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章. 봄 같은 가을
벌써부터 고소한 기름 향이 퍼졌다. 이웃 마을까지 가서 무화과를 가득 구해 온 무헌은 들뜬 마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을 하연을 생각하며 한걸음에 안채로 향하던 두 발이 마당에 우뚝 섰다. 분명 제집이건만, 제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왔어?”
마당 저편에서 하연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무헌은 발끝을 세운 후 담장에 붙어 조심조심 걸었다.
“이게 다 뭐야?”
“뭐긴. 육전 해 먹는다 하였잖아.”
그렇지. 그랬었지. 분명 ‘육전 한 접시 해 먹어야겠다.’라고 했었지.
“그랬는데… 이건….”
발 디딜 틈 없이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가마솥 뚜껑, 바구니들, 배춧잎, 감자, 호박, 버섯…. 무헌은 멧돼지가 휘젓고 간 것 같은 풍경을 눈에 담다가 현기증이 나 외면해 버렸다.
“하는 김에 배추전도 하자 싶어서….”
만삭의 하연이 뒤집개를 든 채로 배시시 웃었다.
“하다 보니 감자전도 먹고 싶더란 말이지요.”
이젠 하연의 단짝이 된 만삭의 강운담도 밀가루가 묻은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러다 보니 호박전, 버섯전도 당기셨고?”
무헌이 기막혀 묻자 하연과 강운담이 쌍둥이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들도 벌인 짓이 무엇인지를 아는 머쓱한 미소가 쌍으로 날아온다.
“…동태전과 돈저냐도요.”
짠 것처럼 터져 나온 답에 설마설마하며 주위로 눈을 돌리자 커다란 솥 안에 들어 있는 생선과 고기가 보였다. 무헌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찔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각시가 먹고 싶다는데. 그것도 산달이 낼모레인 먹성 좋은 우리 각시가.
“알겠으니, 이거부터.”
사당패 줄 타는 것처럼 힘들게 마당으로 들어온 무헌이 하연에게 무화과를 안기고 뒤집개를 낚아챘다. 오는 길에 깨끗이 씻어서 반들반들 윤이 나는 무화과를 집어 들며 하연이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해도 되는데….”
그렇지, 각시가 해도 되지. 이렇게 태워서 못 먹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소매부터 걷고 자리를 잡고 앉자, 이번에는 강운담이 한마디를 했다.
“우리도 잘할 수 있는데….”
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지. 세월이 한 백 년쯤 흐르면.
무헌은 강운담의 손에서도 젓가락을 뺏어 버렸다. 손 큰 거 자랑하는지, 전 한 장 크기가 방앗간 먹돌이 얼굴만 하고, 두께는 시루떡만 했다.
이렇게 하면 속이 안 익는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저리들 가쇼. 가서 무화과나 드쇼.”
휘휘 손을 저어 두 여인을 물린 후 본격적으로 전 부치기에 나섰다. 세상 어지럽던 마당이 무헌의 손에 의해 착착 질서를 찾아갔다. 하연과 강운담은 툇마루에 나란히 붙어 앉아 무화과를 오물거리며, 그런 무헌을 새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손 야무진 건 내 낭군이 최고다. 하연의 입가가 빙그르르 솟았다. 무화과 반을 뚝 잘라 무헌의 입에 밀어 넣자 조금 삐져 있던 무헌의 얼굴이 금세 풀렸다. 입을 벌려 무화과를 받아먹으며 무헌이 소매로 하연의 콧등에 묻은 밀가루를 살살 문질러 닦았다.
“앞으로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생각만 해 놔. 행동으로 옮기지 말고. 아니면 어디 적어 놓든가.”
“…….”
“기다렸다가 내가 오면 나한테 말해 줘. 꼭. 제발. 알았지?”
어딘지 간곡하게 들리는 부탁에 하연이 슬쩍 웃었다.
안다. 그냥 무헌에게 부탁하면 후딱후딱 끝날 일이지만, 제가 일을 벌이면 뒷수습까지 해야 해서 일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수없이 들어 온 부탁이건만, 그래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강운담이랑 붙어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일을 치고 만다. 강운담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왠지 이번만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시작했는데, 역시나 또 일거리만 만들어 주고 말았다.
괜히 애먼 낭군 고생시키는 거 같아 저도 소매로 무헌의 이마와 뺨에 흐른 땀을 콕콕 찍어 주었다. 그러자 하얀 밀가루가 이마와 뺨에 차례로 묻었다.
어어. 이게 아닌데.
“왜? 뭔데?”
눈치는 또 빨라서 수상함을 느낀 무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돌아보았다. 닦아 줘야 했지만, 그렇게 묻는 무헌이 귀여워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강운담을 힐끔 돌아보자 그녀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웃는다.
암튼 둘이 찰떡처럼 쿵짝이 맞아서는.
무슨 일인지 알 리 없는 무헌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방금 갓 부친 호박전 하나를 호호 불어 하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작은 그릇에 다 익은 전을 담아 간장 종지와 함께 강운담 앞에도 내놓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해치운 먹성 좋은 여인 둘이 아예 무헌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헌의 손도 빨라졌다.
이것도 운명인지 알고 보니 강운담과 하연의 산달이 똑같았다. 안 그래도 친자매처럼 장단이 잘 맞는 둘이 배까지 동시에 부르니, 붙어 있노라면 아주 천하무적이 되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먹부림이 아주 끝도 없어서, 대체 어떤 녀석이 태어나려고 그러는가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기도 했다.
“이거 마저 드시우.”
“아니, 먼저 드시우.”
전 하나 남은 걸 가지고 서로 양보하느라 난리다. 무헌은 바지런히 전을 부쳐 두 사람의 접시에 수북이 쌓아 주었다.
그런데. 내 각시는 하나인데, 어째 수발을 들어야 하는 건 둘인지.
국밥 사러 가서 아직 오지 않은 양윤에게로 불만이 돌아갔다.
“소를 잡아서 국밥을 끓이는 거야, 뭐야.”
안 그래도 강운담은 배 안 부를 때도 틈만 나면 송도 집을 놔두고 귀둥 마을로 내려왔다. 그럴 때면 하연과 밤새 수다를 떠느라 무헌을 강제 독수공방하는 홀아비 신세로 만들곤 했었다.
그러더니 지난달에는 아예 여기서 몸을 풀고 가겠다고 짐을 싸 갖고 내려왔다. 대체 이럴 거면 집은 왜 송도에 구한 건지 아직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친자매 하나 없는 하연에게는 유일한 동갑내기 친우라서, 어려서부터 사내들 틈에서만 자라 온 강운담에게는 유일한 여자 친우라서, 두 사람의 찰떡 우정을 무헌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히익, 이게 다 뭐야?”
양반은 정말 못 되는 인물. 양윤이 때맞춰 등장했다. 무헌이 말은 않고 눈빛을 쏘자, 이런 눈치 한두 번 당해 본 게 아닌 양윤이 쪼르르 달려와 국밥을 내려놓았다.
“뜨끈뜨끈한 걸로 가져왔으니 어서들 한술 떠요.”
야무지게 국밥을 풀어 놓은 양윤이 소매를 걷고 무헌을 도왔다. 똥몸뚱이지만 그래도 지난 몇 달간 무헌의 옆에서 보조를 하다 보니 이젠 할 일을 제법 찾아서 잘했다.
두 아내가 호호 불어 국밥을 떴다. 그 옆에서 두 남편은 남은 전을 부지런히 부쳤다.
“태산 같은 녀석이 태어나려나 보네.”
강운담의 입으로 들어가는 국밥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양윤이 웃었다. 뜨거운 국밥을 호호 불어 식히는 하연을 보는 무헌의 입에도 어쩌지 못하고 미소가 걸렸다.
“천하장사가 될 수도.”
어떤 녀석이기에 이리 먹성이 좋은 건지는 모르지만, 제 어미 고생만 시키지 말고 쑤욱 나와라.
각시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른 무헌이 광대를 바짝 올린 채로 코를 한번 쓱 문질렀다. 다시 전 부치기에 집중하려는데, 이마에 양윤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뭐?”
“어? 아니.”
왜인지 입가를 실룩거린 양윤이 바지런히 배추전을 솥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누구 처남인지 신수가 훤한 게 아주 자알 생겼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무헌이 인상을 썼다. 그러자 옆에서 먹부림을 하던 하연과 강운담이 까르르 손바닥을 마주 치며 웃었다. 무엇 때문에 신수가 훤한 건지 혼자만 모르는 무헌은 괜스레 소매로 얼굴 한 번 더 닦고 다시 전을 부쳤다. 어디가 밀가루고 어디가 얼굴인지 구분 안 가는 무헌을 보는 여인들만 그저 재밌어 또 크게 웃었다.
“서당 다녀왔습니다.”
“와! 전이다!”
서당 다녀온 주훤과 오라비 따라갔던 모윤이 안으로 들어섰다. 눈이 휘둥그레져 전을 향해 돌진해 온 모윤에게 하연이 엄하게 눈을 떴다.
“인사부터 해야지.”
그러자 모윤이 두 손을 배꼽에 얌전히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성큼 다가온 주훤이 모윤을 위해 한 번 더 모범을 보였다.
“소자, 서당에서 글공부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고 웃어 주자 모윤이 용기를 냈다.
“소녀, 서당 옆에서 낙서하다가 왔습니다아.”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귀여운 모윤의 입에 육전을 들이밀어 주자, 모윤이 아비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어?”
다음으로 육전을 받아먹은 주훤도 그 의미를 알고 똑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뒤에서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눈짓을 하는 어머니 때문에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저 하얀 분칠 한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기를 잠시, 터지려는 웃음을 육전과 함께 꾸욱 밀어 삼키는데 모윤이 못 참고 푸하 입에 든 것을 뿜었다.
“으어어, 내 고기!”
고개 틀어 뿜는다는 게 숙부인 양윤의 얼굴을 향했다. 씹던 조각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양윤을 무헌이 손으로 가리키며 박장대소했다.
뭐 묻은 사람이 뭐 묻은 사람 비웃는다.
양윤은 씩씩거렸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배를 두드리며 한마음 한뜻으로 웃었다. 마당이 즐겁게 시끌벅적했다. 그렇게 웃는 머리 위로 가을이 오는지 하늘이 참 파랬다.
가족.
그러게, 지금 함께 웃는 이들 모두가 가족이라.
하연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두 눈을 접고 소리를 더 크게 내어 웃었다. 배 속의 아이도 기쁜지 발을 콩콩 굴렀다. 그새 하연의 손을 끌어가 제 손안에 쥔 무헌의 온기가 봄인 듯 따스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