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04화
4화
강혁을 태운 택시가 다시 도로 위를 달렸다.
머릿속으로 하나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 강혁은 범인 일당에게 잡혀 산 속의 별장에 끌려가 있었다.
그곳에서 범인에게 납치당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의 이름은 이수영.
살인사건을 수사 중 동일 수법으로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실종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수영은 그 명단 속에 있던 여자였다.
강혁은 수영의 동생들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수영이'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아내인 유라와 딸 경아와는 다른 의미에서 고통스러웠다.
'결국은 지켜주지 못했어.'
허공을 향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잡아 탄 택시가 한참 산을 올라가던 중 산길로 빠지는 샛길 하나가 보였다.
강혁은 택시 운전사에게 말해 그곳으로 진입했다.
잠시 후, 마침내 모든 것이 일어난 집이 있었던 공터를 찾아냈다.
택시에서 내린 후, 그곳으로 걸어갔다.
"여…여기야. 틀림없어."
머릿속에 엉켜 있던 기억들이 마침내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완성되기 시작했다.
강혁은 다시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 * *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삼강그룹의 임원실,
신철호 회장의 아들이자, 상무이사인 신상현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강혁을 감시하는 드론에서 보내온 영상이었다.
신상현은 그의 집에서부터 강혁을 감시하고 있었다.
신상현은 모니터를 보며 깜작 놀랐다.
강혁이 본사 건물로 찾아 온 것이다.
"맙소사! 대체 어떻게 알았지?"
신상현의 얼굴이 크게 상기되었다.
희열과 설레임이 뒤범벅된 기묘한 얼굴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깜작 생일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비서실에서 인터폰으로 연락이 왔다.
"상무님, 강혁이라는 분이 상무님을 만날 수 있을지 문의하셨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신상현은 여비서의 말에 반색을 하며 말했다.
"정중히 모시도록 해요. 귀한 손님입니다."
"예, 상무님."
강혁은 삼강 그룹 본사 로비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를 반 쯤 마셨을 때, 늘씬한 몸매에 예쁜 얼굴을 한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강혁 님이시죠? 상무님께서 정중히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자리에서 일어나 여비서의 뒤를 따라갔다.
'정중히 모시라고? 과연 언제까지 정중히 모실 수 있을까?'
비서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상무실이라고 적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비서가 말했다.
"여기 들어가시면 됩니다."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강혁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신상현이 일어나 다가왔다.
준수한 용모가 제일 먼저 눈에 띠였다.
전체적으로 댄디한 스타일. 젊은 여성들이 매료될 만했다.
눈앞에 피해 여성들의 왼손 손가락을 잘라내고, 사지를 절단해서 가방에 넣은 후, 유기한 용의자가 있었다.
아내와 딸을 죽인 범인 역시 같은 사람일 것이다.
이미 절반 이상의 확신이 있었다.
국정원 출신의 프리랜서 해커 최승호의 집에서 지워진 영상을 이미 복원했다.
복원한 영상에는 파란색 벤틀리에서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길을 물어보는 신상현의 얼굴이 잡혔던 것이다.
강혁은 이 모든 범행의 범인이 삼강 그룹의 후계자인 신상현이라고 확신했다.
최승호의 집에서 CCTV 영상을 분석했을 때, 처음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새로 프로그램을 코딩해서 업그레이드 시켰다.
디지털 분석기를 뜯어내서 최승호가 F.B.I에 의뢰받은 기기의 칩으로 새로 조립까지 해서 영상을 분석했다.
그러자 사라졌던 영상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원래의 영상에 이전 영상을 정교하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이정도로 현대의 디지털 영상 분석기기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삼강의 관련 기술이 얼마나 앞서가고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형, 이 친구. 아는 얼굴인데?"
"응? 누군데?"
"형, 몰라? 금융 수사 하면서 경제 쪽으로도 팠잖아?"
"그렇기는 한데. 내가 아는 얼굴은 아냐."
"아, 그런가? 아직은 경제 쪽 기사가 아니라 연예 면에 더 자주 등장했으니. 형은 그런 거 안보니까."
"누군데?"
"삼강 그룹 상무야. 괴물 신철호의 숨겨진 아들 신상현."
"……?"
"10살 이전에는 외삼촌 밑에서 컸는데 어릴 때 엄마가 애를 버리고 외가에 맡겼나 보더라."
최승호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강혁은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무심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보자마자 면상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느라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참아, 아직은.'
강혁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신상현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어서 오세요. 삼강 그룹 상무 신상현입니다."
"강혁입니다. 서울지방광역수사대 1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압니다. 제가 사실 오래 전부터 강혁 형사님 찐팬입니다."
신상현의 말에 강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 팬이라고요?"
"그럼요. 여기 서재에 형사님이 쓰신 책도 있습니다."
신상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사무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서재로 가서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강혁이 보니, 진짜 자신이 쓴 책이다.
강혁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때 낸 책이었다.
미국 연수 시절의 에피소드와 캘리포니아 식인 연쇄 살인마를 체포할 당시의 이야기를 엮어 놓은 책이었다.
"이 책입니다."
"초판이군요."
강혁이 표지를 들추자 자신이 한 사인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자신의 글자가 보이자 강혁의 머릿속으로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서울의 대형 서점에서 북사인회를 했었다.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수줍은 얼굴로 강혁의 사인을 받는 모습이 기억났다.
"당시에 중3이라고 했었지."
"기억나시나요?"
신상현은 마치 숭배하는 아이돌을 대하듯 행동했다.
"얼굴이 많이 달라져서 몰라봤군요. 이제 기억나네요. 그때는 아직 어렸는데."
"역시, 절 알아보시는군요. 얼굴이야 저도 20대니까요. 형사님은 많이 변하셨네요. 당시는 젊고 근육질이셨는데.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범죄자도 잡을 수 있는 슈퍼맨 같아 보였어요. 실제로 그 후로 정말 맹활약을 하셨고요. 저, 형사님이 활약했던 당시의 신문들을 스크랩해 놓은 자료집도 있어요."
신상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파일집을 가져왔다.
강혁이 수사했던 사건들을 보도한 언론 기사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강혁은 아무 말 없이 하나하나 파일집을 넘겼다.
그리고 신상현이 얼마나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했다.
"그렇군."
강혁은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가슴 쪽으로 향했다.
신상현은 여전히 강혁의 기사를 스크랩한 파일집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왔다.
"상무님,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참. 그렇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저기 괜찮으시면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강혁은 가슴 쪽에 가져갔던 손을 내려놓았다.
"볼일 보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한 30분쯤 걸릴 테니 편하게 앉아계십시오."
강혁은 비서가 들어오기 직전 가슴팍에 있는 권총을 뽑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하면 애꿎은 여비서가 피해를 볼지도 몰라 신상현을 보내주었다.
'기다려. 유능한 사냥꾼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는 법이야. 놈은 반드시 다시 온다.'
신상현이 밖으로 나가자 강혁은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먼저 신상현이 앉아 있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책상 주변에는 특이할 만한 것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서재 위에 손바닥 모양이 새겨진 작은 사각형 모양의 장식품이 보였다.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을 천천히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놈은 피해자의 손가락을 모두 잘랐어.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 손가락은 어떻게 했을까?'
어린 나이에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신상현의 심리가 어땠을지 생각했다.
손가락은 보통 약속을 상징한다.
특히 새끼손가락은 어린이들이 약속을 할 때 사용한다.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은 결혼반지 등을 끼는 곳이기도 하다.
'어디에 뒀을까?'
강혁은 그동안 범인을 체계적인 살인자로 분류했었다.
'아니야. 놈은 과시적인 성격이야. 오히려 턱하니 사람들이 보는 곳에 전리품을 뒀을 수도 있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바닥에 뭔가에 쓸린 자국이 보였다.
'빙고, 찾았다.'
재빨리 다시 서재를 살폈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만져보기 시작했다.
'여기도 아니군. 여긴가? 아니야. 생각해. 강혁. 어딜까?'
뭔가를 본 순간 강혁의 눈이 빛났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그것을 돌리자 삐거덕하는 소리와 함께 서재가 돌아가며 비밀의 공간이 열렸다.
'역시나 손바닥 장식품이 열쇠였어. 지독히도 좋아하는군.'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가자 서재가 다시 돌아가며 문이 닫혔다.
주변을 돌아보며 방 안을 살폈다.
그러자 한쪽 벽면이 쇼윈도우처럼 꾸며져 있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다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얼어 죽을!'
쇼윈도우 안에는 여자들의 손가락이 석고로 된 동그란 손 모형 위에 붙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넷째 손가락에 다이아 반지를 끼고 다른 손가락과 함께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새끼손가락은 누군가와 약속을 하듯이 앞으로 뻗어 있었다.
이곳은 신상현의 비틀리고, 삐뚤어진 욕망이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 장소였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대체자를 찾아서 결코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손가락을 잘라 반지를 끼우고 저렇게 장식한 것은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결핍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어때요? 내 작품이? 제목은 영원의 약속. 멋지지 않나요?"
"너? 이 새끼!"
"후후, 처음부터 스케줄 따위는 없었어요. 다만 내가 없으면 형사님이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죠. 역시나 찾아내시는군요. 역시 강혁 형사님. 이러니 내가 좋아 죽죠."
생각하기 전에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어디선가 유령처럼 등장한 신상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런, 이런."
신상현은 주머니에서 꺼내든 스프레이를 강혁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강혁은 재빨리 상의로 얼굴을 가린 후 복부에 펀치를 먹였다.
퍼억!
신상현의 몸이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강혁은 순식간에 가슴팍에서 권총을 꺼내어 신상현을 겨누었다.
"신상현, 너를 삼대강 살인사건 및 과학수사대 유세희 팀장 살인사건, 경찰 가족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즉.결.처.단.한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변명을 해도 되는데! 다~ 소용없어, 쉬팔! 동의할 필요도 없고. 왜? 넌 그냥 여기서 죽을 거니까!"
강혁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그의 뒷통수로 강력한 일격이 가해졌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강혁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조심하셔야 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하아, 왔어? 늦었네."
"도련님,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이 녀석 때문에 불명예 제대를 해야 했습니다."
커다란 키와 단단해 보이는 몸, 각이 진 얼굴에 쥐를 연상시키는 눈과 상어처럼 툭 튀어나온 턱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의 이름은 박광수.
HID 출신으로 강혁과는 합동 훈련 당시 악연이 있었다.
강혁이 훈련 중 큰 사고로 대수술 끝에 과잉기억증후군을 얻게 된 것도 박광수와의 다툼으로 인해 생긴 일이다.
"흐흐, 그게 내가 널 데리고 있는 이유지."
"그래서 제가 이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합니까?"
"왜? 고맙지 않아? 연봉도 꽤 센데."
"충분하다 못해 과분하지요. 덤으로 종종 피맛도 보게 해주시니까요. 사실 그게 제일 고맙죠. 제가 도련님 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고. 하지만 이 녀석에게 당한 원한은 별개죠."
"좋아, 그럼 일하라고. 핫산."
"알겠습니다. 응차."
박광수는 정신을 잃은 강혁에게서 권총을 회수했다.
그리고 강혁을 어깨에 걸쳐 메고, 질질 끌고 갔다.
박광수의 키도 크지만 강혁이 190이 넘다보니 발이 바닥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