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03화
3화
"이런 제길… 늦었어."
생방송을 마친 후, 차에 올라탔다.
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생각 이상으로 늦은 것이다.
마침 핸드폰에 설정해둔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을 열자 '여보야 사랑해♡'란 글자가 떠 있다.
통화 아이콘을 누르자 유리처럼 투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출발했어?
"그래, 지금부터 한 시간 반 쯤 걸릴 거야."
저절로 중저음의 매끄러운 음색이 흘러나온다.
유라가 가장 좋아하는 톤이다.
얼굴보다 목소리 때문에 호감이 생겼다고 했다.
―서둘러요. 오빠, 기다리다가 눈 빠지겠다.
"알았어, 서두를게."
―그렇다고 사고내진 말고. 생일 날 초상 치르면 알지? 잠깐만, 경아가 바꿔 달래.
―아빠!
핸드폰 너머로 이제 5살이 된 딸아이의 앳되고 깜찍한 음성이 들려왔다.
"경아야!"
톤이 금세 한 옥타브 올라갔다.
팔불출 마냥 흐물거린다.
강력범죄를 담당하는 범죄 수사관으로서 매서운 눈빛과 날카로운 추리력을 선보이던 강혁은 여기 없었다.
―아빠 언제 와? 케이크랑 카드랑 다 준비해 놓고 엄마랑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공주님~ 그랬어? 아빠가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령~ 알았쥐~?"
―응, 알았어. 빨리 와. 아빠. 쪽~♡
경아가 전화기로 뽀뽀하는 소리가 들린다.
강혁의 입이 더 벌어졌다.
평소 사건 현장에서 엄격하고 냉기 풀풀 날리는 강혁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변화다.
"알았어. 우리 공주님~"
이내 유라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빨리 온다고 운전 함부로 하지 말고. 조심해서 와요.
"염려 마! 이래봬도 내가 우리 경찰청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후훗, 네네 알았어요. 강 형사님.
유라에게 한 호언장담은 사실이다.
타고난 운동 신경에 과잉기억증후군이 더해 생겨난 특이 능력 중 하나였다.
현장을 누비며 기억하게 된 도로와 골목 곳곳의 사소한 특징, 시간대별 특징들이 기억 속에 들어 있다.
일종의 빅데이터 네비게이션이라 할 수 있었다.
엑셀을 한껏 밟았다.
10년째 몰고 있는 현대 투―샨 SUV의 디젤 엔진이 오래된 부속품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뿜어냈다.
뇌리에 떠오르는 교통 사정을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차를 몰았다.
마치 고도로 발달한 A.I가 운전하듯 일체의 낭비가 없는 드라이빙이다.
신호가 끝나는 시점에 딱 맞춰 운전을 했다.
덕분에 정지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는 기염을 발휘했다.
갑자기 튀어 나오는 변수를 감안하며 최대 속력을 유지했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렸을 때였다.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응, 유라야."
―…….
"유라야?"
―강혁 형사.
음성변조가 된 목소리다.
다시 한번 번호를 확인했다.
유라의 핸드폰 번호다.
운전하던 차가 도로에서 휘청거렸다.
뒤에서 차들이 빵, 거리며 경적을 울렸다.
"…누구냐?"
대답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살려 주세요. 제발,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전화기에서 아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급히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 멈춰, 너 누구야!"
―아빠! 아빠, 도와 줘요.
경아의 목소리다.
공포와 울음이 섞인 딸의 목소리에 강혁의 눈에 핏줄이 섰다.
―안 돼, 아이는 안 돼! 제발. 살려주세요. 아이는 놔두세요.
유라의 목소리다.
하지만 곧 전화가 끊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인근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집에 누군가 침입해 가족을 위협하고 있다고 신고를 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원미상의 남자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야, 이 새끼야. 너 누구야?"
―…….
"당장 그 집에서 나와. 안 그러면 내가 너 죽여 버린다."
강혁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고통에 찬 아이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칼로 짐작되는 뭔가로 사람을 찌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안 돼!"
강혁은 그만 순간 차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칠 뻔했다.
"경아야!"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았다.
눈앞에 신호가 빨강색으로 변했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통과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경찰차가 뒤를 따랐다.
'그래, 날 따라와.'
시계를 보았다.
이대로라면 5분 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려 재빨리 뛰었다.
뒤에 경찰차가 서는 것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12층을 눌렸다.
강혁의 집은 서울 외곽에 있는 전형적인 서민 임대 아파트였다.
그래도 30평대 아파트로, 형사 월급으로 겨우 구한 곳이었다.
평생을 꿈꿔 왔던 자신만의 스위트 홈이었다.
착하고 예쁜 아내와 귀여운 딸이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급히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보고 말았다.
"안 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범행 현장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거실로 뛰어들었다.
거실 바닥에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바닥에 두고 누워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자 등에 여러 차례 칼에 찔린 자국이 보였다.
"유…유라야……."
강혁은 아내의 시신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아내의 코와 목덜미에 가져갔다.
강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실낱같은 희망이 끊어졌다.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깊은 잠에 든 것만 같은 아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라는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젊음이 절정에 이르러 꽃처럼 아름다웠다.
고아였던 이유라와 처음 만난 곳은 선배 형사가 주말마다 봉사하러 갔던 복지관에서였다.
유라는 그곳에서 피아노 반주 알바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홀에서 혼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유라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첫 만남 이후 불꽃처럼 사랑에 빠졌고, 서로가 서로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던 유라는 오래지 않아 강혁의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해를 넘기지 않고 두 사람은 가까운 사람만 모아놓고 결혼식을 치렀다.
유라에게 강혁이 그랬던 것처럼 강혁에게 있어서 이유라는 삶의 모든 것이었다.
남들은 스타 형사라고 떠받들어 주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일생에 유라는 유일한 등불이 되어 주었다.
강혁은 너무 큰 충격에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경아!"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휘청거리며 일어나서 딸 유경이를 찾았다.
딸아이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다.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강혁이 딸아이를 찾은 곳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손잡이가 부러져 있었다.
유라가 범인이 휘두르는 칼을 몸으로 막는 사이 딸아이가 범인을 피해 화장실로 달아난 것이라 생각되었다.
문을 열자 샤워실 욕조 안에 딸의 모습이 보였다.
겉모습만 보면 금방이라도 깨어나 인사를 할 것 같았다.
"경…경아야."
강혁은 잠시 딸아이의 신체를 살폈다.
샤워실 목욕탕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딸의 몸에는 칼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목에 성인 남자의 손바닥 자국이 보였다.
크기를 봐서는 장갑흔이다.
강혁은 어금니를 꽉 물며 고개를 숙였다.
손으로 공포에 잠긴 딸의 눈을 감겨주었다.
손가락을 살폈다.
손톱이 부러져 있었다.
마지막 순간 저항을 한 것이리라.
문제는 부러진 손톱 끝에 핏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손톱이 박히지 않은 걸 보면 상대는 팔목까지 내려오는 질긴 가죽 재질의 옷을 입었을 것이다.
딸의 시신을 확인한 강혁은 눈에서 빛을 잃었다.
깜깜한 밤에 세상을 비추어주던 등불이 갑자기 꺼진 느낌이었다.
가슴에 생긴 구멍에 큰 바람이 불었다.
강혁은 조용히 밖으로 나와 유라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입 안에 권총을 집어 넣었다.
끼릭!
방아쇠만 당기면 뇌수가 튀어나와 즉사할 것이다.
'유라야, 조금만 기다려. 곧 갈게.'
손가락을 방아쇠에 올린 강혁이 힘을 주려고 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경찰들이 뛰어 들어왔다.
[TBS 9시 뉴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21일 저녁 9시 경 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스타 형사 강혁 씨의 아내 이 모 씨와, 딸 강 모 양이 신원불명의 범인에게 잔인하게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행이 일어날 당시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범죄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던 강혁 형사는 방송을 마친 후, 집으로 귀가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경찰당국은 범인의 체포를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대한 일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강혁이라 불리우던 스타 형사의 가족이 참혹한 범죄의 대상이 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경찰 당국은 현재 범인을 찾기 위해 모든 경찰력을 총동원하고 있으며, 경찰청장이 직접 사건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신라 일보
…한편 강혁 형사는 이번 사건의 해결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고자 하지만 규정상 수사에 관여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현직 스타 형사 가족의 잔인한 죽음은 대한민국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청장의 직접 지시에 따라 수사 팀이 꾸려졌다.
반 년에 걸쳐 일만 명에 달하는 경찰이 동원되어 사건 반경 30km 이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조사했다.
당일 인근 도로와 CCTV에 등장한 모든 사람들의 신원을 조회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범인에 대한 단서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너무 지나치게 증거나 단서가 없자 형사들 중에는 강혁을 의심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범인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람은 강혁이 유일했다.
강혁의 말이 맞다면, 범인이 살인 현장에 있었던 시간과 강혁이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범인은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이런 의심은 나중에 사건을 조사하던 팀 전체에 퍼졌다.
결국 강혁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알리바이가 확실하다는 것이 확인된 후, 사건은 완전히 미궁에 빠져버렸다.
* * *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내와 딸이 죽은 모습이 너무 생생했다.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과잉기억증후군의 저주다.
딸을 지키려다 등 뒤를 칼로 난자당한 아내와 화장실 욕조에 기대어 죽어 있는 딸아이의 공포에 찬 얼굴과 부서진 손톱…….
눈앞에서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어 죽을……."
기억 속에는 끝내 찾아낸 범인과 마지막 결투를 벌였던 장소가 있었다.
이전에도 알고 있는 곳이다.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서울 외곽의 도로로 이동했다.
차가 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타고 주행하고 있을 때였다.
강혁의 눈에 이채가 떴다.
"아저씨, 여기서 세워주세요."
"응? 여긴 도로 한가운데인데?"
"괜찮습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요금은 드릴게요."
"나야 뭐. 상관없어."
택시 운전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았다.
강혁은 산 중턱의 도로에 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떤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머리가 아파왔다.
"분명히 여기야. 여기에서 내가 그 녀석을 죽였지. 하지만 어떻게?"
범인과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기억에서 빠져나온 강혁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욱!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걸어보았다.
그러자 낯익은 장소가 보였다.
"저 산이야."
마침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