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七章. 꽃, 지던 날 (8/15)

七章. 꽃, 지던 날

꽃잠이 들었었다. 문득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니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하연은 모로 자던 몸을 바로 눕히려다 말았다.

바로 등 뒤에 무헌의 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잠들기 전에 그와 몇 번이나 몸을 섞은 탓에 둘 다 벌거벗은 채였다.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알몸이 그에게 갇히듯 안겨 있었다.

‘어찌 지금까지 한 번을 안 움직였담.’

무헌은 한번 잠들면 일어날 때까지 처음 그 자세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하연은 이불 속에서 몇 번을 꼼지락거리다가 관두었다. 무헌을 깨울까 봐 조심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의 체온이 좋아 계속 모로 누워 있는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끔뻑였다. 그녀에게 팔베개를 내어 준 무헌의 손끝이 눈에 담겼다.

처음 봤을 때부터 참으로 길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손.

가만가만 더듬어 그의 손바닥에 제 손을 대었다. 꺼끌꺼끌한 손끝을 조심스레 훑자 잠결에도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쥔다.

“한양에 가자, 각시야.”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째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까. 비녀를 양선에게 줘 버린 것에 대해 무헌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낯선 이에게 양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싫어 내버려 두었다는 어설픈 변명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지난밤 불쑥 한양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봄이 되면 가자는 것도 아니고, 준비되는 대로 당장 가자니.

이곳은 그가 나고 자란 곳이었다. 무헌이 여기서의 삶을 얼마나 만족해하고, 마을 사람들과도 정이 깊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급제가 떼 놓은 당상이라고 하나 벌써부터 떠나자고 구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관직을 얻어도 이곳으로 내려와 살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이유가 뭘까….’

무헌은 정말로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굴었다. 마치 그녀에게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아느냐고 감히 물을 자신은 없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해도, 혹은 알고 있지 않다고 해도, 어느 쪽이든 그를 속인 것은 매한가지니까.

그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털어놓을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그것은 나무에 줄을 매달아 고리 속에 목을 들이미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어찌 말한단 말인가. 그것을 어찌. 그가 그토록 극진히 대접한 이가 그녀의 첫 낭군이란 사실을. 그 비녀를 준 이가 그이였음을. 나는 새 지아비를 구하러 길을 떠나온 과부가 아니라, 죽음이 싫어 도망친 정승댁 며느리임을.

하지 못할 말이었다. 아니, 하기 싫은 말이었다.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각시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여인의 다른 지아비를 그토록 기뻐하며 배웅하게 해 놓고 무슨 면목으로.

그래, 그러니 그 일은 생각하지 않으련다. 죽어 천벌을 받아도 좋으니, 그 벌은 혼자 짊어질 테니, 사는 동안 무헌에게 그것만은 털어놓지 않을 테다. 그가 상처받는 걸 어찌 보려고. 그걸 보는 나는 또 어찌 살라고.

못된 것은 나 혼자요, 배덕한 이도 나 혼자니, 오직 죄로 인한 상처도 나의 것이다. 팔자를 고치겠다고 사람을 죽이려 한 것도, 부모 형제와 조상님을 모두 저버리고 무연고(無緣故)한 이로 사는 것도 다 나의 죄니, 여기에 다른 죄 하나 더 얹는다고 새삼 무엇이 두려울까. 처음부터 모두의 죄는 나로 인해 시작된 것이니, 나 홀로 죄인이요, 나 홀로 마음을 찢을 것이다.

그러니 곱고 고운 내 낭군님은 좋은 것만 보고, 기쁘기만 하기를. 나로 인한 아픔은 아무것도 겪지 말기를….

그래, 그러니 됐다. 이유가 아무러면 어떤가. 내 낭군님이 가자고 하면 가는 것이지. 어디든 좋았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가 하자고 하는 일은 무엇이든 기꺼이 따를 테니까.

평안해진 하연의 입가가 가만히 솟았다. 여전히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무헌의 손을 끌어당겨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내 낭군. 내 서방. 내 지아비….

“…으음?”

지그시 눈을 감던 하연은 문득 입술을 떼고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가슴에 얹고 있던 무헌의 다른 한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잠결이라기엔 조물조물 젖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이 너무 집요했다. 덕분에 머릿속에 가득했던 상념들이 훅 불어 꺼 버린 촛불처럼 순식간에 걷혔다.

‘혹시 깼나?’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러질 못했다. 목뒤에 퍼지는 숨결이 일정한 것으로 보아 잠에서 깬 건 아닌 듯한데, 어째 손놀림은 점점 더 농밀해졌다.

‘아아, 이건….’

가슴을 찬찬히 문지르더니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굴렸다. 손바닥으로 덮고 부드럽게 쥐었다 놓고는 배를 쓸며 아래로 내려갔다. 물 흐르듯 배꼽 아래를 더듬었다. 음모를 살살 쓸던 손이 조금 더 힘을 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애무에 하연은 다리를 기역 자로 오므려 힘을 주었다. 그런데도 겹쳐진 사타구니를 비집고 은밀한 곳에 그의 손이 닿았다. 가슴을 주무른 것과 똑같이 손바닥을 덮고 다정히 쥐었다가 손가락을 굴렸다가 주무르기를 반복했다.

이쯤 되니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게 맞다 싶었다. 고개를 앞으로 숙여 돌아보려 하자 본능처럼 그가 몸을 당겨 바짝 붙어 왔다.

전보다 몸이 더 밀착됐다. 아래를 주무르던 손길은 멎었으나, 여전히 그곳을 손바닥이 덮고 있었다. 이젠 엉덩이까지 그의 허리에 꼭 맞춘 듯 붙어 버렸다. 당장 그의 물건이 뒤에서 들어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세였다.

‘말도 안 돼….’

무헌은 여전히 자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게 잠결에 한 행동이란 걸 깨닫자 허탈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아아. 자면서도 각시밖에 모르는 열혈 낭군.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민망한 자세로 아침까지 있을 걸 생각하니 아득하고 아득했다.

엉덩이 골 사이에 그의 물건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분명 몇 번의 교합 끝에 풀이 죽는 걸 보았는데, 언제 이리 단단히 일어선 건지. 조금만 움직여도 저 뜨거운 것이 저절로 꽂힐 것 같았다.

손이라도 다시 위로 올려 주면 좋으련만.

속도 모르고 배꼽 아래가 뭉근해졌다. 잠든 그의 손이 그곳을 덮고 있을 뿐인데, 그것이 기분을 요사스럽게 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그와 맨살이 비벼져, 그야말로 홀로 앓는 신음을 내었다.

이러다 젖으면 어떡하나. 그럼 또 놀림을 당할 텐데.

아침부터 맛있는 게 나왔다며 다리를 벌리고 쪽쪽 빨아 댈 게 뻔했다.

“흐읏….”

하연은 얼른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그 광경을 떠올린 것만으로 다리 사이로 왈칵 뜨거운 액이 쏟아져 버렸다.

이를 어쩐다.

무헌의 손이 흠뻑 젖었을 것이다. 홀로 깨어 있는데도 민망함에 뺨이 화끈거렸다. 아무거로라도 닦아 내야겠다 싶어 방 안을 눈으로 훑었다. 무헌이 그녀에게서 벗겨 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속곳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각시야….”

부르는 소리에 움찔 굳었다.

“깨, 깼어?”

“안 깰 수가 없잖아.”

아래를 덮고 있던 무헌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에 고여 있던 뜨겁고 축축한 액이 음모를 지나 배꼽을 훑고 젖가슴까지 미끈거리며 이어졌다.

“이렇게나 많이 나왔는데.”

무헌의 뜨거운 입김이 목을 간질거렸다. 하연은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팽 돌려 말했다.

“뭐, 뭐가.”

“뭐긴. 이것 봐, 여기까지 이어졌어.”

무헌이 고개를 들어 젖가슴을 넘겨다보았다. 손에 묻은 애액을 젖꼭지에 묻혀 비빈 그가 씨익 웃었다.

어둠 속에서 맞닿은 그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반짝거렸다. 도무지 잠을 자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약이 오르는 것과 별개로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몰라. 내 거 아냐.”

시뻘게진 얼굴을 그의 팔에 파묻었다. 그러자 무헌의 손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질퍽한 소리와 함께 그가 젖은 아래를 확인했다.

“각시 거 맞는데?”

하연은 눈을 꾹 감아 버렸다. 큭큭 웃는 무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거지? 일부러 그런 거지?”

너무 창피하니 도리어 목소리가 커졌다.

“사내가 비겁하게.”

눈을 흘기듯 쏘아보자 무헌이 무고한 얼굴을 했다.

“방금 깼는데? 꿈에서 누가 이놈 꼭지를 자꾸 두드려 대서.”

무슨 소린지 이해 못 하는 하연에게 무헌이 친절히도 그녀의 엉덩이 사이에 그의 물건을 꾸욱 눌러 주었다.

“이놈 말야.”

“…….”

“이제 보니 각시가 두드린 거네. 얼른 깨서 들어와 달라고.”

얼굴이 터져 버릴 것처럼 화끈거렸다. 달빛에도 빨갛게 변한 얼굴이 들킬 것 같아 하연은 다시 무헌의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아, 각시야. 이놈도 울고 있으니까.”

“…울다니?”

무헌이 그의 물건을 하연의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무헌의 것에서 나온 축축한 액이 미끈거리며 아래를 문지르자 하연의 엉덩이가 자르르 떨렸다.

“각시 여기도 울고, 내 여기도 울고.”

무헌이 하연의 아래와 제 물건 끝을 차례로 톡톡 쳤다.

“떨어져 있어서 슬퍼 그런 거니 만나게 해 주면 되지.”

“그게 무슨… 으흡!”

뒤에서 푹 찔러 오는 동작에, 더 듣지 않아도 이해가 되었다. 무헌이 하연의 엉덩이를 잡고 다시 한번 더 파고들었다.

“아읏! 미쳤어. 그렇게 하고도 어떻게 또, 흐읏!”

잔뜩 젖은 아래가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철퍽 소리를 냈다. 빠르지 않게, 그러나 강하게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옆으로 누운 하연의 몸이 들썩거렸다.

토끼가 방아를 찧듯, 사이좋은 아낙네들이 절구를 찧듯, 규칙적이고 음탕한 소리가 찰박, 찰박 이어졌다.

“하응, 으으응, 하으….”

시간이 갈수록 하연의 신음도 노랫가락처럼 이어졌다.

“거봐, 각시야. 이제 안 울고 모두 기뻐하잖아.”

무헌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귀를 잘근잘근 씹었다. 손은 수풀 사이를 헤집고 오뚝 일어선 곳을 찾아 눌러 비볐다.

“하윽! 아앗!”

하연의 몸이 파닥거리며 튀었다. 무헌은 그녀를 팔과 다리로 가둔 채 더 집요하게 굴었다. 하연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몸을 뒤틀며 엉덩이를 떨었다.

한밤중에 시작된 괴롭힘은 무헌이 세 번째 파정을 한 후에야 끝이 났다. 까무룩 잠이 들면서 본 건, 퍼렇게 동이 터 오는 하늘이었다.

***

“…헌아! 무헌아!”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무헌과 하연은 동시에 잠이 깼다.

“무헌아!”

양윤의 음성이었다.

“응!”

무헌은 하연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준 후, 급히 바지를 입고 저고리를 걸치며 방문을 열었다.

아직 채 밝지 못한 아침이 쏟아져 들어왔다. 막 떠오른 해가 주황빛을 쏘아 보내, 무헌은 눈을 찡그렸다.

“우리 양선이, 우리 양선이!”

양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툇마루 아래로 내려선 무헌은 급히 신을 신으며 방문을 닫았다. 하연은 몸을 조금 일으켜 방문 밖의 대화에 귀를 세웠다.

“양선이가 없어졌어!”

“언제?”

“새벽에 오줌 누고 오니까 사라졌어. 문고리에 묶어 놓고 다녀왔는데, 그새 이걸 풀고 나갔어.”

양윤이 끈을 들어 보였다. 행여 양선이 밤에 나갈까 싶어, 잘 때마다 그와 양선의 다리 한 짝씩을 묶어 연결해 놓는 끈이었다.

잠결에 돌아다니는 병이라 끈을 풀지는 못한다 하여 믿고 사용해 오고 있었는데, 오늘은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근처를 다 뒤졌는데 없어. 어두워 발을 헛디뎠을 수도 있는데. 한 시진이나 지났는데. 어디 멀리 갔으면 어떡해. 범골이라도 갔으면 어떡해. 호랑이, 호랑이라도 만났으면 어떡해!”

양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채 여미지도 못한 옷은 흙으로 엉망이었다. 날이 밝지도 않은 산을 혼이 나간 채 헤매고 다녔으니, 몇 번을 구르고 넘어졌을 게 뻔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진작 같이 찾자고 하지.”

서둘러 옷을 여민 무헌이 헛간으로 향하며 나무랐다.

“덕삼이는.”

“아, 아직.”

“가면서 데려가면 되고. 너 이 신으로 갈아 신어.”

짚신을 꺼내 양윤에게 던졌다. 밑창이 다 닳은 줄도 모르고 있던 양윤이 허겁지겁 신에 발을 끼워 넣었다.

“이걸로 단단히 묶고.”

양윤에게 새끼줄을 건넨 무헌이 자신의 신도 단단히 동여맸다. 혹시 몰라 활을 어깨에 메고 쓸 만한 것들을 봇짐 속에 욱여넣고 나오던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양윤이 짚신의 앞뒤를 거꾸로 신은 채 서 있었다.

“앉아 봐.”

양윤의 어깨를 눌러 평상에 앉힌 무헌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의 신을 바로 신겼다. 양윤이 더듬더듬 손을 내렸다.

“내, 내가 할게.”

“됐어, 이 똥 손아.”

툭 내뱉은 무헌이 새끼줄을 집었다.

“이런 건 내가 더 잘해.”

양윤의 발을 신에 단단히 고정한 무헌이 그를 올려다봤다. 울먹거리는 양윤의 눈이 마주쳐 왔다. 무헌은 입술을 앙다물고 일어섰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각시야. 다녀올게.”

방에 대고 말하자, 그사이 옷을 챙겨 입은 하연이 방에서 나왔다.

“나도.”

하연의 눈이 혼이 나간 듯한 양윤을 찍고 왔다.

“나도 갈게.”

“…….”

잠시 고민하던 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시는 양윤이 집에 가 있어. 혹시 양선이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응. 방울네랑 근처도 뒤져 볼게.”

“멀리는 가지 말고.”

“그럴게.”

무헌의 당부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두껍게 누빈 겉옷 하나씩을 건넸다.

“날이 차. 입고들 가요. 그리고.”

하연은 덜덜 떨고 있는 양윤의 손을 겹쳐 잡았다. 까이고 베인 차가운 손이 움찔 굳었다.

“양선이는 별일 없을 거예요. 무사히 찾아서 데리고 올 수 있을 거예요.”

또박또박 눈을 마주치고 말하자 넋이 나가 있던 양윤의 눈동자에 어느덧 초점이 돌아왔다.

“우리 낭군, 뭐든 잘 찾잖아요. 예전에도 애먼 곳에 있던 날 잘도 찾아내서 데리고 왔는걸요.”

무헌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렁해진 눈으로 보던 양윤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정신을 가다듬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하연이 건넨 겉옷을 겹쳐 입은 후 숨을 들이켰다.

“가자, 무헌아.”

그 말에 무헌이 양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걸음을 뗐다. 양윤은 하연에게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무헌과 함께 걸었다.

하연도 옷을 여민 채 서둘러 발을 놀렸다. 아침 공기가 제법 찼다.

제발, 제발 양선이 무사하기를.

이제 막 하늘로 떠오른 해가 어서 산을 데워 주기를.

벌써 저만큼이나 멀어진 사내들의 등을 눈으로 배웅하다가, 방울네로 향하는 길로 몸을 돌렸다.

***

한나절이나 지났지만 양선이를 찾으러 나간 무헌과 양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연은 다리를 두드리며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덕삼 할머니를 양윤의 집에 두고, 그녀와 방울네는 짝을 지어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봤었다. 행여 어디 넘어져 있는 건 아닐까, 개울이며 도랑까지 샅샅이 훑어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고, 다리야.”

방울네가 다리를 콩콩 두드렸다. 하연도 기운이 빠져 냉수를 마셨다. 세 아낙이 나란히 앉아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덕삼 할머니가 주먹밥을 내밀었지만, 여태 빈속으로 산을 누비고 있을 무헌과 양윤 생각에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용순이는 왜 여태 아직이지?”

방울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용순이가 왜요?”

“아까 봉희 깨워서 마을에 내려가 본다고 했거든. 혹시 거기 가 있을까 해서.”

“그러네. 밑에 마을에 갔을 수도 있겠네.”

덕삼 할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거기 장이 서면 양윤이가 이것저것 사다 주고 했으니까, 그 기억에 갔을 수도 있지.”

“벌써 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방울네가 목을 빼고 두리번거렸다.

“걔들도 찾아다니느라 시간이 걸리나 보지.”

“봉희 년이 아침잠 깨웠다고 또 앙탈 부리다가 시간 잡아먹었겠지요. 안 봐도 뻔하네.”

방울네가 혀를 끌끌 차며 주먹밥을 집어 하연에게 들이밀었다.

“먹읍시다. 우리도 먹어야 기운 내서 찾아다니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

그 말도 맞다 싶어 하연은 주먹밥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용순의 고함이 들려왔다.

“일 났어요! 일 났다고요!”

불안한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모두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겁지겁 달려온 용순이 사립문을 붙들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사람이 죽었대요!”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누가, 누가 죽었는데?”

“웬 젊은 여자가 물에 빠져 떠내려오는 걸 밑에 마을에서 건졌는데, 양반 옷을 입고 있어서 마을이 발칵 뒤집혔대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어서, 밤새 사라진 사람 있냐고 방을 붙여 놨더라고요.”

“야, 양반 옷?”

“예. 봉희가 더 알아본다고 영주 관아로 시신 옮기는 걸 따라갔어요. 그런데….”

꼴깍 마른침을 삼킨 용순의 눈이 다음 말을 주저했다.

“봉희 말이, 그 여자 신발이 낯이 익다고…. 어, 얼마 전 양윤 오라버니가 장에서 산….”

“에구머니나!”

방울네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연은 비틀거리는 덕삼 할머니를 붙잡은 채 숨을 들이켜야 했다.

***

덩치 큰 사내 무리가 관아 근처를 서성였다. 행인들은 한눈에도 험상궂은 그들을 흘끔거리며 피해 갔다. 거리낄 것 없이 방만하게 서 있던 그들이 관아로 빠르게 걸어오는 남자를 보자 갑자기 자세를 갖추고 섰다.

“여, 여긴 어떻게….”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오는 우두머리를 차갑게 지나치던 민정후가 문득 그를 향해 섰다.

“자네가 돌쇠인가?”

“예? 아, 예.”

“…….”

답을 듣고도 민정후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저 시퍼런 눈길로 한참을 쏘아보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쇠는 뒤늦게 숨을 내쉬며 민정후의 등을 찝찝하게 바라봤다.

“형님. 이제 어쩝니까?”

수하 한 놈이 눈치를 보며 다가섰다. 가뜩이나 부글거리는 속이 그 바람에 가래침이 되어 나왔다.

카악, 퉤!

형방에게 돈 몇 푼 쥐여 준 후 시신을 빼낼 심산이었다. 노마님께 가져가 확인을 받아야 남은 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시신을 확인하겠다는 자들로도 모자라, 저 고매하신 나리까지도 가세하셨다.

그러게, 이제 어찌한다.

돌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민정후가 사라진 곳을 불만스럽게 쏘아보았다.

***

한동안 이어지던 울음소리가 이제 잦아들었다. 양윤은 꼬박 반 시진을 울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그쳤다기보다는 지쳐서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하는 것뿐이었지만, 아전은 그것으로 진정이 됐다고 여겼는지, 양윤이 붙잡고 우느라 흐트러진 덮개를 양선의 주검 위로 반듯하게 덮어 정리했다.

그러고는 여태 장승처럼 옆에 서 있는 무헌의 눈치를 보았다.

무헌은 덮개에 가려진 양선의 머리끝과 발끝을 가만히 눈으로 쓸었다. 그의 눈가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여태 소리를 죽인 채 우느라 턱이 뻐근했다. 차마 소리 내어 울 수가 없었다. 마치 그의 탓인 것만 같아서.

양선은 절벽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자결을 했다. 무헌이 주었던 그 은장도로 스스로 심장을 깊이 찔렀다.

양선이 그렇게 행동한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무헌은 관아 앞을 지키고 있는 돌쇠 패거리들로 미루어 사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하연을 찾느라 산을 뒤지고 다녔을 게다. 그러다가 양반 옷차림을 한 양선을 보았을 거고, 그녀의 머리에 꽂힌 비녀도 보았을 거다.

사내들이 뒤쫓으니 양선은 도망쳤을 테고, 궁지에 몰리자 어느 고매한 집안의 아씨 마님처럼 은장도를 꺼내 들었겠지.

그걸 보고 저들은 더 확신했을 거고, 양선은 그들이 무서워 은장도를 제 가슴에 찔러 넣은 거다. 그리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진 거다.

그러니 은장도를 준 제 탓이었다. 비녀를 되찾아 오지 않은 제 탓이었다. 저 무뢰배들이 산을 뒤지는 걸 알면서도 내 각시는 안전하니 됐다고 방심했던 제 탓이었다.

“얄궂은 것. 기어이 사대부 집 아씨처럼 갔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양윤이 헛헛하게 중얼거렸다. 무헌은 숨을 들이켜고, 주저앉아 있는 양윤을 보았다.

“양선아, 이것 봐. 무헌 오라비가 선물 가져왔다.”

기뻐하던 양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이 으, 은혜는 죽을 때까지 이, 잊지 않겠네. 어, 어딜 가든 항상 품에 간직하고 다, 다닐 것이야.”

그토록 좋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저 비녀가, 저 은장도가 양선이를 데려갔으니, 나는 이제 내 친우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인가.

“…고맙다, 무헌아.”

뜻밖의 말에 무헌의 눈이 흔들렸다. 양윤이 퉁퉁 부어 짓무른 눈으로 무헌을 올려다보았다.

“네 덕에 우리 양선이, 진짜 양반 댁 아씨처럼 갔다.”

“…….”

“살아서는 한 번도 양반처럼 못 살아 보더니, 네 덕에 죽는 것은 그렇게 갔어.”

양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울음과 함께 물렸다. 그의 진심에 무헌은 왈칵 울음이 치고 올라왔다.

“병신. 별것이 다 고맙다.”

결국 고개를 돌리고 흐느끼자 양윤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진짜야. 진짜로 고마워.”

“흐윽… 어우, 저 천치….”

“있잖아, 무헌아. 우리 양선이… 어차피 얼마 못 살았어.”

놀라 바라보자 양윤이 차갑게 굳은 양선의 손을 덮개 밑에서 꺼내 잡았다.

“의원이 그랬어. 올겨울 못 넘기고 죽을 거라고. 가을만 다 보고 가도, 오래 버티는 거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양선이 아파. 아파서 피도 몇 번을 토하고 그랬어.”

“…….”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댔어. 그냥, 살아 있는 동안 하고 싶은 거나 다 하게 하라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입고 싶은 거 다 입게 하라고… 흐윽….”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은 양윤이 다시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러니 우리 양선이 괜찮아. 입만 열면 사대부 집 규수가 어떻고, 정조가 어떻고 해 대더니, 결국 스스로 그리 믿고 갔잖아. 멋지게, 지조 있는 아씨들처럼 은장도로 저를 지켰잖아.”

“양윤아….”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은 탓에 병 얻어 일찍 죽은 불쌍한 아이도 아니고, 여기저기 친척 집 떠돌다가 버리듯 시집보낸 곳에서 모자란다고 소박맞고 쫓겨난 바보 천치도 아니고, 높으신 양반집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란, 귀하디귀한 구양선으로…. 우리 양선이, 그렇게 살다가 간 거야.”

양윤의 목소리는 흐느꼈지만 그의 눈은 그렁한 채 웃고 있었다. 무헌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양윤을 끌어안았다.

엉엉 울음이 터졌다. 양윤도 다시 울음이 시작됐다. 사내 둘이 엉겨 붙어 그렇게 또 한참을 울었다.

“그런데 무헌아. 나 어쩌냐….”

양윤이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나, 우리 양선이 진짜 사대부 집 아씨들처럼 만장 휘날리는 꽃상여에 태워 장례 치러 줘야 하는데. 그런다고 약속했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데….”

무헌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끄덕였다.

“하면 되지. 하면 돼. 내가 그리해 줄게.”

“정말? 정말 그리해 줄래?”

“그럼. 내가 어떻게든 그리해 줄게. 소리꾼에 방상시(方相氏) 세우고, 영여(靈輿)도 메고.”

“으어어, 고맙다! 고맙다, 무헌아!”

“어우, 천치. 별게 다 고마워.”

“다 고마워. 몽땅 다 고마워!”

“…저어.”

여태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만 보던 아전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건 곤란하지 싶은데….”

“뭐가 말이요?”

무헌과 양윤이 동시에 쏘아보았다. 아전이 곤란하게 수염을 긁었다.

“그렇게 하려면 돈도 돈이려니와, 그런 화려한 장례는 양반들만 하는 거라….”

“그런 법이 어디 있소?”

무헌이 따지자 아전이 한숨을 내쉬었다.

“있지. 법은 없어도 그런 법은 있어.”

“그게 말이요, 방귀요?”

“조그마한 상여 정도는 멜 수 있으나, 만장 휘날리는 꽃상여에, 소리꾼에 방상시라. 게다가 요여까지? 멀쩡한 양인도 그리 장례를 치렀다간 치도곤을 맞는데, 하물며….”

“…뭐요? 하물며 뭐? 하물며 뭐!”

양윤이 버럭버럭 대들자 아전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이 여인은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모자란 천치에 정신이 나갔….”

“뭐가 어째!”

양윤이 눈이 뒤집혀 따지자 아전이 겁에 질려 무헌의 뒤로 숨었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그쪽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동생 장례 치르다가 황천 갈 일 있어? 윗분들께서 가만 안 둘 거라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냐.”

“…….”

“나도 다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라고. 순간의 기분으로 약속할 일이 아니라는 거지.”

“이자가 그래도!”

“그리하시게.”

불쑥 끼어드는 음성을 무헌도, 양윤도, 아전도 처음 얼마간은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엉겨 붙은 채로 움직임이 멎은 세 사람의 눈길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리해 보자고.”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역광에 보이지 않던 얼굴이 뒤로 문을 닫자 비로소 드러났다.

“당신….”

먼저 상대를 알아본 무헌의 눈이 커졌다.

“내게 방법이 있을 듯도 하네만.”

아전을 지나 양윤을 훑고 온 눈이 무헌에게 고정됐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민정후가 물었다.

“어찌, 나와 도모해 보겠는가?”

“…….”

말없이 시선을 받아 내던 무헌이 민정후의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섰다. 벌어진 나무 틈을 통해 들어온 빛이 무헌의 얼굴을 가르고 지나갔다.

민정후가 긴장한 숨을 삼킬 무렵, 무헌의 낮고 또렷한 음성이 그에게 닿았다.

“그럼 이제.”

“…….”

“저 비녀에 관해 이야기할 때인가 보군요.”

***

오일장이 크게 열린 마을은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들썩거렸다. 광대패까지 끼어들어 마을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광대패의 현란한 묘기에 모두가 정신을 팔고 있을 무렵, 근방에서 보기 드문 사인교 가마 한 대가 인적이 드문 길을 지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영주 관사 앞에 내려섰다.

끼이익. 나무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자 부유하던 먼지가 희게 모습을 드러냈다. 컴컴한 고방에 홀로 누워 있던 여인의 주검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 곁으로 민정후와 노마님이 다가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 고방의 빛은 미약해졌다. 노마님은 고약한 냄새에 코를 조금 찡그렸을 뿐, 꼿꼿이 선 자세로 미동도 없이 하얀 천이 덮인 주검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민정후는 그 뜻을 읽었다. 기어이 얼굴을 보시려 함이다. 그는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하얀 덮개를 끌어 내렸다.

“……!”

아주 살짝, 노마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부패하기 시작한 여인의 얼굴을 피하지는 않았다.

턱을 높이 든 채 눈만 내려 여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노마님이 어느 순간 고개를 틀었다. 민정후는 그 신호에 다시 덮개를 끌어 올렸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 침묵이 흘렀다. 민정후는 긴장한 채 자신의 어머니를 살폈다.

“비녀가.”

한참 만에 노마님이 입을 열었다. 민정후는 꼴깍 침을 삼켰다.

“맞구나.”

휘청, 졸이던 마음이 풀어져 민정후는 얼른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조금 전의 그 침묵이 그의 매정하고 매정한 모친이 죽은 며느리에게 보내는 일말의 애도였음을 이제는 알겠다.

참으로 모진 분. 한 번쯤은 ‘아가!’라고 외치며 눈시울 정도는 붉혀 주시지.

“하여, 이제 어찌할 것이냐.”

노마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성정답게 카랑하고 빳빳한 음성에 쇳소리가 묻어 나왔다.

“객사한 귀신을 집안에 들여 어쩌자고.”

처음 며느리의 죽음을 고했을 때도, 기어이 두 눈으로 그 죽음을 확인하겠다며 이곳까지 따라나섰을 때도, 그의 어머니는 참으로 담담했다.

민정후는 새삼 차가운 제 모친의 성정에 몸서리를 치며, 준비한 말을 꺼냈다.

“객사가, 아니옵니다.”

노마님의 눈썹이 비죽 솟았다.

“객사가 아니다?”

“예, 어머님.”

“…….”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마님의 얇은 입술 끝이 슬쩍 솟았다.

무슨 수가 있는 게로구나.

집안의 식구가 객사를 했다는 것은 사대부가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나랏일을 하다 변을 당한 사내도 아니고, 얌전히 아파 누워 있었어야 할 며느리가 밖에서 죽어 오는 것은 그야말로 애물단지 같은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야 사내다운 생각을 좀 하는 겐가, 늘 모자란 것 같던 아들의 말에 이제 조금 관심이 기울었다.

“정려문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민정후의 말에, 고매하게 허리께에서 맞잡고 있던 노마님의 손끝이 제법 떨렸다.

“방금 뭐라고. 정려문이라 하였어?”

누구보다 모친이 간절히 원할 것을 민정후는 알았다.

“예, 어머님. 정려문이요.”

모친의 눈과 입술이 꿈틀거렸다. 민정후는 모친에게 한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머님이 해 주셔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모친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한 자 한 자 힘줘 말했다.

***

“말도 안 돼.”

앞서가는 봉희의 걸음이 빨랐다. 용순은 그녀를 따라잡느라 숨이 벅찰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네가 가서 뭘 어쩌게.”

숨을 고르느라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저만치 앞선 봉희가 홱 몸을 돌렸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양선이 가죽신이 맞다니까.”

“양윤 오라버니가 아니라는데, 네가 왜 나서서 그래.”

“어우 참. 양선이가 죽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아 그런 거겠지. 양선이 당혜가 맞는데, 왜 몰라보냐고.”

가슴을 퍽퍽 친 봉희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용순은 하는 수 없이 비척거리는 걸음을 따라붙였다.

“괜히 양윤 오라버니 속 뒤집지 말고 그냥 있자, 좀!”

“너나 그냥 있어. 나는 가서 확인할라니까.”

“봉희야! 야아!”

얼마간 더 뒤따르던 용순이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저 성질머리, 자신이 말려선 들을 게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용순은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일을 알릴 만한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

“아까 나갔는데.”

하연의 말에 용순의 눈이 커졌다.

“어디를요?”

“오늘도 양선이 찾으러 나갔겠지.”

“어우 참. 이를 어째.”

“왜 무슨 일인데?”

용순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다.

어차피 양윤과 무헌이 함께 양선을 찾아다닐 테니, 영주 관아에 봉희가 가서 소란을 피운다 한들 양윤은 모를 것이다. 그러니 문제 될 것도 없지 싶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양윤이 다시 그쪽으로 갔다가 봉희의 말을 듣기라도 한다면. 혹여 그 소란으로 관아에서 양윤 오라버니에게 또 연통이라도 넣는다면.

그런다면 그 맘 약한 오라버니 속은 또 얼마나 놀라고 찢어질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동생이 죽었다고 연락이 오면, 저는 아마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저기요, 실은요….”

새댁 아씨가 산을 내려오지 않는 건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무헌 오라버니의 극성으로 집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새댁 아씨 말이라면 봉희가 듣지 않을까? 똑똑한 양반 아씨니 좋은 말로 잘 타일러 봉희의 오지랖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지금 영주 관아에 간 거야?”

사정을 들은 하연이 난감히 눈을 키웠다. 그걸 보니 괜히 말했다 싶어 용순은 조금 후회가 됐다.

괜히 새댁 아씨만 곤란하게 만든 거 같았다. 그냥 봉희를 따라갔었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로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같이 가자.”

“예?”

“빨리 가면 봉희를 데려올 수 있을 거야.”

“직접 가시게요?”

“관아에서 그렇게 아무나 들여보내 주진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가 가서 데려오면 돼.”

“하지만 무헌 오라버니가 새댁 아씨 밖에 나가는 거 싫어하잖아요.”

장옷을 들고나오던 하연이 그 말에 신을 신다가 잠시 멈칫했다. 양선이가 행방불명된 일 때문에 그러는지 요즘 무헌은 밖이 위험하다며 그녀의 외출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아예 집을 나서지 말라고 엄포까지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헌의 당부를 어기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도 산을 내려가는 것은 걱정되는 일이었다. 영주 관아는 정승댁과 멀지 않았으니까. 그 댁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도 있었으니까.

잠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옷차림과 신을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금방 다녀올 건데 뭐.”

이렇게 허름한 옷과 신을 착용한 자신에게 누가 관심을 줄까 싶었다. 혹시 몰라 장옷을 들고나오긴 했지만, 이것마저도 군데군데 기운 것이니, 그런 그녀를 정승댁 별당 아씨라고 생각할 이는 전혀 없을 듯했다.

“가자. 얼른.”

그보다는 더는 양윤이 속상해할 일이 생기는 걸 두고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지난번 발견된 시신이 양선이 아닌 것은 하늘이 도운 일이지만, 아직도 양선의 행방이 불분명하니 오라비 된 마음이 오죽할까.

아직도 양선의 행방이 불분명해, 밤낮으로 무헌과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그였다. 얼굴이 얼마나 초췌한지, 정말로 동생이 죽기라도 한 사람처럼 흙빛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봉희가 소란을 피운다면, 용순의 말대로 영주 관아에서는 양윤더러 다시 확인하라고 연통을 넣을 수도 있었다. 혹은 그걸 계기로 사건이 더 커질 수도, 혹은 양윤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의 마음은 또 얼마나 갈래갈래 찢어질까.

“어서 와.”

하연은 용순을 재촉해 걸음을 더 빨리했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이런 것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게 가족 같은 사람, 나의 혼례식을 마련해 주었던 사람, 무헌의 유일한 지기, 내 낭군님의 오랜 친우인 그에게.

***

관아 앞에는 왈패 같은 사내들이 여럿 있었다. 봉희는 그들이 말로만 듣던 무서운 돌쇠 패거리임을 알았다.

“여기 뭐 살림 차렸나? 저번에도 저러고 있더니 아직도 그러네?”

꿍얼거리긴 했지만,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자니 자꾸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그래도 관아 앞인데 무슨 일이야 당하겠냐 싶어 입을 앙다물고 꿋꿋이 걸었다.

“글쎄, 네가 시신을 왜 확인해?”

“한 번만 보면 된다니까요. 좀 들여보내 주세요.”

“어허. 안 된다니까 그러네.”

문지기들은 봉희를 귀찮아하며 밀어냈다. 봉희는 신경질적으로 땅을 뻥 차며 그들을 노려봤다. 어린것이 도대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문지기는 조금 인심을 쓰기로 했다.

“어차피 가 봐야 시신 없어.”

“예에? 없다니, 왜요?”

“무연고 시신이라 이미 매골승(埋骨僧)이 거둬 갔어.”

“아우우! 미치겠네! 무연고 아니라니까!”

빽 고함을 치자 문지기가 귀를 막았다. 봉희의 눈이 사나워졌다.

“언제 거둬 갔는데요?”

“그, 글쎄다. 얼추 한 식경 됐나?”

“어우, 내가 못 살아 진짜!”

봉희가 다급히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따라잡으려나, 길을 가늠하는 그녀의 눈이 빠르게 굴렀다.

지체할 것 없이 발을 내디뎠다. 여태 꼼짝 않고 관아 앞을 지키고 있던 돌쇠 무리들이 더는 이곳에 없었지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저기 봉희 아니에요?”

용순의 손끝을 하연의 눈이 뒤따랐다.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뒷모습이 딱 봉희였다.

“맞다!”

헉헉거리던 두 사람의 눈이 기쁘게 커졌다. 뭐라 할 것 없이 동시에 그 뒤를 쫓았다.

“봉희야! 봉희야아!”

용순이 큰 소리로 봉희를 불렀다. 봉희가 그걸 듣고 달리는 채로 돌아봤다.

그녀는 수레를 몰고 가는 사내 무리를 뒤쫓고 있었다. 대체 누굴 따라가는 건가, 고개를 빼고 보는데, 봉희가 마구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얼른!”

돌아오라고 했더니 되레 오란다. 용순은 기가 차서 손나팔을 만들어 고함을 질렀다.

“너야말로 이리 오라고!”

들은 둥 만 둥 봉희는 계속 달렸다.

“야아! 봉희야아아!”

그 커다란 고함에도 봉희는 꿋꿋이 달렸지만, 그걸 들은 다른 이가 있었다. 멀리 떨어져 사내 무리들을 보고 있던 무헌과 양윤이 그 목소리에 눈을 키웠다.

“정말 봉희네.”

“그러네. 저기는 용순이고.”

“그 옆에는… 어!”

무헌이 한 걸음을 나와 섰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이가 그 옆에 있었다.

“어떡해?”

양윤이 다급히 물었다. 무헌의 눈이 수레를 끌고 가는 사내들과 봉희를 지나 하연까지의 거리를 짚었다.

“넌 봉희 데려와. 난 각시한테 갈게.”

양윤이 눈물로 흥건해진 얼굴을 손으로 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헌이 가려다 말고 양윤의 어깨를 짚고 마주 봤다.

“괜찮아?”

양윤이 코를 들이마셨다.

“응. 다 울었어.”

“…….”

그런데도 무헌의 시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떠나는 길을 배웅하려던 일이 이렇게 끊긴 게 못내 아쉬웠다.

“가, 어여. 아직 저 댁 정경부인 마님이 근처에 있어.”

이번에는 양윤이 먼저 무헌의 등을 떠밀었다.

“네 각시 들키면 큰일 나잖아.”

그러게, 그러면 진짜 큰일이다. 무헌은 양윤의 어깨를 꾹 잡았다 놓고는 하연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잠깐만! 잠깐만 서 보라니까요!”

봉희의 끈질긴 외침에 결국 수레가 섰다. 숨을 헐떡이며 다가가던 봉희는 사내들을 보고 움찔 멈춰 섰다. 돌쇠 패거리들이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몰골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무슨 일인가?”

무리 앞에서 걷고 있던 패랭이를 쓴 중년의 남자가 마뜩잖게 돌아봤다. 왈패로는 보이지 않는 초로의 사내였다. 돌쇠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그가 손짓하자 다시 사내들이 말이 끄는 수레를 몰았다. 발을 들썩이던 봉희의 눈길이 수레에 닿았다. 사람을 싣고 가기에 딱 좋은 수레.

이 중에 스님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지만, 매골승이 일을 맡긴 걸 수도 있으니까 일단….

“누구 시신인지 알아요!”

수레가 다시 멈췄다. 지금까지 무시하던 사내들의 눈길이 일제히 돌아봤다.

시신이 맞구나. 봉희는 자신감에 한 발 다가섰다.

“그 시신 우리 마을에 사는 양….”

“양선아!”

“그래요, 양선… 응?”

터억 어깨를 잡는 손길에 봉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여기서 뭐 해! 이 오라비가 얼마나 찾았는데.”

“양윤 오라버니….”

“어여 가자. 여기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했어, 안 했어. 자꾸 오라비 말 안 듣고 나다닐 거야?”

“아니, 저기, 오라버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저기 저 수레에… 읍.”

봉희의 입을 막은 양윤이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제 동생이 좀 모자라서요.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불러 세워 놓고,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답니다.”

패랭이를 쓴 사내가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지었다. 이 일을 비밀리에 완수해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지라, 그도 나름대로 긴장을 했던 탓에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거 몹쓸 버릇이구만.”

“얘가 어려서는 안 그랬는데,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많이 구박을 받았는지 천덕꾸러기 생활 수년 만에 이리 덜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여 갈 길 가셔요.”

“크흠, 뭐 그렇다니 거 유감이네.”

패랭이 사내가 고갯짓을 하자 수레가 다시 출발했다.

“그럴수록 동생 관리를 잘해야지.”

무리 중 한 명이 거들먹거리며 한마디를 내놓고 갔다.

“예, 예.”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양윤의 눈길이 어느 순간 그들이 끌고 가는 수레에 닿았다.

묵직한 눈길이 한참을 뒤따랐다. 사람들에 가려 더는 수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그들의 틈을 비집고 수레의 한 귀퉁이를 좇고 또 좇았다.

잘 가라.

곧 또 보러 갈게.

“…으읍. 읍!”

봉희가 그의 손등을 탁탁 때렸다. 양윤은 그제야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었다.

“어우, 진짜. 뭐예요, 오라버니! 미쳤어요? 대체 왜….”

따지고 들던 봉희의 말이 양윤의 붉어진 눈을 보자 수그러들었다.

“오라버니….”

양윤이 급히 눈시울을 닦았다.

“미안. 미안해.”

애써 웃은 그의 눈길이 다시 수레가 지나간 길로 향했다. 봉희는 더는 아무것도 없는 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양윤을 보았다. 왜인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성난 걸음으로 산을 올라온 무헌은 집에 당도하자마자 하연의 손을 놓고 등을 보이고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그 숨을 가라앉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연은 감히 말도 걸지 못하고 그의 등이 돌아서기만을 기다렸다.

아랫마을에 당도했을 때, 무헌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대로 손을 잡아끌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용순에게도 집으로 가라는 짧은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 먼 길을 걸어 올라오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걸음을 따라잡으려 뛰듯이 걷는 동안에도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무헌이 이렇게 성이 난 것은 처음 보았다. 어찌나 서늘한지 찬바람이 없는데도 몸이 떨렸다.

“미안해.”

꽉 잠긴 목구멍에서 겨우 저 말 하나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아직도 돌아서지 않는 그의 등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다. 그가 왜 이토록 화가 났는지를. 그동안 왜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는지도.

얄궂게도 다 봐 버렸다. 다 봐 버렸고, 그래서 다 알아 버렸다.

절대 그곳에 있을 리 없는 그 고고하신 정경부인의 가마. 수레를 끄는 사내 무리. 그들을 이끌고 가던 패랭이를 쓴 낯익은 사내.

그리고… 그곳에 있던 민정후와 양윤과 무헌.

그 패랭이는 노마님의 심복인 마 서방의 것이다. 뒤태만 보아도 소름이 돋는 그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났었다.

그러다 개울에서 건진 시신의 가죽신이 양선의 것이 맞다는 봉희의 말이 뇌리를 치고 갔다. 양선이 가져갔던 비녀가 지표처럼 하연의 생각을 이끌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았다.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찌 둔갑을 했을까,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할까.

설마설마하던 생각이 망치로 정을 내리치듯 박힌 것은 그곳에 있던 무헌과 양윤 때문에. 탈주라도 하듯 그녀의 손을 잡고 내달리는 무헌 때문에. 이렇게 격앙된 채 그녀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그녀의 낭군, 때문에.

‘다 알아 버렸구나.’

그러게, 다 알아 버렸어.

그녀가 누구인지를. 누구로부터 도망쳐 나왔는지를. 그저 보쌈해 와 데리고 살 수 있는 그런 과부가 아니란 것도. 전에 집에 왔던 당하관이 그저 시관이 아니었음도.

그걸 알고도 어찌 내색 한번 안 했을까.

누구에게라도 들켰다면 크게 고초를 겪을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그런 위험을 알고도 속였으니 깊게 실망해 쳐다보기도 싫었을 일이었다. 전남편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놔뒀으니 배신감에 당장 내쫓았을 수도 있을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어찌 나를 위해 그런 일을 벌인 거야?’

‘당신도, 양윤도, 민정후도 모두 어찌 나를 위해 그런 일을 벌인 건데?’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아직도 돌아서지 않는 무헌의 등이 매캐했다. 보고만 있는데도 시퍼렇게 멍이 드는 것 같았다.

‘왜 아직 돌아보지 않는 거야?’

‘왜 그리 무섭게 화를 내는 거야?’

저 등이 돌아서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전처럼 고운 눈으로 보아 주지 않으면 어쩌나 무섭도록 두려워졌다.

‘이젠… 이젠 내가 버거운 거야?’

‘모두를 그리 만든 내가, 징그럽고 무서운 거야?’

‘그래서 돌아봐 주지 않는 거야?’

심장을 한 겹 한 겹 저며 내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 가슴을 그러쥐어도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흐르는 눈물에 뺨이 베이듯 아팠다.

“천치.”

그런데도 그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오는 내내 저를 꽉 붙들고 있던 그의 손 때문에.

“바보.”

조금만 비틀거려도 행여 넘어질세라 힘줘 잡아당겼던 그 손 때문에.

“천하의… 머저리.”

“자기 낭군을 그렇게 부르는 각시가 어디 있어?”

기다란 눈이 힘을 주고 돌아보았다. 불만이 덕지덕지 붙은 눈길에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노려보는 그 눈시울이 울 것처럼 붉었다. 그걸 보자 온 힘을 다해 깨물고 있던 입술이 툭 풀렸다.

아아.

“낭군님아!”

살면서, 이렇게 큰 걸음은 내디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연은 그대로 달려가 무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몇 걸음에도 온 힘을 실었다. 그토록 단단하던 사내가 그녀에게 밀려 휘청거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흑! 흐으윽, 흐윽….”

익숙한 땀 냄새를 맡자 서러운 울음이 터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안도가 되었다. 서늘하게만 보였던 품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눈물로 뜨겁게 젖어 가는 옷 너머로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 해 놓고 뭘 잘했다고.”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렸다.

“아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고.”

그도 두려웠구나. 그도 겁이 났었구나. 그걸 이제야 알겠다.

“내 눈이 병신이 돼서 각시가 아닌 사람을 각시로 보는 줄 알았다고.”

그러니, 아직 두 팔을 등 뒤로 둘러 주지 않는 건 그의 작은 오기.

“아무튼 이렇게 낭군 말 안 듣는 각시는 나라님도 못 들어 봤을 거다.”

그러나 결국 머리를 당겨 안고 등을 토닥여 오는, 어쩔 수 없는 나의 낭군.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줄 테야.”

하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가는 길마다 돌부리를 파내 줄 테야.”

“…….”

“평생 아끼고 사랑할 테야.”

“…….”

“바라는 건, 다 해 줄 테야.”

허리에 두른 팔을 꼭 당겨 그를 감쌌다. 귓등을 울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 아늑하고 단단한 품. 마음이 놓이는 땀 냄새.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이 사내 없이는 살라고 해도 살지 못할 것이다.

***

요 며칠 귀둥 마을과 가까운 영주 관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개울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무연고자로 밝혀져 매골승(埋骨僧)이 거둬 가 장례를 치렀고, 잡무를 맡아보던 아전 하나는 승급이 되어 멀리 평양으로 이전되었다.

오일장이 열려 사람들로 무척 붐비던 어느 날에는 고가의 가마가 영주 관사에 들렀는데, 누군가가 그게 정승댁 노마님을 태운 가마라고 말했다가 사람들로부터 터무니없다며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계절을 넘기며 마을을 돌아다니던 돌쇠 무리들은 어디를 갔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고, 그로부터 얼마 안 가 정승댁 별당 아씨의 부고 소식이 영주 현감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은 6년 넘게 수절 과부로 살다 병을 얻은 그 댁 아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지만, 양반들은 그 죽음을 명예롭다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아내의 도리를 다하고자 자결한다는 그녀의 유서가 그네들이 내세우는 명분에 더없이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돌아온 지 한참이 되었으나, 기뻐 버선발로 뛰어나가기는커녕 병든 몸으로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아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있되 남편을 섬기지 않는 아내는 죽은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하여 저는 아내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목숨을 끊어 마지막 남은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시고, 자손만대 복락(福樂)을 누리소서.

정승댁에서는 며느리의 마음을 귀히 여겨 장례를 크게 치렀다. 흰 비단 만장이 휘날리고, 소리꾼의 선창에 방상시와 영여를 앞세운 긴 상여 행렬이 동구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 장렬한 행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무헌과 하연과 양윤은 모두 뜨겁게 달아오른 눈시울로 양선이 귀하고 귀한 양반 아씨처럼 꽃상여 타고 저승길로 향하는 길을 배웅했다.

수십의 상여꾼과 끝이 보이지 않는 상주들의 행렬이 장관이었다. 문중의 대다수와 근처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 길을 함께했다.

소리꾼의 구성지고 구슬픈 가락이 울렸다. 먼 곳을 향하는 민정후의 눈길이 이곳에 닿았다.

“정말 그리되겠습니까?”

“어찌, 허황되다 여겨지는가?”

“…….”

“실은 나도 무척 무섭네. 하지만 되게 해 보세. 모자란 틈은 자네가 메워 주면 되지 않겠나.”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책상물림 주제에.”

“책상물림이니까 머리라도 좋아야지.”

“책상물림 주제에, 대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민정후의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고 거두어졌다. 언덕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무헌은 떨고 있는 하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또 울고 있는 양윤의 손도 힘줘 잡았다.

저마다의 소중한 것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손을 부여잡은 채 무헌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춥지 않을 만큼의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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