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章. 꽃 각시, 꽃 낭군
방 밖에서 새가 뽀롱, 뽀롱 울었다. 하연은 별난 울음소리라 여기며 손만 뻗어 방문을 열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해는 벌써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딜 간 거지?”
잠시 나갔다 온다던 무헌은 두 시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행방도 알리지 않고 나간 터라 기다릴수록 궁금증만 커졌다.
“아고.”
뻐근해진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누웠다. 아침에도 연거푸 세 번을 안겼더니 온몸이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무헌이 새벽에 눈 뜨자마자 한 일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더듬거리는 일이었다.
‘멍석말이를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아침에 밥숟가락 들 기운도 없다고 투정 부렸더니 밥상을 차려 와 직접 떠먹여 주었다. 그러더니 세숫물까지 받아 와 씻겨 주기까지 했다.
아예 뒷간 시중도 들지 그러냐고 농담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사내였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한 제 잘못이라, 하소연도 못 했다. 그야말로 날뛰고 싶은 말의 고삐를 풀어놓아 준 격이었다.
“대체 뭐 하느라 안 오는 거지?”
와 봤자 다시 몸을 섞자고 들면 큰일이었지만, 그래도 아침도 안 먹고 나간 이가 여태 감감무소식이니 걱정이 되었다.
그녀 입에는 눈 부릅떠 가며 밥을 떠먹여 놓고, 정작 그는 그길로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오늘 급한 일이 있다는 얘긴 듣지 못했는데….’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렸다. 하연은 몸을 뒤집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툇마루에 앉았다.
곱게 단장하고 낭군님 드실 밥상을 차려 놓은 고운 각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누구 덕분에 그 꿈은 날아갔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으면, 곁에 붙어서 부축이라도 좀 해 주든가.
투덜거리며 비척비척 부엌으로 향하던 하연의 두 발이 기척에 멈춰 섰다. 반갑게 커진 눈이 그가 오는 길로 향했다.
“왜 나와 있어?”
그가 큰 걸음으로 달려왔다. 하연은 부러 비틀거리는 척 그의 부축을 받았다.
“기다려도 안 오니까 궁금해 나왔지.”
배고파서 나왔다는 말보다는 듣기 좋을 것 같아 뻔뻔함을 무릅쓰고 그리 말했다. 진짜로 무헌을 보자 배고픔 같은 건 금세 잊히기도 했다.
“아프다며? 걸을 수 있는 거야?”
걱정하는 그의 얼굴이 좋았다. 그가 돌아온 게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를 일이다. 누가 보면 두 시진이 아니라 두 달은 헤어졌다가 만난 줄 알겠다.
그러게, 남녀가 몸을 섞는다는 건 참으로 요사스러운 일이었다. 하룻밤 사이 그는 더 그립고,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맨살을 비비는 것은 맨마음을 비비는 것과 같아서,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는 둘만의 세상이 생긴 듯했다.
“그리 걱정되는 이가 아침에도 세 번을 해?”
반가움을 숨기고 새치름히 눈을 흘기자, 무헌이 골똘히 눈을 굴렸다.
“그거야…. 그게, 못 해서 죽는 거보단 낫잖아.”
“어머나. 못 해서 죽었단 사내는 한 번도 못 봤네.”
“왜 없어? 있어. 분명히.”
뻔뻔함은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연은 무헌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바라보다 두 손을 들었다.
“아침도 안 먹고 어딜 다녀온 거야? 배 안 고파?”
“괜찮아. 각시를 많이 먹어서.”
뜨악하니 입을 벌리고 보자, 무헌이 벙싯거렸다. 그러더니 손을 잡아 툇마루로 끌어다 앉혔다.
“머리가 이게 뭐야? 새색시가.”
뜬금없는 타박에 눈을 들자,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쓱쓱 정리했다.
그리도 엉망인가?
새삼 민망해져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해 줄 테야.”
하연의 손을 고이 잡아 무릎 위에 돌려놓은 무헌이 다시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하연은 그에게 머리를 맡긴 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서졌다. 입가에는 옅게 미소가 물려 있었다. 머리를 빗기는 손길이 조심스러우면서도 꼼꼼했다.
‘무슨 사내 손이 이리 야무지담.’
사근사근 이마에 와 닿는 숨결이 기분 좋았다. 집중하느라 앙다문 입술을 바라보다가 작게 하품을 했다. 차근차근 땋아 내려가는 손길에 나른하게 몸이 늘어졌다.
“다 됐다.”
완벽하게 쪽을 지은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손이 야무져서 그런가, 그녀가 했을 때보다 어째 더 탄탄하게 느껴졌다.
“우와, 정말 잘했네.”
손을 뒤로 해 머리를 만져 보던 하연의 눈이 커졌다. 머리에 꽂혀 있는 건 나뭇가지가 아니라 비녀였다.
“어엇. 빼면 어떡해?”
까맣고 윤기 흐르는 땋은 머리가 툭 풀어졌다. 무헌은 타박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녀를 바라보던 하연의 눈이 천천히 무헌을 향했다.
그 비녀인 줄 알았다. 꼴 보기 싫으니 내다 팔라고 했던 그 몹쓸 비녀.
그런데 머리에 꽂혀 있던 건 직접 손으로 깎은 나무 비녀였다. 어찌나 매끈하게 잘 다듬었는지 옥을 만지는 것 같았다. 은은한 향기까지 났다. 무헌이 머쓱하게 웃었다.
“향나무야. 오랫동안 말린 거라 휘지도 않고 단단해.”
“…이걸, 만든 거야? 아침 내내?”
가운데 글까지 새겨져 있었다. 하연은 손으로 글을 더듬었다.
예쁜 이무헌의 각시
쿡,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나왔다. 글귀가 꼭 그이처럼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다. 이 작은 것에 이리도 고운 글을 새기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그렁해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무헌이 쑥스러운지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손에는 상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냉수가 담긴 커다란 사발이 올려져 있었다.
마당에 고이 상을 내려놓은 그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를 보고 섰다.
“각시야.”
작정하고 부르는 음성이 조금 떨렸다.
무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하연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얼른 머리를 정리하고 비녀를 꽂고는 그에게로 걸음을 뗐다.
“어어, 잠깐! 나 왔어! 왔다고!”
요란한 고함에 고개를 돌리자 초 두 개를 들고 오는 양윤이 보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가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성질 급하기는.”
하연과 눈인사를 한 양윤이 무헌에게 인상을 썼다. 무헌도 지지 않고 인상을 구겼다.
“왜 이제 와?”
“곧장 뒤따라온 거야. 네 발이 좀 빨라?”
그 말에 무헌이 거 보란 듯 하연을 봤다. 발 빠르다는 자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서둘러 보따리를 뒤적인 양윤이 목안(木雁, 나무로 만든 기러기) 한 쌍을 상 위에 터억 꺼내 놓았다. 휘둥그레져 바라보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목안은 무헌이가 깎은 거예요. 저는 이런 재주 없습니다.”
무헌에게 시선을 옮기자 무헌이 쑥스러운 듯 눈을 피했다.
“원래는 더 잘 만드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아!”
손바닥을 마주친 양윤이 다시 보따리를 뒤졌다. 초 두 개를 꺼낸 그가 부리나케 부엌에서 불을 붙여 왔다.
“세상에. 이 귀한 초를 어디서 구하셨어요?”
하연의 물음에 양윤이 뻐기듯 어깨를 폈다.
“어쩌겠어요? 친우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놈이 정식으로 혼인을 한다는데, 훔쳐서라도 가져와야지요.”
“훔쳐요?”
눈이 댕그래지자 양윤이 뻘쭘하게 무헌을 보았다. 무헌이 한숨을 쉬었다.
“신소리하는 거 다 믿지 마. 그럴 배짱도 없어, 이 자식은.”
“양선이한테 비싼 물건 사 주느라 잘 알고 지내는 장사꾼이 있거든요. 거기서 빌려 왔어요.”
양윤이 웃으며 해명을 했다. 하연은 머쓱하게 웃었다. 이제는 얼추 양윤의 성격도 알 것 같았다. 달려온 여파로 여전히 헉헉거리는 그에게서 친우를 위한 마음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각시야.”
무헌의 부름에 눈을 들었다. 그가 진지한 눈을 마주쳐 왔다.
“꼭 출세해서 좋은 비녀 사 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그거 하고 있어.”
말을 끝낸 그가 씨익 웃고는 손을 모으고 바로 섰다. 올라간 입 끝이 조금 떨렸다. 지난밤 그녀의 옷고름을 풀며 긴장했던 것과는 또 다른 긴장이었다.
그 긴장이 전해져 하연의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초 두 개. 목기러기 한 쌍. 그리고 물 한 사발.
작은 초례상을 앞에 두고 무헌을 마주 보았다.
그가 손을 올려 절을 했다. 하연도 절을 했다. 양윤이 보따리에서 술병을 꺼내 술잔을 내밀었다. 차례로 합환주를 마셨다.
무헌의 입꼬리가 둥글게 솟았다. 하연도 그를 따라 웃었다.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뽀롱, 뽀롱 노래하던 새가 다시 왔다. 새 울음소리가 재밌어 하연은 그렁한 눈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환히 웃는 그녀에게로 햇살이 쏟아졌다. 무헌의 기다란 눈이 사랑스럽게 접혔다.
“자.”
무헌이 손을 내밀었다. 하연은 눈물을 훔치고 손을 뻗었다. 굳은살 박인 길고 커다란 손이 작고 여린 손을 단단히 가두었다.
행복했다.
백화 활옷에 화려한 칠보화관 썼던 혼례식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
산에 있으면 계절이 흐르는 것이 눈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소리로도, 감촉으로도, 향기로도 풍성하게 다가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봄꽃이 가득했었다. 이른 아침 불어오는 풀 내음은 누군가를 사모하는 처녀처럼 수줍고 풋풋했고, 손끝으로 매만지는 풀잎들은 갓난아이의 뺨처럼 보들보들했다.
그러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방문을 여니, 훌쩍 자란 초록 잎들이 시원스레 폐부를 파고들었다. 보이는 곳이 다 꽃밭 같던 산 아래는, 보고 있으면 눈이 말갛게 떠지는 녹음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하연은 오늘 문득, 그것이 벅차올라 한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부터 땅에 붙은 손톱만 한 잡초까지 모두.
그러게, 이것이 여름이구나. 여름이 오는 준비를 이렇게 하는구나.
별당에 틀어박혀 있을 때에는 몰랐던 것들. 댕기 머리 처녀일 때는 미처 소중히 보듬지 않았던 것들.
사람이 자라고, 짐승이 자라듯이 계절이 가면 흙도 자란다. 봄 흙은 발밑을 간지럽혔다면, 여름 흙은 거칠 것이 없는 댕기 머리 드리운 총각들처럼, 서툴지만 기운차게 바스러졌다.
그것이 좋아 한량처럼 사립문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으면, 무헌이 풀피리를 불어 주기도 하고 심심하니 입에 물라며 장에서 사 온 당과를 쥐여 주기도 했다.
“세상에. 벌써 다 만들었어?”
치마폭에 살구를 담아 들어서던 하연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요 앞 나무에 살구가 벌써 익었대서 구경 다녀온 사이, 형태 없던 평상이 벌써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응. 이제 마무리만 하면 돼.”
끌과 끌방망이를 들고 마당에서 뚝딱거리고 있던 무헌이 땀을 닦으며 일어나 툇마루에 놓인 물그릇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며칠 전, 마당에 평상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혼자 중얼거린 걸 언제 들었는지 나무를 베어 와 자투리 시간마다 집중을 하더니 그새 평상을 완성해 놓았다.
하연은 얼른 소쿠리에 살구를 담아 놓고 툇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기특하고 재주 많은 낭군의 땀을 닦아 주기 위해 소매를 들었다.
그러자 무헌이 알아서 허리를 낮춰 얼굴을 내밀었다. 이마도 꼼꼼히, 콧등도 꼼꼼히. 그러고 나니 잘생긴 얼굴이 눈을 감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 얼굴 좀 소중히 여기면 얼마나 좋아.’
가만히 보던 하연은 속으로 다짐을 했다.
‘그러니 오늘은 기어이 버릇을 고쳐 놓을 테다.’
무헌에게는 버릇이 있었다. 따로 밥상을 차리지 않고 그릇째로 음식을 먹었다.
같이 먹을 때는 상을 들고 나오는데, 일찍 일을 나가야 해서 혼자 밥을 먹을 때에는 상을 쓰질 않았다. 귀찮아서 그런다기에는 하연에게 무언가를 줄 때는 꼬박꼬박 상을 쓰는 걸로 봐서 그것도 아닌 듯했다.
그러지 말라고 말을 해도 그녀가 안 볼 때는 늘 그랬다. 단순히 상을 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충 먹고, 후딱 일을 나가고. 뭐든지 자기 건 대충 했다.
그러니 결론이 났다. 무헌은 자기 자신한테만 그러는 거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거다.
전에 이마의 상처만 해도 그랬다. 그녀의 발은 물론 손등에 작게 긁힌 상처까지도 애지중지 치료하면서, 자기는 손이 까지든 얼굴이 긁히든 상관을 안 했다.
사내 손이야 거칠 수 있다 해도 저리 고운 얼굴을 돌보지 않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부엌에 선 채로 아무렇게나 밥을 먹는 것도.
“낭군님아. 밥 먹자.”
무헌이 정리를 하는 사이 부엌에서 그릇을 들고 나왔다.
“여기. 시원하게 들이켜.”
인심 쓰듯 냉국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무헌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덜어 내온 것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어어?”
역시나. 그사이 손을 닦고 그릇을 받아 들던 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연은 짐짓 모른 척 그릇을 손에 받치고 숟가락을 놀렸다.
“왜 그래?”
눈만 비켜 그를 엿보자 무헌이 코를 찡그렸다.
“왜 상이 없어?”
“왜 상이 있어야 하는데?”
“당연히 있어야지. 각설이도 아니고, 왜 그러고 먹어?”
“낭군도 그러고 먹잖아.”
“내가 언….”
받아치려던 무헌의 말이 제풀에 꺾였다. 하연이 이렇게 나온 이상 얼굴 마주 보며 거짓말을 할 배짱은 없었다.
“그야, 나는, 혼자 먹는데 굳이….”
“그러니 나도 이렇게 먹을 테야.”
“왜.”
“편하잖아. 무겁게 상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귀찮고.”
“내가 들어 주잖아.”
하연은 아예 그릇을 입에 대고 밥을 털어 넣고는 우물거렸다.
“으음, 아냐 아냐. 귀찮게 뭐 하러. 이젠 그러지 않아도 돼.”
빵빵한 볼에서 밥풀이 이리저리 튀었다.
“낭군이 각설이처럼 구는데, 각시가 혼자 양반 행세를 하면 안 되지. 그건 내훈에도 어긋나.”
“…뭐어?”
“그래, 다음부터는 아예 부엌에서 먹고 나오자. 뭣 하러 귀찮게 여기까지 들고 나와.”
“…….”
보다 못한 무헌이 밥그릇을 채 갔다. 눈매가 이리저리 구깃거렸다. 못마땅함이 가득한 숨결이 거칠게 들락거렸다.
“밥을 귀하게 먹어야 귀한 사람이 된댔어.”
목소리를 낮게 깐 것이 어지간히 마뜩잖은 듯했다. 하연은 내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낭군이 안 귀한데, 각시 혼자 어찌 귀해져.”
“하지만 각시는….”
하연이 해 보라는 듯 훌쩍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무헌이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안 들어도 알았다.
또 저런다. 매번 나보고만 귀하단다.
“부창부수(夫唱婦隨)면 가도성의(家道成矣)라잖아.”
하연은 벽처럼 꿈쩍 않을 태세로 팔짱을 꼈다.
“낭군이 하니까 나도 따를 거야.”
“…….”
대답 없는 무헌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영민한 그가 그녀의 이 투정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연은 팔짱을 풀고 무헌의 손을 가져와 잡았다.
“알아. 나는 아주 귀한 각시야.”
“…….”
“왜냐면 나는 자기 각시가 세상에서 제일 최고인 줄 아는 낭군의 각시거든.”
나는 정작 하나도 귀하지 않았는데. 살면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고 있는 건 지금인데. 그렇게 해 주는 이가 바로 자기인데.
누빈 옷에 풀죽을 먹고 살아도, 이이가 빨아 주는 옷이 제일 좋고 이이가 해 주는 죽이 제일 맛있는데.
살면서, 내 모습 그대로를 이렇게나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이는 이이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아껴 줘. 낭군은, 그 귀한 각시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니까.”
“…….”
“내 거란 말야. 내 낭군인데 함부로 다루지 말아.”
“…….”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야.”
무헌의 눈이 옅게 흔들리며 부풀었다. 하연은 희미하게 상흔이 남은 그의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디 가서 다치지 말고.”
무헌이 순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치면 곧장 치료하고.”
“알았어.”
이럴 때는 꼭 열다섯 살 먹은 소년 같다.
“내가 해 줄게.”
이렇게 솜씨 좋고, 이렇게 바지런하고, 이렇게 사내다운 열다섯 살이 있을까마는.
“각시 뒀다 뭐 해? 그런 데다 써먹어야지.”
입술에 쪽 입맞춤을 하고는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목을 끌어 껴안았다.
언제부턴가, 이 사내의 땀 냄새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안락한 신호가 되었다. 하연은 무헌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아냐. 각시는 애먼 데 힘 낭비하지 마.”
하연의 머리를 손으로 폭 감싸 안고 있던 무헌이 갑자기 눈을 마주쳐 오며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 안 돼.”
“낭군 치료해 주는 게 무슨 힘이 든다고.”
의아함을 담아 바라보자, 무헌이 눈을 꾹 눌렀다가 뜨며 못을 박았다.
“각시는 그냥 하나만 하면 돼. 절대 다른 데 힘쓰지 마.”
“하나? 그게 뭔데?”
“그야….”
대답 대신 무헌의 입꼬리가 실룩 솟았다. 눈이 가느스름해진 게 어딘지 불길했다. 번뜩 드는 생각에 눈을 치떴다.
“설마, 또?”
아침에도 두 번이나 했다. 어젯밤에도 두 번, 아니, 세 번은 했던 거 같다. 중간에 까무룩 뻗어 버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아무튼 여러 번을 했다.
“왜. 싫어?”
무헌이 한쪽 눈을 비죽 올렸다. 하연은 주춤 뒤로 물러나 앉았다.
“너무하잖아. 적당히 해야지. 힘들지도 않아?”
“부창부수면 가도성의라며? 낭군이 하면 각시는 따른다며?”
아아, 얄밉다. 그러나 그 마음을 드러낼 틈도 없이 무헌에게 번쩍 들려 방으로 들어섰다.
첫날밤에 옷고름 푸는 것에도 손을 덜덜 떨던 사내는 더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재주가 좋은 사내는 뭐든 익히는 것이 빨랐다. 순식간에 이부자리를 깔고 그 위에 하연을 앉힌 무헌은 한 손으로는 저고리를 벗기고 다른 손으로는 치마를 풀어내더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맨가슴을 드러낸 채 하연은 손을 뒤로 해 이불을 짚고 고개를 젖혔다. 이젠 무헌이 건드리기만 해도 배꼽 아래가 알아서 뭉근해졌다.
흐트러진 속치마만 입은 채 앉은 채로 다리를 벌렸다. 가슴을 물고 빨던 무헌의 손이 아래를 더듬었다. 평상을 만드느라 부쩍 굳은살이 많아진 손이 틈을 가르고 뒤에서 앞으로 훑어 올렸다. 엉덩이가 자르르 떨리며 왈칵 뜨거운 것이 쏟아졌다.
“각시야.”
흐트러진 숨과 함께 습한 음성이 가슴에 쏟아졌다. 미끈거리는 액을 묻힌 손이 아래를 문질거렸다. 속곳은 예전에 풀어져 치맛자락에 휩쓸려 있었다.
“으음….”
하연은 대답 대신 낮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새로운 것을 들었어. 그리 해 볼래?”
무헌이 젖꼭지를 이로 잘근거리며 눈을 들었다.
“아주 까무러치는 거래.”
“으읏, 하읏!”
무엇이길래 그러냐고 물으려던 물음은 나오지 못했다. 그의 손이 음모를 헤집고 딱딱해진 돌기를 찾아 꾹 눌렀다. 생경한 쾌감에 튀어 오를 듯이 허리를 파닥거리며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여기가 맞구나.”
눈을 반짝인 무헌이 하연의 다리를 더 넓게 벌리더니 손으로 비부를 열어젖혔다.
“역시. 여기였어.”
숨어 있던 돌기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한 그가 뿌듯하게 웃었다.
“어제 이 근처를 문질렀을 때 엄청 좋아해서, 긴가민가했거든.”
“아아!”
액을 묻힌 손가락으로 돌기를 비비자 하연은 정말로 까무러칠 뻔했다. 무헌의 손 위로 흥건한 액이 쏟아졌다.
“어어, 진짜 많이 나왔다.”
무헌이 젖은 손으로 음부를 톡톡 쳤다. 물에 젖은 찰싹 소리가 음탕했다. 하연은 부끄러움에 그를 나무랐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지 좀 마….”
이렇게 환한 대낮에, 이렇게 다 보이게 다리를 열어 놓고, 그렇게 마주 앉아 눈과 손으로 농락을 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듯 아래가 제멋대로 일을 벌이지 않는가.
“왜. 내 각시 거 내가 보는데 누가 뭐라 그래. 각시도 좋으니까 이런 거잖아.”
젖은 아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무헌이 얄궂게 웃었다. 이 미끈거리는 것들이 다 제 몸에서 나온 거라 생각하니 하연은 어딘지 억울했다.
아무리 급해도 각시 엉덩이 아플까 걱정돼 이부자리는 꼭 까는 그였다. 터질 듯 못 참는 얼굴을 하고서도 정갈하게 몸은 꼭 씻고 오는 그였다. 그렇게 각시를 떠받드는 이가 말로는 꼭 저리 음탕하게 사람을 놀려 댄다.
“안 좋아. 안 할래.”
하연은 무헌을 힘껏 밀어내고 옷을 추슬렀다. 무헌이 물고 있던 엿을 뺏긴 아이처럼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어어, 이러는 게 어딨어?”
재빠르게 옷을 챙겨 입은 하연은 무헌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귀한 각시 닳아. 아껴 주세요, 낭군님.”
방문을 홱 열고 나왔다. 무헌의 둥그런 눈이 황망히 좇아왔지만, 모른 척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아….”
속곳을 두고 나왔다. 아래가 젖어 축축한 것이 이대로 있기 찝찝했다. 물을 퍼서 닦을 생각에 물독이 있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사실 그녀라고 이렇게 하다 마는 게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새로운 거라는 게 뭔지 알고 싶기도 했고.
가끔 무헌은 새로운 것을 알아 왔다며 하연을 조르곤 했다. 사내들끼리의 수다라는 것은 어찌 다 그런 것인지. 새신랑이 된 그에게 한마디씩 보태 주는 조언들은 가끔은 망측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망측함을 견디고 나면 대부분이 까무러치게 좋았던 터라, 은근히 기대도 됐다.
‘내가 이렇게 음탕한 여인이었던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하연은 무헌이 하자는 것이 궁금해졌다.
물론, 저 사내가 뭐든 잘 해내서 그러한 것이겠지만.
“어맛!”
물독을 여는데 그대로 두 발이 공중으로 들렸다. 하연은 허리에 둘린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뭐 하는 거야?”
“생각해 봤는데.”
뒤에서 안아 올린 무헌이 승자처럼 웃었다.
“나, 귀한 낭군이잖아. 귀한 낭군 여기가 터져 버리면, 각시가 슬퍼할 거잖아.”
엉덩이를 푹푹 찔러 오는 힘이 여간 단단한 게 아니었다.
“터지긴. 꽈리도 아니고, 거기가 어떻게 터진대?”
괜한 투정 한번 해 보았다.
“이렇게 자꾸 커지는데 속에 든 걸 안 빼내고 참으면, 언젠가 빵! 터지지 않겠어?”
한 손으로는 허리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무헌이 어깨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각시가 꿰매 줄 테야?”
“자꾸 느물거릴 테야?”
“그러니까 터지기 전에.”
으챠. 하연을 추켜 안은 무헌이 치마를 들추고 단박에 비부를 찾아내 만졌다.
“나 좀 살려 주라, 각시야.”
동작이 빠른 사내는 이런 때도 능력을 드러냈다. 어느새 뜨끈한 물건이 뒤에서 푹 파고들었다.
“아앗.”
몸이 들린 채로 아래가 꿰뚫렸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연의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받쳐 든 채로 무헌은 몸을 부딪쳐 왔다.
그도, 그녀도 옷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모아 잡은 치마 아래로 하얀 엉덩이와 그곳만 드러나 있었다. 필요한 부분만 드러낸 물건이 엉덩이를 가쁘게 쳐올렸다.
엉덩이가 아래로 빠져 있어 그런가, 들어오고 나가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방에, 아읏, 방에 가서, 으읏.”
이러다 누가 오면 어쩌려고. 불안한 마음에 눈은 자꾸 사립문 밖으로 향했다.
“가고, 있, 어.”
가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무헌은 허리를 추켜올릴 때마다 한 걸음씩을 옮기고 있었다.
하연은 질겁하여 손을 휘저었다. 방에 가자는 말은 이렇게 아래를 드러내고 몸을 합친 채로 마당을 가로질러 가자는 말은 아니었다.
이러다 정말로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안 돼, 나가지, 으읏, 마.”
절박한 마음에 양손으로 문틀을 잡고 버텼다. 이런 상태로 나가느니 차라리 여기가 낫다는 판단이 섰다. 그 때문에 잠시 끊고 방에 가서 다시 하자는 말은 꺼낼 생각도 못 했다.
몸속에서 이미 부풀 대로 부푼 물건이 아래를 빠듯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몇 번의 허릿짓으로도 이미 아래는 흥건하게 철벅거렸다.
다급한 사내에게는 부엌에서 방까지 가는 몇 걸음도 참기 힘들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왜? 어디 불편해? 역시 힘들지? 그래, 얼른 방에 갈게.”
아, 이 고집.
“아니라니까.”
하연은 손에 힘을 주고 그가 부엌을 나서지 못하도록 버텼다.
“하나도 안 힘들어. 여기 좋아. 여기서 해.”
“…여기가 좋다고?”
“응. 좋아.”
들리듯 안겨서 몸에 사내를 꽂은 채 할 만한 실랑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사내를 너무도 잘 아는걸.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왜, 왜 안 해?”
정신없이 허리를 튕겨야 할 그가 꼼짝을 안 했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자 어깨 너머로 알 수 없는 무헌의 눈길이 닿았다. 미심쩍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골똘한 것 같기도 했다.
하연은 허릿짓이 멈춘 이 틈을 이용해 용기를 한번 내 보기로 했다.
“혹시 잠시 빼면….”
“싫어.”
“그치? 응. 그래….”
그렇게 단호할 거면 각시 걱정을 하지나 말든가. 입을 비죽거리는 사이, 무헌이 하연의 허리를 힘줘 누른 채 느린 맷돌처럼 아래를 문질렀다.
“아아앗.”
갑작스럽게 시작된 움직임에 눈이 게슴츠레해지고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다. 느릿한 움직임이라 까슬한 사내의 음모가 비부에 그대로 비벼졌다. 품고 있는 사내의 뜨끈함과 주변에 묻은 채 식어 있던 애액들의 끈적하고도 서늘한 대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각시가 이런 곳에서 하는 걸 좋아하는지는 몰랐어.”
뭉근하게 아래를 돌리며 무헌이 머리 위에서 중얼거렸다. 나른한 듯 불규칙한 숨결은 야하고도 질척거렸다.
“하아아.”
좋아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 대신 신음이 흘렀다.
“그럼 앞으로 계속 여기서 하자.”
그의 손이 교합된 곳을 거슬러 와 수풀 안쪽을 헤집었다.
“흐으, 으읏….”
아냐, 그러지 마, 라는 말 대신 손을 뒤로 해 그의 목덜미를 감았다.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각시가 원한다면 나는 평상 위에서도 할 수 있어.”
“읏, 그게 아, 읍.”
쥐어 짜내던 항변은 그의 입술에 막혔다. 목덜미를 감아 잡아당긴 것은 입을 맞춰 달라는 것. 무헌은 하연의 조그만 혀를 감아 올리며 도톰한 입술을 물고 빨고 깨물었다.
자꾸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은 그것으로 감췄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각시. 행여 이제라도, 이 향기로운 혀로 ‘그게 아니다.’라고 바로잡을까 싶어, 무헌은 아래서 아우성치는 녀석의 고삐를 풀어 주었다.
“으읏. 읏. 읏. 읏.”
쳐올릴 때마다 그에게 물린 혀가 꼼지락거렸다. 무헌은 힘들어하는 그녀의 혀를 놓아주고 추켜 안았다. 그러자 득달같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가 겁내는 말은 아니었다.
“좀, 흣, 안으로, 으읏.”
그 정도 청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손짓에 무헌은 흔쾌히 뒷걸음질을 했다.
“빨리, 으으.”
“더 빨리하라고?”
“아니, 읏, 아니, 아우우.”
허리를 빠르게 흔들자 하연이 말도 못 내놓고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이러다, 누가, 하앗, 오면 어떡, 하냐, 고.”
아하. 그 뜻이었구나. 빨리 끝내자는 말.
하지만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나. 모든 건 이 아래 있는 녀석의 마음인걸.
“그러니, 까 빨리, 읏, 하잖, 아.”
하연은 그제야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알았다.
고집쟁이. 순 악동 같은 사내.
“아니, 그, 으읏, 아아아.”
역시나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무헌은 그 나름의 뱉은 말을 지키려는 듯 속도를 빨리했다.
시야를 잘게 쪼개는 것 같았다. 추위에 덜덜 떨 때보다 몸이 더 빨리 오르고 내렸다. 아래에서 열꽃이 피어날 것 같았다. 부싯돌처럼 불씨가 피어오르지 싶었다.
“으으, 으으, 으.”
신음이 쪼개져 나왔다. 살과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찰지게 울렸다. 지나가던 이가 들으면 절구에 떡이라도 넣고 찧는 줄 알 법했다.
손을 뻗어 벽을 짚다가 선반에 쌓아 놓은 키와 체를 건드렸다. 우당탕 떨어졌다.
“불편, 불편해.”
“어어, 미안.”
무헌의 팔을 두드리며 투정하자 그가 그대로 뒷걸음질을 쳐 부뚜막에 앉았다. 그 바람에 공중에 들려 있던 몸이 그의 위로 내려앉으며 물건이 뿌리 끝까지 안으로 들어찼다. 하연은 어깨를 떨며 짧게 진저리를 쳤다.
“하아.”
겨우 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다리가 위로 들리더니 몸이 반 바퀴를 돌았다. 무헌의 물건을 아래에 품은 채 빙그르 돌아 그를 마주했다. 적나라한 감각에 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제 편하지?”
말갛게 마주쳐 오는 눈에 할 말을 잊었다. 짓궂은 건지 순수한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게, 내 잘못이다. 하연은 짧게 탄식했다.
장소가 다른 것은 이 사내의 별스러움을 더 대담하게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부엌이 좋다는 말을 괜히 해 버린 거다.
어쩌다 이리되었나.
그저 내 낭군의 습관 하나 고치려던 것뿐이었는데.
그저 내 낭군의 고운 얼굴, 귀한 몸, 고이 챙겨 주고자 했을 뿐인데.
그런데 나는 어쩌다, 이 부엌에서, 이리도 별스럽게, 신음을 내지르고 있단 말인가.
‘내 다시는, 무엇이든, 어떠한 순간에도 꼭 생각하고 말하리라.’
하연은 절절한 후회를 하며 무헌을 바라보았다.
결코 다시는 아무 데서나 좋다고 말하지 않을 거다. 그랬다가는 또 무슨 망측한 일을 시도할지 모를 일이 아닌가.
“하아…. 하아….”
온 마음을 담아 밉게 쏘아보려 했지만, 반쯤 맥이 풀린 여인의 숨과 젖은 눈빛은 사내를 다시 처음으로 되감기에 충분할 만큼 요염했다.
무헌은 하연의 동그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땀에 젖은 그녀의 잔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잠시 쉴래, 각시야?”
그 말에 하연이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으로는 크게 위아래로 여러 번 끄덕이고 싶었지만, 기력이 다한 몸은 그저 미약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 뜻이 전달되었는지 무헌이 웃으며 눈두덩이에 쪽 입술을 붙였다. 편안히 그 입술을 받아 내던 하연은 한쪽 다리가 번쩍 들리는 것에 눈을 떴다.
그 다리를 어깨에 걸어 놓은 무헌이 아래를 느릿하게 굴렸다.
“아아….”
가위처럼 다리가 들리자 아래가 밭게 벌어지며 신음이 절로 나왔다. 웬일로 쉬어 가자 하더라니. 쉰다는 게 단지 속도를 늦춘다는 것뿐이었다.
얄미워 노려보고 싶었지만 시야가 가느스름하게 흐릿해졌다. 얄밉기에는 너무도 좋아서 얄미웠던 것도 잊었다.
“하아아….”
더운 숨이 나왔다. 이대로는 넋을 놓고 뒤로 누울 것 같아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매달리듯 허리를 뒤로 젖힌 채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보는 하연에게 무헌의 눈이 머물렀다.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음탕한 소리도 어찌 이렇게 노래하듯 지를까.
그런 각시가 나를 아껴 줘서 벅찼다. 나를 귀하다 해 줘서 참말 좋았다.
얼굴도, 마음도, 몸도, 곱지 않은 곳이 없는 내 각시.
그뿐인가. 하물며, 이 아래까지도….
“간다, 각시야.”
그 말에 하연이 게슴츠레한 눈을 밀어 떴다. 입 끝을 씨익 올린 무헌은 하연의 등허리를 받치고 몸을 잘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소리. 더 지르게 하고 싶어졌다.
“아앗. 하앗. 하읏. 으읏….”
깜짝 놀란 하연이 팔에 힘을 주었다. 신음은 앓는 소리가 되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아득해졌다. 그의 어깨에 올려진 버선발이 무력하게 출렁거렸다.
몸은 속절없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한쪽 다리가 들려 있는 탓에 벌어진 아래가 다물어질 생각을 안 했다. 쳐올리다가 한 번씩 뭉근히 비벼 올 때마다 정말로 까무러칠 것 같았다.
“하아. 으으으.”
철벅, 철벅, 널을 뛰듯 몸이 솟았다 내려왔다. 시야에 보이는 물독이며 소쿠리가 형체를 잃고 흔들렸다.
허리를 안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연은 더듬더듬 그의 어깨를 짚고 두 뺨을 감쌌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이.
속절없이 흔들리며 눈을 밀어 뜨자 그가 입을 맞춰 왔다. 몸이 흔들려 이가 부딪쳤다. 그러나 입술을 떼지 않았다.
더운 숨이 오고 갔다. 거친 숨소리도 서로 삼켰다. 온몸으로 퍼지는 전율에 아무 데로나 손을 뻗었다. 물 항아리의 입구를 붙잡자 물이 출렁출렁 원을 그렸다.
“으읍, 읍, 으!”
그의 입술을 문 채로 교성을 질렀다. 파정을 하는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고도 한 번, 두 번을 더 쳐올리느라 그의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연은 뜨끈하게 퍼지는 아래를 느끼며 그의 목을 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거꾸로….”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무헌이 말을 꺼냈다.
“각시랑 나랑, 하아…. 거꾸로 마주 본 채로 해도 재밌….”
찰싹, 무헌의 등을 때렸다. 그러나 힘없는 손은 그저 그의 등을 건드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대체 이 사내는 밖에서 뭘 먹고 다니길래 이렇게 지치지도 않을까. 어떻게 방금 끝내자마자 또 그 얘기를 하는지.
나는 이렇게 숨 쉴 기운도 없는데.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무헌이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큭큭 웃었다.
“내가 그러잔 게 아니고, 그러면 진짜 재밌다고 누가… 아앗. 알았어. 알았어.”
말할 기운은 없어서 팔뚝을 꼬집자 그가 까르르 웃었다. 꼬집어도 단단한 근육은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웃음이 나와?”
기어이 부엌에서 일을 벌여 놓고 뭘 잘했다고 웃는담. 힘없이 중얼거리자 무헌이 하연의 손을 가져와 조몰락거렸다.
“간지러우니까 그러지.”
“어디서 망측한 소리만 듣고 와서. 대체 누구야? 그 사람들 만나지 마.”
“예에, 예에.”
“다시는 어울리지도 마.”
“예, 그리합죠.”
“농치지 말고.”
힘을 쥐어짜 쏘아보자 입을 쪽 맞춰 왔다.
아, 미워. 미운데 너무 다정해서 또 미소가 지어진다.
“어! 눈썹달이네?”
흐트러진 저고리 사이로 한쪽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무헌이 저고리를 젖히고 어깨에 박힌 점을 손으로 쓸었다.
“점이 눈썹달 모양이야. 그것도 두 개나.”
그는 신기한 듯 눈을 빛냈지만 하연은 달갑지 않은 점이었다. 손을 밀어내고 얼른 저고리를 여몄다.
“없었으면 좋겠어.”
“왜?”
“왜라니. 이것 때문에 내가….”
하려던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젠 다 지난 일. 무엇보다 다시는 입에 담고도, 다시 떠올리고도 싶지 않았다.
“예쁘기만 한데.”
멈칫 무헌을 보았다. 무헌이 싱긋 웃었다.
“선녀 같고.”
점을 두고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늘 저주처럼, 족쇄처럼 따라다녔던 먹구름이 아니던가.
“…선녀?”
너무 꿈 같은 말이라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자 무헌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가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말해 줬는데, 할머니 고향에는 아주 영험한 산이 하나 있는데, 눈썹달이 뜬 밤에 그 산에 가면, 들꽃 따러 내려온 선녀를 만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대.”
“…….”
“그 선녀는 눈썹달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언덕으로 내려온대. 그러다 너무 세게 내려오면 머리를 쾅 찧어서 기억을 잃기도 한대.”
“…풋. 그게 뭐야.”
하연의 작은 웃음을 따라 무헌도 큭큭 웃었다.
“가끔은 그런 선녀들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들꽃이 되기도 한대.”
그러고는 지그시 눈을 맞춰 왔다.
“인생은 들꽃 따러 가는 거라고 그랬어. 들꽃 따러 언덕을 올라가는 거라고.”
“…….”
“하늘이 허락하면, 예쁜 꽃 한 송이를 품고 언덕을 내려올 수 있는 거래.”
무헌이 둥근 하연의 눈썹을 엄지로 가만히 문질렀다.
“나한테는 각시가 꼭 그래.”
“…….”
“각시는 내가 품고 온 꽃이야.”
그가 기다란 눈을 가만히 접었다.
“머리를 꽝 부딪친 선녀고.”
“…….”
무헌은 미소했지만, 하연은 어쩐지 울음이 날 것 같았다.
그러게,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이었으면 좋겠다. 달을 타고 내려오다 기억을 잃은 선녀였으면 좋겠다.
그날 그 밤, 이 사내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휘영청 밝은 달 아래 길 잃고 헤매던 선녀였으면.
이 사내의 각시가 되기로 한 그날처럼,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꽃 같은 선녀였으면.
그렇게나 고귀한 사람이어서, 이 맑고 바른 사내에게 부끄럼 없는 아내였으면, 참말로 좋겠다.
“꽃이 될게.”
하연이 나지막이 미소했다.
“제일로 어여쁜 꽃이 될게.”
두 팔로 무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뭐라 할지는 이미 알았다.
“각시는 이미 꽃이야.”
후훗. 그래, 안 들어도 알 수 있는 말.
“으응.”
그래, 그래.
있잖아, 낭군님아?
낭군도 내게는,
꽃이야.
“…무헌아.”
“……!”
공기가 일시에 떠올랐다. 양윤의 목소리에 놀란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안에 들어 있던 무헌의 것이 쑥 빠지며 아래가 허전해졌지만, 그걸 느낄 겨를은 없었다.
여긴 부엌이었다.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안이 훤히 보이는 부엌.
“무헌아, 집에 있어?”
발소리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허둥대는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연은 급히 저고리를 추슬렀고 무헌은 그녀의 치마를 훑어 내렸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머리를 매만지던 하연이 커진 눈으로 무헌의 허리께를 가리켰다. 무헌의 바지 틈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양윤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그러더니 흠칫 고개를 물렸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어? 내, 내가 뭘?”
솥뚜껑을 방패처럼 내세운 무헌이 큰소리를 쳤다.
“너야말로 갑자기 여긴 왜 온 건데?”
양윤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긴. 중턱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덫 놓은 거 살피러 가자며. 시간이 지나도 안 오길래, 집에 와 봤지.”
“아아. 아, 그랬지. 그랬구나. 그랬어.”
“어어? 여기 계셨어요?”
그제야 하연을 발견한 양윤이 환히 웃으며 인사를 했다. 상체를 숙여 물 항아리 속에 얼굴을 넣고 있던 하연이 비죽 몸을 세웠다. 아이들이 왜 몸을 숨길 때 얼굴만 숨기는지 그 심정을 제대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물, 푸려고요.”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해 놓고, 나름대로 당당하게 바가지도 들어 보였다.
왜일까, 멀뚱히 서 있던 양윤이 하연과 무헌을 번갈아 보았다. 눈길이 한 번, 두 번, 세 번을 오갔다.
“…….”
“…….”
하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헌은 솥뚜껑으로 앞을 가린 채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누구도 말을 않는 시간이 차곡차곡 흐르던 때였다.
“안 가?”
양윤이 도통 이유를 모르겠는 얼굴로 붙박인 듯 서 있는 무헌을 재촉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덫 살피러 안 갈 거야?”
“아아. 봐야지. 그래, 봐야지!”
덥석 대답한 무헌이 솥뚜껑을 든 채로 부엌을 나갔다.
“그건 왜 들고 나와?”
“뒷간 가려고.”
“뒷간에 그걸 왜 가지고 가?”
“나는 가지고 가.”
“뭐어?”
뜨악해 바라봤지만, 무헌은 아주 당당히 솥뚜껑을 들고 뒷간으로 향했다.
차라리 방으로 가지.
그 생각을 하며 하연은 양윤을 향해 뻣뻣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