終章. 꽃이 어여뻐, 그를 보고 웃었네
며칠 사이에 부쩍 날이 따스해졌다. 마른 몸으로 겨울을 이겨 낸 가지들에는 어느새 꼬물꼬물 연둣빛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햇살이 좋아 뒤뜰을 거닐던 하연의 걸음이 담장 앞에서 멈췄다.
“이제 곧 꽃이 필 테지?”
개나리 가지를 들여다보며 하연이 새뜻하게 웃었다.
“그럼 또 꽃가지로 비녀를 삼고 꽃놀이를 가 볼 테야.”
뒷짐을 지고 따라오던 무헌이 등채를 손바닥에 톡톡 두드리며 심드렁히 답했다.
“그러든지.”
선뜻 나오는 대답치고는 어딘지 개운치 않았다. 가느스름히 올려다보자 그의 발이 까딱까딱 발장단을 쳤다. 무헌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만순이랑 가면 되겠네.”
“…만순이?”
“전에 얘기했잖아. 귀둥 마을 만순이. 머리에 꽃 꽂아 주면 좋다고 춤을 추는.”
“뭐어?”
“둘이서 꽃 꽂고 동무하면 좋잖아. 심심하지도 않… 어어!”
기어이 웃음을 물고 말하던 무헌이 하연을 피해 도망을 쳤다. 기다란 다리로 겅중겅중 도망가는 사내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데도, 약이 올라 따라붙었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놀이하듯 도망가는 그의 입가에서 계속 히죽거리는 웃음이 흘렀다. 요리 손을 뻗고 조리 발을 걸어도 옷자락 하나 닿지 않았다.
아아, 얄미워!
누구는 추억을 떠올리며 아련해졌건만. 함께 시 한 편을 읊으며 포옥 안아도 모자란 판에 만순이라니. 꽃 꽂고 춤을 추라니.
뒤뜰을 빙글빙글 돌았다. 쫓고 쫓긴다기에는 발 빠른 무헌의 일방적인 승이었지만, 잡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하연의 승인지라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는 추격전이 계속 이어졌다.
아랫사람들이 보았다면 두 눈 손으로 비벼 가며 기함할 일이었지만, 뭐 어떤가. 지금은 보는 이 아무도 없는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인 것을.
그러게, 이곳은 강주 관아의 내아(內衙, 관아의 안채로 수령 가족의 살림채) 뒤뜰이다. 그리고 이곳의 현감은, 나의 낭군 이무헌이다.
지난봄, 그러니까 재작년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에 한양으로 올라간 무헌은 복시를 거쳐 전시에 올라, 갑과 3인 중 가장 출중한 성적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늘 입버릇처럼 부르던 나라님은, 방방의(放榜儀) 때 옷고름에 호랑이가 수놓아진 저고리를 입고 참석해 홍패를 받는 그를 유난히 눈에 담았다 한다.
곧장 관직을 제수받아 훈련원에 있다가 좌포청 종사관으로 옮겨 가 두 계절을 재임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귀둥 마을이 영주 관속을 벗어나 강주 관아에 귀속됐다는 소식에 무헌은 강주 현감에 자원하여 이듬해에 강주 관아로 부임해 왔다.
그것이 바로 한 달 전이었다.
그가 살던 귀둥 마을과 가깝지만, 많은 사연이 있는 영주 관아와는 엮일 일이 없는 곳이라 더없는 최적의 장소였다. 덕삼 할머니도, 방울네도, 시집간 용순이와 봉희 그리고 덕삼이까지 모두 나와 새로 부임한 현감 나리 부부를 반겼다.
고향에 왔으니 어찌 안 좋을까. 피 한 방울 안 섞여도 가족 같은 이들이 두 팔 벌려 반기니, 늦추위에 코끝이 벌겠어도 그저 웃음만 나왔었다. 무헌은 너무 좋다며 그날 밤 하연의 팔을 붙들고 둥개둥개 춤까지 췄었다.
그러나 이 사연은 그들만 아는 것. 자고로 고을을 다스리는 헌앙하고 영준한 수령이 되려면,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하연은 무헌에게 강조했다. 자비롭되 위엄 있는 수령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고 또 일렀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뛰어다니는 것은, 모두에게 비밀인 것이다.
“나리! 현감 나리!”
불쑥 끼어드는 음성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우뚝 섰다. 그토록 좁혀지지 않던 두 사람의 거리가 아전의 부름 하나에 찰싹 좁혀졌다.
무헌이 고개를 낮추자 하연이 손을 뻗어 비뚤어진 전립을 바로잡았다. 흐트러진 구군복(具軍服)의 매무시를 가다듬자마자 짠 것처럼 기가 막힌 찰나에 아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감 나리!”
“무슨 일인가.”
숨이 턱에 차오른 아전의 눈에는, 언제나처럼 다정히 뜰을 거닐던 의젓한 현감 나리와 고고한 부인 마님 부부가 있을 뿐이었다. 허리 굽혀 인사하는 그에게 예의 인자한 미소를 문 하연이 다정히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급히 뛰셨는가? 그러다 다치면 어쩌시려고.”
“헤헤, 조심하겠습니다.”
“해서, 무슨 일인데 예까지 달려온 건가?”
뒷짐을 지고 허리를 편 무헌이 제법 엄히 물었다. 평온한 그의 시간을 방해한 것에 대한 나무람이었다. 아전은 민망함에 양손을 맞붙잡고는 허리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옵고, 그… 저… 또… 에… 예, 이, 일을 내셨습니다.”
무헌과 하연의 눈길이 냉큼 닿았다. 내용 없는 말에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무헌이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이번엔 뭔데?”
“그게….”
쉬이 대답 못 하는 아전의 눈이 또르르 굴렀다.
“괜찮으니 답하게.”
어금니를 문 허락에 아전이 에라 모르겠다, 뱉어 냈다.
“마, 말이 도망갔습니다.”
“…….”
부글거리는 침묵이 흘렀다. 일러바치긴 했지만, 어깨가 좁아져 들었다. 이제 불호령이 떨어지겠지.
“그러게 왜 말을 내주! 하아….”
버럭 내지르던 고함이 옷소매를 당기는 하연의 기척에 한숨으로 바뀌었다. 파란 하늘을 향해 잠시 인고의 시간을 가진 무헌이 참을 인(忍)이 새겨진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겠소, 각, 아니, 부인.”
“예, 속히 가 보시어요.”
아전을 앞세운 무헌의 보폭이 컸다. 걸음마다 화를 삭이는 게 뒷모습으로도 전해졌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하연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우리 오라버니 대체 어쩌려고 그러신담.”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꽃나무 아래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어느새 사고뭉치가 된 양윤을 떠올리는 하연의 웃음이 말갛게 퍼졌다.
***
“살다 살다 그런 몸치는 처음 본다니까. 기마술을 가르친 게 몇 달이야? 그 정도면 돼지를 태워도 말고삐를 잡을 거야.”
장이 크게 열려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광대패 상쇠가 꽹과리를 치고 장구 소리가 흥을 돋우었다.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고 가는 흥정 소리.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오직 무헌만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활을 가르쳐 놓으면 말에서 떨어지고, 말에 올려놓으면 창술을 잊어버리고. 차라리 각시가 무과를 봐. 그게 더 나을 거야.”
양윤이 부끄럽지 않은 오라비가 되겠다며 무과를 보겠다고 나선 지도 얼추 1년이 돼 가고 있었다. 무헌에게 훈련을 받은 것도 꼬박 그만큼의 시간, 부끄럽지 않은 오라비가 되고 싶은 양윤은 더없이 부끄러운 친우이자 처남이 되고 있었다.
“완전히 똥 몸뚱이. 세상에, 어찌 자라면 사내 몸뚱이가 그리 둔하지?”
“…….”
“내 말 듣고 있어, 각시야?”
선 자리에서 두 바퀴를 도는 광대패의 재주에 박수를 치던 하연이 흠칫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 으응, 듣고 있지.”
“어쩌면 좋겠어, 저 상몸치를?”
아무래도 오늘은 답을 들어야 할 모양이었다. 하긴, 그 귀한 말을 잃어버릴 뻔했으니, 사고도 보통 사고가 아니지.
“차라리 역관이 되는 게 어떨까 해.”
“역관?”
“말도 잘 익히고, 듣는 귀도 좋잖아.”
“…….”
“내가 봐도, 양윤 오라버니는 절대 무관은 못 돼.”
“…….”
너무 광대패만 바라보고 얘기했나? 재차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걱정되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걱정과 달리 무헌의 눈은 신박한 것을 본 듯 커져 있었다.
“각시는 정말 똑똑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 그래?”
그냥 평소 생각하던 것을 내놓은 것뿐인데 저리 좋아할 줄은 몰랐다. 무헌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결연히 말했다.
“그래, 그거야. 역관. 역관을 시켜야겠어. 각시는 진짜 천재야.”
뿌듯함에 양 볼이 솟았다. 아내 의견을 이리 잘 들어주는 낭군이 세상 또 어디 있을까.
“말을 익히려면 유학을 가야 할 테니 이참에 멀리 보내 버릴 수도 있고, 얼마나 좋아!”
…그런 거였어?
어째 양윤에게 미안해졌다. 툭하면 신접살림에 끼어들어 방해를 놓는 양윤이 그녀인들 달가울까마는, 그래도 하루라도 안 보면 섭섭한 사이가 아니던가.
“아니 뭐 그렇게 멀리 보낼 것까지야….”
“어! 저기 있다. 각시 좋아하는 당과.”
어느새 고민은 저만치 날려 버린 무헌이 하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당과 얘기에 하연도 군침이 돌아 바삐 뒤를 따랐다.
다 팔렸으면 어쩌나. 워낙 맛이 좋아 늦게 가면 없을 텐데….
“여기야, 여기!”
익숙한 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주막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양윤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린 채 손을 흔들었다.
“이제 오면 어떡해. 당과는 아까 다 팔렸는데.”
무헌과 하연의 시선이 쪼르르 매대로 향했다. 정말로 비어 있었다. 허무한 시선이 다시 닿았다가 원흉인 양윤에게로 꽂혔다.
“누구 때문에 늦었는데.”
무헌이 으르렁거렸다. 그놈의 말이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진작 왔다. 누구는 뒤처리하느라 이제 나왔건만, 사고 친 장본인은 장터에서 탁주나 마시고 시시덕거리고 있다니.
“어우, 이 웬수.”
“어허, 매제. 이러시면 쓰나.”
양윤이 제법 엄히 눈을 떴다.
“사람들이 ‘현감’ 나리를 다 보고 있지 않은가.”
능글맞은 말투로 일부러 ‘현감’이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그 말에 주막에 있던 사람들이 무헌을 알아보고 벌떡 인사를 했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복색을 입고 나왔는데, 양윤 덕에 들통이 나 버렸다.
부글거리는 숨을 가다듬은 무헌이 이를 물고 말했다.
“그러게 그 현감 노릇 제대로 하려면, 타지도 못하는 말을 장터까지 끌고 나왔다가 도망가게 만든 이를 공정하게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술잔을 들던 양윤이 뜨악하니 눈을 굴렸다.
“가만있자, 어떤 벌이 있더라? 장을 칠까, 똥을 치우게 할까?”
“잠시. 잠시만 있어 봐.”
잔을 내려놓은 양윤이 급히 소매 속을 뒤졌다. 그러더니 작은 보자기로 싼 것을 하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여요?”
양윤이 씨익 웃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말을 끌고 나왔겠어. 이게 다 이것 때문이지. 얼른 선점하려고.”
“어머나.”
보자기를 풀자 색색의 당과가 가득했다. 하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양윤이 어깨를 쫘악 펴며 술잔을 들었다.
“그래, 무슨 벌을 내리겠다고?”
무헌이 골이 올라 입술을 씹었다. 양윤이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시를 읊듯 손을 뻗었다.
“죄가 있다면 그저 누이를 아끼고 사랑한 죄. 모자라고 부족한 오라비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당과가 다 팔리기 전에 달려가는 것뿐이라.”
“…….”
“발이 빨라, 앞서갈꼬. 손이 빨라, 수를 낼꼬. 부족함을 채우고자 말을 빌려 탄 죄. 그러나 기술이 서툴러 그마저도 놓치고, 데구르르 바닥을 굴러 장터에 닿으니, 당과 장수가 가엾이 여겨 남은 것을 모두 싸 주더라.”
장터의 광대가 울고 갈 곡조였다. 하연은 터지려는 웃음을 물어 삼켰다. 차마, 골이 난 무헌 앞에서 대놓고 웃을 수는 없는지라, 당과로 볼록해진 볼이 웃음을 참느라 실룩거렸다.
“아주 먼 나라가 좋겠어.”
무헌의 뼈 있는 중얼거림에 술잔을 비운 양윤이 순박하게 물었다.
“응? 뭐가?”
“아주 희한한 말을 쓰는 나라.”
무헌이 홀로 비장하게 다짐하는 사이, 하연이 뿌루퉁한 그의 입으로 당과를 들이밀었다.
“이거 봐. 이거 낭군이 제일 좋아하는 거야.”
입 안에 든 당과를 요리조리 굴리던 무헌의 눈이 누그러졌다.
“잊지 않고 챙기셨네, 양윤 오라버니가.”
무헌이 흘끔 양윤을 보았다. 양윤이 새치름한 새색시처럼 손을 내리고 바로 앉았다.
두 시진만 안 보여도 서로 찾는 사내들끼리 새삼 내외는.
당과 하나에 풀어지는 사내나, 잊지 않고 당과로 마음을 전하는 사내나,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어찌 됐든 없어서는 안 될 사내들. 하나는 금쪽같은 내 낭군이요, 하나는 하늘이 준 오라버니이니. 두 사내 사이에 앉은 하연의 눈은 둥글게 접혀 펴질 줄을 몰랐다.
“정려문을 내리셨다네.”
양윤의 말에 무헌도, 하연도 잠시 눈을 끔뻑였다. 양윤이 가만히 웃었다. 마주쳐 오는 눈이 사연 많은 노인처럼 깊고도 애틋하게 휘었다.
그래, 이제 그 말을 헤아렸다.
고요한 눈길들이 서로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눈길이 손길인 듯 서로를 어루만지고 갔다. 손 내밀지 않아도 서로를 껴안은 듯했다.
“주모. 여기 술잔 좀 더 주시게.”
무헌이 잔마다 찬찬히 술을 채웠다. 하나는 양윤에게, 하나는 하연에게, 그리고 남은 하나는 그가 들었다.
“여기 없는 이에게.”
잔을 높이 든 무헌이 시원하게 미소했다. 양윤이 씨익 웃음을 물고 잔을 들었다. 두 사내의 눈이 하연에게 향했다. 크게 숨을 들이켠 하연은 힘차게 잔을 들었다.
“여기 있는 이들에게도.”
그 말에 무헌과 양윤이 탁 무릎을 쳤다. 잔 세 개가 호쾌하게 부딪혔다 흩어졌다. 봄바람이 꽃인 양 사뿐히 불어왔다. 탁주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어어, 저기는 벌써 개나리꽃이 폈네!”
“어디요?”
함께 집으로 향하던 길. 양윤의 외침에 하연은 까치발을 들었다. 행인들 너머로 담장 아래 노란 꽃이 피어 있는 게 보였다.
얼른 보고 싶어 무헌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걸었다. 장옷을 쓴 양반가 여인이 곁을 지나가다 어깨가 닿았다.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
“…….”
참으로 얄궂지. 느리고, 느리게 가는 시간이었다. 누구 하나 걸음을 세울 생각도 못 한 채, 스치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 그래, 어머니였다.
조금은 수척한, 그러나 여전히 고운. 웃을 때면 가지런하게 윗니가 드러나는 붉은 입술도, 그녀가 똑 빼닮은 고집스러운 커다란 눈매도 모두가 여전한. 자식을 잃은 상실감에 볼이 패었지만 그것을 견뎌 낸 필사의 자존심이 훈장처럼 얼굴에 드리운.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찰나로 눈동자가 흔들리는.
그래, 그날 그 밤, 그렇게나 간절히 보고 싶었던.
나의, 나의 어머니….
하연은 먼저 시선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쳐 갔다. 몇 걸음을 더 걸은 후에야 두 발을 세웠다.
먹먹한 귀. 뿌연 시야. 가슴이 시끄럽게 뛰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리도 아픈 걸까.
사람들이 주위로 흘러갔다. 홀로 멈춰 선 채 어지러이 오가는 발들에 초점 없는 눈을 두었다.
사위가 휘청거렸다.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땅이 꺼지는 듯했다. 슬픔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한없이 서럽고 또 아팠다.
…시야.
숨을 들이켰다.
각시야.
무헌의 목소리.
“각시야.”
손이 당겨지고 낯익은 얼굴이 허리를 숙여 다가왔다.
“왜 그래?”
까맣고 또렷한 눈동자에 천하의 못난 여인 하나가 비쳤다.
“무슨 일 있어?”
옥돌처럼 말간 눈동자에 담기니 저 못난 여인도 반질반질 윤이 난다.
정하연. 아니, 구양선. 아니, 이무헌의 아내.
그래, 하나뿐인 내 낭군.
나는, 나는 그의, 각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말갛게 눈앞이 개었다.
“…아니. 그냥, 당과 하나 더 먹으려고.”
말은 그리하고도 당과 대신 무헌의 뺨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녀를 마주 보기 위해 한껏 허리를 굽힌 사내의 입가가 시원스레 호선을 그렸다.
“업어 줄까, 각시야?”
아아. 눈물이 핑 돌았다.
뜨끈해진 눈시울을 들키기 싫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싱긋 웃은 무헌이 몸을 낮춰 등을 대었다.
“읏차.”
목에 팔을 꼭 감자 무헌이 가볍게 일어섰다. 앞서가 있던 양윤이 개나리를 가리키며 얼른 오라고 손짓을 했다. 하연은 울음이 날 것 같은 입술을 꾹 물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등 뒤로 다시 사람들이 들어찼다. 행인들은 지나가고, 장사꾼들은 물건을 팔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장옷의 여인이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을 땐, 사내의 등에 업혀 가는 행복한 여인의 뒷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봄이다, 각시야.”
들꽃 하나가 파란 하늘 아래서 봄볕을 쬐었다.
“응. 낭군님아.”
꽃이 어여뻐서, 그를 보고 웃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