버벙!!! 퍼버버버버벙!!!
카일라이드의 마법이 하늘에서 축포로 터졌다.
뒤이어 르노어와 다른 로얄나이츠들이 나와 예를 갖추며 검을 들어올렸다.
세상에 로얄나이츠의 예식을 받으며 결혼식을 치르는 사람은 아시테르와 린이 유일할 것이다.
“크하하하하! 너무나 좋은 일이로구나!”
헬라이번이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해 허공에 브레스를 뿜었다.
덕분에 하늘 위로 보이는 광경이 더욱더 장관이 되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린이 등장하고, 깔끔한 예복을 입은 아시테르가 걸어나왔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미르가 눈물을 훔쳤다.
“여보… 보고 있어? 우리 아들이 다 커서 이제 결혼을 한대… 스승님 보고 계십니까? 우리 아들이 누굴 닮아서 저렇게 예쁘고 훌륭한 아이를 아내로 맞이할까요… 예. 다 저를 닮아서입니다. 크흑…….”
“어유… 고모부도 참…….”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유미르를 보며 테오도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시테르와 린 두 사람이 조용하게 결혼식을 하고 싶어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첼룬 왕국 근처의 섬을 통째로 사용할 줄은 몰랐다.
“크흐… 우리 딸…….”
한쪽에서는 웨스트 왕국의 국왕, 헤렌달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우우우! 키스해라 키스!”
“화끈하게 가자 화끈하게!”
“너무 재미없습니다 스승님! 두 분 키스 한 번 하시죠!”
“사랑의 키스으으으!”
한쪽에선 언노운 기사단원들이 짖궂게 외쳐댔다.
아시테르와 린이 수줍게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으아아아아!”
“꺄오오오오!”
“이거지 이거야!”
“으아! 오늘 술맛 죽이는구만!”
여기저기 탄성이 흘러나오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속에 아시테르와 린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르가 그런 두 사람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아버지, 이건…….”
“레티나의 반지다. 설명은 안 해도 알지?”
“아버지…….”
“후후. 축하한다 내 아들.”
유미르가 아시테르를 안아주었다.
뒤이어 유미르가 린도 끌어안았다.
“못난 아들이지만 잘 부탁한다.”
“행복하게 잘 살게요. 아버님.”
린의 웃음에 유미르도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아시테르가 린을 꽈악 끌어안았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린.”
“나도 사랑해.”
<던전에서 왔습니다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