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一章. 오누이 폭력단 (11/15)

들꽃 따러 왔다가 (외전)

一章. 오누이 폭력단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흙바닥에 동그라미 두 개를 이어 그렸다. 찌글찌글한 두 번째 동그라미 아래로 작대기 네 개가 그어지고, 역시 찌글찌글한 첫 번째 동그라미에는 뾰족한 두 귀와 함지박만 한 입이 그려졌다.

네발 달린 짐승인 것은 알겠으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참으로 오묘한 형체였다.

“아아함….”

모윤은 흥미를 잃은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어찌나 늘어지게 하품을 했는지 눈물도 찔끔 나왔다.

소매로 눈가를 쓱쓱 문대고는 고개 돌려 정자 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리는 걸 보니 오라비 글공부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나 보다. 모윤은 엉덩이를 한번 긁고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다홍색 고운 치마에 흙이 묻는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

그러다 손바닥을 마주 치고는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오라버니가 심심할 때 먹으라고 준 게 이제야 생각났다.

커다란 알사탕을 입에 넣자 솜털 가득한 작은 볼이 불룩해졌다. 기분이 좋아져서 내던졌던 나뭇가지를 다시 집어 드는데 그 위로 댕기 머리 그림자가 드리웠다.

“뭐냐? 괴물이냐?”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한 어조였지만, 모윤은 꿈쩍도 안 하고 찌글찌글한 동그라미 위에 못다 그린 눈과 콧구멍을 그리며 답했다.

“먹순이다.”

“먹순이? 그게 누군데?”

“세상에서 제일 빠른 흑마다.”

그렇게 말하며 모윤은 정성스럽게 갈기 여섯 개를 찍찍 그렸다. 그러고는 세상 자랑스럽게 댕기 머리를 올려다봤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리고 입 안에 든 사탕 때문에 발음도 뭉개졌지만, 대꾸하는 기개는 웬만한 대장군이 부럽지 않았다.

댕기 머리가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말은 여포의 적토마거든? 하루에 천 리를 가는 말이지. 먹순이는 몇 리나 가는데?”

잠시 흔들렸던 모윤의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한껏 낮게 깐 목소리에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답이 나왔다.

“먹순이는 만 리를 가지.”

“말이 어떻게 만 리를 가. 괴물 맞네.”

댕기 머리가 이때다 싶어 혀를 쭉 내밀고 놀리기 시작했다.

“괴물이래요, 괴물이래요, 먹순이는, 괴물이래요.”

모윤의 꾹 다문 입술이 꿈틀거렸다. 억울함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못생긴 괴물이래요, 돼지 코에 당나귀래요.”

댕기 머리의 발이 땅에 그린 먹순의 코를 꾹 밟고 껑충거렸다. 뭉개진 그림을 내려다보는 모윤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분하고 또 분해서 작은 주먹을 꾹 말아 쥔 채 노려보기를 잠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짐과 동시에 크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앙!”

그런데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해도 너무 쩌렁쩌렁했다. 콩알만 한 여자애한테서 나올 목청이 아니라 댕기 머리가 놀라 움찔 물러섰다. 그러나 댕기 머리는 몰랐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정자에서 글 읽던 소년들이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쳐들고 울어 대는 모윤을 발견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을 꿰신고 달려오는 것이 흡사 적군을 발견한 병사들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언제 출발한 건지 벌써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빨리 달려왔는지 옷자락이 그 여파에 아직도 휘날렸다. 흡사 날아왔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뭐 하는 자냐!”

뽀얀 먼지가 환영처럼 보이는 듯해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댕기 머리는 매서운 음성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대답은 않고 입만 뻐끔거렸다. 빠르기도 빠르거니와 소년의 외모가 너무도 고와서였다.

복건 아래 드러난 둥근 이마며, 가지런한 고운 눈썹 아래 총기 어린 까만 눈동자. 오뚝한 코에 붉은 입술. 무엇보다 백지 같은 피부에 뺨이 발그레한 것이 선녀를 그리라면 이렇게 그릴 것 같았다.

사규삼을 입고 허리띠를 반듯하게 맨 것이 양반가의 자제인 건 알겠으나….

소년이 맞는가, 소녀가 남장을 한 것인가, 아니면 제가 헛것을 본 것인가. 맥없이 두 눈만 끔뻑이는데 또랑또랑한 음성이 재차 다그쳤다.

“뭐 하는 자냐고 묻지 않느냐!”

체격이 여리여리한 것이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생겨서는 기세 하나는 대단했다.

“어찌 사내가 되어서 못나디못나게, 연약하고 연약한 어린 규수를 괴롭힌단 말이냐!”

“…….”

아무리 혼이 나가 있어도 이번만은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댕기 머리는 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저를 쏘아보고 있는 모윤을 내려다봤다.

연약한 어린 규수라니. 누가.

“모윤이 일어나.”

주훤의 말에 모윤이 꼬물꼬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펑펑 털고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통통한 두 주먹을 불끈 쳐올린다.

사납게 치켜뜬 눈하며, 조그만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게 불이라도 뿜을 듯했다. 용이 새끼를 낳으면 꼭 저렇게 생겼겠지 싶다.

“누구야?”

“웬 놈이야?”

“무슨 일이야, 주훤아?”

그사이 글 읽던 소년들이 우르르 달려와 섰다. 잘못 건드렸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생각보다 커진 사태에 댕기 머리는 당황했다.

그저 늘 하듯이 어린 여자애 조금 놀린 것뿐인데. 놀리면 울고, 도망가면 쫓아오고,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흰자 드러내고 쏘아보면 통쾌히 비웃어 주고. 다 그러는 거 아닌가?

제가 살던 마을에선 다들 그랬다. 머슴애들은 계집아이들을 약 올리고, 계집아이들은 머슴애들을 흘겨보고 그렇게.

그런데 뭐 이렇게 유별나게 난리야?

별거 아닌 일에 파르르 들고 일어서는 꼴이 딱 샌님들 하는 짓거리라. 두메산골에서 살다 온 자격지심에 반항심까지 보태졌다. 댕기 머리는 삐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계집처럼 생겨서 유난은. 붙으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서당에서 서책만 펴 놓고 공자 왈 맹자 왈 읊어 대기만 했을 이런 녀석들은 혼자서 열 명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이럴 때는 제일 덩치 큰 놈을 골라 먼저 코를 때려 주면 모든 게 평정된다. 코피만 터뜨려 놓으면 모두 놀라서 뿔뿔이 흩어질 게 뻔했으니까.

댕기 머리는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고 대상을 물색했다. 곱디고운 소년은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왜인지 부끄러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대신 바로 그 옆에 서 있는 배 볼록하고 둔하게 생긴 녀석을 골랐다.

그래, 너. 너로 정했… 퍽!

“윽!”

순간 뻗어 나가던 주먹이 허공에 멈췄다.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 치더니, 턱이 갈라지는 것처럼 쨍하고 울렸다. 뒤이어 사람들 모습이 흐려지고, 누가 머리에 대고 징을 치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렸다.

턱에 번개를 맞았다고 댕기 머리는 생각했다. 번개를 맞고 까맣게 타 버렸던 나무가 절로 떠올랐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과 머리털 하나 없이 민둥해졌을 제 모습을 떠올리니 사내 체면이고 뭐고 오줌을 쌀 것 같았다. 어쩜 조금만 늦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밑에서 씩씩거리는 이상한 숨소리를 듣지만 않았다면.

데구루루 눈알을 굴려 내리자,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올려다보고 있는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주저앉아 침을 흘리며 울어 대던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다. 표정에 어딘가 뿌듯함이 빵빵하다 못해 터질 듯하다.

꼴사납게도, 이 조그만 머리통에 턱을 들이받혔다는 걸 아는 순간, 세상이 뒤로 넘어가더니 하늘이 시야에 들어찼다. 쿵, 하는 둔탁한 소음은 제가 뻗어 버렸음을 알게 하는 신호였다. 너무 창피하고 또 분해서 발딱 일어나고 싶었지만, 어찌 된 건지 맥 빠진 몸은 주인 맘도 모르고 꼼짝도 안 했다.

***

“정신이 드느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기절이란 걸 했었나 보다. 눈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아까 그 샌님들 대신 수염 성성한 훈장님과 의원이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며칠간은 턱이 얼얼할 테니, 연한 음식 위주로 먹도록 해라.”

껄껄 웃은 의원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주의를 주고 일어섰다. 누군 기절까지 했었는데, 너무 쉽게 넘기는 듯해 댕기 머리는 눈을 치떴다.

턱에 구멍 난 것 아닙니까!

…라고 따지려고 했다. 그런데 턱이 안 벌어졌다. 알 수 없는 말로 으으, 거리자 의원이 눈을 접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다. 놀라서 그런 것일 뿐 이상은 없다. 저녁밥 짓기 전까지는 편해질 테니 걱정 말고, 할 말 있으면 천천히 입을 벌려 보거라.”

질문도 안 했는데 다 알아듣고 답을 해 준다. 참말로 용한 의원이거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거거나.

“그러게 주훤이를 왜 건드려. 제 오라비를 건드리니 모윤이가 들이받지.”

무언가 이상하다. 오라비라니. 나는 분명.

“…여자애…를 놀린… 건데요. 오라…비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 해서 천천히 입을 벌려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훈장이 수염을 쓸며 웃었다.

“잘 생각해 보거라. 분명히 주훤이한테 뭐라 했을 거야.”

주훤이라면, 그 곱디고운 꽃도령 말인가?

위아래로 쳐다본 것뿐이었다. 사내답지 않게 참으로 고와서 좀 오래.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했었지.

“계집처럼 생겨서 유난은. 붙으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라고.

설마 그것 때문에?

어이가 없어 눈을 휘둥그레 키우자 훈장과 의원이 거 보란 듯이 껄껄 웃었다. 남은 아파 죽겠구먼, 이 어르신들은 아까부터 왜 자꾸 웃어 젖히는 건데.

“시비 걸지 말고 친하게 지내거라. 새로 왔다고 기 싸움 할 것 없어.”

“…치잇.”

“우리 마을 애들은 반상이고 지위고 상관 않고 모두 가족처럼 지낸다. 그러니 너도 어려워 말고 가서 사과하거라. 그러면 주훤이는 잘 받아 줄 거다. 어쨌든 네가 먼저 시비를 걸어서 생긴 일이니 네가 먼저….”

“양…반인…데요….”

“응?”

“저 상놈… 아니고… 양반이…라고요….”

비록 입이 많이 안 벌어졌지만 나름대로 당당하게 말했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훈장이 수염을 쓸며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구나. 그건 내가 사과하마. 행색만 보고 오해를 했으니 온전히 내 허물이다.”

“…….”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우리 마을은 반상이고 지위고 상관없이 모두….”

힘껏 인상을 써 보이자 훈장이 머쓱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아무튼, 사과는 꼭 주훤이한테 하거라. 모윤이한테는 해 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 오히려 더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고는 또 껄껄 웃는다. 이 어르신들이 정말 허파에 구멍 나셨나.

자존심에 대답은 않고 입을 비죽이며 대들보만 보았다. 맛있어 보이는 약식 한 덩어리를 앞으로 내밀어 준 훈장이 옷을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걸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졌다.

“어딜 가야… 만나는데요? 그….”

꽃도령이라고 말하려다가 얼른 말을 바꿨다.

“돌머리 여자애랑… 그 오라비랑….”

“오늘은 아마 장에 갔겠지요?”

훈장이 의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의원이 끄덕끄덕했다.

“그랬겠지요? 둘이 손 꼭 잡고.”

“아마 당과 파는 곳에 있을 게다. 아니면 사당패 놀이하는 곳에 있거나.”

“보나 마나 그렇겠지요. 어찌 그리 찰떡인지. 그런 오누이 세상천지에 또 없을 겁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뭐가 좋은지 훈장과 의원이 마주 보며 또 껄껄댔다. 사이좋은 오누이는 개뿔. 오누이 폭력단이다. 동생은 돌덩이 같은 머리로 폭력. 오라비는 곱디고운 얼굴로… 폭력.

***

“오라버니, 저기. 저기!”

작고 통통한 손이 희고 긴 손가락을 꽉 잡아당겼다. 마음이 급해 머리통부터 앞으로 빼고 전진하는 걸 주훤은 손을 당겨 저지했다.

“잠시만 모윤아.”

사당패 놀음이 한창이었다. 구경 중인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도 앞자리를 차지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주훤은 훌쩍 자리에 앉았다.

“자.”

어깨를 툭툭 쳐 보이자 모윤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작은 몸이 냉큼 오라버니 목에 올라탔다. 명색이 오라버니인데 어린 누이 하나에 몸이 비틀거렸다. 주훤은 젖 먹던 힘을 짜내 끙차, 하고 일어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 키가 또래보다 훨씬 크다는 거였다. 목말을 탄 모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잘 보여?”

“응! 잘 보여!”

사당패 가락에 맞춰 모윤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그걸 보니 힘든 것도 잊고 뿌듯함에 미소가 물렸다. 제 앞에는 다른 사람들의 어깨뿐이어서 보이는 게 없었지만, 사당패보다 모윤의 흥겨운 덩실거림이 더 좋았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 사내는 여인을 무조건 아껴야 한다고. 특히 어머니와 누이는 무조건, 무조건, 보물처럼 위하고 보듬어야 한다고.

그러니 내 몸뚱이 조금 힘든 것쯤은 이겨 내야 했다. 돌아가면 오늘도 열심히 무술 연습을 해서 힘을 길러야지, 다짐을 하는데 벼락같은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모윤이 너.”

곱디고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정색하고 힘줘 부르실 때는 벼락 맞은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쭈뼛쭈뼛 뒤를 돌아보자 덩실거리던 모윤의 춤사위가 멎었다. 참으로 고우신, 그러나 무서우신 어머니께서 엄하게 눈을 뜨셨다.

“너 또 친구 턱을 들이받았다며?”

목말을 탄 덕에 어머니와 눈높이가 같아진 모윤이 쪼르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놓고 여기서 춤을 추고 있어?”

“…….”

“주훤이 너는, 오라비가 돼서 동생이 그런 짓을 했으면 나무라야지. 여기서 목말을 태워 주고 있으면 돼?”

“잘못했습니다.”

“저도 잘못했습니다.”

주훤이 용서를 빌자 모윤도 따라 했다. 숨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쉰 어머니가 몸을 돌려 앞장을 섰다.

“따라오너라.”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길이 슬쩍 사당패를 향했다가 돌아왔다. 사당패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시는 분이 저리 구경도 마다하고 앞장서시는 걸로 보아, 오늘은 정말로 많이 혼나겠구나 그 생각을 하며 주훤은 뒤를 따랐다.

“모윤이 걸어.”

역시, 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어머니는 뒤에도 눈이 달리셨다. 주훤은 조심스레 몸을 낮춰 모윤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어린 누이의 통통한 손을 꼬옥 잡고 어머니 뒤를 따랐다.

괜찮아. 오라비가 덜 혼나게 해 줄게.

입 모양으로 조그맣게 어린 누이를 달래면서.

***

체감상 반 시진은 된 것 같다. 처음에는 귀 옆으로 바짝 쳐들고 있던 두 팔이 제멋대로 스르르 내려왔다. 그러자 뒤에 눈이 달리신 어머니가 탁 소리 나게 수틀을 내려놓으셨다.

움찔 두 팔을 다시 바짝 세우자 어머니가 가만히 돌아보셨다. 고운 눈가가 설핏 접히는 걸로 보아 노기가 가라앉으셨나 보다.

“내리거라.”

털썩 팔을 내린 모윤과 달리 주훤은 얌전하게 팔을 내리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그걸 본 모윤도 오라비를 따라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내일 그 아이 찾아가서 용서를 빌거라. 알겠니?”

“예, 어머니.”

“네. 어머니.”

“이제 됐다. 그만 가서 놀거라.”

모윤과 주훤이 눈을 마주쳤다. 어머니가 곱게 웃었다.

“아직 사당패 안 갔으니 어서.”

모윤이 신이 나서 발딱 일어섰다. 신에 발을 넣는데 마음이 급해 자꾸 엇나갔다. 또르르 댓돌 아래로 신 한 짝이 굴러떨어진 걸 주워 준 후, 주훤은 어머니를 향해 바로 앉았다.

“왜 안 가고?”

“그게…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정색하고 바라보는 아들의 기척에 당과 하나 꺼내 주려고 주머니를 뒤지던 하연이 고개를 돌렸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하고 또래보다 점잖아서 마을에서는 차기 정승감이라고 소문이 난 아들이지만, 제 눈에는 그저 어리고 귀여운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줘야겠다. 하연은 당과 하나를 꺼내 주훤의 입에 쓰윽 들이밀었다.

“모윤이만 주지 말고 너도 먹어.”

얼결에 입에 당과를 문 주훤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오물거렸다. 마당에 앉아 흙장난을 하던 모윤이 흘낏 돌아보고는 다시 관심을 거뒀다. 식탐이야 유별나지만 평소 우애는 좋아서 제 오라비 입에 들어가는 걸 탐내는 아이는 아니었다.

“무슨 할 말 있어 그리 무게를 잡는데?”

어린 아들의 이마 잔털을 매만지며 묻자 주훤이 비장하게 입에 고인 단물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 저는 사내가 되어서 왜 이리 힘이 없을까요?”

“…응?”

“아버지는 천하제일 발도 빠르시고, 기마도 잘하시고, 활도 잘 쏘시고, 무예가 남다르신데. 저는 그런 것은 하나도 못하니, 장차 모윤이가 위험에 처하면 어찌 누이를 지켜 주겠습니까.”

목소리 끝이 울먹거리는 것이 제 딴에는 이렇게 큰 근심이 없었다. 가만히 아들을 내려다보던 하연은 크음,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있지, 훤아. 사람은 저마다 잘하는 것이 다 다르단다. 사내라고 모두 힘이 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여인이라고 꼭 무예를 못하는 것도 아니야. 사내, 여인, 구분할 것 없이 그저 자기가 잘하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야. 그러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거든. 서로 부족한 부분은 채워 주고 잘하는 것에는 손을 보태라고. 한 사람이 다 잘해 버리면 세상이 무슨 재미며, 어찌 돌아가겠어.”

주훤이 똘망똘망한 눈을 깜빡거렸다. 누굴 닮아 이리 예쁠까. 아들의 뺨을 손으로 쓸며 하연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우리 집안만 봐도 그래. 아버지는 사내인데도 밥도 잘하고 살림도 야무지시잖아. 이 어미는 또 어떻고. 다른 건 다 똥소ㄴ… 아니, 다른 건 다 못해도 수 하나만은 아주 잘 놓지 않더냐.”

증거 삼아 수틀을 슬쩍 들어 보였다. 모윤이는 네가 지키지 않아도 알아서 제 몸 제가 지킬 아이다, 라는 말은 굳이 보태지 않았다.

주훤이 감복한 눈으로 모윤의 손을 잡고 중문을 벗어날 때까지, 하연은 그 우애 좋은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당과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솜씨 좋은 낭군님이 사다 준 당과라 그런지, 차암 맛있네.

먼 길 시찰 나간 낭군님이 새삼 보고 싶었다. 똥손 얘기는 주훤이가 못 들어서 참 다행이다, 그렇게 안도하면서.

***

“어머니께서 뭐라셔?”

안채를 벗어나자 모윤이 눈이 부신 듯 눈을 찌푸리며 올려다봤다. 주훤은 손을 들어 어린 누이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주며 태연하게 답했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다르니 상심하지 말라고.”

“아하!”

모윤이 통통한 손바닥을 마주 쳤다.

“숙부님이 똥몸뚱이지만 다른 나라 말은 잘하는 것처럼?”

주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응. 어머님이 똥손이시지만 수는 잘 놓으시는 것처럼.”

“똥소온.”

모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자씩 되새겼다. 오라비를 보고 걷느라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주훤이 팔을 잡아당겼지만 이미 늦어서 담벼락에 머리를 콩 박았다.

흔들거리던 기왓장 하나가 떨어지는 걸 모윤이 반사적으로 받아 냈다. 제 몸뚱이의 반만 한 기왓장을 가뿐히 든 모윤이 저도 놀라 제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둘이 마주 보기를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저보다 힘센 누이도, 단단한 누이의 머리도, 새삼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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