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별당에 버려져 있던 정승댁 젊은 과부 하연은
자신을 죽이려는 시어머니를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자루에 담겨 끌려오고 만다.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대들보에 목이 매달리겠구나, 체념하는 순간
자신을 데려온 사내가 시어머니가 부리는 일꾼도, 자신을 쫓는 무리도 아닌 생판 낯선 사내임을 알게 되는데….
“어?”
“어….”
하연이 굳은 건 사내와 마주쳐서만은 아니었다. 그 사내가 어수룩하고 우락부락한 칠동이가 아니어서였다. 그렇다고 수많은 민정승댁 하인들 중 하나도 아니었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반듯한 콧날과 붉은 입술과 달리 조금 사납게 치켜 올라간 기다란 눈매, 넝마처럼 옷을 기워 입고도 총기 있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이 앳된 사내는, 그녀가 아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뉘신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물었다. 그러자 여태 당황한 듯 빤히 보고 있던 그의 눈이 둥글게 접혔다.
“모자란다더니, 혼자서도 잘 풀고 나왔네?”
…모자라?
“이제 보니 말도 별로 안 더듬고.”
어째 이 사내, 하는 말이 좀 이상하다.
보시게, 자넨 대체 나를… 누구로 여기고 있는 것이야?
***
“그건 안은 거 아냐.”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하연은 굳게 입매를 가다듬었다. 둥그레진 무헌의 눈이 날아왔다.
“왜 안은 게 아냐?”
크게 숨을 들이켠 하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남녀가 몸을 맞댄다는 건, 이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