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章. 들꽃 따러 갔다가
올해는 단풍이 일찍 들었다. 산은 온통 색색의 커다란 꽃을 꽂은 듯 어여뻤다. 하늘은 더없이 파랗고, 목화솜 같은 구름은 본 적 없이 하얬다.
“길 떠나기 딱 좋은 날이지 않아?”
무헌이 방에 들어서자 괴나리봇짐을 꼼꼼히 여미던 하연이 그리 말하며 환히 웃었다. 무헌은 괜히 서운해 눈을 비꼈다.
“그럼 같이 가든가.”
불퉁하게 자리에 앉자, 하연이 입을 가리고 큭큭 웃었다.
“낭군님 먼 길 떠나는 게 그리 좋아?”
서운함은 배가 되어 입이 비죽거려졌다.
오늘은 무과 초시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날이었다. 무헌이 사는 곳은 한양과 먼 곳이라서 각 지방에서 열리는 향시를 봐야 했다. 한양만큼 먼 길은 아니어도 족히 십수 일은 걸릴 거리였다. 이번에는 그나마 시험장이 그리 멀지도 않고, 무헌의 발이 빠르니 그 정도였다.
누구는 그 없는 동안 행여 불편할 것이 있을까 싶어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살림을 쟁여 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데, 대체 우리 각시는 어쩌자고 이리 태평한 건지.
양윤에게 자주 들여다봐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 놓고도 불안해, 덕삼이와 덕삼이 할머니 그리고 방울네한테까지도 당부를 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연은 아침부터 싱글벙글이었다.
“자, 이거.”
돌아앉은 무헌의 팔을 하연이 살랑살랑 흔들었다. 힐끔 넘겨다보니 그녀가 얼굴을 들이민 채 방싯 웃었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각시의 웃는 얼굴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세상 여인네들이 원래 웃으면 이렇게 다 예쁜 건지, 아니면 내 각시만 특별한 건지.
“뭔데.”
어쨌거나 그가 항상 지는 상대는 각시뿐이라, 이번에도 무헌은 그녀가 손으로 톡톡 가리키는 것에 쪼르르 시선을 내렸다.
“어….”
무헌의 눈이 커졌다. 윤이 반지르르 나는 고운 새 옷이 앉은 자리 옆에 놓여 있었다.
“이건….”
어디서 났냐는 질문을 담아 하연을 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지었지.”
“언제?”
“내 낭군님 일하러 나가셨을 때?”
“옷감은 어디서 나서?”
당장 하연의 손부터 살폈다. 혹시 저 모르게 그동안 바느질만 해 댄 건 아닌지, 손가락부터 매만졌다. 굳은살이라도 박여 있기만 해 봐. 눈썹을 일그러뜨리자 하연이 까르르 웃었다.
“아니야. 꽃신 팔았어.”
“꽃신을?”
“응. 그걸로 옷감을 사다 달랬지.”
“누구한…. 양윤이?”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나 모르게 양윤과 각시가 이 일을 벌였나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양윤이 놈이 그랬다 이거지? 나한테 말도 않고 그랬다 이거야.”
“뭐라 하지 마. 내가 누차 비밀로 해 달라고 한 거니까.”
“그래도….”
그럼에도 뭐라 따지려던 마음이 말간 하연의 눈을 보자 포르르 사라졌다. 꽃신 좀 팔아 버리라고 그리 말해도 안 듣고 버티고 버텼던 게 자신 아닌가.
“그러지 말고 얼른 입어 봐. 내가 몇 날 며칠을 공들여 지은 거란 말이야.”
하연이 저고리를 펴고 들이댔다. 그녀의 눈에 들어찬 기대감을 보니 무헌도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섬주섬 낡은 옷을 벗자 하연이 무헌의 팔에 소매를 끼워 넣었다. 가끔 인심 쓰듯 옷을 입혀 줄 때는 있었으나 오늘은 기분이 남달랐다. 손길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고 조심스러웠다.
옷감은 또 어찌나 보드랍고, 색은 또 어찌나 곱고 윤택이 나는지,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깃털로 만든 옷을 입은 것처럼 몸에 닿는 느낌이 간질거렸다.
이런 호사는 나라님도 못 하지 싶었다. 조금은 믿기지 않기도 했다.
하연은 처음 그가 과거를 보겠다고 했을 때만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래서 전전긍긍 눈치를 보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훈련을 하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오기도 하고, 돌아오면 등목도 시켜 주기 시작했다.
하연이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세상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건 알았다. 그러니 그가 관직에 오르겠다고 했을 때 달갑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점차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지원해 주기로 한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묵묵히 그를 믿어 주고 이해해 주는 각시가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모른다.
물론,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는 주먹밥 맛은 좀 곤혹스럽지만.
“내가 할게.”
바지 매무새를 정리하려 몸을 숙이고 앉는 하연을 말렸다. 그러자 하연이 짐짓 엄하게 나무랐다.
“어허. 낭군님은 그냥 계시지요? 옷을 지은 사람으로서 직접 입혀 보고 싶으니.”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의 눈이 웃고 있었다. 무헌은 뻘쭘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섰다. 힐끗 눈을 내려 엿보자 즐거워하는 것이 정수리에서도 느껴졌다. 무헌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어찌 이걸 지은 거야?”
고마움에 뭉클해져 묻자, 바지 정리를 끝낸 하연이 몸을 일으켰다.
“과거 보러 가는데, 허름하게 갈 순 없잖아.”
마주 선 그녀가 싱긋 웃었다.
“명색이 내년 식년시 무과 급제자가 될 사람인데.”
부담도 이런 부담이 없다며 항변하려던 입이 벌어졌다 다시 닫혔다. 무헌은 그의 옷을 살피기에 여념 없는 하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소매며 옷깃을 매만지는 손길이 야무졌다. 집중한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누가 보면 적진에 출정이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
차례차례 그에게 옷 한 벌을 다 입힌 하연이 끝으로 옷고름 모양을 곱게 다듬고는 한 발 물러섰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 번에 주루룩 훑어 내린 그녀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누구 낭군인지 정•말• 잘났다!”
무헌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리 비싸고 좋은 옷을 처음 입어 봐서는 아니었다. 그더러 잘났다고 해서도 아니었다.
각시가, 그의 아내가 직접 공들여 지어 준 옷. 그리고 하나, 하나 정성 들여 직접 입혀 준 옷. 그게 왜 이리 가슴을 벅차게 하는지 모르겠다.
사내는 제 여인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나 이무헌은, 나의 각시를 위해서라면, 이 여리고 고운 여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에라도 뛰어들 것이다. 무엇이든 해낼 것이다. 되게 만들 것이다. 세상에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무헌은 덥석 하연의 손을 잡았다. 어찌해도 그보다 늘 차가운 작은 손을 손에 가두고 꼬옥 쥐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그가 담겼다. 이 고운 눈동자가 자신을 담고 있는 게 어찌나 좋은지 모르겠다.
“크흠.”
입을 열면 사내답지 못하게 울음이 터질까, 무헌은 숨 한번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웃음기를 문 채 턱을 높이 들었다.
“가뜩이나 잘난 낭군한테 이런 옷 입혀 놓고 불안하지도 않아?”
그러자 하연도 웃음을 가둔 턱을 쑤욱 쳐들었다.
“얼굴에 반해 따라왔다가도, 경국지색, 녹빈홍안(綠鬢紅顔)의 각시가 있는 거 보면 꽁지 빠지게 도망가겠지.”
어찌 반박을 할까. 틀린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을.
하연을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새 옷에 각시를 감싸고 동그란 정수리에 입술을 비볐다.
“오게 하지도 않아.”
하연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애먼 여인네들, 감히 우리 집에 오게 하지도 않을 거라고.”
두 눈을 접어 웃은 하연이 두 팔로 무헌의 허리를 안았다. 무헌은 긴 팔로 그녀의 등과 머리를 빈틈없이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큰일이다.”
과거 보러 가야 하는데, 좀처럼 놔지지가 않았다.
“아아….”
그리고 또….
“기어이 해 버렸구나.”
나라 잃은 듯한 탄식에 하연이 품에서 큭, 웃었다. 이제야 발견한 소매 끝에는 형형색색의 꽃과 나비가 여인의 옷 장식보다 더 곱게 수놓여 있었다.
***
시험 날도 날이 좋더니, 오늘도 날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인가, 주막은 어제 시험을 끝낸 초시 응시자들 외에도 손님들로 몹시 붐볐다. 주모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건 처음이라며 입을 귀에 건 채 바삐 손을 놀렸다.
아침 일찍부터 잠에서 깬 무헌은 냉수만 들이켠 채 나갈 채비를 했다. 합격자를 고시하려면 아직 반나절이나 남았지만, 좀체 마음이 잡히질 않아 미리 근처에 가 있을 심산이었다.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 품정한 고시 과목은 모두 그가 유난히 잘하는 것들이었다. 활 하나 당길 때마다, 동작 하나 선보일 때마다 찬탄과 박수가 쏟아졌었으니, 합격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다만 너무 많은 응시자와, 이번 시관(試官)을 맡은 이들 중에 갑자기 발령을 받은 당하관 문신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발표자를 추리는 것에도 꼬박 하루가 들 정도로 응시 인원이 많은 곳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닌 예정에 없던 시관이 내려오다니.
특히나 이번에는 내로라하는 집 자제들의 수가 유난히 많아서 갑자기 발령받아 내려온 시관과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무과 향시는 무헌이 사는 지역에서는 10명밖에 뽑지 않는다. 3개 지역을 통틀어 겨우 10명이니, 저 많은 응시자를 제치고 일부러 좋은 집안의 자제만으로 그 10인을 채우지 않을 거란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조바심이 날 수밖에.
당하관 이름이 민정후라고 했던가. 멀리서 보기에도 비리비리한 것이 꼬챙이 같은 몸집만큼이나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전 책만 팠지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게 뻔한 자.
“드쇼.”
그릇을 툭 내려놓는 손길에 무헌은 신을 신다 말고 눈을 들었다. 커다란 그릇에 국밥을 말아 내온 주모가 인심 좋게 웃고 있었다.
넉넉한 주모 풍채만큼이나 국밥도 그득했다. 고깃덩어리도 넘칠 만큼 수북했다.
“난, 국밥을 달라 한 적 없소만.”
눈이 동그래져 묻자 주모가 들고 있던 탁주 병과 곱게 부친 육전도 마저 내려놓았다.
“알지요. 내가 드리고 싶어 드리는 거니, 많이 드시우.”
“이걸 왜 나한테….”
상을 훑은 무헌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제 시험 전에 국밥 한 그릇을 사 먹은 게 전부인지라 침이 꼴깍 넘어가긴 했다.
돈이 모자란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맘 편히 사 먹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떠나오기 전, 하연이 비녀를 찔러 주며 이번에는 제발 팔아서 여비에 보태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여전히 비녀는 그의 보따리 안에 있었다.
기껏 초시 따위에 각시의 물건을 내다 팔고 싶진 않아서였다.
“우리 마을서 급제감이 나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걸. 하늘을 나는 매 같고, 산을 달리는 호랑이 같았다고 다들 거기 얘기뿐이라우.”
주모가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스레 목에 힘을 주었다.
“문과였으면 복두(幞頭, 관모)에 어사화 꽂았을 거라고도 하고.”
“…….”
“미리 잘 보이려고 주는 것이니, 부담 가질 거 없수다. 급제자가 묵었던 주막인 게 소문나면 나도 한밑천 크게 잡는 거니까.”
“하지만 아직 발표가 난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초시일 뿐인데….”
민망해 중얼거리자 주모가 호탕하게 웃었다.
“엄살 마시우. 몇 년간 본 중에 제일 눈이 반짝반짝하구만.”
“…….”
“정 마음에 남으면, 창방의(唱榜儀, 합격자 호명 의식) 때 우리 주막 얘기나 슬쩍 흘려 주시든가.”
몸을 기울여 어깨로 무헌의 팔을 툭 친 주모가 호방하게 몸을 돌렸다. 무헌은 주모의 듬직한 등을 바라보다 인사를 했다.
“고맙소.”
주모가 대답 대신 몸을 흔들어 보였다. 흥 많은 주모 덕에 무헌은 모처럼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뜨끈한 국밥을 떠먹으니 조바심 났던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그래, 내 실력이 갑인데, 졸아 있을 게 무어야.
하루라도 빨리 출세해서 각시를 호강시켜 줘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탓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실력을 칭송하고 있으니 아무리 고약한 감시관이라도 멋대로 수를 쓰진 못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순식간에 국밥을 비운 후 육전을 입에 물던 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잉, 그 정승댁 수절 과부 말여? 쩌어기 윗마을에?”
“이젠 과부가 아니지. 신랑이 돌아왔잖여.”
“돌아왔다고? 여섯 해 전인가, 일곱 해 전인가, 사신단 따라나섰다가 범한테 물려 가 죽었다 그랬잖여. 상도 치렀잖여.”
“그랬지. 그랬는디, 아주 말짱히 살아 돌아왔다는구먼. 그래서 지난봄에 잔치도 어마어마하게 크게 열고 그랬다더라고.”
“시상에. 무슨 그런 일이 있는가.”
그러게 별일도 다 있다, 무헌은 그리 생각하며 육전을 우적우적 씹었다. 고기 맛이 좋았다. 하연에게도 육전 한번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그 비녀를 팔아 새 옷도 사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줄까?
근질거리는 손을 보따리에 넣었다. 하연의 물건이라 함부로 팔기 싫어 아껴 두었던 건데, 이번에도 안 팔고 가면 한 소리 들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수절 과부가 뭐? 신랑이 돌아왔으면 이젠 아주 살맛 날 거고만.”
“살맛은 무슨. 병에 걸려 못 일어난다잖여.”
“그려? 독수공방이 너무 길어 병이 나는갑네.”
사내가 낄낄거리며 웃자 다른 사내가 쯧, 혀를 찼다.
“고것이 아니고, 사실은 도망갔단 야그가 있어.”
“도망?”
주위를 살핀 사내가 목소리를 죽였다.
“실은 그 댁 노마님이 며느리 모가지를 매달려고 해서, 밤중에 냅다 도망갔디아.”
“목을 매달아? 왜?”
“왜긴. 열녀문 받으려고 그랬겄지. 양반님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간혹 있다는구먼.”
“시상에, 그게 말이여 방구여?”
“욕심낼 만하지. 그게 어디 보통 명예여? 그것만 받으면 아주 집안이 탄탄대로잖여.”
“어째서?”
입맛을 다신 사내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나라님이 직접 상도 내리지, 여기저기서 떠받들어 주지, 시댁이고 친정이고 집안 사내들은 공짜로 감투까지 쓴다잖여. 집안뿐인가, 고을 원님도 크게 상을 받어. 그 고을 자체가 아주 높게 추앙받아서 그야말로 죽은 사람 빼고 산 사람은 몽땅 잔치라는구먼.”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 목을 매달아? 짐승도 아니고.”
“그 댁이 죽은 줄 알았던 장남 빼고는 아들들이 다 관직에 못 나갔잖여.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지. 그런데 열녀문을 받으면 문중 자체가 아주 칭송을 받으면서 암만 시원찮은 시동생이라도 그냥 벼슬을 준다는구먼. 그러니 욕심이 나지 안 나겄어?”
“에잇, 나는 안 믿네. 그렇다고 산 사람 목을 억지로 매다는 이가 어딨어. 그것도 지체 높으신 정승댁 정경부인 마님이 그런 흉한 일을 할 리가 있겄어?”
사내가 머리채를 흔들며 탁주를 마셨다. 본의 아니게 옆에서 이야기를 다 들은 무헌도 그에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그렇게 모질고 못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맞다니까 그러네. 그 별당 과부 아씨 잡겠다고 봄부터 여름 내내 매일같이 돌쇠놈들이 돌아다녔다잖여.”
“돌쇠놈들? 그, 돈 받고 사람 잡으러 다니는?”
“그려. 눈이 반달처럼 생기고 얼굴이 하얀, 그 뭐냐, 옥비녀 꽂은 양반 여인을 찾는다나. 그 흉한 놈들을 여태까지 돈 써 가며 부리는 집안이면 있는 집안 아니겄어?”
“하긴 그러네.”
“게다가 며칠 전에 용팔이가 어디 산길에서 그 댁 아씨를 봤다고 그랬다네. 그래서 돌쇠놈들이 몽땅 그리로 몰려갔다는구먼. 이건 어디서 들은 건데, 그 댁 아씨 어깨에 달 점이 두 개가 박혀 있대. 달 점이 두 개가 있으면 신랑을 둘을 섬길 팔자….”
우당탕 요란한 소리에 사내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무헌은 엎어진 상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심장이 미친놈처럼 뛰었다. 몇 번이고 사람들과 부딪혀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욕을 하려다가 그의 번뜩이는 안광에 흠칫 물러서기도 했다.
“안 돼. 안 돼….”
다급한 흐느낌이 목구멍으로 넘쳐 나왔다.
각시가, 어깨에 달 점 두 개가 어여삐 박혀 있는 그의 아내가 높디높은 정승댁 며느리여서는 아니었다. 죽었다던 그녀의 신랑이 살아 돌아와서도 아니었다.
“며칠 전에 용팔이가 어디 산길에서 그 댁 아씨를 봤다고 그랬다네.”
“그래서 돌쇠놈들이 몽땅 그리로 몰려갔다는구먼.”
안 돼. 안 돼 각시야.
사력을 다해 달렸다. 달리다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달렸다.
***
“떠났다고?”
“예. 어제 아침에 무슨 일인지 밥술 뜨자마자 냅다 떠났어요.”
“흐음.”
주모의 대답에 민정후는 난감히 신음을 내었다.
떠났다니. 소식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 벌써 갔단 말인가.
“처음엔 봇짐을 두고 갔길래 돌아오나 보다 했는데, 누가 대막골 우물가에서 마주쳤는데 집에 간다고 했다네요.”
“봇짐을 두고 가?”
“예. 여기요.”
주모가 주막 한편에 놓아 둔 봇짐을 가져왔다.
“근데 거기서도 물만 마시고 곧장 또 달려가더래요. 뭔 일이 났지 싶어요. 안 그러면 애지중지하던 봇짐을 두고 갔겠어요?”
민정후는 봇짐을 아쉽게 매만졌다.
무예라면 까막눈인 그가 보기에도 유독 눈에 띄는 자였다. 최근 자주 한성부 관아를 드나든 덕에 많고 많은 무관을 보아 왔지만, 그토록 출중한 자는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탁이불군(卓爾不群)한 자라. 시험이 아니더라도 한성부 좌윤(左尹)께 직접 천거하고 싶을 만큼 아주 탐이 나는 자였다.
그런데 합격자를 고시하는 곳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가 꼬박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에 그가 묵고 있다는 주막을 직접 수소문해 찾아왔다.
만나서 독려도 해 줄 겸, 이참에 젊은 인재를 좌윤께 소개해서 그동안 신세를 진 것도 갚을 생각이었는데 벌써 떠나고 없단다.
“내년 복시 때나 볼 수 있으려나?”
아쉽네. 꼭 따로 만나고 싶었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내년 봄에도 한양에 가야겠다고 이미 마음을 먹어 버렸다. 집에 있는 것이 하루하루가 끔찍한 고역인지라, 어떻게든 밖으로 나돌 생각을 하던 차에 좋은 변명거리를 찾았다 싶었다.
“술이나 한 잔 주시게.”
멀지도 않은 거리를 바삐 왔다고 그새 기운이 빠졌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적 없는 눈이 먼 산으로 향했다.
‘그러면 내년 봄까지는 또 무얼 핑계 삼아 나돈다?’
아예 지금 떠날까? 씁쓸한 자조를 입에 물던 때였다. 봇짐을 톡톡 두드리던 손이 옳다구나 싶어 빛났다.
이걸 전해 주는 핑계로 길을 떠나면 되겠구나!
속내를 들킬까, 괜히 헛기침 한번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실례 좀 하겠네.”
기대감에 봇짐을 열던 그의 손에 뾰족한 것이 걸렸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봇짐에 어울리지 않는 비녀였다. 그걸 꺼내 이리저리 살피던 그의 눈이 어느 순간 휘둥그레졌다.
“가만, 이것은…!”
기억을 불러온 눈이 흔들렸다.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비녀를 든 손마저 충격으로 덜덜 떨렸다.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이게 어떻게 여기….
“여기 계셨습니까?”
시관을 보좌하던 아전(衙前)이 그를 보고 다가섰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찾….”
“집이 어디라 했지?”
다급히 물어 오는 말에 아전은 당황해 눈을 굴렸다.
“어디, 어디 사느냔 말이네.”
“저는 감골에….”
“누가 자네를 물었는가. 이 사람 말일세, 이 사람.”
아전은 비녀를 들이미는 민정후를 멀뚱히 보았다. 비녀가 이 사람이면, 이 사람이 된 비녀가 어디 사냐는 건데, 이건 또 무슨 선문답인가….
“이무헌 말일세. 이무헌! 그, 날고 기었던 이무헌!”
민정후가 답답한 가슴을 펑펑 쳤다.
“…아아, 그 이무헌….”
그럼 처음부터 그리 얘기를 하지, 왜 사내를 비녀로 칭하는지. 높으신 분들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아전은 서운함에 입술을 꾹 물고는 소매 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집안 좋기로 소문난 당하관이 제 집을 묻길래, 나도 드디어 좋은 연줄 하나 잡아 보나 했더니, 다른 이의 사는 곳을 묻는 거였다니.
“에, 그러니까, 그게….”
괜히 마음이 상해 한 장씩 넘기는 손이 느렸다. 그러자 민정후가 종이 뭉치를 뺏어 갔다.
“이리 내게!”
툭 치면 넘어가게 생긴 분이 갑자기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가. 아전이 데굴데굴 눈을 굴리는 사이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홱홱 지나갔다.
“이무헌, 이무헌….”
빠르게 종이를 넘기던 민정후의 손이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여기, 여기군.”
사는 곳을 확인한 민정후가 종이 더미를 아전에게 떠넘기고 그대로 걸음을 뗐다.
“어어? 어디 가십니까, 나리?”
술상을 가져온 주모가 당황해 물었다. 어떤 순간에도 뛰지 않는다던 높으신 양반님 두 발이 뛰듯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끔뻑거리던 주모와 아전의 눈이 이 진귀한 광경의 동지를 찾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가까운 거리에 서로가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섰다.
“수, 술상은 나 주게. 아무래도 내가 마셔야 할 듯싶으니.”
“아, 예, 그, 그러십시오.”
술상을 받는 아전이나, 술상을 내려놓는 주모나, 쓸데없이 얼굴이 붉었다.
***
덕삼이네 평상 위가 여인들의 웃음소리로 들썩거렸다. 도토리 껍질을 벗긴다는 핑계로 정오 무렵부터 시작된 여인네들의 수다는 두 시진째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절구 방망이를 절구에 푹 꽂은 방울네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아, 이 염병할 인간아, 네가 닷 푼이면 나는 칠 푼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인간이 와하하 웃는 거야. 생각해 보니 내가 나더러 ‘칠푼이’랬어. 물건 흥정하다 칠푼이가 됐지 뭐야.”
방울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깔깔깔 웃음이 터졌다.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웃음을 참고 있던 하연도 시원하게 함께 터뜨렸다.
몇 번을 들어도 재밌는 얘기였다. 눈물까지 핑하고 돌 만큼.
“아이고, 내 배야. 내가 못 산다 진짜.”
덕삼 할머니가 배를 잡고 웃다가 수북이 쌓인 도토리 껍질 위로 고꾸라졌다. 그러다 허리가 아픈지 또 허리를 잡았다.
“아이고, 내 허리야. 아이고, 웃다가 앞뒤로 병나겄네.”
그걸 보고 또 웃음이 터졌다. 모두 평상 바닥을 때리며 꺼이꺼이 웃었다.
“처음 듣는 것도 아니고만 적당히 웃으시지.”
그리 말하며 덕삼 할머니 옷에 붙은 도토리 껍질을 털어 내는 방울네의 입에도 연신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얼마 전부터 이 모임에 함께하기 시작한 용순이와 봉희도 손부채질을 해 가며 웃음을 뱉어 냈다.
“그런데, 양반 댁 아씨가 그리 큰 소리로 웃으셔도 되어요?”
꽤 친해졌다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까칠해지는 봉희가 새치름하게 하연을 보았다. 용순이가 나무라듯 허벅지를 쿡 찌르자 입을 비죽였다.
“아니 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내가 아는 마님들과 아주 많이 달라서….”
“네가 아는 양반 마님이 어디 있어서?”
방울네가 놀리듯 눈을 부라리자 봉희가 입을 쭈욱 내밀었다.
“그리고, 우리 새댁 아씨는 그런 거 없어. 애초에 격조했으면 우리와 말이나 섞었게? 나랑도 얼마나 친한데?”
편들어 주는 말에 하연은 든든해져 봉희를 보았다. 힐끔거리던 눈이 부드럽게 접힌 하연의 눈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하연은 쿡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귀엽기는.’
무헌 때문에 샘이 나 그런다는 것은 이미 처음 본 날부터 알고 있었다. 특별히 눈치가 빨라서가 아니었다. 뺨이 발그레해진 채로 무헌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틈만 나면 하연을 힐끗거리며 까칠하게 위아래를 훑어 대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을까.
마음이 있는 건 용순도 마찬가지였지만, 용순이 눈이 마주치자 그저 순하게 웃는 것으로 현실을 받아들인 것에 비해 봉희는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 질투 섞인 투정을 종종 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 신분에 넘보지 못할 색시 자리인 건 알아서, 질투하는 와중에도 하연에게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했다.
그런 걸 보면 하연이 어쩌다 무헌의 각시가 되었는지 이들은 모르는 듯했다. 그저 멀리서 시집온 가난한 양반집 딸로만 여기고들 있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하연은 어린 소녀들의 풋사랑을 두고 시샘할 나이는 지난지라, 열일곱 어린 봉희의 질투가 그저 막냇동생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 일로 무헌을 놀리는 건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봉희와 용순이 얘기를 할 때마다 펄쩍 뛰는 무헌을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가만 보면 무헌은 참으로 골리기 좋은 사내였다.
“양선이도 함께 놀면 얼마나 좋아. 양반 병은 고것이 걸려서 문제지. 에효, 쯧쯧.”
방울네가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용순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무슨 얘기?”
“지지난밤에 양윤 오라버니가 장 의원을 찾았대요.”
양윤의 얘기에 하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 무헌이 향시를 보러 간 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러 안부를 챙기는 고마운 존재이자, 이젠 그녀에게도 정말 가족이나 진배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왜? 양윤이가 양선이 약 달여 먹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더듬이 고치려고 그러는 거잖아.”
방울네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용순은 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아니고요, 한밤중에요. 웬 여인을 업고서요.”
“여인?”
“양선이지 싶어요.”
“그러니까, 양윤이가 한밤중에 양선이를 업고 장 의원한테 갔다고?”
“네, 마구 뛰어갔대요.”
“…….”
“…….”
여인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오고 갔다. 누군가 목 뒤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없이 오가던 긴장은 덕삼 할머니로 인해 깨졌다.
“아유, 난 또 뭐라고.”
덕삼 할머니가 등을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또 밤에 어디 쏘다니다 발바닥 베였나 보네.”
“…….”
“언제야, 전에 단옷날에도 오라비 잠든 새에 밤에 쏘다니는 걸 우리 덕삼이가 발견해서 데려다줬잖아. 전에 또 한 번은 무헌이가 잡아 오고. 그땐, 저 뒷산 개울까지 갔었대.”
“그래도, 발 좀 베인 거로 한밤중에 둘러업고 의원한테 가요?”
“양윤이니까 가지. 양선이 일이라면 그저 껌뻑 죽는데.”
그 말에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무슨 큰일이나 났다고. 암튼 양선이 고것도 발바닥이 아주 엉망진창이야. 제가 양반 마님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밤에 신은 왜 안 신고 돌아다니나 몰라. 그러다 언제고 큰일 나지.”
덕삼 할머니가 안타깝게 혀를 찼다. 봉희가 삐죽 말을 보탰다.
“그러게, 안 신을 거면 그 당혜 나한테나 줄 것이지.”
“넌 밤에 그거 신고 어딜 싸돌아다니게?”
“비싼 당혜 아까우니까 그러죠. 암튼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어쩌다 그런 병이 걸려서는. 양윤 오라버니 등골만 빼 먹고.”
“이것아, 말조심해!”
방울네가 봉희의 등을 짝 소리 나도록 때렸다. 봉희가 억울해 쳐다보자 눈을 엄하게 떴다.
“양윤이 앞에서 그딴 소리 하기만 해. 그랬다가는 그날부로 너야말로 미쳐 버리도록 내가 두드려 패 줄 테니.”
“어우, 진짜! 무슨 손이 솥뚜껑도 아니고 이렇게 맵대. 말로 해도 알아들어요. 짐승도 아니고, 낼모레 시집갈 처녀 등을 이렇게 때리는 게 어딨어요?”
“시집은 너 혼자 가니? 너 혼자 가?”
이번에는 봉희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봉희가 끼아아 고함을 치며 무릎걸음으로 도망가자 방울네가 엉금엉금 기어 뒤를 쫓았다.
평상 위가 그들로 난리가 났다. 두 사람의 행태에 남은 사람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배를 잡고 웃어 대는 하연의 귀에 한숨 섞인 덕삼 할머니의 말이 들려왔다.
“따지고 보면 양반 병은 아니지. 양선이는 진짜 양반이 맞으니까.”
“양선이가요?”
놀라 되묻자 덕삼 할머니가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양선이네 아버지가 딱 무헌이 같았어. 찢어지게 가난한 이름뿐인 양반.”
“…….”
“혼자 딸 키우는 것도 버거웠던 주제에 갈 곳 없이 쫓겨난 양윤이 모자를 거뒀어. 서로 의지하고 산 거지 뭐.”
“그랬군요.”
“그런데 양선이 아버지도, 양윤이 어머니도 역병으로 금방 죽어 버렸어. 그때 양선이는 친척 집으로 보내졌지. 그랬는데 그 친척이 애가 이상하니까 애먼 곳에 팔아 버린 거고.”
“세상에나.”
“그러니 고것이 한이 맺혀 양반 병이 걸린 거지. 사는 동안 어디 한 번을 양반처럼 살아 봤어야지. 세상 불쌍하지, 걔도.”
끌끌 혀를 찬 덕삼 할머니가 치마를 털며 말을 이었다.
“그 뒤로 혼자 남은 양윤이는 무헌이 할머니가 같이 키우다시피 해서 그때부터 둘이 형제처럼 자랐지. 어린것들이 어찌나 사이가 좋은지, 풀뿌리로 죽을 쒀도 다툼 하나 없이 나눠 먹고 그랬다니까.”
“…….”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제 팔자처럼 기구한 것도 없을 거라 여겼던 것이 무색하게도, 세상에는 참으로 가엾은 사람들이 많았다.
새삼 양선에게 더없이 마음이 갔고, 그 고생을 하고도 저리 든든한 사내가 된 무헌과 양윤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돈독한 우정을 알게 되자 전보다도 양윤과 양선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대단하네요. 피 한 방울 안 섞인 누이를 그토록 살뜰히 챙기는 것이.”
“양선이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양윤이 모자한테 엄청 잘했거든. 목숨이 간당간당한 걸 살려 놨으니까. 그래서 양윤이는 양선이를 친누이와 다름없이 여기지.”
“저기요. 좀 가 보셔야겠는데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가 눈을 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덕삼이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무릎을 짚었다. 그걸 본 방울네가 마뜩잖게 툴툴거렸다.
“이 인간 또 너더러 나 찾아오라디? 으이구, 밥 제때 찾아 먹는 서방만큼 웬수도 없다, 정말.”
그러나 고개를 저은 덕삼의 눈은 다른 이를 향했다.
“아뇨. 아주머니 말고요. 집에 누가 올라가는 거 같던데요.”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하연이었다.
“우리 집에요?”
“예.”
“오늘 신랑 와?”
“신랑 왔으면 우리 덕삼이가 ‘누가’ 왔다고 했겠어?”
“무헌 오라버니 며칠 더 있어야 오지 않나?”
“네가 그걸 왜 챙겨?”
모두 한마디씩 보태는 사이 하연은 평상을 내려와 신에 발을 밀어 넣었다.
“누군지 모르고요?”
그제야 지게를 내려놓은 덕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세히 보진 못했어요. 말발굽 소리가 나길래 길가 쪽으로 가 봤더니, 저만치 올라가고 있더라고요.”
“말이요?”
“여기보다 위면 그 집밖에 없는데.”
“정말 무헌 오라버니 왔나?”
“어머! 장원 급제 해서 말 타고 왔나 보다!”
“초시에 장원 급제가 어디 있니?”
“좀 조용히들 좀 해 봐!”
큰 소리로 평정한 덕삼 할머니가 설레는 눈으로 하연을 보았다. 남은 이들의 눈도 차례로 하연에게 향했다. 모두 기대감으로 반짝반짝했다. 하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저,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응응. 어서.”
모두 미소를 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울네는 하연의 치맛자락에 묻은 검불을 떼 주며 문 앞까지 배웅했다.
정말로 무헌이 왔나 보다.
산 위를 바라보는 하연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
허엇.
집에 당도한 하연은 외마디 신음을 내었다. 사립문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몸을 세웠다. 힘줘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지거나 주저앉을 뻔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성마르게 마당을 서성이던 그의 두 발도 하연을 보자 주춤 물러섰으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하연은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두 눈을 꾹 눌렀다 떠 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제 눈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이건 분명 귀신을 보고 있는 걸 테니까.
“…서방 …님?”
부르기에도 낯선 호칭이 입 안에서 어색하게 흘렀다. 한참 만에 열린 상대의 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인?”
아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연은 이번에야말로 크게 비틀거렸다.
“부인!”
급히 다가온 그가 부축을 하려 했다. 하연은 흠칫 손길을 뿌리치며 혼자 중심을 잡고 섰다. 그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둘의 시선이 불편하게 닿았다. 몹시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
참으로 얄궂지. 떠올리려 해도 기억조차 나지 않던 얼굴이, 어찌 마주하자마자 단박에 알아봐지는 건지.
여전히 낯선 얼굴인데, 남인 듯 지나치는 게 더 자연스러울 사이인데, 그런데도 상대가 누군지 어찌 알아봐지는가 말이다.
“하아….”
한겨울에 내뱉는 입김 같은 한숨이 흘렀다. 한밤중에 얼어붙은 들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것처럼 온몸이 바들거렸다.
믿기지 않는 눈은 다시 그를 훑었다. 지그시 움켜쥐는 그의 주먹에 시선이 가닿았다. 하연은 그것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비녀. 그녀가 무헌에게 줬던 비녀. 아니 애초에, 눈앞의 이 사람이 그녀에게 줬던, 비녀.
“여긴….”
“대체 어찌….”
“각시야!”
동시에 벌어졌던 입이 무헌의 부름에 닫혔다. 그녀도, 상대도 하려던 말을 가두고 눈을 돌렸다.
저만치서 무헌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빠르다는 두 발로, 꽃처럼 물이 든 나무 사이를 지나서, 세상 반가운 얼굴로 그가 오고 있었다.
“왜 나와 있어? 나 오는 줄 어찌 알고? 내 꿈이라도 꾼 거야? 아니면 보고파서 오매불망 기다리….”
당장이라도 끌어안을 듯 다가오던 무헌의 걸음이 우뚝 섰다. 늘 순하게 웃던 두 눈에 단박에 날이 서더니, 동굴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하연의 앞을 막아서며 발톱을 세웠다.
“누구십니까?”
잔뜩 경계를 세운 물음이 낯선 사내에게 날아갔다. 무헌의 어깨 너머로 하연과 민정후의 시선이 마주쳤다. 침묵 속으로 불안과 긴장이 흔들리며 차올랐다. 당장 나오지 않는 대답에 무헌의 안광이 호랑이처럼 번뜩였다.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르렁대는 낮은 음성이 잘근잘근 씹혀 나왔다. 하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무헌을 향해 섰을 때였다.
“어어! 내, 내 비녀다!”
언제 왔는지 등 뒤에서 나타난 양선이 민정후의 손에서 비녀를 채 갔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쪽 찐 머리에 비녀를 푹 끼워 넣고는 뿌듯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 이제야말로 지, 진정한 사대부 집 규수의 며, 면모를 갖추었군.”
“…….”
“고… 맙네. 내 이 은혜는 주, 죽을 때까지 잊지 아, 않겠네. 어딜 가든 하, 항상 품에 간직하고 다, 다닐 것이야.”
“거기… 비녀라고요? 그게요?”
여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민정후가 혼란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헌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양선에게 손을 뻗었다.
“양선아, 그러지 말고 그거 얼른 이리….”
“맞습니다.”
무헌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무헌이 휘둥그레 돌아보자 하연이 굳게 힘준 눈으로 차분히 강조했다.
“저 비녀 주인은, 저쪽이, 맞습니다.”
말을 끝내자 굳게 닫아 버린 입술. 하얗게 뼈가 도드라지도록 움켜쥔 주먹.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닌 저 사내에게 하는 말임을 무헌은 알았다. 질문을 머금고 하연을 바라보자 그녀가 시선을 비꼈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 끝이 무헌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여전히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는 저 사내의 눈동자도.
알 수 없는 공기가 차곡차곡 쌓였다. 발로 툭 차기만 해도 크게 터질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기묘한 정적이 점점 안개처럼 차오르던 때였다.
“그, 그런데.”
갑자기 양선이 민정후의 앞으로 쓱 다가섰다.
“거기는 누, 누구신가?”
고개를 기울인 채 빤히 들여다보는 눈길에 민정후가 주춤 물러섰다. 그 덕에 팽팽하던 공기가 결계를 벗어난 듯 조금 옅어졌다.
하연은 그사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민정후는 여전히 홀로 긴장한 채 있어야 했다.
양선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가 물러선 만큼 양선이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그의 눈이며 코며 입술을 유심히 훑어 내리기를 한참, 양선이 쯧, 혀를 찼다.
“생긴 것이 비, 비실비실한 게 꼭, 내 서, 서방님 같군.”
뜨악해하는 누구와 달리, 양선은 아련하게 뜬 눈을 먼 하늘가로 던졌다.
“오, 오실 줄 알았습니다. 나를 못 잊고 기, 기어이 돌아오실 줄 아, 알았어요.”
“…….”
“기, 기다리십시오, 서방님. 오라버니께 이, 인사는 올리고 떠나야지요.”
새초롬하게 미소 지은 양선이 음전하게 마당을 벗어나 사뿐사뿐 길을 내려갔다. 그 길을 따라가던 세 사람의 눈길이 어느 순간 다시 부딪쳤다.
“그래서.”
무헌의 기다란 눈이 가느다래졌다.
“누구시냐 다시 묻습니다.”
“…….”
“설마, 진짜 양선이 데리러 오신 분은 아니실 테고.”
“…….”
이젠 정말 대답을 해야 할 때였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민정후가 주저하던 입술을 열었다.
“나… 난 민정후라고 하네.”
위태로운, 그러나 턱을 꽉 깨문 하연의 시선이 그에게 던져졌다. 쏟아지는 그녀의 시선을 감내하던 민정후가 흔들리는 눈을 내렸다.
“시관이었네만. 기억하는가?”
조금은 떨리는 음성이었다. 어느덧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는 그의 의지로 다급히 자리를 찾아갔다.
“합격 소식을 알려 주러 달려왔네. 그리고….”
숨을 들이켠 민정후가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입가를 힘들게 끌어 올린 그의 손에는 무헌의 봇짐이 들려져 있었다.
“…이것도, 전해 줄까 하여.”
***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술상이 차려졌다. 양윤에게서 급히 가져온 탁주와 무헌이 손 빠르게 무쳐 내온 호박나물이 놓였다.
하연은 끝으로 호박과 버섯을 넣고 부친 전을 가져와 상에 보태 놓았다. 물론, 만들기는 무헌이 만들고 그녀는 내오기만 한 것이었다.
“각시도 여기 앉아.”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자 무헌이 평상 위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하연은 재차 이어지는 재촉에 조금 떨어진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앉은 곳도, 발을 디딘 곳도, 들이마시는 공기도 모두 따끔거렸다.
시관이 자신을 보러 직접 와 준 것이 고마워 극진히 대접하는 무헌을 보는 것도 괴로웠고, 무헌의 대접에 가지도 못하고 꼿꼿이 앉아만 있는 민정후의 등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어찌해야 할지 그저 혼란스러운 가운데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반쯤 혼이 나간 채로 무헌의 뒤만 따라다녔던 것 같다.
“한 잔 받으시죠.”
무헌이 시원하게 웃으며 민정후의 잔을 채웠다.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던 민정후가 그 말에 어깨를 털고 잔을 들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봇짐 안에 아주 귀한 것이 들어 있었는데,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비록, 양선이가 채 갔지만.
“…그랬군.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그래도 이렇게 직접 전해 주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마침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
어색한 웃음이 민정후의 입에 걸렸다. 무헌이 민정후의 앞으로 잔을 밀었다.
“드십시오. 이게 보기엔 이래도 맛은 좋습니다. 술 좋아하는 놈이 쟁여 놓은 거라서 틀림없습니다.”
“…고맙네.”
민정후가 잔을 들자, 그제야 무헌도 잔을 들었다. 술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 평소와 달리 단번에 들이켜고는 씨익 웃었다.
잔을 든 채로 멈춰 있던 민정후는 마주쳐 오는 눈길에 정신을 차리고 마저 잔을 비웠다. 매 순간 다른 곳으로 향하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두 눈을 깊게 눌렀다 뜨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것도 드셔 보십시오. 있는 게 호박뿐이라 조촐하지만 고소합니다.”
무헌이 살갑게 말했다. 작게 끄덕이고만 있자, 쭉 찢어 직접 입에 들이미는 바람에 민정후는 얼결에 입을 벌렸다. 입 안이 꽉 차도록 부침개를 밀어 넣은 무헌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물우물 부침개를 씹는 민정후의 입가에도 예의상 뻣뻣한 웃음이 걸렸다.
“각시도 한잔할래? 탁주 좋아하잖아.”
불쑥 향하는 말에 하연이 번뜩 눈을 들었다. 당혹스러움에 눈길이 향할 곳을 잃었다.
“제가 붙은 건 다 각시 덕분입니다. 각시 없었으면 시작도 못 했을 겁니다.”
무헌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연을 보고 짓는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누가 보면 벌써 급제라도 한 줄 알겠다고 비죽거릴지 모르겠지만, 불안과 초조로 술렁이던 하연의 가슴은 그 미소에 잠시 쉴 곳을 얻었다. 이제는 저 미소에 위로받는 것이 익숙해진 제 가슴을 느꼈다.
“당하관님은 부인과 어떠신지요?”
무헌의 물음에 하연과 민정후가 동시에 굳었다. 서로 제 앞에 시선을 묶어 둔 채 긴장한 눈만 깜빡였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한참 만에 민정후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내 아내는…. 몸이 안 좋다네.”
“…….”
“시집살이가 고되었지. 우리 어머님이 심히… 아주 심히 엄하시거든.”
“…….”
하연은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한 채 작게 숨을 토해 냈다. 무헌이 민정후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많이 안 좋으신가요?”
잠시 술상을 바라보던 민정후가 잔에 술을 채웠다. 한 번에 쭈욱 들이켠 그가 잔을 툭 내려놓고는 소매로 입을 닦고 허리를 세웠다.
“많이 안 좋네.”
민정후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뚜렷해졌다.
“나 때문이지. 내가 아주 오랫동안 혼자 버려두었거든.”
“버려두다니요?”
“내가… 내가 도망을 쳤네. 아내가 싫어서, 혼자 도망을 쳤어.”
하연은 가만히 숨을 머금었다. 민정후의 목소리는 죄를 자백하듯 가늘게 떨렸다.
“그래, 그땐 그랬어. 어머니가 정해 주신 혼처가 끔찍하게도 싫었어. 우리 집안이, 그러니까 나의 어머님은, 부끄러운 얘기네만 성품이 모진 데다 한 치의 빈틈도 없으시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숨이 막혔거든.”
“…….”
“따로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었네. 집안이 미약했지. 포기할 수가 없었네. 그래서 데리고 도망쳤지. 타국에서 숨어 살았네. 그러니까 나는, 갓 시집온 조강지처를 그날로 버린 거야.”
하연은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뜨겁고 아픈 것이 울분이 되어 치솟았다. 죽은 줄 알았던 자가 도망을 간 거였다니, 설움보다 깊은 배신감에 숨이 턱 막혔다.
“그러나 그렇게 산 지 2년 만에 그 여인이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갔다네. 그때 그 여인이 그러더군. 볼 거라고는 집안과 벼슬뿐인 남정네가 그걸 다 버리면 뭘 보고 살겠느냐고.”
“…….”
“그때 나는 깨달았지. 내가 얼마나 한심한 사내인지를. 나는 그저 내 갑갑함 하나 못 이겨 그 화살을 아내에게 돌렸었던 거야.”
술 한잔을 더 따라 마신 민정후가 옅게 붉어진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했네. 아내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거든. 몇 년을 더 타지를 헤맸지. 그게… 더 큰 죄를 짓는 건지도 모르고 말이야.”
어느덧 민정후의 목소리는 담담해져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흐린 눈으로 무헌을 보았다. 반듯하고 맑은 무헌의 눈동자를 보자 자신의 못남이 사무쳐 울음이 날 것 같았다.
“나도 아네.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몹쓸 죄인가를. 아내의 삶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못 하겠어. 아들인 나도 내 어머니를 못 견뎌 도망쳤는데, 낯선 곳에 혼자 남은 며느리의 삶은 어떠했겠나.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었을 거야.”
“…….”
“나라면 아마 진작에 도망갔을 거네. 짐승만도 못한 서방을 저주하고, 매서운 시어머니를 욕했을 거네. 나라면 진작에 그 끔찍한 곳을 도망 나와서….”
잠시 말을 끊은 민정후가 말에 힘을 싣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행복을 찾았을 거네.”
“…….”
“그래야 조금이라도 순리가 아니겠나.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의 죄가… 우리 어머니의 죄가 덜어지지… 않겠나.”
하연은 가만히 가슴께를 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어느 순간부터는 민정후의 말이 그녀를 향해 건네는 사죄임을 알았다.
괜찮다고. 다 안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을 이해한다고.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행복하라고. 행복하면 됐다고. 그걸로 그와 어머니를… 용서해, 달라고….
“이거 가져가십시오.”
안에 들어갔다 나온 무헌이 꼭지에 실을 묶어 주렁주렁 늘어뜨린 곶감 뭉치를 내밀었다.
“제가 하나, 하나 직접 깎아서 말린 곶감입니다. 이것도 손맛을 타서, 요령에 따라 맛이 달라지거든요.”
“…….”
“제 곶감은 맛이 아주 달고 부드럽습니다. 이 근방에서 최고죠. 자다가도 생각나 벌떡 일어날 만큼 맛이 좋습니다.”
“…….”
“실은 각시 주려고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건데, 당하관께 드리겠습니다.”
장엄한 자랑을 끝낸 무헌이 민정후의 손에 실의 꼭지를 쥐여 놓았다. 그러고는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건 나라님도 쉽게 못 구하는 겁니다.”
“…….”
둥글게 접힌 무헌의 눈이 속을 알 수 없게 깊었다. 부끄럽게 꺼내 놓은 치부가 그의 앞에서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건만 마치 무헌에게 그의 죄를 용서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생경해 물끄러미 보던 민정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리 귀한 걸 왜 내게….”
“부인 드리십시오.”
“…….”
“아프다면서요. 이거 드시면 기운을 차리실 겁니다.”
처음으로 하연과 민정후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베일 것처럼 가는 실 같던 시선이 점차 고운 선으로 변했다. 멀리서 닿았다가 찰나에 떨어졌지만, 그것에도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오가고 아물어졌다.
하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후가 옅게 미소했다.
“어서 넣으십시오. 귀한 짐을 찾아 주셨으니 이 정도는 보답을 해야죠.”
무헌이 보자기를 가져와 곶감을 싸 내밀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민정후가 고이 받아 들었다.
“귀한 것을 넘겨주고, 다른 귀한 것을 받아 간다라…. 그래, 그런 거면 받아 가야겠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무헌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걸 보는 민정후는 기분이 이상했다. 순간 상대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른같이 느껴졌다.
민정후는 묘한 기분을 털어 내며 서둘러 평상을 내려섰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잘 곳을 알아봐 주겠다는 무헌의 배려를 사양하고, 말을 타고 돌아갈 테니 괜찮다며 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설 때 민정후와 하연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예를 갖춘 그의 인사에 하연이 더 허리를 숙여 답례를 했을 뿐.
숙인 등만으로도 그녀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민정후는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걸음을 빨리해 그곳을 벗어났다.
울긋불긋한 나무들 위로 그보다 붉게 노을이 졌다. 한 시진 전만 해도 정신없이 오르기에만 바빴던 이 길이, 이제 보니 이토록 아름다웠다. 세상이 온통 꽃밭 같아, 민정후는 잠시 걸음을 세우고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네….”
능선에 걸린 해가 불꽃처럼 찬연히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민정후는 노을에 시선을 둔 채 배웅차 뒤따라오고 있던 무헌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부인은 어떻게 만났나?”
무헌이 옆에 와서 섰다. 민정후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가만히 산등성이를 바라보던 무헌이 빛나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들꽃, 따러 갔다가요.”
“…들꽃?”
“…….”
민정후는 물끄러미 무헌을 보았다. 무헌이 가만히 입꼬리를 올렸다. 마주 본 채 깊게 감았다 다시 뜨는 무헌의 눈빛은 속을 알 수 없게 깊었다. 그런데도 싱그럽게 올라간 미소는 소년처럼 맑았다.
소년 같은 대장부, 대장부 같은 소년. 참으로 알 수 없으나, 참으로 알겠는 사내.
마주 닿은 두 사내의 시선이 차분히 떨어져 다시 앞을 향했다. 민정후의 입가가 둥글게 솟았다.
“그거 참 탐나는 인연이네.”
두 사내는 한동안 나란히 서 있었다.
민정후를 배웅하고 돌아온 무헌은 사립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하연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하연은 작은 새처럼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보고 싶었어, 각시야.”
그의 품이 따스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헌의 커다란 손이 하연의 등과 머리를 쓱쓱 어루만졌다. 꼭 뭘 아는 사람 같기도 했고, 평소와 다름없기도 했다.
하연은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나도. 나도, 낭군님아.”
무헌이 마주 보고 웃었다. 웃는 것이 꼭 달이 따스하게 뜬 봄날의 꽃 같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오던 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꽃나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