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五章. 내 낭군의 조삼모사 (6/15)

五章. 내 낭군의 조삼모사

툭. 나뭇더미를 내려놓은 무헌은 땀을 닦았다.

며칠째 창창한 하늘 탓에 오늘은 햇빛이 유독 드셌다. 이젠 제법 날씨가 더워져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와 등에 땀이 흘렀다.

“나 줄 거야?”

찬물 한 사발을 건네던 양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헌은 물을 받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없길래.”

“없어?”

헛간 쪽을 바라본 양윤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보따리를 내밀었다.

“뭐야?”

“살구. 이거 주려고 불렀지. 각시 갖다 줘. 아주 맛있어.”

무헌이 씩 웃으며 받아 들었다. 양윤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저 각시라면 좋아 죽지. 어유, 팔푼이.”

“나도 줄 거 있다.”

품을 뒤적거린 무헌이 양윤의 눈앞에 은장도를 내밀었다. 양윤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이걸 왜 날 줘?”

“너 말고 양선이. 전에 이거 달라고 한참 떼를 썼잖아.”

“울고불고 난리가 나긴 했었지.”

이것뿐인가. 하연의 비녀와 당혜도 제 것이라며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굴렀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절대 안 된다더니.”

양윤의 손에 은장도를 쥐여 준 무헌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앞섶을 흔들어 더위를 식히는 무헌의 입가가 빙긋 솟았다.

“응. 이젠 갖고 있으면 안 돼.”

“…왜?”

“진짜 아내가 생겼으니까.”

양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얼굴로 빤히 무헌을 보았다. 무언가 승자처럼 여유가 흘러넘치는 무헌이 이상하게 얄미웠다.

“자네 와, 왔는가.”

머리 위에서 불쑥 소리가 내려왔다. 방문을 열고 나온 양선이 무헌을 향해 도도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동안 겨, 격조했군. 오, 오랜만일세.”

무헌은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 오랜만이다.”

“자, 장가갔다는 얘기는 들어서 아, 알고 있네. 바, 밤일에 정진하느라 자주 모, 못 들른다고 오, 오라버니가 말씀해 주셨지. 그, 그러고 보니 전보다 마, 많이 야위었네.”

무헌은 기막혀 양윤을 보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웃음을 참던 양윤이 얼른 말을 돌렸다.

“양선아, 이것 봐. 무헌 오라비가 선물 가져왔다.”

은장도를 본 양선의 눈이 크게 부풀었다. 전에 없는 환희가 얼굴로 번졌다.

“세상에나! 이, 이것은 내 으, 은장도군!”

은장도를 품에 안은 양선이 꿈을 꾸듯 말했다.

“이, 이제야말로 지, 진정한 사대부 집 규수의 며, 면모를 갖추었군.”

“…….”

“내 이 으, 은혜는 죽을 때까지 이, 잊지 않겠네. 어, 어딜 가든 항상 품에 간직하고 다, 다닐 것이야.”

“그리 좋아?”

“오라버니. 나, 나는 오늘 저녁을 먹지 않겠어요. 왜냐면 머, 먹지 않아도 배가 부, 부르거든요.”

감동에 벅차 무헌의 어깨를 토닥인 양선이 은장도를 안고 방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저리 좋아하는 것을 보니, 뜬금없게도 하연이 생각났다. 얼른 살구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가려고?”

“응.”

지게를 둘러메고 나서자 양윤이 따라붙었다.

“각시 보고 싶어서 어떻게 일을 나와? 아예 지게에 각시를 지고 다니지 그래?”

빈정거리는 말에도 무헌의 광대는 볼록 솟았다. 양윤의 어깨에 손을 얹은 무헌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뭐가?”

“각시를 지고 다니는 거.”

뻔뻔한 대답에 양윤은 혀를 내둘렀다. 무헌이 키득거리며 앞서갔다. 양윤은 잠시 무헌의 등을 바라보다가 뒤따라 걸었다.

“돈 좀 내어 줄게.”

“갑자기 무슨 돈?”

“저 은장도. 딱 봐도 엄청 비싼 건데, 어떻게 그냥 받아. 장에 내다 팔면 값을 꽤 쳐줄 텐데.”

“됐어. 줄 만하니까 준 거야. 파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아서.”

“그러니까 준다고. 각시랑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예쁜 옷도 사 주고. 그러고도 남으면….”

눈치를 보며 입술을 축인 양윤이 흘리듯 덧붙였다.

“과거 보러 가는 데 쓰든가.”

무헌이 걸음을 세웠다. 뒤따르던 양윤이 무헌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또 그 소리야?”

쏘아붙이자 양윤이 코를 문지르며 답했다.

“이젠 괜찮아질 때도 됐잖아.”

슬쩍 시선을 피한 그가 기어이 덧붙였다.

“할머니 돌아가신 게 어떻게 그 탓이야?”

“너어.”

무헌의 눈이 매섭게 양윤을 찔렀다. 양윤은 이번만은 단단히 결심한 듯 무헌을 똑바로 보고 섰다.

“그래, 네가 하루 일찍 왔다고 쳐. 그런다고 병환이 나아지셨겠어? 의원도 못 고치는 거라 그랬잖아.”

“그만해라, 구양윤.”

“그만은 개뿔. 그해 향시가 그리 먼 데서 열린 걸 어떡해. 오래 걸릴 줄 알고 간 거잖아. 할머니 편찮으신 거 알고도 간 거잖아. 할머니 소원이라 그렇게 한 거잖아.”

“그만하랬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먼 길 갔다 돌아오는 날짜를 어느 누가 정확히 지켜? 네 발이 아무리 빨라도 하루 정도는 늦을 수 있는 거잖아.”

무헌의 눈이 그렁해졌다. 그걸 보니 또 마음이 아파 왔다. 양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다. 무헌이 할머니를 잃고 얼마나 상심했는지.

당시 무헌은 자신을 책망하며 자주 중얼거렸었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그 일만 없었어도.”

“그래서 길을 잘못 들어 헤매지만 않았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는지는 느껴졌다.

6년 전, 무헌이 집에 당도했을 때 할머니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 줌의 숨을 붙들고 손자를 기다렸다. 무헌이 달려와 손을 잡자마자 하루 내내 뜨지 못했던 눈을 떴다. 그러나 손자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할머니. 나 무헌이! 무헌이라고! 무헌이 왔다고, 할머니!”

재차 할머니를 부르자 거칠한 가죽만 남은 손이 미약하게 무헌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살면서, 무헌이 그날처럼 서럽게 운 것은 처음 보았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양윤도 주저앉아 따라 울었었다.

친할머니가 아닌 걸 안다. 찢어지게 가난한 이름뿐인 양반집에 시집온 무헌의 어머니의 유모였다. 그러나 무헌에게 할머니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부모였다. 울타리였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버지보다, 그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보다, 더 가깝고, 더 살가운 혈육이었다.

무헌은 그날 이후 과거를 보지 않았다. 출세해서 기쁘게 해 줄 사람이 더는 곁에 없다며 다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돈 몇 푼에 혹해서 낯선 이를 따라가는 바람에 할머니 곁을 지키지 못했다며 늘 죄스러워했다.

물어도 말해 주지 않는 일.

하지만 가슴에 바위 한 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살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각시가 생겼잖아.”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무헌이 눈을 마주쳐 왔다.

“장가도 갔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

“혼자 몸일 때랑은 다르잖아. 이제 가장인데.”

무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때문에 아이가 생기면 어찌 기를 거냐 물으려던 말은 그만두었다.

어련히 잘 해낼까. 과거 따위 보지 않아도 무헌은 알아서 잘 살 거란 것쯤은 안다. 출세하지 않아도 제 식솔들 밥 굶기지 않고 잘 챙길 위인이란 것도 안다.

그런데도 일부러 몰아붙인 까닭은 아까워서. 무헌의 재주가 너무 아까워서.

그리고 또….

“잘해 줄 수 있을 때 최고로 잘해 줘야 후회가 없는 거야. 할 수 있을 때 뭐든 하는 거라고. 내일 어떻게 될 줄 알고. 모레는 또 어떻게 될 줄 알고….”

이미 저만큼이나 걸어가는 무헌은 듣지 못할 중얼거림이었다.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양윤은 그렁해진 눈으로 양선의 방을 돌아보았다.

“사람이 꼭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게 아니란 말이지….”

주책없이 꿈틀거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크게 숨을 들이켠 그가 부엌으로 향했다.

“양선아, 밥 먹자!”

눈물을 닦은 그의 입가엔 어느새 여느 때와 같은 미소가 물려 있었다.

***

곱게 실매듭을 지은 하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저고리를 들어 펼쳤다. 무헌의 저고리 팔꿈치가 해졌길래 천을 덧대어 꿰매다가 그 자리에 수를 놓아 보았는데, 제법 그럴싸했다.

낡은 옷을 기운 것이 아니라 거북을 수놓은 것처럼 변신했다. 겨우 한가지 색실로 꾸민 것치고는 자신이 봐도 훌륭했다. 뿌듯함에 입꼬리가 휘었다. 저녁 내내 공들인 보람이 있었다.

“이거 봐. 좋지?”

무헌이 들어오자마자 자랑을 했다. 일을 마치고 막 씻고 들어온 그는 웃통을 벗은 채였다. 저고리를 받아 든 무헌은 믿기지 않는 눈을 했다.

“이걸 각시가 한 거야?”

“평생 그 짓만 했는데, 뭐. 색실만 더 있으면 그보다 더한 것도 잘해.”

반쯤은 자랑을, 반쯤은 자조를 섞어 답을 했다. 그런 하연을 말끄러미 보던 무헌이 부러 밝게 말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내 각시를 두고 하는 말이었네.”

“뭐어?”

발끈했지만 사실은 사실인지라 더는 따지지 못했다. 무헌이 벙싯거리며 재빠르게 저고리에 팔을 넣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이 색실은 어디서 난 건데?”

“덕삼 씨 할머니께서 주셨어. 오늘 다녀가셨거든.”

“오늘?”

“밑에 집 방울네도 함께. 개떡 만들었다고 나눠 주고 가셨어.”

“이젠 제법 친구가 생겼네?”

“마을 분들이 모두 다정하고 좋으니 그러지.”

무헌의 혼례 소식을 듣고는 없는 살림에도 보탤 것 하나씩을 들고 모여들어 잔치를 열어 주었던 이들이었다. 수가 많지는 않아도 덕분에 가족처럼 끈끈한 이들이란 걸 날이 지날수록 하연도 느껴 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계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노마님이라도 이 깊은 산골까지 사람들을 보낼 리도 없을 테고.

“어때?”

연신 벙글거리던 무헌이 옷고름을 매고 보란 듯이 바로 섰다. 올려다보는 하연의 눈이 더없이 뿌듯했다.

“누구 낭군인지 자알 생겼다.”

“그런데, 덕삼이 할머니는 이런 실이 어디서 나셨대?”

무헌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눈은 팔꿈치의 거북에서 떼어지질 않았다.

그리도 좋은가?

하연은 의욕이 솟아 명랑하게 답했다.

“다음에 꽃과 나비를 놓아 줄게. 제일 잘하는 거거든.”

“실이 또 있어?”

“구하면 되지.”

“어떻게?”

“있지….”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무헌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덕삼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이걸로 돈을 벌 수 있대.”

“돈을 벌다니?”

“댕기에 수를 잘 놓아 주면 값을 크게 쳐준대. 내 솜씨를 보더니 해 보지 않겠냐고. 방울네도 딱이라며 박수를 치더라고. 나처럼 수 잘 놓는 이를 못 봤다나? 그래서 한다고 했어. 수를 놓고 남는 실은 얼마든지 가져도 된다니, 이득이지 뭐야.”

신이 나서 말하느라 무헌의 얼굴이 점점 굳는 건 보지 못했다. 말을 끝내자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하연은 조심스레 무헌의 안색을 살폈다.

“어찌 그래?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어?”

“…….”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무헌의 미간이 자못 구겨졌다. 무헌은 입을 꾹 다문 채 일렁거리는 호롱불을 보았다. 얼마 전 양윤이 가져다 놓고 간 호롱불이었다.

그때 하연은 달빛이 밝아 켤 일이 없을 거라 말하면서도, 연신 옷소매로 호롱을 닦았었다.

골똘하던 그의 눈이 다시 하연에게 향했다. 해가 뜨나 달이 뜨나, 어두우나 밝으나 한결같이 곱고 고아야 할 각시의 청아한 눈이 그의 기척을 살피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무헌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짐짓 눈을 구겼다.

“꽃이 뭐야? 사내 옷에.”

“…….”

“이 늠름한 낭군을 천하의 놀림거리로 만들 거야?”

고생스러우니 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지만 꺼내지 못했다.

“하려면 호랑이 정도는 되어야 면이 서지.”

돈은 내가 더 열심히 벌어 올 테니, 각시는 남의 일 해 주고 품삯 받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암튼 수놓다가 손가락 찔리기만 해.”

그러나 저리 반짝이는 눈은 또 처음이어서, 색실을 말할 때 하연의 얼굴이 행복해 보여서, 행여 좋아하는 것을 뺏는가 싶어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무헌은 괜스레 인상을 쓰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랬다가는 꽁꽁 묶어 방에 가두어 둘 테니까.”

“치이.”

하연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 안다는 얼굴을 했다.

“손가락 찔린 걸로는 의원한테 안 가네. 돈 들일 일 없으니 걱정 마시지요, 낭군님아.”

무헌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찌른 하연이 바늘 쌈지를 정리했다.

“당장 내일 덕삼 씨네 가서 일감부터 받아 와야겠다.”

하연이 신이 나서 말했다. 쭈그리고 앉아 꼼질거리는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무헌의 입가가 문득 빙그르 솟았다.

“내일은 어려울 거 같은데?”

무헌이 하연의 동그란 엉덩이를 가볍게 찰싹 쳤다.

“어맛!”

외마디를 내지른 하연이 뚱그런 눈으로 돌아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무헌이 하연의 허리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당장 내일 못 일어날 수도 있거든.”

“무슨 소, 어흡.”

하연의 턱을 돌려 입을 맞추며 가슴을 움켜쥐자, 하연이 무헌의 팔뚝을 찰싹찰싹 쳤다.

“부우. 부부터 끄어.”

무헌의 입 안에 갇힌 하연의 말이 웅얼거리며 나왔다. 용케 알아들은 무헌은 버둥거리는 그녀를 안은 채 호롱불을 껐다.

겹쳐 앉은 채로 저고리를 열고 치마 끝을 풀자 환한 달 같은 하연의 젖가슴이 방 안을 밝혔다. 무헌은 한쪽 손에 가슴을 그득 담은 채 서둘러 그녀의 몸에서 치마를 걷어 냈다.

다급하게 파고드는 손길에 입술을 뗀 하연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하아. 몇 번이나 하려고 그리 겁을 줘?”

“많이.”

“지난밤에 세 번, 아침에도 두 번이나 했잖아. 걷는 것도 힘들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무헌의 눈이 짓궂게 휘었다.

“그것보다 더 많이.”

“…….”

“이를테면… 조삼모사(朝三暮四)?”

“뭐어?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잖아.”

질겁하는 하연의 턱을 잡아 돌려 다시 입 안을 파고들었다. 단단히 일어선 물건이 폭신한 엉덩이에 비벼지자 호랑이 같은 힘이 났다.

그래, 까짓거 일 같은 거 못 하게 만들면 되지. 하루 종일 잠만 자게 만들면 되지. 바늘귀에 실을 꿸 힘도 없게 만들면 되지.

조삼모사래 봤자, 겨우 일곱 번. 조사모사는 못 할까. 아니, 조오모오도 가능하다.

“하으, 으읏!”

다리를 벌리고 젖은 곳을 손바닥으로 비비자 하연이 신음을 내었다.

세상 어느 곡조보다 듣기 좋은 소리.

무헌은 수풀을 헤치고 오뚝 솟은 곳을 손으로 굴렸다. 하연이 허리를 뒤틀었다.

“아흐, 하아아.”

무헌은 노래를 감상하듯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그래, 하려고만 들면 하루 종일인들 못 할까.

***

갑자기 하늘이 쪼개질 듯 울렸다. 뒤이은 세찬 빗소리에 하연은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아침만 해도 해가 쨍쨍하더니 갑자기 굵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해가 비구름에 가려져 저녁처럼 어두웠다.

입을 벌리고 멍하니 보기를 잠시, 하연은 생각 끝에 툇마루로 나앉았다.

‘오늘은 어딜 간다 했더라? 덫을 살핀 후, 덕삼 씨네 밭에 들렀다가, 버섯을 캐고 송진을 모은다 했던가?’

차분히 무헌의 일과를 되새겨 보던 하연은 근심스레 콧등을 구겼다.

“이래서야 일이고 뭐고 내 낭군 홀딱 젖겠네.”

냉큼 헛간으로 가 물건들을 뒤졌다.

지금쯤이면 딱 선녀폭포 근처에 있을 거라 가늠이 됐다. 그곳 버섯이 제일 좋다고 했던 무헌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선녀폭포까지 가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아 해 볼 만했다.

“분명히 보았는데….”

며칠 전 무헌이 볏짚을 엮어 우장(雨裝)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고운 볏짚을 새로 엮어 가볍고 촘촘한 접사리는 그녀 것이고, 헛간에 있는 커다란 도롱이는 그의 것이라고 직접 보여 주기까지 했었다.

“여기 있다!”

접사리를 둘러 입고, 삿갓에 도롱이를 챙겨 드는데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마당의 흙이 튀어 오르고 세상이 온통 물줄기로 하얬다.

문득, 밖을 나서기가 두려워졌다. 산길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찾아 나섰다가 못 만나면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노마님의 종복들과 만나기라도 한다면…. 이 산골까지 올 리는 없겠지만, 또 모르지 않는가. 선녀폭포는 무헌의 집이 있는 이곳과 또 다르니.

‘튼튼한 사내이니, 괜찮을 게야….’

마음속으로 변명을 지어 불안을 달래 보았다. 그러면서도 물러서진 못하고 두 발은 헛간과 마당의 경계에 선 채로 동동 굴렀다.

“금방 그치면 좋으련만….”

그러나 올려다본 하늘은 눈길 닿는 곳이 모두 시커먼 먹구름뿐이었다. 산과 산에 검은 장막을 쳐 놓은 듯 이대로 밤이라 불러도 좋을 듯했다. 저 구름이 다 물러설 때까지 이 비는 그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착잡한 두려움에 한숨만 뿜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쌓아 놓은 짚섶 위에 풀썩 앉는데, 엉덩이 아래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손을 넣어서 뒤적거릴 때만 해도 하늘가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아직 완성이 안 된 작은 미투리였다. 그것도 삼 껍질을 비단실처럼 다듬어 아주 공들여 총을 엮은.

누구 것인지는 크기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신의 폭이 좁고 길이가 아담한 것이 딱 그녀 것이다.

“세상에. 탑골치가 울고 가겠네.”

이걸 만드느라 새벽이면 헛간에서 꼼짝을 안 했구나. 뭘 하느냐 물어도 그저 웃기만 하고.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뜨끈하게 일렁거렸다. 어찌 모를까, 꽃신 사 주고픈 마음이 이 정성 들인 미투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훌쩍, 코를 들이마신 하연은 가슴에 품었던 미투리를 다시 원래 자리에 숨겨 놓고 일어섰다. 비가 하얗게 쏟아져 앞이 보이든 말든, 내 낭군 찾아가 도롱이를 입혀 놓아야겠다는 비장한 결심이 섰다.

***

우르르르 쾅! 하늘이 번쩍하더니 산을 깨부술 듯한 천둥이 울렸다.

“난감하네….”

비죽이 튀어나온 바위를 지붕 삼아 비를 피하고 있던 양윤은 한숨을 내쉬며 무헌을 돌아보았다. 무헌도 눈썹을 구긴 채 시커먼 하늘에 눈을 박고 있는 중이었다.

“덕삼 할머니도 틀릴 때가 있네.”

덕삼 할머니는 날씨를 맞히는 신통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비가 올지 안 올지에 관해서는 백발백중이라서, 오늘도 찰떡같이 믿고 나온 참이었다.

“지게 내려놓을 때만 해도 쨍쨍하지 않았어?”

양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얼굴로 젖어 드는 발끝을 오므렸다.

“놀랐겠다, 우리 양선이….”

“그러게…. 우리 각시도….”

저마다 집에 있는 사람 걱정에 빗줄기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무헌이 축축하게 젖은 지게를 짊어졌다. 양윤이 뜨악하게 물었다.

“가려고?”

“금방 그칠 비가 아니야. 이대로 날이 저물면 더 골치 아파.”

“그래도 이 비에 가겠다고?”

“가겠다고, 가 아니라 가자고. 너도 얼른.”

양윤은 무헌의 젖은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있어 보자. 빗줄기라도 좀 가늘어지면 그때 가든가.”

무헌이 곤란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구름이랑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쏘아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물이 불어 아래로 쏟아지면 너 같은 약골은 미끄러워 걷지도 못해. 비척거리다가 쓸려 가. 계곡물에 떠내려가서 귀찮게 찾으러 다니게 하지 말고, 가자고 할 때 가.”

무헌의 겁박이 통했는지 양윤은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지게를 졌다.

“여기서 계곡이 어딘데, 거기까지 구르지 않는 이상 빠질 일이 뭐라고….”

“정신 똑바로 차리면 구를 일은 없지.”

“떠내려가면, 건져는 줄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란 의미인데, 구를 생각부터 해?”

양윤이 껄껄 웃었다. 무헌이 눈을 부라리며 불퉁하게 말했다.

“건져만 줄 거야. 그러고 나서 멍석을 말아 두드려 팰 테니, 알아서 해.”

걱정을 하면서도 꼭 저렇게 심통맞은 척하더라.

“역시 넌 내 친우야. 내 하나뿐인 지기야.”

“안 건져 주면, 평생 그 뒤끝을 어찌 감당하라고?”

실실 웃음을 흘린 양윤이 벌써 빗속으로 뛰어든 무헌의 뒤를 따랐다.

“솔직히 말해 봐. 각시 걱정돼서 가는 거지?”

“…….”

“물이 붇네, 계곡이 어쩌네 하는 거 다 핑계지?”

“…….”

“각시가 무슨 애도 아니고, 설마 비 좀 온다고 놀랄까.”

얼굴로 쏟아지는 비를 손으로 쓸면서도 양윤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장가, 안 갔으면 억울해서 어쩔 뻔했어? 그러니까 그 귀한 각시 위해서라도 과거를 좀 보란 말이야.”

또 저 얘기. 무헌은 걸음을 빨리했다. 누군들 각시 귀한 거 몰라 이러나?

하지만 우습게도 겁이 났다. 과거 보는 것이 아니라 집을 떠나 먼 길에 오르는 것이. 또 누군가에게 훌쩍 끌려갈 것만 같아서.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바보 같다 비웃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도 이게 얼마나 우스운 걱정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그때의 그 어리고 약한 소년이 아닌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내 각시는 어찌하라고. 오래전 그 아기씨가 날 살려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할머니 장례도 치르지 못했을 것을.

그날 이후로 살면서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돈 몇 푼 탐을 내다가 목숨을 내놓을 뻔하지 않았던가. 할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할 뻔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무서운 것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괜한 욕심 부리다가 또 무슨 변을 당할 줄 알고. 나는 그냥 각시랑 이렇게 오순도순 살 테다.

“…….”

“그 장가, 우리 남매 덕에 간 거는 알아? 내 은혜라고.”

양윤의 타박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무헌은 듣기 싫어 좀 더 보폭을 크게 했다.

“엄밀히 말하면 양선이가 중신을 선 거라고. 어어, 같이 가! 아오, 이 비.”

손으로 다시 얼굴을 쓸어 낸 양윤은 멀어지는 무헌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렸다. 비에 젖은 잡초와 흙들이 미끈거려 발에 힘을 줘야 했다.

“그러니 이 형님 말씀 좀 들어라. 너는 내 가족이다. 양선이랑 다를 바 없는 가족이라고.”

사내가 사내에게 진심을 꺼내 놓는 건 낯간지럽고도 어려운 일이라, 양윤은 발끝만 보았다.

“그만큼 널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좀 들으란 말이다. 내 말 잘 들어서 각시도 얻었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내 말 듣고 이번 무과… 어어? 으어억!”

땅을 디딘 발이 허공으로 미끄러지고 몸이 기운 건 순식간이었다. 비탈을 따라 데굴데굴 구를 때마다 시야가 어지럽게 돌았다. 어딘가에 엉덩이와 등이 부딪히고 눈앞이 따가웠다. 나둥그러진 지게를 눈에 담는 순간, 갑자기 모든 소리가 먹먹해지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윤아! 양윤아! 구양윤!”

허둥거리며 물 밖으로 고개가 삐져나왔을 때, 그를 따라오며 고함을 치는 무헌이 보였다. 무헌이 내민 버팀목을 잡아 보려 했으나, 거센 물살에 떠밀려 가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계곡물이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와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은 바위와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양윤은 속절없이 떠밀려 내려갔다.

“양윤아아!”

그 발 빠르다는 무헌도 물살을 따라잡지 못했다. 눈을 부릅뜨고 따라오는 친우의 모습이 힘겹게 뜬 눈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아아. 이렇게 죽는 건가. 그건 싫은데….

이무헌. 건져 준댔잖아. 그러니 건져만 줘. 멍석을 말아 패도 되니까… 그러니까 건져만 주라….

“어우, 이 웬수!”

갑자기 뒷덜미가 잡히고 몸이 쑥 들렸다. 숨 쉴 때마다 들이치는 물을 먹었던 숨통이 캑캑거리며 뒤늦게 트였다.

“그러게 빗길 걸으며 웬 말이 그리 많아? 걷는 데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살아서 말 못 하고 죽은 귀신이 붙은 거야, 뭐야?”

널브러져 눈을 뜨자 익숙한 가느다란 눈이 매섭게 올라가 온갖 구박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헌아!”

와락 무헌의 목을 껴안았다.

“건져 줬구나! 살려 줬구나!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어….”

“어우우. 왜 이래, 징그럽게. 이거 놔.”

“나는 우리 양선이 두고 이렇게 가는 줄 알았다. 꼬박 죽는 줄 알았어…. 흐윽….”

“…뭐야, 우는 거야?”

“응. 우는 거야…. 흑흑….”

건져 놓자마자 눈을 까 보고 안색을 확인하고 손과 발을 살피느라 분주하던 무헌의 손길이 잠시 멎었다. 무슨 타박을 해도 받아 낼 참이었는데, 그의 손이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차가운 등에 차가운 손이 닿았는데도 따뜻했다. 손길이 한 번씩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벌렁거리던 양윤의 심장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어우, 똥 몸뚱이.”

한참 만에 무헌이 투덜거리며 양윤을 떼어 냈다.

“몸치 옮을까 무서우니 저리 떨어져.”

“안 옮아. 옮을 거면 벌써 옮았지.”

양윤은 다시 무헌의 품을 찾아들었다.

“아, 진짜, 저리 안 가? 징그럽다고!”

무헌이 질겁을 했다.

“장가를 가. 애먼 사내 끌어안지 말고!”

욕을 먹으면서도 양윤의 입은 웃고 있었다.

***

아아, 춥다….

굵은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은 무헌은 긴 한숨을 내쉬며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산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빗물은 비탈을 쓸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뒤라 흠씬 젖은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야 어떻게든 버텨 보겠지만, 양윤이 문제였다.

이 부실한 몸뚱이, 이러다 드러눕지 싶은데….

놀란 몸 쉬게 해 줘야 할 거 같아 급한 대로 비를 피해 앉아 있기는 했지만, 이러고 있자니 추위가 몰려왔다.

“언제더라, 누가 여름에 산에서 비를 만나 얼어 죽었다길래 농치지 말라고 했더니, 농이 아니었던가 보다.”

바짝 붙어 쭈그려 앉은 양윤이 비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히죽 웃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야!”

꽥 고함을 치자 양윤은 아예 무헌에게 팔을 둘렀다.

“추워 그런다. 임자 있는 사내한테 딴 맘 품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나으리.”

“농이 나오는 거 보니 쉴 필요 없겠네.”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양윤의 팔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릴 때 함께 발가벗고 목욕도 한 불알친구인데, 이 정도는 꾹 참아 줄 수 있었다.

“그래도 양선이는 비 오면 나돌아 다닐 생각을 안 하니 다행이다.”

그 말에 무헌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각시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몸이 식어 그런가, 말이 덜덜거리며 나왔다. 무헌은 몸 위로 팔짱을 끼고 목을 파묻었다.

하연이 보고 싶었다. 춥고, 힘들고, 배고픈데도, 떠오르는 건 희한하게 각시 얼굴뿐이었다.

‘이런 날은 장떡 한 장 부쳐서 따뜻한 방구들에 누워 각시랑 나눠 먹으면 딱인데….’

희한하다.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묘하게 위로가 됐다. 뜨끈하게 달군 돌덩이를 품고 있는 기분. 각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온기가 돌았다.

뭐든지 해 주면 맛있다고 그릇을 싹싹 비우는 그녀가 좋았다.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씹고 삼키는 것을 지켜보느라 그의 입에 밥숟가락 넣는 것도 잊은 적이 있었다.

‘제시간에 안 돌아가면 걱정할 텐데, 어떡하지…?’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걱정하며, 툇마루에 발끝 올리고 서서 이제나저제나 내다보고 있겠지.

가끔은 그를 기다리는 각시의 모습이 좋아서 몸을 숨기고 한참을 지켜보기도 했었다. 그가 보일까, 고개를 빼고 툇마루 위에서 깡충거리는 그 모습에 홀로 웃음 짓기도 했었다.

그러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어찌나 환히 웃는지, 십 리 밖에서도 알아볼 만큼 빛이 나서, 아무리 피곤해도 다시 아침이 된 것처럼 기운이 났다.

그러게, 각시가 보고 싶다. 나를 기다려 주는 각시가. 웃으며 배웅하고 웃으며 맞아 주는 각시가. 군불 때는 거 구경하다가 코에 검불을 묻히고도 좋다고 까르르 웃는 내 각시. 그런 각시 옆에서 몸을 녹이고 싶다….

“무헌아.”

양윤이 덜덜 이를 부딪쳤다.

“고맙다.”

뜬금없다 싶어서 고개를 빼 바라보자 양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이 목숨값은 죽어서도 잊지 않으마.”

“…….”

청승도 때와 장소가 있는데, 하필 이 기분에 이 얼굴로 그런 얘기라니.

있던 기운도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다 큰 사내 둘이 이렇게 홀딱 젖어 쭈그리고 붙어 앉아 있으니 꼭 세상이 끝난 것처럼 처량했다.

“죽어서는 다 잊어도 되니, 살아서 꼭 갚아라.”

괜히 구박 한번 하고 나뭇가지에서 툭툭 떨어지는 빗물을 쳐 냈다. 이 부실한 녀석을 지게에라도 지고 가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저만치서 무언가가 꼼지락거리며 다가왔다.

뭐지? 짐승인가?

찬찬히 버팀목을 쥐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시야를 넘겨보느라 가늘게 떴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고, 입이 툭 열렸다.

그사이 죽어 선계에 온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저 부실한 구양윤을 구하다가 같이 휩쓸려 명을 다한 게 아니라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헛것이 아닌 이상, 저 여인은 분명….

“낭군님아!”

접사리에 고깔을 뒤집어쓴 자그마한 여인에게서 익숙한 음성이 나왔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끈해지는 고운 목소리.

이 나라에 그를 저리 부를 이는 단 한 사람뿐이다. 무헌은 쏟아지는 비도 잊고 그 앞으로 첨벙첨벙 달려가 섰다.

“각시?”

“세상에, 진짜 만났네!”

꽃처럼 붉은 자그마한 입술이 둥글게 솟았다. 하얗고 보들보들한 뺨에 빗물이 쏟아지는 것도 상관 않고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리 비를 잘 피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세상 반가움을 얼굴 가득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투정을 부렸다. 역시 내 각시가 맞다.

“무슨 도롱이가 이리 크고 무거운지, 빗길에 발은 또 얼마나 미끄러운지. 오다가 몇 번을 넘어질 뻔했지 뭐야.”

그러면서도 기쁘게 어깨를 펴는 하연의 웃음이 싱그러웠다.

“하지만 괜찮아. 내가 낭군 닮아 생각보다 발걸음이 야무지거든.”

잠들어 꾸는 꿈이 아니라면, 이렇게 온몸이 뜨거워질 수 있을까.

무헌의 눈동자가 크게 부풀었다. 도롱이를 한 번, 하연을 한 번, 그렇게 번갈아 보기를 잠시, 비에 젖은 얼굴을 손으로 털며 와락, 하연을 끌어안았다.

“각시야!”

그 힘에 비틀거리는 하연의 몸은 그대로 무헌의 품에 갇혔다. 손에 들고 있던 도롱이와 삿갓이 바닥에 떨어졌다. 접사리를 걸쳐 제대로 안을 수도 없는데도, 무헌은 놔줄 생각이 없었다.

하연이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꺼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행여 캐물으면 상처일까 싶어, 그저 무엇인가 겁나는 것이 있을 거라 짐작만 했다.

그러니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 것은 정말로 큰 용기를 낸 것임을 알았다. 그 용기가 오롯이 그를 위해 낸 것임도 잘 알았다.

아아. 내 각시.

무헌의 눈이 바닥에 널브러진 도롱이에 꽂혔다. 저걸, 이 작고 여린 손으로 들고 왔다. 이 작은 두 발로 나를 찾아 예까지 왔다.

사내를 힘 나게 하는 것은 산삼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내 각시 하나면 된다. 내 각시가 날 보고 곱게 웃어 주면 그게 산삼이고 보약이었다.

“나 비 맞을까 봐 온 거야? 내가 걱정돼서?”

한참 만에 팔을 푼 무헌은 하연의 뺨을 쓸고 차게 식은 손을 덥혀 주듯 움켜잡았다.

“그럼 다른 사내 주려고 예까지 왔을까?”

하연은 괜히 접사리를 한번 툭툭 털고, 무헌의 머리 위에 삿갓을 씌웠다. 감동받은 무헌의 얼굴을 보니 헛걸음은 아닌 듯해 뿌듯해졌다.

“그래도 그렇지,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여길 와? 길 잃어버리면 어떡하려고.”

조금 전까지 좋아서 입 끝이 귓불까지 닿았던 사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좋은 것과 걱정은 또 다른 것이어서, 무헌은 제법 진지하게 하연을 나무랐다.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쩔 테야? 비 오는 산은 타는 게 아니란 말이야.”

시작된 잔소리에 하연은 도망치듯 그가 있던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걱정되니까 그랬지. 비가 억수같이 오잖아.”

무헌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뒤따라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각시는 아직도 나에 대해 이렇게 몰라. 나는 비 좀 맞는다고 어떻게 될 사내가 아니야. 각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게 튼튼한 사내라고.”

“…….”

“각시야말로 이런 날 길 나섰다가 앓아누우면 그땐 어떡하라고.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미끄러져 어디로 구르기라도 하면? 안 되겠어. 돌아가는 길엔 지게에 올라타. 걸어갈 생각 꿈도 꾸지….”

“어머나!”

아직 한참이나 남은 무헌의 잔소리는 하연의 외마디에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하연이 뚱그레진 눈으로 양윤을 살폈다.

아, 그러게. 이 녀석이 있었지….

핏기 없는 얼굴로 파리하게 떨고 있던 양윤이 눈을 끔뻑거리며 하연을 올려다보았다.

“…무헌아…. 나 죽은 거야…?”

“…뭐?”

“왜 네가… 네 각시로… 보이냐….”

“뭐라는 거야?”

“헤헤….”

이 와중에도 헤실거리며 웃던 양윤이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어우, 이 천치.

그 탓에 무헌의 지게에는 양윤이 올라타야 했다.

***

양윤은 금세 정신이 들었다. 집에 데려다 놓고 나니 다행히 비도 그쳤다. 의원을 불러와 진맥을 하자, 크게 놀라서 잠이 들었던 것뿐이라며 몸조리를 하면 된다고 했다.

죽을 끓여 먹이고 양선이 밥을 챙긴 뒤, 덕삼이에게 자주 들여다봐 달라고 부탁하고 나자 날이 어둑해졌다. 무헌은 다시 한번 양윤의 집을 꼼꼼히 살핀 뒤 하연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아까 업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지게 위에 고이 하연을 태우고 걸었다.

“괜찮다니까.”

“안 돼. 업고 갈 테야. 각시 병나면 약값 들어.”

이젠 누가 저 말을 믿을쏘냐. 하연은 입술을 쭉 내밀고 소리 없이 웃었다.

“아아, 벌써 날이 저무네.”

지게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 비를 뿌려 댔나 싶게 하늘은 맑고 진한 노을을 퍼뜨리고 있었다. 황금빛 노을이 꿋꿋이 걸음을 옮기는 무헌에게로 쏟아졌다. 걸음마다 흔들거리는 지게 위에서 하연은 빛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낭군님아.”

“…응?”

“내 낭군님.”

“왜?”

“후훗.”

불러 놓고 가만히 웃자, 그가 걸음을 세우고 돌아봤다. 하연은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장떡 부쳐 먹자고.”

그냥 좋아서. 낭군님이랑 자박자박 걷는 게 좋아서. 낭군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좋아서. 그리 부르면 돌아보는 이가 있는 게 좋아서.

그래서 자꾸만 부르고 싶어. 볕이 좋은 날에도, 오늘처럼 비가 쏟아진 날에도, 배부르게 밥을 먹은 후에도, 깨끗한 빨래를 개어 놓고 난 다음에도, 좋은 꿈을 꾸고 난 다음에도, 평상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자다 깨어 품에 파고들 때에도. 나는 그저 낭군이 좋아서, 그래서 ‘낭군님아.’라고 입버릇처럼 부르고 싶어.

“어우우, 먹보. 아까 양선이랑 밥 먹었잖아.”

면박을 주면서도 입은 옅게 웃고 있었다. 하연은 지게 끝을 쥐고 무헌을 넘겨다보았다.

“그래서 안 해 줄 테야?”

“그렇게 먹다가 굴러다닌다?”

“아쉽네. 탁주에 장떡 한 장이면, 모사도 거뜬할 거 같은데.”

“…모사?”

“조삼모사라며. 설마, 오늘은 안 채울 거야?”

갑자기 무헌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러다가는 지게에 그녀를 얹고도 뛰어갈 기세였다.

“왜 안 채워? 남아일언중천금인데, 당연히 해야지. 부침개 몇 장 해 줄까? 두 장? 세 장?”

“어어, 나 굴러다니면 어떡하려고?”

“그럼 조오모오하면 되지. 아니, 조칠모칠할까?”

하연이 지게 위에서 까르르 웃었다. 오늘 도롱이 들고 산길을 걸었으니 얼마나 피곤할까 싶어 일찍 재우려던 생각은 부침개 도발로 단번에 날아갔다.

그러게, 각시야. 미안해. 각시 고운 손에 그 거친 도롱이를 들고 산길을 걷게 해서. 보드라운 뺨이 빗물에 차게 식게 해서. 자그마한 두 발이 빗물에 젖어 퉁퉁 붇게 해서.

그래도 각시야, 접사리 입고 뒤뚱거리며 걸어오던 각시를 봤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몰라. 날 위해 용기를 내어 줘서 고마워. 이 작고 고운 발로 날 찾으러 와 줘서 고마워. 그 어여쁜 입으로 낭군님아, 낭군님아, 불러 줘서 고마워.

“각시야.”

“…응?”

“내 각시야.”

“…후훗.”

나긋한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손을 뻗자 작은 손이 꼭 쥐어 온다. 그것이 마음이라, 그도 꽉 쥐었다. 무헌의 입도, 둥글게 솟았다.

***

크게 장이 선 날이었다. 방문(榜文)을 붙이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장에 물건을 내다 팔고 오던 무헌은 그곳으로 흘낏 눈길을 던졌다가 멈춰 섰다.

잠시 갈등하던 그의 눈길이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꽤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키가 큰 덕에 붙어 있는 글을 읽는 것엔 지장이 없었다.

내년 식년시(式年試, 정기적인 과거 시험)를 알리는 방문이었다.

“올가을도 초시(初試) 때문에 시끌시끌하겠구만.”

느릿느릿 걸어온 양윤이 무헌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말을 이었다.

“작년 춘당대시(春塘臺試)가 그렇게 치열했다더니만, 그래서 그런가, 올해는 아예 미리 고지를 해 버리네. 응시자들 수준이 매우 높으니 알아서 잘들 준비하라 이런 거지?”

양윤의 시선이 옆얼굴을 빤히 찔러 왔다. 마뜩잖게 돌아보는 무헌의 눈에 양윤이 손에 들고 있는 노리개가 보였다.

얼핏 봐도 청옥에 곱디고운 분홍 방울 술이 달린 노리개였다. 무얼 하느라 미적거렸나 했더니, 그사이 저걸 샀던 모양이다.

“어, 양선이가 하도 탐을 내서.”

양윤이 노리개를 자랑스레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엄청 비쌀 텐데.”

“돈 두면 뭐 하냐. 죽을 때 싸 가지고 갈 것도 아니고.”

양윤이 달관한 사람처럼 히죽 웃었다. 무헌은 애써 노리개에서 시선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초가삼간 금방 거덜 나겠다.”

서얼(庶孼)이니 뭐니 해도 양윤은 형편이 좋았다. 어릴 때는 본가 마님의 구박으로 멀리 쫓겨나 무헌만큼이나 가난으로 고생을 했지만, 작년에 생부가 숨을 거두면서 그에게도 조금의 유산을 나눠 주었다.

덕분에 양부가 죽은 후 먼 친척 집으로 보내졌던 양선이가 소박맞고 오자 기꺼이 거둘 수 있었고, 지금도 애지중지하며 봄에는 자미사에 여름에는 갑사로 비단옷을 사 주고 있었다.

자연히 집에 있는 하연이 생각났다. 처음 그녀를 보쌈해 왔을 때 입고 있던 옷의 옷감이나, 다시 만났을 때 신고 왔던 당혜는, 지금 양윤이 양선에게 해 주는 것에 댈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좋은 집에서 얼마나 높은 신분으로 살아왔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럴 때면 가슴께가 욱신거리면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지난번에 그 고운 각시의 손으로 돈을 벌겠다 했을 때는, 심장이 툭툭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이번에도 안 볼 거야?”

불퉁하게 소리친 양윤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무헌은 괜스레 씩씩거리며 걸었다.

“가을 초시에 응시만 하라니까. 봄에 한양 갈 노잣돈은 내가 대 준다고. 은장도 값이라 생각하라니까.”

무헌의 걸음이 빨라졌다. 양윤의 걸음도 빨라졌다.

“갑과 3인은 몰라도 을과 5인엔 충분히 들 수 있어. 내 열 손가락을 건다고.”

“왜. 왜 갑과 3인은 몰라?”

우뚝 멈춰 선 무헌이 눈을 부라렸다. 양윤은 당연하게 답했다.

“넌 무예만 잘하지, 강서(講書)는 쥐약이잖아.”

“내가?”

“기사(騎射), 격구(擊毬)야 날아다니겠지만,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어쩔 거며, 무경칠서(武經七書)는 어쩔 거야. 통감(通鑑)은? 병요(兵要)는? 가만, 소학은 기억해?”

“내가 천치야?”

무헌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양윤은 심드렁히 등을 벅벅 긁었다.

“책이라면 질색이면서. 책 놓은 게 몇 해야? 여섯 해지, 벌써? 여섯 해면 알던 것도 잊어버리지 않아?”

“그런 거 금방 기억나거든?”

“에이, 설마.”

“두고 봐. 가을 오기 전에 다 외워 버릴 테니.”

책이 싫은 거지, 읽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저 같은 줄 아나?

장담을 한 무헌이 성큼성큼 앞서갔다. 골이 잔뜩 난 걸음이 땅을 파낼 듯 찍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보던 양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과 보는 거야?”

쪼르르 따라가 물었다. 양윤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힐끔 쳐다본 무헌이 턱을 고집스레 치켜들었다.

“아니면, 오경과 통감을 재미로 보는 이도 있나?”

“이야아, 이무헌! 정말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 그래, 네가 갑과 최고 먹어라!”

양윤이 무헌의 목을 껴안고 방방 뛰었다. 무헌은 짐짓 귀찮아하며 그를 떼어 냈다.

“호들갑은. 아직 초시도 안 봤는데.”

“천하의 이무헌이 초시 따위 통과 못 할까.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넌 계속 급제감이야!”

“뭐, 내가 좀 많이 잘났긴 하지.”

“그래, 잘났다! 잘난 이무헌, 꼭 급제해서 나라님이 주시는 홍패 받아 돌아와라!”

무헌의 입가가 야트막이 솟았다. 그러나 양윤의 호들갑에 호응하긴 싫어 일부러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삼이네도 말해 줘야지. 방울이네도 말하고. 다들 엄청 좋아라 할 거야.”

“벌써부터 무슨.”

말은 그래도 입꼬리가 자꾸 솟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생각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비단옷에 옥비녀에 꽃당혜를 사 줄 거다. 그 곱고 예쁜 손에 물 한 방울 안 닿게 할 거다. 무과에 급제하면 제일 처음으로 그리해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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