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章. 액막이 신랑
읏.
사각거리는 속적삼 위를 차가운 손이 움켜쥐었다. 처음 그가 들어왔을 때 묻혀 온 한기가 손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연은 그 서늘함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채 굳었다.
한겨울 냉방에 누운 것처럼 온몸에 찬 소름이 일었다. 이제 시작될 일이 아득했다. 단단히 마음먹었음에도 아직은 어린 처녀라, 겨우 손길 하나에도 이가 덜덜거리도록 두려웠다.
그런데 사내의 손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응당 젖가슴을 찾아 더듬거릴 줄 알았는데, 가슴뼈 위 옷깃만 그러쥔 채 꼼짝을 안 했다.
하연은 바들거리는 눈을 들어 몸 위에 올라타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사내는 울고 있었다. 가느다란 달빛만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그가 우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흐윽.”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그가 얼른 삼켰다. 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지 바닥을 짚고 있는 팔 하나를 들어 급히 소매로 눈가를 문지른 그가 다시 누워 있는 하연을 마주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마주 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 딱 한 번 눈이 마주친 이후로, 그는 감히 하연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손을 들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곱게 풀 먹인 얇은 속적삼 위로 커다란 사내의 손이 가슴 한쪽을 그득 담았다. 그 감각이 너무 생생해 하연은 다른 생각을 잊어버렸다.
으으….
그가 소담한 살덩이를 몇 번 쥐었다 놓았다. 서툴고 거칠었고 급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게 자상한 손길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연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항해서는 안 돼. 참아야 해. 무얼 해도 꾹 참아야 한댔어….’
가슴을 놓은 손이 아래로 향했다. 치마를 걷어 올리는 손가락이 종아리를 스쳤다. 찬 기운에 몸서리가 쳐졌다. 금세 허벅지까지 치마가 걷혔다. 손이 안쪽을 더듬어 왔다. 울음이 날 것 같아 하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속곳 위를 문지르는 손바닥이 급했다. 오므린 사타구니에 사내의 찬 손이 비벼졌다. 하연은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이곳에 사내의 손이 닿을 거라고는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었다.
안 돼, 참아. 참아….
“흐으윽.”
주름지도록 힘이 들어가 있던 하연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방금 난 소리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아래를 주무르던 사내의 손은 멈춰 있었다. 그가 또다시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독한 술을 연거푸 먹어 술주정으로 우는 것이 아니었다. 서러운 것을 꾹 참고 인내하는 울음이었다.
‘왜….’
조금은 억울했다. 지금 울어야 할 이가 누구인데.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낯선 사내에게 처음을 내주고 시집을 가야 하는 서러운 팔자가 누구인데.
“미안, 미안합니다. 흐윽….”
그녀가 빤히 쳐다보는 걸 알았는지 그가 사과를 하며 서둘러 얼굴을 훔쳤다. 결이 고운 음성이었다. 키가 커서 덩치만큼 목소리도 굵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울음을 추스른 그가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음욕에 뻗는 손길이 아니란 것을 이제는 하연도 알 수 있었다.
해야 하니까, 끝내야 하니까 떠밀리듯 향하는 손길.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참아 내고 있는 자신의 처지와 꼭 같게 느껴졌다.
‘왜. 대체 왜….’
더듬더듬 속곳을 벗기는 손이 떨렸다. 어찌나 덜덜거리는지 하연은 제 아래가 드러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가 떨고 있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드러난 맨살을 그의 손이 덥석 쥐었다. 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내었다.
“헉.”
은밀한 곳에 사내의 손바닥이 멋대로 비벼졌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 제 몸이 불덩이 같은 것인지 사내의 손이 얼음장 같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이를 악물고 버티는데, 갑자기 사내가 상체를 들었다.
방 가운데를 가르는 달빛에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를 보는 하연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사내는 얼굴을 쳐들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다리 사이를 문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허리 아래가 사내의 손놀림에 흔들거렸다. 여린 살이 사내의 손에 만져지며 헤집어졌다. 아래에서 치덕치덕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부끄럽고, 서럽고, 음탕한 소리.
“…째서. 어째서 웁니까?”
무슨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연은 저야말로 곧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사내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내의 손이 뚝 멈췄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그의 울음이 와르르 터졌다.
“으읍….”
그가 팔로 입을 막고는 서럽게 울었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끄윽끅, 속으로 삼키면서.
하연은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조금 몸을 일으켜 그를 보았다. 어둠에 익은 눈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제야 여인을 대하는 서툴고 급한 손짓이 이해가 됐다.
저이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소년이었다. 울고 있는 사내는 그저 소년이었다. 그것도 그녀보다도 족히 너덧 살은 더 어린, 앳되고 앳된 소년.
“…헛.”
헛웃음이 나왔다. 키가 웬만한 장정들보다 더 크니, 아마도 다 자란 사내인 줄 알고 잡아 왔나 보다. 아니면 이것도 무당이 점지해 준 것인가?
“…왜 우니?”
하지만 그렇다고 연신 울어 대는 그가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저라고 완숙한 여인이라 이걸 참고 있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도 그저 머리에 댕기 드리운 말간 처녀가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저리 아이처럼 울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 일이 어찌 울 일인가. 한창나이의 소년이라면 호기심으로라도 달려들 일이 아닌가. 올해 열다섯 살 된 행랑채 구봉이만 해도 틈만 나면 젖가슴을 만지려 한다고 몸종 분이가 분통 터져 하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었다.
“미안합니다. 다시, 얼른 하겠습니다.”
눈을 꾹 감았다 뜬 그가 다시 손을 그녀의 아래로 넣었다. 하연은 질겁을 하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저기, 잠깐.”
“…….”
그러자 그가 ‘아.’ 하더니 옷을 벗었다. 급히 입혀 놓았을 혼례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이어 저고리가 내쳐졌다. 하얗고 마른 상체가 달빛에 드러났다. 거칠하고 두꺼운 머슴들의 몸통과는 확연히 달랐다.
몸을 일으킨 그가 바지춤도 풀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비척거렸다. 그 어설프고 급한 손길에 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이것이 처음이지만, 눈앞에 있는 이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숙한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었어.”
나지막이 다시 묻자 바지를 벗던 소년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이 방에 들어와 두 번째 마주치는 눈길이자, 처음으로 제대로 와 닿는 눈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고 소년은 얼른 눈을 내렸다.
하연은 허리까지 올라온 치마를 내리고 이불로 몸을 가린 후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물러나 앉았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원삼 족두리가 그녀의 서글픈 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당황한 듯 주춤 물러섰다. 하연은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후 그를 바라보았다.
“대답, 안 해 줄 테야?”
부드럽게, 그러나 예판댁 아기씨의 위엄을 담아 조용히 묻자 그가 바지를 추켜올리고 저고리를 입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도 달그림자에 가려졌다. 어둠에 익은 눈으로 서로가 서로의 윤곽을 훑었다. 눈치를 살피는 그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하연은 그의 두려움을 없애 주듯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동생 같은 소년을 앞에 두고 보니 스스로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하,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
침 한번 꿀꺽 삼킨 소년이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내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안 가면 우리 할머니 죽습니다. 지금쯤 먹을 것도 다 떨어졌을 테고, 이제 날이 추워져 나무도 해 놔야 하는데….”
소년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행여 밖에 들릴까 눈치를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연 역시 방문 너머로 눈길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이 일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바로 앞에서 귀를 대고 있진 않을 것이다.
“괜찮아. 작게 얘기하는 것은.”
소년이 흘끔 그녀를 보았다. 하연은 그를 안심시키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속히 초야를 치러야 하는 밤, 어쩌다 이러고 있는 것인지 실소가 나왔지만, 당장은 소년의 얘기가 궁금했다.
“그런데 왜 울어? 할머니께 돌아가면 되잖아.”
소년의 까만 눈이 건너왔다. 그녀를 살피기를 잠시, 그의 눈동자가 조금 사나워졌다.
“거기도 나를 속이려는 겁니까?”
험악한 물음에 하연은 조금 억울해졌다.
“속이다니. 뭘?”
“도와주면 큰돈을 준다고 해서 왔는데, 그 돈이면 우리 할머니랑 쉬이 겨울 나겠다 싶어 따라온 건데….”
그랬지. 오늘 밤 그녀와 초야를 치르는 사내는 큰돈을 받아 돌아갈 거라 했지.
서방이 둘인 사나운 팔자.
그 팔자를 바꾸고자 오늘 밤 붙잡아 오는 사내를 액막이로 쓴다 했지.
“그런데 왜. 돈이 모자라?”
하연은 매정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꾹 붙인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까만 눈동자가 서늘하게 일어섰다.
어린 소년은 어디 가고 성이 난 사내가 나타났다. 화를 누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돈이고 뭐고, 일이 끝나면 날 죽일 거잖습니까?”
“…뭐?”
“사내들이 속닥거리는 말을 다 들었어요. 방을 나서자마자 자루를 씌운 후 산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목매달아 죽인 후 파묻을 거라고. 벌써 석 자 깊이 땅도 파 놓았다고.”
“…….”
충격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이라 항변하려던 입이 사내의 똑바른 눈에 가로막혔다.
푸르게 날이 선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거짓이 아님은 그녀도 이제 알아 버리고 말았다.
“어딜 다녀오길래 옷이 그래?”
“아, 아닙니다. 밭일하다가 굴러 그렇습니다, 아기씨.”
오늘 아침, 천 서방과 덩치 좋은 일꾼들이 바지에 흙을 잔뜩 묻히고 돌아왔었다. 그것이 뻔한 거짓말임을 그땐 왜 몰랐을까.
천 서방은 아버님의 수족이었다.
그는, 밭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게. 지금 생각해 보면 액막이 사내를 큰돈을 주어 돌려보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 절대 밖으로 새 나가서는 안 되는 일. 서방이 둘인 팔자니 하나가 죽어야 액땜이 되는 일.
그러니 데려온 사내를 죽여야 이 의식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럼 그길로 도망가지 왜 이 방에 들어온 거야?”
어찌 그런 무서운 일을 부모님이 계획하신 걸까,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얼마나 잘 살려고 사람 목숨을 끊어 가면서까지 시집을 가는가, 제 자신도 혐오스러웠다.
그 화가 소년에게 향했다. 곧장 도망갔으면 됐잖아. 어째서 방에 들어와 내 가슴을 만지고 아래를 희롱한 건데. 죽을 걸 알면서도 어째서.
“그럼 어떡하라고. 방금 전에야 엿들은 얘기라 나도 경황이 없는데. 문 앞에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지키고 있는데. 일거리를 준대 놓고는 토할 것 같은 술을 강제로 먹이고 사내 짓을 하라고 등 떠밀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환장할 것 같은데.”
“…….”
“내가 제대로 안 하면 거기가 고자질할 거잖아. 그러면 뭘 어쩔 새도 없이 곧장 죽임을 당할 거잖아. 그래서… 그러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하면서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해야 할 거 아니냐고.”
소년이 따지듯 말했다. 하연은 맥이 빠졌다. 수치스러웠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화가 났다.
소년은 이제 울지도 않았다. 죽일 듯이 바라보는 눈은 이제 어쩔 거냐고 묻고 있었다. 영민하게도 그는, 그녀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디서 잡혀 왔어?”
결단을 내린 하연이 낮게 물었다.
“주막.”
“거긴 왜 갔는데?”
“향시 보고 오던 길이었어.”
“너, 양반이야?”
하연이 뜨악해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눈에 힘을 주었다.
“꼴이 이렇다고 무시하나 본데, 이래 봬도 우리 할아버지가….”
“조용. 말하지 마.”
이번에는 하연이 눈에 힘을 주었다.
“너에 대해 나한테 알려 주지 말라고, 이 천치야.”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이 순진한 녀석 좀 봐. 하연은 답답함에 숨을 내쉬었다.
“혹시, 저들한테 네가 누군지 얘기했어?”
“아니. 뭐 하는 자냐길래 무과 향시 보고 오던 길이라고만 했어. 그랬더니 잘됐다며 국밥을 사 주던데?”
“그래서 널 데려왔구나.”
그래도 딸 액막이로 아무나 쓰긴 싫으셨나 보다. 양반가의 소년을 데려온 걸 보면.
혼자 과거 보러 나선 가진 것 없는 만만한 양반가 소년이니 속이기도 쉬웠을 터.
“어디 사는지도 말 안 했고?”
“응.”
“짐은?”
“주막에.”
“호패는?”
“여기….”
그가 품을 뒤적거렸다. 하연은 됐다며 호패에서 눈을 돌렸다. 어차피 어두워 보이지도 않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서도 그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되었다.
“자.”
까만 어둠 속에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만 달빛이 내려앉았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얀 은장도가 달빛을 부서뜨리고 있었다.
“가져가.”
하연은 조금 더 손을 뻗었다.
“이게 네가 살길이야.”
“…….”
“내 말, 알아?”
하연이 비장하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 까만 눈동자가 마주쳐 왔다. 하연은 온 힘을 다해 소년에게 제 뜻을 실어 보냈다.
모르겠다. 대체 무슨 마음에서였는지는. 대체 어쩌자고 이 중한 일의 한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거스르고 저 소년을 살리고 싶어진 것인지를.
저만큼이나, 아니, 저보다 더 어린 소년에 대한 누이 같은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홀로 계신 할머니 때문에 울어 대는 소년의 효심에 마음이 동했는지.
아니면 그저, 저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 싫은, 고매한 양반가 아씨의 팔자 좋은 양심 때문인지도.
그것도 아니면, 그래, 정녕 사납고 사납다는 제 팔자에 반항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엇이 이유였든 하연은 그를,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을 살려 보내고 싶었다.
“응.”
마침내 소년이 짧게 대답했다. 하연은 안도했다. 어려도 말뜻을 이해할 만큼 영민해서 다행이었다.
소년이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기울여 은장도로 손을 뻗었다. 하연은 서둘러 소리쳤다.
“오지 마.”
소년이 주춤 멈췄다.
“달이 너무 밝아. 그냥 손만 뻗어 가져가.”
“…….”
“너도, 나도, 서로 얼굴을 기억해 좋을 것이 없어.”
잠자코 바라보던 소년이 몸을 물렸다. 손만 뻗어 은장도를 집었다. 하얀 달빛 아래 손과 손이 닿았다.
손바닥에 그의 손가락이 스쳤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손끝을 머물다 거둬 갔다. 그 찰나가 이상하게 울컥했다. 하연은 두 입술을 꾹 물었다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신호로 그가 하연의 목에 은장도를 겨누었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밖을 지키던 일꾼들은 혼비백산 난리가 났다. 하연은 소년에게 끌려 맨발로 문을 넘었다.
집에서 한참을 떨어진 별가(別家)였다. 지키고 있는 일꾼은 대대로 내려오는 믿을 수 있는 가노(家奴) 천 서방과 고용된 일꾼 세 명 그리고 몸종 분이뿐이었다.
따돌리는 길을 하연은 알고 있었다. 소년을 그리로 보내고 길을 막듯 저들 앞으로 쓰러졌다. 귀하신 아기씨의 안전이 더 중했기에 저들의 걸음은 늦춰졌다.
‘부디, 잘 살아.’
하연은 소년이 사라진 산길을 눈으로 좇다가 거두었다.
‘나도, 잘 살아 볼 테니.’
그날 하연은 부모님께, 사내와 일을 치렀다 거짓으로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