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章. 초야, 초야, 초야
구수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익숙한 냄새에 하연은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자 이른 햇살과 함께 음식 냄새가 확 덮쳐 왔다. 입에 군침이 돌아 서둘러 툇마루로 나와 앉았다.
“뭐가 이렇게 고소해?”
아침 해가 유난히 맑았다. 담장에 앉은 참새가 지푸라기를 부리로 쪼더니 포로롱 날아갔다. 꽃이 노래를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아침이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날이었다.
“어, 막 깨우려던 참인데.”
무헌이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고 웃었다.
“잠시만. 다 됐어, 각시야.”
각시야. 저 말이 참 듣기 좋다.
하연은 지그시 웃으며 손으로 머리를 가다듬은 후, 가지런히 쪽을 틀어 개나리 꽃가지를 꽂고 마당에 내려섰다.
무헌과 지낸 지는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각시야’라는 말은 몇 번의 착오 끝에 입에 착 붙어 남은 호칭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그는 그녀를 어찌 부를 줄 몰라 어색해했다. ‘부인’이라고도 했다가, ‘보시오’라고도 했다가, 헛기침으로 대신하기도 하는 등 중구난방이었다.
말투도 그랬다. ‘하오’, ‘하셨소’ 같은 존대도 했다가, 급하면 하대도 했다가, 곤란할 땐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어색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하룻밤일지언정 격식 없이 그녀를 대했던 그가 좋았다. 새삼 예를 차리는 그가 불편해 보였고, 그를 그렇게 만드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그녀가 먼저 제안했다.
“거기가 나를 데려온 날이 우리 연의 시작이니, 거기와 나의 생활도 거기서 비롯되어야 하지 않겠소?”
“하니, 그때처럼 편히 대해 주시오. 동무처럼, 친구처럼.”
“거기가 줄곧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날, 흐드러진 벚꽃 잎을 맨발로 밟는 순간, 예판댁 정하연은, 정승댁 수절 과부는 죽었다.
더는 하늘 같은 남편도, 조신한 아내도 싫었다. 숨 막히는 내훈(內訓)의 가르침도, 반(班)과 상(常)을 논하고, 충효를 논하고, 여인의 도리를 들이대는 잣대도 싫었다. 예법에 옭매여 숨통을 조이는 모든 격식이 싫었다.
저이가 신겨 주는 꽃이 담긴 신을 신고, 걸어 보지 않은 길을 걷고 싶었다. 지독히 가난해도 예를 차리지 않고 서로 배 두드리며 웃는 밤이 그리도 좋았다.
졸리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낮잠을 자고, 내키지 않으면 하기 싫노라 투정도 부리고,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흐트러질까 동백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는, 허기져 나는 꼬르륵 배 장단에 까르르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삶.
뛰어도 되고, 굴러도 되고, 버선을 훌렁 벗고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를 수 있는.
하연은 그래서 이무헌과 부부가 되었다. 벼슬도, 몸종도, 아무것이 없어도,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진•짜• 낭군을 가진 각시가 되었다.
“어어, 비녀 꽂으라니까.”
머리에 꽂힌 꽃가지를 본 무헌이 눈썹을 찡그렸다. 하연은 보란 듯이 자리에서 빙그르 돌았다.
“이게 더 예쁘잖아.”
“양윤이가 흉본단 말이야. 각시 머리에 저런 걸 꽂게 했다고.”
“흉볼 테면 보라지.”
양윤은, 행여 노마님의 수하들이 여태 저를 찾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 문밖출입을 꺼리는 그녀가 유일하게 맘 편하게 만나는 무헌의 오랜 지기지우였다.
무헌은 왜 나가지 않느냐고 그녀를 다그치지도, 이유를 물어 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하고픈 대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고맙고도, 또 의지가 됐다.
그의 집은 작아도, 해님도 쉬고 달님도 머무는 너른 들판 같았다. 그것이 그녀를 평온하게 했다. 그래서 그와 있으면 하연도 때때로 소녀 같고, 온전히 그녀다울 수 있었다.
이렇게 머리에 꽃을 꽂고 마당을 거닐며 덩실거릴 수 있을 만큼.
“비녀, 안 팔 거면 양선이를 주든가.”
작은 소쿠리 안에 곱게 놓인 비녀를 가리키며 말하자 무헌이 단박에 인상을 구겼다.
“싫어. 그걸 왜 줘?”
그러더니 비녀를 집어 부엌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연은 입을 비죽였다.
꼴 보기 싫은 비녀, 당장 팔아 살림에 보태자고 해도 그는 왜인지 고집스레 가지고 있었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비녀였다. 갓 시집온 아내보다 사신단 따라나서는 것이 더 중요했던 사내가 선물이라며 줬던, 6년을 족쇄처럼 옭아매고 있던 겉만 번지르르한 옥비녀.
팔면 돈깨나 받을 비녀였다. 그렇게 돈을 아끼는 이가 왜 목돈이 생기는 일을 마다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무슨 고집이람.”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탁 트인 담장 밖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한껏 공기를 들이마신 후 팔과 다리를 움직여 몸을 풀었다. 그러고는 비장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자, 그럼 나도 이제 일 좀 해 볼까.”
무헌과 지내면서 알게 된 건, 생각보다 그가 훨씬 더 바지런하다는 거였다. 그는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참으로 많은 일을 해 놓았다.
일찌감치 물을 길어다 놓고, 제 키만큼의 나무를 해 온 후 산에서 각종 나물과 먹을거리를 캐 와 아침상을 차렸다. 대부분은 겨울 동안 말린 시래기를 넣고 끓인 죽이었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나물과 참기름 냄새가 풍기는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후 데운 물을 가져와 그녀의 상처를 씻기고 살핀 후 청소를 했다. 빨래를 한 후엔 일거리를 찾아 나갔다. 사냥을 하기도 하고, 덫을 놓기도 하고, 밭도 가꾸고, 그때처럼 더덕 같은 걸 캐 와 잘 다듬어 부사댁에 비싼 값에 팔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그야말로 손 하나 까딱 안 한 채 무헌의 수발을 받았다. 그저 먹고 자고 놀았다.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물론 그녀가 원한 게 아니라 무헌이 으름장을 놓아서였다.
처음 며칠간은 그녀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상처가 덧나면 약값이 더 드니, 애먼 데 돈 쓰게 하지 말라며 눈을 치뜨는 바람에 나서지 못했다. 돈을 셈할 때의 그는 사내다움이고 뭐고 통하지 않는 쩨쩨한 자가 된다는 걸 그 계기로 알게 되었다.
상처가 꽤 아물었을 땐 몇 번인가 팔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빨래를 돕다가 개울물에 옷가지를 떠내려 보내고,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짚신을 잃어버리고, 솥 앞을 지키다가 치마를 태워 먹은 후부터 모든 집안일이 금지되었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란 말 알지?”
“제발 가•만•히• 있어 주라, 각시야!”
그때의 ‘각시야!’만은 좀 무서웠다. 하연은 그토록 진심인 무헌을 처음 보았었다.
아내가 되어 낭군의 진심을 무시할 순 없는 법. 하연은 그날부로 손을 놓았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언제까지 업둥이 아이처럼 그의 손길에 의존하긴 싫었다. 명색이 아내가 아닌가.
그래서 밤새 생각해 본 결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의외로 가까이 있음을 알았다.
자신 있게 담장으로 걸어가 지게에 한가득 쌓여 있는 나뭇가지를 듬뿍 안았다. 이런 것쯤 옮기는 건 아주 쉬운 일….
“아앗.”
손대자마자 너무 따가워서 뒤로 훌쩍 물러섰다. 무슨 가지들이 이렇게 뾰족뾰족한지. 하연은 괘씸한 눈으로 나뭇가지들을 노려보았다.
과유불급이라 했으니. 한 번에 너무 욕심을 냈다. 하연은 고개를 주억이고는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다시 내렸다. 그러고는 찔리지 않게 아주 조금만 들어 올렸다.
“오오오, 됐다!”
이제 이걸 저쪽에 쌓아 두기만 하면….
신이 나서 걸음을 떼는데 무언가가 당겨졌다. 불길한 느낌이 등 뒤로 치솟았다.
몸을 돌리자 옷고름에 걸린 받침대가 흔들리더니 와르르르 무너졌다. 차근차근 키만큼 쌓아 놓았던 나뭇더미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뿐이랴, 잘 빨아 널어놓은 빨래들까지 같이 휘감겨 널브러졌다. 그야말로 바닥이 난장판이 되었다.
“무슨 일, 으어억! 이게 뭐야!”
무헌이 밥상을 든 채 절규했다. 하연은 슬그머니 먼 산으로 눈을 피했다. 이 와중에 참기름 냄새가 참말 고소하기도 했다.
“내가 진짜, 어우우, 정말.”
무헌이 툴툴거리며 마당을 치웠다. 따갑지도 않은지 산더미 같은 나뭇가지를 두 번 만에 옮겨 쌓아 놓고는 빨래를 바구니에 담았다.
간간이 툇마루 앞에 조신하게 서 있는 하연을 쏘아보기는 했으나 우선은 치우는 것에 열중했다. 하연은 두 손을 모은 채 그의 사고 수습이 끝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미안해.”
무헌이 손을 탁탁 털기 무섭게 하연이 입을 열었다.
“빨래는 내가 다시 헹궈 올게.”
그가 찌릿 흘겨보았다. 가뜩이나 기다랗게 쭉 찢어진 눈이라 저렇게 뜨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하연은 용기를 내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흠칫 물러섰다. 하연은 얼른 입꼬리를 내렸다.
“…왜. 웃는 게 그리 흉해?”
수년간 웃어 본 일이 없었다. 웃을 일이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웃는 얼굴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 이상한가? 저리 정색을 하고 고개를 돌릴 만큼?
기가 죽어 눈을 내렸다. 그러자 그가 헛기침을 하더니 밥상 앞에 툭 걸터앉았다.
“식기 전에 먹으라니까.”
무헌이 숟가락을 들었다. 하연은 그제야 쪼르르 다가와 밥상 앞에 앉았다.
“같이 먹으려 그랬지.”
숟가락을 들며 그를 바라보자 기다란 눈이 재빠르게 내뺐다. 그러더니 갑자기 숟가락질이 빨라졌다. 그릇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였다.
이제 보니 귀가 빨갛다. 화, 난 건가?
“크헉. 컥.”
사레가 들린 그가 기침을 했다. 하연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가져왔다.
“천천히 먹지.”
한동안 밭은기침을 해 대던 무헌이 다시 밥그릇을 들었다. 아예 들이켜듯 입에 몰아넣더니 빈 그릇을 탁 내려놓았다.
“장에 다녀올게.”
벌써 사립문을 나섰다.
“혼자?”
“양윤이랑.”
“저물기 전에 와.”
우뚝 멈춰 선 그의 어깨가 잠시 들썩였다. 그러더니 몸을 홱 돌려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 옷고름 좀.”
“…응?”
말갛게 올려다보는 시선에 무헌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을 들었다.
“거기. 옷고름 말이야.”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간 하연의 눈이 함지박만 해졌다.
“이게 언제 풀어져 있었대?”
저고리 앞섶이 벌어져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얼굴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서둘러 매듭을 감는 손길이 자꾸 엇나갔다. 아까 지게에 걸렸을 때 풀린 걸 모르고 여태 이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궁이 속으로라도 숨고 싶어졌다.
“간다.”
무헌은 또 어느새 문을 나서고 있었다. 하연은 옷고름을 여미느라 제대로 배웅할 정신도 없었다. 멀어지며 툴툴거리는 무헌의 말이 언뜻 귓가를 스쳤다.
“웃기만 하든가 풀기만 하든가. 웃는 것만도 환장하겠는데, 그러고 웃으면 어쩌란 거야. 나더러 죽으란 거야 뭐야.”
“…….”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매만지며 발끝을 세워 벌써 한참이나 멀어진 무헌의 등을 지켜보았다.
당황스러웠던 순간이 지나자 하연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러게, 부부인데….
한 달이 되도록 살 한번 맞대지 않은 부부라….
그날 손을 잡고 집에 온 것이 전부였다. 무헌은 상처를 치료해 줄 때를 제외하곤 그녀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한방에 누워 자면서도 그는 문가에, 그녀는 안쪽에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누웠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게 생활을 했다.
너무 자연스러워 그녀 자신도 문제를 깨닫지 못했다. 아니 실은 깨달았지만 애써 문제 삼지 않았다. 그가 탐하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지만, 굳이 그를 일깨우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보면 무헌이라고 모를까. 장성한 사내가 여인을 옆에 두고 욕정 한번 품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그녀를 기다려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 실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두려웠다. 어쩌면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무헌을 사내로 받아들이는 것에. ‘또 다른’ 사내로 받아들이는 것에.
사납고도 사납다는 서방 팔자에, 그를 끌어들이는 것에….
하연은 빈 그릇을 모았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설거지 정도는 해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바빴다. 하연은 방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걸레를 비틀어 물기를 짠 후 다시 방을 훔쳤다.
“그냥 두라니까.”
무헌이 지붕 위에서 소리쳤다.
“방 닦는 걸로는 사고 치지 않아.”
하연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거기서야말로 조심해.”
“지붕에서 떨어지는 걸로는 죽지 않아.”
무헌이 제 말을 빗대어 대답한다. 하연은 풋, 웃음을 물고 바지런히 손을 놀렸다.
새벽에 갑자기 내린 비로 지붕이 새는 걸 알았다. 무헌은 여름이 오기 전에 지붕을 손본다던 말을 지금 실행하는 중이었다.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다행히 이불과 옷은 젖지 않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기가 이마 위에 오줌을 싸길래 혼을 내다 일어났더니 바로 위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는 무헌의 꿈 덕분이었다.
꿈이 하도 웃겨 배를 잡고 웃었다. 얼굴이 빗물로 젖은 무헌에게 정말로 지린내가 난다며 놀리기도 했었다.
“다 됐다.”
방에 고인 빗물을 다 닦은 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뭔가 보탬이 된 듯해 뿌듯했다.
풀썩. 지붕에서 뛰어 내려온 무헌이 소매로 땀을 닦았다. 하연이 휘둥그레져 보자 그가 씨익 웃었다.
“멋있지? 이렇게 한 번에 뛰어내리는 사내 처음 보지?”
하연은 기가 차 눈에 힘을 줬다.
“나무라려고 쳐다본 거야.”
그가 눈을 한 바퀴 굴렸다.
“…왜?”
하연은 걸레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천치같이 거기서 뛰어내리면 어떡해? 그러다 다리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거야말로 치료하려면 돈이 억수로 들 텐데?”
무헌이 허리에 손을 얹더니 껄껄 웃었다.
“각시가 나를 잘 모르나 본데, 난 안 다쳐.”
“…….”
“내 발이 얼마나 날랜데. 나라님 주위에도 이렇게 발을 잘 쓰는 자는 없을걸?”
씨알이 안 먹히는 잘난 척에 하연은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참. 이따가 장에 같이 가자, 각시야.”
무헌의 제안에 걸레를 뒤집던 손이 멎었다.
“장에?”
“재밌는 광대패가 왔대. 구경 가자, 손잡고.”
“…….”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람 많은 곳은 꺼려졌다. 그중에 아는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노마님이 누구던가. 이리 쉽게 포기할 노친네가 아니었다. 분명 사람을 풀어 아직도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안 되겠다.”
대답 못 하고 있는 하연을 대신해 무헌이 다시 말을 이었다.
“부사댁에 일 도와드리러 가기로 한 걸 깜빡했네. 나중에 가자, 각시야. 나중에….”
눈을 마주한 그가 다정히 웃었다. 뒤에 붙는 ‘나중에’란 말에는 아무런 재촉이 없었다. 그 기약 없음도 그녀를 배려한 그의 마음이었다. 그걸 알기에 하연은 섣부른 변명 대신에 그저 조용히 마주 보고 미소했다.
“그래. 나중에 꼭 가자. 둘이… 손잡고….”
만족스러운지 무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머리를 쓰윽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돌연 몸을 돌렸다.
“그럼, 다녀올게.”
“어어? 갑자기 어디 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무헌이 뒤를 돌아봤다.
“마른 짚 좀 더 가져오려고.”
“어디서?”
“양윤이네. 두고 봐, 백을 다 세기 전에 돌아올 테니.”
무헌이 돌연 제자리 뛰기로 몸을 풀더니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다. 만면에 웃음을 물고 손을 흔드는 게 기어이 빠른 다리를 자랑할 셈이었다. 하연은 놀라 발딱 일어섰다.
“앞에, 앞에 보고 가!”
“센다. 하나, 둘, 셋….”
“알았으니 앞에 보고 가라고.”
“다섯, 여섯….”
“그러다 다치면….”
“일곱. 여덟….”
“어유, 아홉!”
그래도 말을 안 들어 하는 수 없이 수를 세자 그제야 그가 몸을 돌려 제대로 뛰기 시작했다.
“열! 열하나! 열둘!”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수를 세어 주자 그가 위로 손을 들어 보였다. 세상 신이 난 노루처럼 걸음이 방방 뛰었다.
“못 살아.”
하연은 결국 웃음이 나와 배를 쥐었다. 그러면서도 무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안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을.
무슨 사내가 저리 잔정이 많은지.
나는 괜찮은데.
정말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지붕 새는 집에 살아도, 떠들썩한 광대패를 보지 못해도, 나는 이대로도 정말 행복하기만 한 것을….
“어머, 예뻐라….”
포근한 바람을 타고 작은 꽃잎들이 눈앞으로 날아왔다. 하연은 돌아서다 말고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의 집 근처에는 꽃나무가 많아서 바람이 불면 꽃잎들이 제법 마당으로 들어왔다. 특히 달빛 가득한 밤에 꽃잎들이 날리면 따스한 눈이 오는 것 같아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조금만 집을 나서면 개나리가 진 자리에 철쭉이 가득 피어 있었다. 툇마루에서 발끝을 세워 내다보면 세상이 온통 꽃으로 어여뻤다.
볼일을 마친 그가 산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면, 하연은 꽃을 보듯 그를 보곤 했었다.
“으쌰.”
감상을 멈추고 어깨를 크게 털고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하는 김에 마무리를 하자 싶어 끌어내었던 짐들을 다시 자리로 옮겼다.
가만, 지금쯤이면 몇을 세고 있었어야 하나?
그 생각을 하며 오래된 그의 옷 더미를 옮기던 때였다. 작은 보따리 하나가 그 틈에서 툭 떨어졌다.
“뭐길래 이리 꽁꽁 싸맸담?”
엿볼 생각은 없었다. 고대로 집어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던 손길이 멈춘 건 비죽 튀어나온 그것 때문이다.
“세상에나…!”
보따리를 열어 본 하연은 신음을 내었다. 너무 놀라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었다.
“이게 어떻게, 이게 어떻게 여기에….”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서 있을 수가 없어 벽을 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믿기지 않아 허공을 짚던 눈동자가 다시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하얀 은장도.
6년 전, 액막이 소년에게 들려 보냈던 달빛처럼 하얀, 그때 그 은장도였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공들여 붙인 자개 손잡이에 제가 직접 수를 놓은 덮개를 씌운 것을.
“말도 안 돼.”
이 작은 것이, 무헌의 짐 깊숙이에 소중히 들어 있는 이것이, 제가 준 은장도라니.
그 천치 같던 소년이, 그리 울어 대던 사내가, 그녀가 살려 보낸 진짜 첫 낭군이 무헌이라니.
은장도를 손에 꼭 쥐었다. 심장이 마구 뛰어 가슴 언저리를 눌렀다. 처음으로 기뻐서도, 벅차서도, 또 뜨거워서도 눈물이 흘렀다.
살았구나. 살아 주었구나. 그 안도와 함께 수많은 감정들이 그녀를 휘감았다.
잘 살라 하였다.
“부디, 잘 살아.”
잘 살겠다 하였다.
“나도, 잘 살아 볼 테니.”
그래, 그 밤의 나는 그리 소망하고, 그리 다짐했었더랬지.
멀리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낯선 이를 두려워하는 그녀를 위해, 놀라지 말라고 일부러 크게 내어 주는 소리.
하연은 숨을 들이마시고 일어나, 꽃잎을 흩뿌리는 꽃나무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그곳에서 무헌이 꽃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하연은, 이무헌의 각시 정하연은, 그를 향해 환히 웃었다.
“아흔아홉! 백!”
***
초저녁달이 일찍 하늘에 떴다. 아랫마을에 급한 일을 도우러 나간 무헌이 귀가할 때가 되었다.
하연은 일찌감치 목욕을 하고 머리도 곱게 빗고 무헌을 기다렸다. 그가 삶아 놓고 간 감저로 배도 든든히 채웠다.
빨래도 곱게 개어 놓았고, 마당도 쓸어 두었다. 방에 은은하게 불도 켜고, 지난번에 그가 얻어 온 탁주로 술상도 차려 놓았다.
오늘 하루 이 순간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얼른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나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욕심을 꾹 누르며, 온종일 그를 기다렸다.
“각시야.”
이윽고 그의 기척이 들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며 방문을 열었다.
“왔어?”
“…어어?”
방에 들어서던 무헌이 엉거주춤 선 채 눈을 키웠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늘 둘로 나뉘어 있던 이부자리가 하나로 합쳐져 있으니 필시 무슨 사달이 난 거라 여겼다.
“어디 가? 가려고?”
대뜸 묻는 말에 이번에는 하연이 눈을 키웠다. 초조함이 가득한 눈이 그녀를 살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하연은 조금 당황했다.
가다니. 왜 그런 생각을.
하연은 웃으며 베개를 탁탁 가리켰다.
“베개가 둘인데, 나 가면 하나는 누구한테 내어 주려고?”
“어우, 난 또….”
무헌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또 벌컥 그녀를 훑었다.
“근데 왜 그래?”
“무엇이?”
“왜, 그러니까 왜 붙어 있냐고, 이부자리가.”
하연은 새초롬히 무헌의 옆에 앉았다. 무헌이 불안한 기색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하연은 입술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이거.”
망설이던 손끝이 그의 눈앞에 은장도를 내밀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조금은 눈물도 날 것 같았다. 그의 까만 눈과 그의 붉은 입술이 내놓을 말에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었다.
“미쳤어!”
버럭 고함을 친 그가 은장도를 채 갔다.
“이걸 왜! 이걸 왜 가지고 있어!”
“…….”
“왜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고 그래!”
당황한 하연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게 뭔 줄 알고.”
“…….”
“이게 어떤 건 줄 알고…!”
조금은 서운하려 했던 마음은 그의 손을 보고 사라졌다. 전에 본 적 없이 화를 내는 언성과 달리 그의 손은 소중한 것인 양 은장도를 감싸 쥐고 있었다.
얼마나 아끼고 있는 것인지 느껴졌다. 은장도를 꼭 쥔 채 가슴께로 끌어당겨 씩씩거리고 있는 그를 보는 하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게, 그렇게 소중해?”
고집스레 굳어 있던 무헌의 눈이 조금 흐트러졌다.
“…미, 미안. 소리쳐서 미안.”
자신이 화를 내서 그녀가 우는 거라 생각한 무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게 왜 허락도 없이 만져서는. 하나 사 줄게. 이게 갖고 싶으면 사 줄게, 당장. 하지만 이건 안 돼. 이건 그러니까….”
하연의 손이 안절부절못하는 무헌의 손목을 잡았다. 움찔, 놀란 그의 눈이 손목을 잡고 있는 하연의 손을 타고 올라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래, 이 까만 눈동자. 그때도 이렇게 반짝거렸었지. 어둠 속에서도 이 눈빛만은 그리도 영민하게 빛이 났었지.
왜 몰랐을까. 어찌 몰랐을까. 이렇게도 고운 사내를.
“누가 준 건데 그리 아껴?”
그렁한 눈물을 삼키며 하연은 짐짓 모른 척 물었다. 하연의 입가에 옅게 떠오른 미소를 본 무헌이 조금 용기를 냈다.
“화, 안 났어?”
하연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 믿는 것 같아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정말이야. 안 났어.”
“…….”
그런데도 무헌은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대역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명색이 서방인데, 서방 노릇을 못 해서.”
“…….”
“사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말을 끊은 무헌이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도 쉽게 나오지 않는 말이라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조강지처가 있어.”
“조강, 지처?”
잠시 숙였던 무헌의 말간 눈이 다시 마주쳐 왔다. 까맣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 하연의 얼굴이 비쳤다. 참으로 정직하고 곧은 얼굴로 무헌은 6년 전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에게는 악몽이자 천운 같았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연은 가슴이 깊게 뜨거워졌다.
잊고자 했고,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이토록 귀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하고서도 조강지처라니. 그 모진 일이 다 그녀 때문에 일어났는데도 저리 소중히 은장도를 간직하다니.
어찌 그는 그를 해하려 한 것에 원망을 두지 않고 살려 보내 준 은혜만 생각하는가. 그게 뭐라고. 그런 것은 귀한 은혜 축에 끼지도 못하는 것을.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여인인지를. 그가 털어놓은 그 악몽 같은 일이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그 탐욕스럽고 매서운 일이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
싫었다. 나는 아닌데.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여인이 아닌데. 그런 무자비한 일을 오만하게 저지르는 부끄러운 양반가의 여식이 아닌데. 그녀는 죽었는데. 나는 그냥 이무헌의 각시이고 싶은데….
그러니 말하지 않으련다. 그때 그 각시가 저라고 차마 수치스러워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두려워서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대로 살고 싶었다. 이무헌의 각시로. 이름 없는 여인이어도 좋으니, 정하연이 아닌, 그냥 이 사내의 아내로.
“그러니 미안해, 각시야….”
이야기를 끝낸 무헌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연은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눈물을 쓸었다. 눈물에 젖은 그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아직도 이리 순진한 사내여서 어찌하려고.
그러니 그녀는 울 수 없었다. 강해야 했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하연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를 향해 작게 미소했다.
“사내는 살면서 세 번을 운다는데, 이런 일에 그 귀한 한 번을 쓰면 어쩌자는 거야?”
무헌이 울음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 한 번이 남아 괜찮아.”
빤히 보던 하연은 결국 풋, 웃음을 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말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움찔 놀라더니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연은 일부러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내게 서방 노릇을 안 한 거야?”
“그건….”
“조강지처가 준 은장도라 여태 간직하고 있었던 거고?”
무헌이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꼈다.
“이유야 어쨌든 사모관대 쓰고 장가를 간 거니, 정조는 지켜야지.”
“정조?”
정조 지키는 여인은 보았어도, 그런 사내는 듣도 보도 못했다. 아연해 바라보자 무헌이 단호히 말했다.
“사내가 되어 이 여자, 저 여자를 품는 건 옳지 않아. 신하가 이 임금, 저 임금을 섬기는 것과 뭐가 달라.”
“하지만 서방은 각시를 섬기지 않는걸.”
“인륜대사의 연을 맺은 이를 섬기지 않는 사내가 무엇인들 귀히 여기겠어?”
“…….”
“그런 건 사내도 아니야.”
확고한 대답이 돌처럼 단단했다. 하연은 눈가가 뜨끈해졌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넘쳐 날 것 같아 뜨거운 숨을 들이켰다.
살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내를 보았던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내를 만난 적이나 있던가.
눈앞에 있는 이는 순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바르고 곧은 사내였다. 잘난 사내였다.
하연은 지금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무헌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랗고 든든한 사내로 보였다.
그러게, 내 낭군. 내 서방님. 나의 지아비. 나의 사람.
이 사내가. 바로 이, 사내가!
“그럼… 나랑 계속 이렇게 살 거야? 나 생과부 만들면서?”
어쩐지 목이 메었다. 그것을 감추려 조금은 짓궂게 물은 것인데, 무헌이 찔린 듯 흘끔 보았다. 하연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때 연은 거기서 끝냈어야지. 액막이가 무언데. 액막이 신랑이 초혼의 액땜을 해 줘야 새로 시집가서 잘 사는 거잖아.”
“…….”
“게다가, 누구보다 그 일을 잊고 싶은 게 그 여인일 텐데 아직도 서방입네, 하고 버티고 있으면 그 여인이야말로 곤란해하지 않겠어?”
무헌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자신의 잘못을 되짚느라 그의 눈동자가 바빴다. 하연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짐짓 서운한 척 턱을 들었다.
“모르긴 해도 지금쯤 그 여인은 새 낭군 만나 살 비비며 잘 살고 있을 텐데, 나만 이게 뭐람?”
“…….”
“하긴, 한 번 서방 복 없던 이가 두 번이라고 있을까. 박복한 게 내 팔자인가 보네.”
“그, 그건.”
“괜찮아. 사내가 충(忠)에 버금가는 지조를 논하는데 어찌 토를 달겠어. 그저 내 팔자가 기구한 것이려니 하고 살아야지.”
“…울어?”
옷고름으로 눈을 콕콕 찍으니 무헌이 바짝 다가와 앉았다. 몸이 달아 고개를 숙여 얼굴을 살피려 하자 하연은 팽하니 돌아앉았다.
“붙여 놓은 이부자리는 서방님께서 떼어 가셔요. 나는 슬픔이 흘러넘쳐 모든 기력이 사라졌으니.”
“각시야….”
“눈물 좀 흘린다고 새삼 마음에 둘 것은 없어. 밤마다 흘린 눈물, 새삼 초저녁이라고 못 흘릴까.”
“밤마다 울었다고?”
무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사내는 어찌 이리 골리는 재미가 있을까.
하연은 일부러 허공을 보며 애달프게 읊조렸다.
“수절 과부 되어 매일 밤 통곡했더니, 울음도 습관이 되었는가. 나는 왜 이리 조금만 서러워도 눈물이 날까.”
제게 이런 못된 심보가 있었나, 하연은 스스로 놀랍기도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때 나를 데려오지 말지. 대롱대롱 목을 매고 죽었더라면, 두 번의 설움을 겪진 않았을 텐데.”
“…….”
“각시라며 꽃신 신겨 손잡아 끌고 올 땐 언제고, 있지도 않은 아내에게 정조를 지킨다며 나를 내치나.”
“아우우, 진짜!”
무헌이 발딱 일어섰다. 빼꼼 올려다보자, 그의 눈이 화난 듯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떠날 거야?”
어째서 이 사내는 툭하면 떠날 거냐 묻는담.
“그래서 나 버리고 또 떠날 거냐고?”
“…….”
무헌을 올려다보는 하연의 입술이 톡 벌어졌다.
버리다니. 버리고 떠나다니. 내가, 무헌을 버려?
“알아. 내가 가진 거 하나 없는 보잘것없는 사내라는 거. 무늬만 양반이지,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는 거.”
“…….”
“각시가 좋은 집에서 귀하게 살았던 거 말 안 해도 알아. 매일 쌀밥에 고깃국 먹으며 몸종들 시중 받으며 살았을 텐데, 나는 그런 거 하나도 해 줄 수가 없잖아. 그래서 나 싫다고 가도 별수 없다는 것도 알아.”
품을 뒤적거린 그가 비녀를 꺼내 내밀었다.
“언제고 가겠다면 붙잡지는 않을게. 하지만 그때처럼 말도 없이 가지는 말고 언질만이라도 좀 남겨 줘. 그래야 내가, 내가 괜스레 찾아 나서지 않지.”
“…….”
하연은 가슴께가 따끔거렸다. 왜 그렇게 비녀를 팔지 않았는지 이제 알았다.
그리고….
“그래서 날 안지 않은 거야?”
왜 그렇게 목석처럼 굴었는지도.
언제고 떠날 수도 있겠다고 여겨서. 이 생활을 못 참고 도망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붙잡을 수 없으니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서 그리 살뜰히 챙기면서도 몸을 안지 않고, 그리 형편이 어려운데도 비녀를 내다 팔지 않았다.
“조강지처 어쩌고는 다 거짓말이지?”
무헌의 눈이 흔들렸다.
“임금 신하 어쩌고도 변명이지?”
“…….”
“천치 같아.”
이번에는 하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게 날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정말 천치 같아.”
내가 갈 곳이 어디 있다고. 날 살려 놓을 땐 언제고, 누가 누구더러 떠난대.
내가 어딜 갈 수 있는데. 널 버리고 어디로 갈 수 있는데. 내 집은 여긴데. 내 낭군은 너인데.
나는, 나 정하연은, 이무헌의 각시인데.
“그 여인을 안았다는 거, 거짓말이지?”
처음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내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은 걸 꾹 누르며 짐짓 미운 척 쏘아보았다.
무헌의 눈이 단번에 커졌다. 그러더니 푹 꺼지듯 주저앉았다.
“진실이야.”
“거짓말. 어떻게 진실이야?”
아차, 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모르는 척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찌했는데?”
“뭐?”
“어찌했는지 말해 보라고.”
하연의 추궁에 망설이던 무헌이 입을 열었다.
“가, 가슴을 만지고.”
“또?”
“…알몸도 보았어.”
“알몸?”
기가 막혀 입이 툭 벌어졌다. 알몸을 보였던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무헌이 서둘러 말을 고쳤다.
“정확히 알몸은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암튼 보았고 만졌어. 거기… 거기를 말야.”
무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목덜미부터 귀까지 타는 듯이 붉어져 손을 대면 델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하연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라니…. 새삼 그때 생각이 나서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건 안은 거 아냐.”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하연은 굳게 입매를 가다듬었다. 둥그레진 무헌의 눈이 날아왔다.
“왜 안은 게 아냐?”
크게 숨을 들이켠 하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남녀가 몸을 맞댄다는 건, 이런 거야.”
무헌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입술을 꾹 붙였다. 손에 닿는 그의 볼은 뜨거운데 입술은 차가웠다. 그것이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가만히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까맣고 기다란 눈이 지척에서 마주쳐 왔다. 하연은 제풀에 놀라 화들짝 손을 놓고 물러섰다.
“나, 난….”
더듬거리며 무어라 변명을 하려던 때였다. 무헌의 커다란 손이 등을 받쳐 그녀를 가두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파고들 듯 찔러 왔다. 하연은 입을 뻐끔거렸다.
“왜… 왜 그리 봐….”
“각시 탓이야.”
평소와 달리 낮고 무거운 음성이 흘렀다. 하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넘겼다.
“무엇이?”
“나는 정말 선비 같은 낭군이 되고 싶었는데, 각시가 다 망쳤어.”
무헌이 목을 긁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너무 절절해서 조금 겁도 났다.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그의 눈을 훑자, 눈빛이 짙어진 그가 힘줘 말했다.
“젠장맞게 그런 거, 자신 없어졌어.”
“뭐가, 으읍!”
커다란 손이 목뒤를 감싸고 고개가 위로 들렸다. 열린 입술을 헤집고 무헌의 입술이 겹쳐졌다.
차갑다고 느꼈던 입술은 온데간데없었다. 뜨겁고 뜨거운 숨이 입 안을 삼키고 헤집고 핥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온몸의 기가 빨리는 듯했다.
그가 말한 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 입맞춤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참고 또 참아 왔던 사내의 욕망은 길들이지 않은 짐승 같은 것이었다. 선비가 아니라 화적 같았다. 이제 막 눈가리개를 떼고 산야에 풀어놓은 야생마처럼 무헌은 마구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연은 숨이 막혀 그의 가슴을 때렸다. 그제야 집어삼킬 듯 그녀의 입술을 빨고 깨물던 무헌이 고개를 물렸다.
“하아. 하아.”
하연은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물고 빤 입술이 그새 부풀었다. 무헌이 혼란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걸 보니 타박도 못 하겠다. 아무래도 제가 큰 불씨를 지핀 듯했다.
하연은 쌕쌕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의 한쪽 뺨을 가만히 매만졌다.
“조금은 천천히. 자신 없어도 조금만. 응?”
무헌이 얼굴을 붉혔다. 불만스러운 눈길이 비껴갔다. 하연은 그의 얼굴을 돌려 그녀를 보게 했다.
“밤일에 서툰 사내가 될 거야?”
“미쳤어?”
발끈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가만 바라보던 무헌이 인상을 쓰며 힘줘 말했다.
“그럼, 가르쳐 줘.”
“…응?”
“나는 머리가 좋아 뭐든 잘 배우니까.”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눈이 그녀를 향했다. 덕분에 하연도 웃음을 거두고 진지해졌다.
그녀라고 잘 알까. 하지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철새가 무리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때가 되면 꽃이 제 몸을 열어 벌에게 내어 주는 것처럼, 배운 적 없어도 몸이 스스로 깨우치는 것들이 있었다.
하연은 몸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방을 밝히고 있던 불을 끄고 그와 마주 앉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무헌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대었다. 물컹한 살에 닿은 무헌의 손이 흠칫 떨렸다. 침 한번 삼키고 하연의 옷고름을 푸는 그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하연은 그것이 좋았다. 저만 떠는 게 아니라 그도 함께 떨어 주어서. 그래서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긴장한 그의 얼굴이, 저를 소중히 여겨 주는 것 같아 좋았다.
저고리를 벗기기 전에 무헌이 눈을 맞춰 왔다. 허락을 구하는 눈길에 하연은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저고리가 벗겨지고, 치마를 동여맨 매듭이 그의 손에 풀려 나갔다. 하나 남은 속치마마저 바닥으로 주저앉자, 갇혀 있던 젖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무헌의 입에서 탄성 같은 숨이 터졌다. 하얗고 둥근 가슴 두 쪽을 무헌의 눈이 번갈아 가며 담았다.
평소에도 가늘다고 느꼈던 몸이 벗겨 놓으니 더 가냘팠다. 둥근 어깨를 지나 볼록한 젖가슴과 쏙 들어간 허리와 탐스러운 둔부와 귀여운 배꼽까지 한 번에 훑었다.
달빛도 미끄러질 것처럼 곱고 고운 살결이었다. 속곳 하나만 걸친 채 부끄러운 듯 앉아 있는 여체의 모습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무헌은 제 저고리의 고름을 풀면서도 그녀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꼴깍, 꼴깍, 마른침이 계속 넘어갔다.
여인의 젖꼭지는 어째서 이리 예쁜 건가. 아니면 내 각시만 그런 건가.
참지 못하고 오뚝 일어서 있는 그것부터 손으로 잡았다. 손가락으로 굴리며 비틀자 하연이 신음을 흘렸다.
“아아.”
미치도록 고운 소리였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당장이라도 탐스러운 양 가슴을 두 손에 움켜쥐고 질리도록 주무르다 입에 담고 맛보고 싶었다.
이곳이 이리 예쁘니 아래는 어떠할까. 속곳을 벗겨 다리를 활짝 벌려 여인의 구석구석을 모두 눈으로 살피고 싶었다.
허리 아래로 피가 잔뜩 몰렸다. 제 몸이 아닌 것처럼 꿈틀거렸다. 하지만 서툰 사내는 되기 싫어 숨을 골랐다. 그 숨이 파르르 떨리며 나왔다.
“마음껏 만져도 돼.”
물에 젖은 것처럼 촉촉한 음성에 등골이 지르르 울렸다. 하연이 까맣고 커다란 눈을 지그시 밀어 올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몸이 시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또다시 꼴깍 침이 넘어갔다.
“나도, 그럴 거니까.”
하연이 옅게 웃었다. 새초롬한 미소가 달밤에 핀 꽃보다도 고왔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정신이 불길 속으로 뛰쳐 들어간 듯 화르륵 타올랐다. 무헌은 하연을 밀어 눕히고 덥석 가슴을 쥐었다.
“하읏.”
하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었다. 무헌의 두 손이 쉬지도 않고 젖가슴을 주물렀다. 온통 빨갛게 손자국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싫지 않아 방만한 여인처럼 허리를 꺾고 고개를 젖혔다.
입 안이 아리도록 혀를 물고 빨며 헤집던 그가 목을 지나 가슴으로 입술을 내렸다. 가슴 끝을 세차게 빨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움켜쥐었다가 문질렀다가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손에 몸이 만져지는 것이 이리 좋은 것인지 처음 알았다.
“너무 예뻐. 주물러도 주물러도 제자리로 돌아와. 부드럽고 말랑해서 만지고 있으면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연신 가슴 끝을 빨아 대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코와 입술이 동시에 가슴을 문질렀다.
“하아, 아아.”
입김이 옆구리를 타고 배꼽으로 향했다. 살결을 빨아들일 때마다 따끔한 통증이 들면서 묘한 쾌감이 함께 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얇은 갑사(甲紗)를 몸에 덮고 간질이는 것처럼 기묘한 느낌이 사분사분 퍼졌다.
가슴과 배를 지분거리던 그가 다시 입 안을 열고 들어왔다. 정신이 아득하여 그의 손이 속곳을 벗겨 낸 것도 뒤늦게 알았다.
은밀한 맨살을 움켜쥐는 느낌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무헌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왜?”
고개를 들고 묻자 무헌이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안 씻었어.”
“…응?”
“손도 안 씻고, 다 안 씻었어. 아니, 아까 손 씻고 오긴 했는데, 어쨌든 새로 안 씻었어. 이 손으로 여길 만질 순 없잖아. 여긴, 여긴 그러면 안 되잖아.”
그 여기가 어딘지는 민망하리만큼 그가 제대로 알려 주고 있었다. 여기라고 말하는 내내 그의 눈이 계속 그가 벌려 놓은 다리 사이에 닿아 있었다.
하연은 허겁지겁 다리를 오므렸다. 그렇게 활짝 아래를 열어젖히고 있는 줄 여태 몰랐었다.
횡설수설하던 무헌이 저고리를 집어 들더니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미안. 얼른 씻고 올게. 금방 올게!”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무언가에 부딪히고 혹은 무언가가 발에 차이고 쓰러지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무헌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다친 건가 싶어 하연은 고개를 들고 귀를 세웠다.
“난 괜찮아. 괜찮아, 각시야.”
다급히 외친 무헌의 발걸음 소리가 바삐 멀어졌다. 듣고만 있는데도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한바탕 소란이 사그라든 자리에 고요가 남았다. 문을 넘어온 달빛이 방에 훤히 들어찼다. 방문 너머를 바라보던 하연은 그제야 머리를 눕히고 아랫도리에 이불을 덮었다.
“…….”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멀리서 이름 모를 새가 울었다. 결국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언제 배운 노래더라.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 곡조를 읊으며 사내를 기다리다니. 음탕한 여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뭐 어때, 각시가 제 낭군 기다리는데.’
하연의 노랫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
금방 온다던 무헌은 정말로 노래 세 가락이 끝나자마자 돌아왔다.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숨이 가빴다.
날이 따뜻해졌어도 산속 밤바람은 찼다. 계곡물은 더할 것이다.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찬기가 가득 묻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연은 그의 맨가슴을 손으로 훑었다. 물기도 제대로 못 닦고 달려왔는지 미끈거렸다.
“고뿔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안 들어, 그런 거. 더워서, 미칠 거 같단, 말야.”
불규칙한 숨 때문에 무헌의 말이 끊어져 나왔다. 그리 더운 건 그래서 더운 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하연의 입술은 채 열리기도 전에 그의 찬 입술이 삼켜 버렸다.
그렇게나 달려오고도 어디서 이런 기운이 난 건지. 입 안을 헤집고 빨아 대는 힘이 전보다 더 거셌다.
찬 손이 가슴을 주물렀다. 차고 단단한 그의 가슴이 맨살에 닿았다. 흠칫, 흠칫 몸이 떨렸다. 하연은 손을 뻗어 그의 가슴과 배를 매만졌다.
그 옛날 하얗고 가늘기만 했던 소년의 몸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벽처럼 단단한 가슴과 탄탄하게 갈라진 배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악기를 만지는 것 같았다. 하연은 힘이 들어간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손이 다리를 열고 가장 깊은 곳에 닿았다. 가장 뜨거운 곳에 가장 찬 것이 닿아 머리가 쭈뼛 섰다. 아래가 손바닥에 비벼졌다. 젖은 소리가 차올랐다. 하연은 무언가가 쏟아질 것 같아 허리를 뒤틀었다.
“아으읏.”
그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다리 안쪽을 활짝 열었다. 두 다리가 허공을 향하고, 늘 감춰만 왔던 깊은 곳이 그의 눈앞에 고스란히 벌어졌다.
“헉.”
부끄러움이 몰려와 손으로 가렸다. 이렇게 음탕한 자세라니. 원망하듯 무헌을 쏘아보자 그가 불만스럽게 눈을 구겼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그래도 이런 자세는 너무….”
“그럼 이따 나도 그렇게 해 줄게.”
“무엇을?”
“나도 활짝 다리를 벌려 줄 테니, 그때 똑같이 구경하면 되잖아.”
“구경이라니, 무얼 구경하겠단, 하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의 손이 치워졌다. 은밀한 살을 헤집는 것은 그의 손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가랑이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하연의 눈이 기겁하여 커졌다.
“대체 무얼 하는, 하아앗!”
한 줌의 항의는 아래를 지분거리는 입놀림에 새하얗게 날아갔다. 코가 음모를 헤집었다. 뜨끈한 혀가 꽃잎 사이를 한 겹씩 훑어 내렸다.
허리가 뒤틀렸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런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배울 테니 가르쳐 달라던 무헌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런 건, 아흣, 어디, 하아, 어디서 배운,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하래서 하는 거잖아.”
입술이나 떼고 말하지, 그가 말할 때마다 예민하게 일어선 꽃잎들을 건드렸다.
“핥고 싶어서 핥고, 빨고 싶어서 빨고.”
그가 은밀한 살덩이가 볼록해지도록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곳을 통째로 입에 넣고 이로 씹었다.
“먹고 싶어서 먹는 건데.”
“아윽, 그만. 그만….”
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아래로 무엇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입술을 떼고 침이 흥건한 음부를 놓았다. 그러자 정말로 아래에서 왈칵 무엇이 쏟아졌다. 하연은 질겁하며 다리를 붙이려 했다. 실수라도 한 것일까 견딜 수가 없었다.
츄릅.
무헌이 뒤에서부터 앞으로 입술을 대고 빨아들였다. 입맛을 다신 그가 번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맛있는 게 나왔어.”
무헌의 기다란 눈이 버들처럼 휘었다.
“여기서, 맛있는 게 주룩 나왔어.”
손가락이 가장 깊은 곳을 톡톡 건드렸다.
“먹어 본 중에 제일 맛있는 과일 같아.”
꼿꼿이 세운 혀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들이켤 듯 아래를 빨았다.
“하아읏. 흐읏. 흑.”
하연은 이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부끄러움은 묘한 흥분이 되어 몸을 간지럽게 타고 흘렀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맥이 풀린 것 같으면서도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아래를 드러낸 채 끄덕거렸다. 몸이 제멋대로 떨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넣어야 하는데.”
그의 손가락이 밀지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곳을 들락거리는 움직임이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다.
“너무 좁아. 오늘 안에 못 들어갈 것 같아.”
걱정 섞인 무헌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남은 손가락의 손뼈와 손등이 음부와 사타구니에 치대졌다. 그럴 때마다 다리가 파들거렸다.
“하앗. 읏….”
어느덧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대체 이런 건 누구에게 배운 거냐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달아 찌걱거리는 소리만이 아득히 들렸다. 그의 말소리도 멀리 있는 것 같았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무엇이 한 번만 더인가를 물을 힘도 없었다. 공부라도 하듯 아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무헌의 손가락이 어느덧 세 개로 늘어났다. 아래를 휘젓는 것뿐인데 또다시 무언가가 왈칵 쏟아졌다.
“하아….”
“됐다!”
누구는 축 늘어졌는데, 누구는 신이 났다. 무헌이 칭찬이라도 하듯 축축한 밀지에 입술을 쪽 붙였다 뗐다.
“이제 넣어 볼게.”
기쁜 얼굴로 무헌이 서둘러 바지춤을 풀었다. 손놀림이 급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음 먹을 것을 미리 찜하는 아이처럼, 벌어져 있는 음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것이 민망하면서도 짜릿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바지를 던져 버린 그가 곧장 하연의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예민하게 열려 있는 그곳에 파고들었다.
“허억!”
아래가 꿰뚫리는 것 같아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하연은 상체를 일으켜 제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큰 줄 몰랐다. 입이 떡 벌어졌다.
“아직 안 들어갔어.”
끝만 조금 걸친 채 무헌이 미안한 듯 말했다. 어둠 속에서 둘의 눈이 닿았다. 하연은 마른침을 삼키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기, 정말로 그걸 다 넣을 셈이야?”
“다 들어간댔어.”
“…뭐?”
“겉으로는 아무리 구멍이 작아 보여도 다 들어갈 수 있다고. 아이도 나오는 곳인데 이런 거 하나쯤 안 들어가겠냐고.”
“대체 그런 망측한 말을 누가 해 줬어?”
“그야….”
무헌의 눈이 쪼르르 도망갔다.
“사내들 모이면 하는 말이 다 그런 거지.”
“어우우,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하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무헌이 꽂혀 있던 끄트머리를 빼고 물러나 앉았다.
“싫은 거야? 나랑은, 싫은 거야?”
풀 죽은 물음에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이 내려갔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전에도 해 봤을 거 아냐. 그… 먼저, 남편이랑….”
“…….”
하연의 턱이 툭 풀렸다. 무헌이 골난 눈으로 비죽거렸다.
“아니면 그 사내 것이 비교도 할 수 없이 쪼끄맸나?”
“…….”
“하긴. 내가 봐도 이놈이 매우 튼실하긴 해.”
무헌이 다리 사이로 솟아 있는 그의 물건을 뿌듯하게 내세웠다.
“아침에도 얼마나 발딱발딱 일어나 있는지, 한참을 가라앉질 않는다니까.”
언제는 선비 어쩌고 하더니 이젠 아예 입을 풀어놓았나 보다. 하연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무헌의 물건을 바라보다가, 다리를 오므리고 이불을 끌어 허리를 가렸다.
“…안 해 봤어.”
작게 중얼거리자, 무헌이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찌푸렸다.
“…응?”
“안 해 봤다고.”
다시 한번 뱉어 놓고는 새침하게 돌아앉았다.
“수절 과부란 소리는 귓등으로 들었나?”
흘낏 곁눈질하자, 잠시 눈을 끔뻑이던 무헌이 목을 긁었다.
“그래도… 전에 남편이랑은 해 봐….”
“안 해 봤다고! 처음이라고! 시집온 날 술 먹고 초야 내내 쓰러져 자더니 그 이튿날 사신단을 따라나섰단 말이야. 사내 꼴이라고는 그 전에 너랑, 아, 아니.”
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암튼 안 해 봤다고!”
“…….”
“…….”
때아닌 침묵이 흘렀다. 끔뻑끔뻑 시간이 갔다. 눈치를 보던 무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안 해 본 게 자랑도 아니고….”
하연은 발끈해서 돌아보았다.
“그럼 흉이란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자기 각시가 처녀라고 불만 있는 사내는 거기밖에 없을 거다!”
이유 없이 얼굴이 활활 타올랐다. 할 말을 쏟아 내고 돌아앉자, 묵묵히 있던 무헌이 심드렁히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그러는 각시는.”
“…….”
“자기 서방 물건이 크고 튼튼하다고 불만 있는 각시는 여기밖에 없겠다.”
“뭐…. 하….”
제 말을 따라 하며 놀리는 것이 괘씸했지만 대꾸할 것이 없었다. 하연은 민망함을 감추려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암튼 몰라. 처음 하는 여인이 이 큰 걸 단번에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무섭고 겁나는 게 당연하잖아.”
“…….”
“바꿔 생각해 봐. 누가 거기 몸에 이 큰 걸 박아 넣는다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그래 놓고는 입술을 감춰 물고 눈치를 살폈다. 그때의 그 어리숙하던 소년이 어쩌다 몸에 저리 커다란 걸 키운 건지. 장성한 몸만 놓고 보면, 그때와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
무헌은 왜인지 말이 없었다. 말이 먹힌 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데, 그가 진지하게 입술에 힘을 준 채 눈을 들었다.
“하지만 난, 이런 구멍이 없으니 알 길이 없잖아.”
“어머나!”
말과 동시에 그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단번에 가랑이 사이를 짚었다. 하연은 그 재빠름에 한 번, 아래를 찌르고 들어오는 손길에 두 번, 그리고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 그의 물건에 세 번 놀랐다.
“나도 몰라. 못 참아. 못 넣게 할 거면, 차라리 죽으라고 그래.”
당당하게 선언한 무헌이 하연을 밀어 눕히고 다리를 번쩍 들어 열었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은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다른 일에는 한없이 다정한 사내가 왜 지금은 이리도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건지.
“예뻐.”
아래를 빤히 바라보던 무헌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뻐끔뻐끔 빨리 넣어 달라는 것 같아.”
눈길만으로도 아래가 뚫리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 오므리고 싶었지만, 그의 손에 다리가 잡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그만 봐….”
정말 할 거라면, 어차피 그걸 넣을 거라면, 차라리 그만 구경하고 빨리 넣어 줬으면 하고 바랄 때였다.
“허억!”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단번에 찌르고 들어왔다. 이번에야말로 아래가 뚫리는 것 같았다. 뻐근하게 꽉 차는 느낌에 하연은 끄응, 신음을 내었다.
“미안. 아파?”
대답도 못 하고 눈을 찌푸리자 무헌이 그의 것을 물고 있는 부위를 손으로 살살 쓸었다.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에 어느덧 빠듯하던 아래가 풀려 갔다. 하연은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훔쳐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아졌, 아앗!”
그러자 그가 한 번을 더 치고 들어왔다. 예기치 못한 탓에 하연은 크게 놀라 고함을 질렀다.
“다 들어온 게 아니었어?”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무헌이 미안한 듯 웃었다.
“미안. 한 번만 더.”
“세상에, 아직도? 말도 안, 아악!”
한껏 벌어진 사타구니에 그의 허벅지가 닿으며 철퍽 소리가 났다. 번개를 본 것처럼 눈앞이 번쩍했다.
“많이 아파?”
무헌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하연은 고개를 저을 여유도 없어 숨만 겨우 내쉬었다. 그래도 이제 더는 들어올 것이 없으니 다행이지 싶었다.
“미안, 각시야.”
몸을 기울인 무헌이 그녀의 이마를 살살 쓸었다. 따뜻한 목소리에 한결 숨이 편해졌다.
가만가만 잔머리를 매만지던 그가 눈꺼풀에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코에도, 뺨에도, 입술에도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손끝이 다정하게 따라붙었다.
빈틈없이 사랑받는 기분이었다. 오롯이 아낌을 받고 있었다. 어느새 점점 나른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무헌이 아래를 세게 쳐올렸다.
“어, 읏!”
나무라듯 무헌의 어깨를 손으로 때렸다.
“미안. 하지만 계속 꽂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입술만 깨물었다. 이마에 힘줄이 돋은 채로 무헌이 신중하게 허리를 놀렸다. 뒤로 물러났다 다시 들어설 때마다 점점 배꼽 아래가 간질거렸다. 그리고 회가 거듭될수록 간질거리는 곳을 그가 긁어 주듯 시원하기도 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래서부터 뜨겁고 찌르르한 줄기가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연은 무헌의 팔을 힘줘 잡았다.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팔뚝에 손톱을 세웠다. 입으로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하아, 그런데 이거, 안 빠져나오면, 어떡하지?”
들뜬 숨소리와 별개로 그가 심각하게 물었다.
“너무 꽉 조여서, 이러다가 안에 콱 박혀서 안 나올 수도 있을 거 같아.”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하연은 눈을 치떴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어이없긴 했지만, 스멀스멀 두렵기도 했다. 손을 내려 제 안에 끼워져 있는 무헌의 물건을 더듬었다. 어찌 된 게 그사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안 빠져나올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럼 어떡해?”
흔들리는 눈으로 해결을 재촉하듯 무헌을 보았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수 없지. 평생 꽂은 채로 사는 수밖에.”
“뭐어?”
“이렇게 이어진 채로 밥도 먹고, 잠도 자는 거지.”
“…….”
“생각해 보니 그것도 괜찮네. 각시랑 나랑 평생 붙어 있는 거잖아.”
기함할 듯이 커진 눈에 짓궂게 휘는 그의 눈이 들어왔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할 수도 있고 말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허리를 튕겼다. 거듭해서 쳐올리는 몸짓에 아래에서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그가 놀려 댄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억울했지만 따질 여력이 없었다.
아래가 연신 부딪쳐 왔다. 불이 나는 것처럼 뜨거운데도 더 해 주기를 바라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치고 들어올 때마다 몸이 위로 밀려 머리가 벽에 닿았다. 무헌이 허리 아래로 손을 넣어 안아 들었다. 그 순간 아래가 끝까지 내려앉으며 그와 빈틈없이 닿았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하읏, 읏!”
그에게 올라앉은 채로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가슴이 출렁출렁 아프게 흔들렸다. 허리를 받친 그가 한 손으로 가슴을 잡았다. 속도가 더 빨라졌다.
“하아아, 하아, 하앗.”
젖은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뜨겁고 치덕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부끄러운 그 소리에 등줄기가 찌릿찌릿했다.
몸을 섞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누가 알까 두려울 만큼 속되고 민망한, 하지만 그래서 더 친밀하고 더 뜨거운 일. 이 사내와 나, 단둘만의 행위. 그래서 부끄러우나 솔직할 수밖에 없는 몸짓.
그 은밀함에 감당키 어려운 열락이 있었다. 지금껏 넘어 본 적 없는 문 하나를 넘어선 것처럼 환희가 일었다.
“하아, 하아….”
반쯤 뜬 눈에 덜 닫힌 방문 틈으로 밖이 보였다. 언제 날아왔는지 지게 위에 멀뚱히 앉아 있던 올빼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보자마자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간다.
“하아앗!”
질주하던 무헌이 파정을 하느라 크게 몸을 쳐올렸다. 하연은 고개를 뒤로 꺾고 새된 신음을 질렀다.
까무룩 시야가 흐려졌다. 큰 날개를 편 올빼미가 까만 밤하늘을 가르며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