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章. 첫눈에 반했다네
캬하.
술잔을 쭉 들이켠 양윤이 옷소매로 수염을 쓸었다. 팔도의 술도 모자라 이웃 나라 먼 나라 술까지 다 마셔 봤지만, 역시 으뜸은 이곳 귀둥 마을 탁주였다.
“해마다 더 맛있어진단 말이지.”
듣는 이도 없는데 홀로 감탄을 하며 배추전 하나를 통째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쩌억 입을 벌려 겨냥을 하고 있노라니,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양윤은 입을 벌린 채 두 눈도 쩌억 벌렸다.
“소, 소단주?”
고개를 젖힌 그대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씨익 웃은 여인이, 저를 보고 놀란 탓에 빗나가 버린 배추전을 입에 맞게 겨냥해 준 후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인인데도 기골이 장대해, 뒤에서 보면 여인에게 가려 마주 앉은 양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배추전을 단번에 입에 밀어 넣은 양윤이 급하게 씹어 삼키며 변명을 했다.
“저기 나는… 케헥.”
급하게 삼키느라 사레가 들리자, 술잔에 탁주를 따라 쓰윽 내민다. 일단 양윤이 그걸 받아 마시자 여인이 커다란 손을 뻗어 양윤의 등을 턱, 턱, 쳐 주었다. 그 손길에 양윤의 몸이 앞으로 휘청휘청했다.
“저기, 크흠. 나는 그러니까….”
“말했잖소.”
어딘지 조급한 양윤과 달리 여인은 느긋한 얼굴로 양윤에게서 잔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하기를.
“역관께서 도망쳐 봐야, 이 손바닥 안이라고.”
한쪽 무릎을 괴고 앉은 여인이 그 위에 팔을 올리고는 넘치기 직전까지 가득 채운 술잔을 들었다. 저 술을 다 마시려는가 하겠지만 천만에. 그 잔을 양윤의 앞에 무심하게 툭. 다른 손에 든 술병이 그녀의 몫이었다. 손목을 기울여 병째로 꿀꺽꿀꺽 넘기는 기세에 주위에 앉아 있던 주막 손님들도 하나둘 눈을 홉뜨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도망이라니. 내가 언제 도망을 쳤다고 그러시오.”
그사이 조신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양윤이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며 변명 같은 항변을 이어 갔다.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오. 도망가려면 어디 연고 없는 곳으로 가지, 고향으로 도망 오는 이가 어디 있답니까.”
듣기는 하는 건지, 단숨에 술병을 비운 여인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양윤이 전광석화처럼 그 입으로 안주를 쏘옥 집어넣었다.
“비었소.”
술병을 흔들어 보이자 양윤이 얼른 주막 안쪽에 대고 고함을 쳤다.
“주모! 여기 술 한, 아니, 두 병 더 주시오!”
그러고는.
“두 병이면 되겠소, 소단주?”
“세 병.”
“세 병 주시오, 주모!”
“크으, 역관 말이 맞았소. 이곳 탁주가 먹어 본 중 최고요.”
탁주 맛에 기분이 좋아진 여인이 싱긋 웃었다. 양윤이 뿌듯하게 웃었다.
“거보시오. 나는 거짓말은 안 한다니까.”
“그래서.”
“…응?”
안주를 오물오물 씹어 삼킨 여인이 양윤을 처억 바라봤다. 시선 하나 건너오는 게 무슨 바윗덩이를 던지는 것 같아 양윤은 움찔 몸을 물렸다.
“거짓말은 안 하시는 분이, 어찌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토끼셨는지 설명을 해 보라 이 말이오.”
“토, 토낀 게 아니라 나는… 내게도 준비할 시간이… 그러니까 서찰에도 써 놨듯이 집안에도 알리고 준비도 하려면, 그래서 한 달을 달라고 내가….”
“그러니까.”
주모가 가져온 술병의 목을 손으로 콱 틀어쥔 여인이 단호히 말했다.
“오늘이 딱 한 달째요만.”
양윤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 한 달이 집에 돌아온 후의 한 달이지 떠나온 날부터 한 달은 아니라고 말해야 했건만, 차마 술병을 쥔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용기가 제게는 없었다.
***
“혼이인?”
“혼인이라고요?”
무헌과 하연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쌍둥이처럼 입을 벌리고 서로 마주 보기를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무헌에게 콕콕 박혔다.
“누구랑?”
“송도 가실 때만 해도 아무 말씀 없었잖아요.”
“설마, 기생한테 홀라당 넘어간 거 아니야? 그런 거면 가만 안 둬.”
“그런 거 아니야!”
빽 고함을 친 양윤이 제법 진지하게 두 사람을 보았다.
“진짜 혼인한다고. 마음에 둔… 정인이랑.”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얼굴이 자꾸 뜨거워져 양윤은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게다가 갑자기 혼인 사실을 알리는 게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부끄러움과는 별개로, 사연 없이 통보만 하는 것 같아 혹여 서운해할까 눈치도 보였다.
그래서일까, 무헌과 하연이 말은 않고 가만히 서로를 바라봤다. 침묵 속에 눈길만 오가기를 잠시, 입가가 훌쩍 솟더니 커다랗게 환호성이 터졌다.
“그건 좋은 일이잖아!”
“감축드려요!”
“혼인이라니! 총각 귀신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 잘됐어요, 진짜!”
진심으로 웃는 얼굴. 가득 접힌 두 눈. 상기된 음성. 두 사람을 보던 양윤은 가슴이 뛰어 입술을 꾹 붙였다. 코끝이 시큰해져 말이 나오지도 않는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두 팔을 벌리자 여태 좋다고 박수 치던 사람은 어디 가고 무헌이 질색하며 밀어 냈다. 민망해 손을 거두자 하연이 다가와 양윤을 꽉 안아 주었다. 평소라면 제 색시 안지 말라고 질색하던 무헌도 잠시 지켜보다가 마지못해 그 위로 몸을 겹쳤다. 셋이서 부둥켜안고 있자니 양윤은 정말로 펑펑 울 것 같았다.
“그런데 혼인을 왜 그렇게 서둘러?”
다른 건 다 봐줘도 양윤 우는 꼴은 못 봐주는 무헌인지라 양윤의 울음이 터지기 전 얼른 떨어지며 말을 돌렸다. 무헌의 질문에 하연도 동조했다.
“그러게요. 삼 일 후면 너무 갑자기예요.”
“번갯불에 콩 볶는 것도 아니고. 무슨 혼인을 삼 일 후에. 준비할 시간도 없잖아.”
“그게….”
할 말이 있어 입을 열었지만 뒷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기를 잠시. 침 한번 꼴깍 삼킨 양윤이 벌게진 얼굴로 입술을 축였다.
“부인 될 이가 먼 길 떠나야 해서. 가기 전에 혼인해 놓지 않으면, 날 아예 잡아끌고 가겠다고 해서….”
“잡아끌고 간다고?”
무헌이 기함을 했다. 왜인지 낯부끄러워 양윤은 애꿎은 뒷덜미를 문지르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됐어. 그게, 허응… 하하.”
끌려간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뭐가 좋은지 입가에는 히죽 웃음이 걸린다. 열일곱 살 총각이 열여섯 살 처녀에게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손가락으로 바닥만 문지르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다.
혼인은 좋은 일이나, 정인이 생겼다니 참으로 잘된 일이나,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있었다.
“…부인이 멀리 떠난다는 말은 또 뭐야?”
무헌의 질문에 양윤이 흘낏 눈길을 주었다가 쪼르르 거둬 갔다. 배시시 웃더니 한다는 말이.
“청으로 무역을 하러 가거든.”
“…무역?”
“송악 상단이라서.”
“송악 상단이라면, 우리나라 제일의 상단 말이어요?”
“그렇지. 이번 교역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터라 빠질 수가 없다더라고.”
하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돈 많기로는 나라님도 저리 가랄 정도라는 그 큰 상단에서 일하고 있는 여인이라니. 그렇게 대단한 거상에 여인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중요한 일까지 맡고 있다는 얘기가 그저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럼 이번만 다녀오시면, 이곳에 신접살림을 차리시는 거지요?”
그런 여인과 가족이 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게….”
그러나 여태 헤실헤실하던 양윤이 뜸을 들였다.
“아마 나는 송도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
눈에 아쉬움과 서운함이 가득한 건 양윤만이 아니었다. 양윤의 혼사 얘기에 내내 웃고 있던 무헌이 처음으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송도에? 왜?”
양윤이 숨 한번 들이켜고 말을 꺼냈다.
“송악 상단 단주의 무남독녀 외동딸이거든.”
“…뭐어?”
“지금은 소단주지만 머지않아 단주가 되어 상단을 물려받게 될 거라서….”
“어머나, 세상에.”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 그 어마어마한 상단의 주인이 될 여인이 양윤의 짝이 되는 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어려서부터 붙어 자라 온 형제 같은 양윤이 떨어져 살게 되는 걸 슬퍼해야 하는 건지,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는 무헌의 마음이 모두에게 읽혀서.
항상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혼인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도 저희가 어울렸듯이 그렇게 어울려 자라나고, 함께 나이 들고, 함께 늙어 가면서 그렇게.
그걸 아는 양윤도, 하연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를 마음에 그리며 수많은 말을 삼키기를 잠시. 표정을 가다듬은 무헌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모지리 처남 거둬 가 주는 귀인 중에 귀인이니 아주 큰절이라도 해야겠네. 덕분에 이제 두 다리 뻗고 자겠네, 아주.”
무헌의 말에 그제야 마음에 얹고 있던 바위 하나 내려놓은 양윤이 히죽 웃었다. 사실은 그래서 한 달여 시간을 달라고 했었던 거다. 오롯이 그 시간을 무헌과 하연과 어울려 지내면서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당장 떠나는 건 아니니까. 식만 미리 올리고, 나는 부인이 청에서 돌아오는 석 달 뒤에나….”
“가만.”
무헌이 말을 막았다.
“아까부터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그럴 거면 돌아와서 식을 올리면 되지 않아?”
그 말에 양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아니, 아예 제 빛으로 돌아온 적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게, 그것도 어… 히응, 그렇게 됐어.”
“망아지야? 왜 자꾸 히응, 히응대?”
시선을 외로 꼰 양윤이 바닥을 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달밤이 너무 좋은 걸 어떡해.”
“…뭐?”
“그… 탁주도 맛있었고, 에… 사과꽃도 참 어여뻤고… 뭐, 그래서 그렇게 된 거지.”
“…….”
“사실 소단주가 차암 귀엽거든. 특히 밤에는 아주아주 귀여워. 막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을 만큼. 그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을 앞에 두고 어찌 사내가 긴 밤을 그냥 넘기겠어. 그건 사내도 아니….”
“으어어, 그만. 그만!”
이미 사과꽃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알아들었다. 더 이상 양윤의 사랑 얘기를 듣는 것은 무리라서 무헌은 팔을 문지르며 물러섰다. 제 연애 얘기 할 때는 그리도 눈에 별을 박고 유난을 떨면서, 왜 나한테만 이러나 조금은 섭섭해진 양윤이 입을 비죽거릴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일어났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요란한 발소리가 섞여 들더니 웬만한 사내보다 체격이 좋은 여인이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눈이 휘둥그레진 양윤이 신을 신고 마당을 쪼르르 가로질렀다.
“기다리시라니까, 이렇게 갑자기.”
“기다려도 안 오니 들어왔지요. 내 성격 아시잖소. 참고 있는 건 근질거려 못 하오.”
목소리며 말투며 화통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쩌렁쩌렁한 말소리에 무헌과 하연도 신을 신고 마루에서 내려섰다.
“뉘시길래 이렇게….”
두 사람을 본 그녀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몸을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송악 상단 강성호의 여식, 강운담이라 합니다.”
“예에? 그럼…?”
“제가 못나게도 참을성이 없어 역관께서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못 참고 이렇게 뛰어들어 왔습니다.”
무헌이 슬그머니 하연을 보았다. 하연도 눈동자를 한 바퀴 또르르 굴렸다. 소개를 들으면 분명 양윤의 혼인 상대가 맞는데, 양윤의 묘사와 너무 달라서였다.
귀엽다고 했었는데. 주머니에 넣고 싶을 만큼 분명 그렇다고 했었는데. 눈앞의 여인은 귀엽다기보다는 뭔가 더….
“두 분 뵙기 전까지는 심장만 벌렁거렸는데, 막상 뵙고 나니 긴장이 되어 온몸이 죄다 덜덜거립니다. 부디 못났다 흉보지 마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거침없으나 정중하고, 솔직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다르지만 뜻밖의 기개가 너무 시원시원해서 무헌과 하연의 입가가 절로 솟았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한가. 애초에 양윤의 사람 묘사는 심하게 잣대가 다른 것을 깜빡한 저희의 잘못이었다.
말이 곧 성정이라 했고 눈빛이 곧 그 진위라 했는데, 눈앞의 여인은 어느 하나 진실되지 않은 곳이 없으면서도 시원시원한 게 막힘이 없었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네 계절을 지나야 한다고 하는데, 겨우 인사 한마디 나눴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으니, 세상사 참 모를 일이었다.
이런 걸 두고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남녀 사이 아니어도, 한눈에 반했다… 라고 해야 하나.
반상(班常)의 구분 따지는 사람이야, 나는 양반입네 너는 중인입네 선 그을지 몰라도, 마음이 먼저인 하연은 덥석 다가가 그녀의 손부터 잡았다.
“먼 길 오셨습니다. 제게는 형님 되실 분인데, 인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강운담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말을 잃었다. 언제나 거침없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상대는 양반인 동시에 벼슬아치인 현감의 부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것도 이렇게 꽃처럼 고운 여인이 투박한 제 손을 살갑게 잡을 줄이야.
아무리 돈으로 신분도 사고 벼슬도 사는 세상이 왔다지만, 여전히 반상의 구분이 있는 나라였다. 양윤이 아무리 역관이라고는 해도 그도 신분이 양반인지라, 혼인을 반대할 수도 있다고 여기고 내심 걱정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런 환대라니.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돈이 많아 그런가, 강운담은 그 어떤 재물보다 이런 정감 어린 손길 하나, 따스한 눈길 하나에 더 가슴이 벅찼다.
양윤이 늘 입이 닳도록 누이와 매부 얘기를 했지만, 제 식구라 팔이 안으로 굽는 거려니,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으려나 했었는데 모두 사실이었다. 양윤 자신의 말대로 역시 거짓말은 안 하는 자였다.
양윤을 믿지 못하고 여기까지 몸이 달아 쫓아온 것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살면서 저를 귀엽다고 해 준 이는 처음이라, 그 말을 못 믿고 도망가는 거라 여겼었다.
강운담은 새삼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
“소소하게나마 선물을 좀 가져와 봤습니다. 일종의 이바지 같은 거라고 여겨 주십시오. 급히 오느라 많이는 못 챙겨 왔습니다. 삼 일 뒤에는 아버지도 오시니 그때 제대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강운담의 옆에는 어느새 일꾼들이 가져다 놓은 짐들이 가득했다. 벌써 마당을 반 가까이 채웠다.
이게 소소한 거라니.
무헌과 하연의 눈이 오늘 여러 번 마주친다. 여태 눈치 보고 있던 양윤이 무헌의 등을 툭 치고 지나갔다. 뿌듯함에 어깨에 조금 힘도 들어갔다.
“주훤이랑 모윤이는 어디 있어? 우리 조카님들 용돈 좀 주고 싶은데. 그사이 얼마나 자라셨나 아주 궁금도 하고.”
양윤이 괜히 집 안을 기웃거렸다. 받아도 되나 고민하는 걸 알고 그냥 받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걸 알아들은 무헌과 하연도 걱정을 덜었다.
그래, 그렇다면. 여름 장마로 수해 입은 우리 마을 사람들, 고생 안 해도 되겠네. 송악 상단의 이름으로 저수지도 개간하고, 농지도 돌보고, 구휼도 하면 될 일.
“들어가요, 우리. 세상 이곳저곳 다녀 보셨다고 하니, 물어보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아요.”
강운담의 손을 이끌고 안채로 향하던 하연이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내에게 눈길을 줬다.
“잠시간 우리 여인끼리 놀 테니, 사내들은 저녁때까지 저리 가 있어요.”
뜬금없는 하연의 퇴출령에 임자 잃은 무헌만 서러웠다. 그러나 코 한번 쓱 문지른 후 양윤을 돌아봤다. 졸지에 단짝인 각시를 처음 등장한 여인한테 뺏긴 건 좀 억울하지만 그도 오늘은 사내끼리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무헌은 아직도 쓸데없이 기웃거리는 척하고 있는 양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각시한테 잘해라.”
“…응?”
내 각시면 몰라도 제 각시한테 잘하라니. 이제 막 혼인하려는 새신랑한테 하려는 말치고는 번지수 잘못 찾은 거 아닌가 싶어 눈을 끔뻑이자, 무헌이 엄하게 눈을 떴다.
“이 나라 제일가는 부자 부인을 만난 게 누구 덕인지 생각해 봐.”
“…….”
“너 역관 시키자고 한 게 우리 각시야. 역관 된 덕에 국경 넘어 다니면서 상단들이랑 친해진 거고. 그러니 우리 각시한테 잘해야겠어, 안 해야겠어.”
언제 어느 때고 제 각시 자랑할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 매서운 놈.
양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이야기라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자.”
“어딜?”
그러자 무헌이 정색을 했다.
“각시가 저리 가 있으라잖아.”
아. 이럴 때는 정말 때려 주고 싶다. 하지만 각시 말 잘 듣기로는 저도 이제 어디 가서 지지는 않을 판이라, 이번에도 할 말이 없었다.
“수암사로 위패를 옮겨 왔어.”
무헌의 말에 양윤의 두 발이 우뚝 섰다.
“주지 스님도 훨씬 좋으시고, 여기서 거리도 가깝고, 경치도 전에 있던 절보다 훨씬 좋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가만히 바라보자 이번만은 진지한 얼굴의 무헌이 양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혼인도 하니 잘됐다. 내일 다 같이 가자.”
그러고는 씨익 웃는다.
“우리 누이 보러.”
어쩔 수 없이 그렁그렁해진 양윤이 눈가를 훔치며 끄덕였다.
“그래, 가자.”
“…….”
“우리 누이 만나러.”
산행 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바람도 솔솔 적당하게 불고. 그래서 무헌은 얼른 말을 돌렸다. 양윤이 우는 꼴은 정말 보기 흉하니까.
“말 타고 가면 금방인데, 누구 때문에 걸어가야겠네.”
“타고 가면 되지.”
“너 못 타잖아. 아마 모윤이가 더 잘 탈걸.”
“뭐어? 그 꼬마 녀석이 말을 탄다고?”
“응. 그렇게 말하는 누구보다 훨씬 더 잘.”
“말도 안 돼.”
“못 믿겠으면 당장 겨뤄 보든가.”
“좋아, 당장 해 보자고.”
어린 조카와 겨뤄 이기겠다는 뻔뻔한 양윤과 함께 무헌은 웃으며 마사로 향했다.
볕이 좋아 그런가, 눈이 따끔거렸다. 이제 장가가면 말 못 타서 징징거리는 양윤을 볼 날이 많지는 않겠구나. 기쁜데도 눈물이 날 것 같고, 섭섭한데도 한없이 좋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