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章. 깃동
어….
보따리를 열어 본 하연은 잠시 말을 잊고 눈만 깜빡였다. 또… 그 옷이다.
무헌이 새로 옷 하나 지었다고 보냈길래 열어 본 참이었다. 지나다가 색이 너무 고와 샀다고 한 게 벌써 몇 번째더라.
하나, 둘, 셋, 넷….
손가락을 꼽아 보던 하연은 수를 세는 걸 그만두고 저고리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깃동을 가만히 손으로 쓸었다.
처음에는 착각이려니 했다. 두 번째는 우연인가 보다 했고. 세 번째는 애써 부정했다. 그리고 네 번째부터는 꺼내 입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아 둔 치마와 저고리가 쌓이고 쌓여 어느새 옷장 한쪽을 가득 채웠다.
어쩌면, 아마도 어쩌면 처음부터 저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뿐. 왜 입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 무헌도 아마 그 마음을 알고 있었을 테지.
“…….”
하연은 다시 곱게 저고리를 개었다. 깃동에 닿은 손끝이 쉬이 떨어지지가 않았지만, 숨 한번 들이켜고 소매로 덮었다. 그러고는 고이 가슴에 품고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가득 빼곡하게 쌓인 색색의 옷들을 바라보기를 한동안.
고요한 방 안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드리운 햇살이 옷을 쥐고 있는 손끝을 간지럽혔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작은 숨결이 고운 저고리에 차곡차곡 가 닿고….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하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신을 신기 무섭게 마당을 가로질러 달렸다. 가슴에 방금 받은 새 옷을 꼬옥 품고서.
아마도 이 길이겠지. 아마, 아마도 이 길을 지나야 할 거야.
언덕길을 내달려 올라섰을 땐 숨이 차올라 잠시 쉬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방향을 가늠하느라 눈은 바쁘게 굴렀다. 거센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피던 하연의 눈에 지은 지 얼마 안 된 정자 하나가 들어왔다. 하연은 그곳에 올라가 길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지나가는 이는 없었다. 멀리 걸어가는 이도 없었다. 아마도 저 길. 저 길이 맞을 텐데. 저 길로… 가셨을… 텐데….
그렇게 그 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마도 어머니가 걸어가셨을, 그 길을….
“흐윽….”
어쩐지 기운이 빠져 정자에 주저앉았다.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소리 나지 않게 밀어 삼켰다.
“어머니는 왜 깃동에 두 번 박음을 하셔요?”
“그래야 찬 바람이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
“깃동이랑 찬 바람이랑 무슨 관계여요?”
“음, 그냥 이 어미의 몹쓸 습관이란다.”
그렇게 말하며 웃곤 하셨다. 그러게, 제게도 한때는 그리 웃어 주던 어머니셨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나이를 먹고, 삶을 살면서. 한 번도 어머니가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떤 날은 매 순간이, 매 시각이, 그 손길이 그리워 숨어 울기도 했었다.
행복한 날도 울었다. 기쁜 날도 울었다. 제 속으로 낳은 아이가 어여뻐서도 울었고, 아이가 옹알이를 해도 울었다. 처음 몸을 뒤집었을 때도, 첫걸음마를 뗐을 때도, 둘째를 낳았을 때도, 아이가 아파 무헌과 둘러업고 밤길을 달렸을 때도 저는 어머니가 보고파서 울었다.
잊어도, 잊었는데도 그리워서 울었다.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의 제가 그 시절의 어머니라, 그래서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소리 죽여 울던 하연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옷고름으로 눈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저만치서 한참을 지켜보았을 무헌이 눈이 마주치자 가만히 웃는다. 하연은 벌게진 코를 훌쩍이며 저도 웃었다.
손을 내밀자 그 손을 꼭 잡은 무헌이 옆에 와 앉았다. 하연은 그게 좋아 말끄러미 무헌을 보았다.
이 사내는 언제나 날 혼자 두는 법이 없다. 외로워지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 나를 감싸 안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내 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내 마음 가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춥게….”
무헌이 하연의 어깨에 팔을 둘러 품으로 잡아당겼다. 따스한 온기에 갇히자 까닭 없이 서러웠던 마음도 금세 사라졌다.
하연은 무헌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하늘가를 보았다. 단단히 저의 등을 받쳐 주는 품이 좋아 새끼 새처럼 몸을 오므렸다.
그러게, 이 사내 때문에 저는 울어도 행복했다. 이 사내가 있어 저는 서러워도 기뻤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보듬고, 귀히 여기는.
하늘이 주신,
나의, 꽃.
“여기서… 우리 집이 보이네?”
앞마당이, 제가, 아이들이, 자주 나와 거닐던 뜰이 여기서 보였다.
어째서….
상기된 눈으로 묻자 무헌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그러라고 지은 거니까.”
…세상에나.
어쩐지 가슴이 벅차 하연은 무헌의 팔을 꽉 잡았다.
새로 지은 이 정자가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았다. 앉아 계시다 가라고. 앉아서 딸과 손자와 손녀를 보시다 가라고.
아아. 고운 사람. 참으로 곱고, 또 고마운 사람.
해가 짧아져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노을빛에 붉게 물든 채로 하연은 말했다.
사실은 오늘 밤 말하려고 했던 거였지만….
“셋째가 생겼어.”
등을 타고 무헌의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하연은 얼떨떨한 모습으로 입가를 늘이고 있는 무헌을 바라보며 곱게 웃었다.
“그날, 달빛 타고 내려온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