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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5화 (5/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05화

5화

#2장 어둠의 자식

어둠이다.

사방이 시커먼 어둠이었다.

강혁은 두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뒷통수로부터 느껴지는 통증에 비로소 현실감각을 되찾았다.

"얼어 죽을. 여긴 또 어디야?"

"아저씨, 정신이 들어요?"

"누구요?"

갑자기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려워마세요. 저도 여기 잡혀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남자가 잡혀 온 적은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잡혀왔다고?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죠?"

"수영이요. 이수영."

"이수영? 동생이름이 이승우, 이서영?"

"어? 어떻게 아세요? 우리 동생을 아세요?"

"끄응, 그런데 머리가 왜 이리 아프지?"

강혁이 뒷통수를 매만졌다.

"아저씨. 우리 동생 아세요?"

"응, 아저씨, 경찰이야. 두 사람을 만났어. 잘 지내고 있고."

"그래요? 잘 지내고 있다고요?"

"그래, 잘 지내. 밥도 꼭꼭 잘 먹고 있고."

강혁의 말에 수영은 울컥 눈물을 쏟았다.

갑작스런 수영의 애절한 흐느낌에 마음이 아팠다.

아파트 입구에서 승우와 서영이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아저씨가, 너희 누나 꼭 찾아줄게."

실종된 누나를 찾아 달라며 울먹이는 두 아이에게 그날 그렇게 말했었다.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수영은 부모를 사고로 잃고, 어린나이에 취직해 동생들을 혼자 돌보고 있었다.

비가 오던 어느날 퇴근길에 실종되어 강혁의 리스트에 올랐었다.

'여기서 내가 죽어도, 이 아이는 구해야겠다. 동생들한테 돌려보내야지.'

"밥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죽기 전에 동생들 소식을 들었으니 이젠 됐어요."

이수영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죽긴 왜 죽어. 내가 구해줄 건데."

"아저씨가요? 하지만 아저씨도 잡혔잖아요."

"아저씨가 이렇게 잡혀 있으니까. 믿음이 안가나 본데, 이래 뵈도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이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이곳에 잡혀 온 이후 처음으로 지은 미소였다.

"잘 봐. 어? 안 보이지 참. 그럼 기다려보라고. 아저씨가 널 구해줄 테니."

강혁의 팔은 뒤로 묶여 있었다.

다리 역시 묶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강혁은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그리고 뒤로 넘어가 있는 팔을 서서히 앞으로 돌렸다.

그게 가능하냐고? 인체 구조상 불가능하다.

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 뼈가 빠졌다.

지독한 고통이 전해졌다.

"끄으윽……."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그렇게 팔을 앞으로 돌렸다.

빠드드!

다시 강제로 어깨뼈를 다시 끼위 넣었다.

"끙……."

외마디 비명을 속으로 삼키는 것을 끝으로 몸을 바로 세웠다.

"어디에 있니?"

"저요? 이쪽이에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두발을 모아 콩콩 뛰어갔다.

잠시 후, 물컹거리는 감촉이 닿았다.

"앗, 아저씨?"

"엇, 미안. 너 움직일 수 있니?"

"아뇨, 저는 쇠사슬로 연결된 자물쇠 같은 게 채워져 있어요."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손을 더듬어 수영의 다리 쪽 사슬을 만져보았다.

"흐음, 이거 내가 잘 아는 거다. 혹시 머리핀 같은 것 있니?"

"있, 있어요."

수영은 손목에도 수갑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강혁처럼 양손을 한꺼번에 묶은 형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여, 여기요."

강혁은 수영이 건네는 머리핀을 잡아들었다.

어둠 속이라 잘못하면 잃어버리기 쉬웠다.

양손과 이빨을 사용해서 핀을 이리저리 구부렸다.

그 와중에 손목의 피부가 벗겨지며 피가 배여 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핀의 한쪽 끝을 잡고는 다른 손으로 쇠사슬을 더듬어 자물쇠를 찾아냈다.

"좋아, 조금만 기다려."

핀을 자물쇠에 꽂은 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와중에 손톱이 깨어져 나갔다.

하지만 마침내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열쇠 수리기사 자격증을 따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사실 강혁은 형사로서 금고나, 자물쇠를 따는 도둑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이미 은퇴한 도둑을 찾아가거나, 현역에서 활동하다 감옥에 들어간 도둑들을 만나서 조언을 듣기도 했다.

"됐다!"

"아저씨!"

"어때? 이제 내 말 믿지."

어둠 속에서 이수영은 밝게 웃었다.

"믿어요. 아저씨."

해맑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의 울림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아저씨만 믿어. 죽어도 넌 구해줄게."

"고마워요."

이수영이 갑자기 다가와 강혁의 얼굴에 입술을 맞춘다.

마침 볼에 맞닿은 따뜻한 감촉에 강혁은 깜짝 놀랐다.

"얌마, 깜짝 놀랐다."

"힛, 이제 어서 나가요."

"이제 웃음이 돌아왔나 보네. 보이진 않지만 보기 좋다."

"킥!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 가볼까?"

강혁은 벽을 손으로 집고서 가느다랗게 빛이 새어나오는 지점으로 콩콩거리며 뛰었다.

수영이 그 뒤를 따랐다.

그르릉~

바닥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강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가면 이 쇠사슬부터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군."

동그란 손잡이를 잡고 핀을 넣어 이리저리 돌렸다.

이런 단순한 자물쇠는 매우 손쉬운 먹이였다.

돌린 지 얼마 안 되어 철컥하고 열렸다.

"아저씨, 형사 맞아요?"

"형사 맞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열쇠를 잘 따세요? 형사가 아니라 도둑 아니세요? 사실은 여길 털로 왔다가 잡혔다거나?"

"은퇴하면 먹고 살려고 열쇠 수리 자격증을 땄거든."

"그게 뭐에요? 푸훗."

"자주 웃어. 여기 나가면 더 자주. 듣기 좋네."

"듣기만 좋은 게 아니라 보기도 좋을 걸요? …이젠 다 소용없지만."

문을 열자 빛이 새어 들어오며 수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평소 예쁘다는 소릴 자주 들었을 법했다.

갑자기 침울해하는 수영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용이 없다니. 일단 살아남자. 우선은 그것만 생각해. 동생들 보러 가야지."

수영이 눈물을 닦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빛 속에서 자신의 손목과 다리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테러 용의자들에게 사용하는 플라스틱 끈이었다.

움직일수록 더 단단하게 조여진다.

이미 끈이 조여들어 피부 속을 파고 들었다.

도구가 없으면 절대로 완력으로는 풀 수 없는 도구다.

임시방편으로 사람을 결박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였다.

한 번 뜀뛰기를 할 때마다 발목에서 피가 배여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색 한 번하지 않고 수영을 바라보며 자신만 믿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자, 그럼 나가 볼까?"

"저기, 저한테 좀 기대세요."

수영에게 한쪽 어깨를 의지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나서자 긴 통로가 보였다.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긴 통로였다.

공기의 밀도를 가늠하며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딘가의 지하라고 생각했다.

통로를 지나는 동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팔과 양다리가 묶여 있는 상태라 조마조마했다.

*     *     *

사방이 고급스런 가구로 둘러싸인 응접실 소파에 신상현은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백발의 집사가 건네는 와인을 홀짝이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마침내, 결착을 맺을 때가 왔나? 강 형사님을 이렇게 빨리 보내버리다니."

신상현은 강혁이 좀 더 절망에 빠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즐거웠던 놀이도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생은 뭘로 흥분하지? 나의 슈퍼맨이 죽었는데 말이야."

"도련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또 적당한 놀이감을 찾아보겠습니다."

"글쎄,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군. 또 누가 있어서 날 이 정도로 전율시킬 수 있을까? 이번만 해도 날 찾아냈잖아? 게다가 사실 거의 죽을 뻔 했다고."

"제 심장이 멈출 말을 하시는군요."

"오, 쏘리. 그건 미안해, 할아범. 염려를 끼쳤군."

"저는 도련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시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래야지. 내가 약속했잖아. 손녀딸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상현이 웃으며 백발의 노집사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원래 상현의 아버지 신철호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집사였다.

지금은 상현을 돌보고 있지만 이전에는 신철호의 자택을 관리하고 오랫동안의 그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그런 그가 대체 왜 상현의 편에 붙어 있는 것일까?

상현에게 와인잔을 건네받으며 노집사는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도련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10살의 상현은 그날도 몰래 들개에게 쥐약이 묻은 밥을 던져 주고 있었다.

동네에는 방화범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들개의 죽음 따위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킨 것이다.

상현은 자신의 부주의를 탓했다.

미소를 지으며 낯선 이방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누구야?"

"저는 앞으로 도련님을 모실 집사입니다. 할아범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할아범? 그런데 할아범은 내가 한 짓을 고자질할 거야?"

상현은 노집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관심은 자신이 한 짓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것인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가 보아하니 도련님은 마음이 망가지신 분이군요."

노인의 말에 상현은 본색을 드러내며 급히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 상현의 팔을 잡고 노인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괜찮습니다. 비밀을 하나 말씀드릴까요?"

두려워하는 상현을 향해 노인이 말했다.

노인의 얼굴이 기이한 빛으로 물들었다.

"저도 마음이 망가진 사람이랍니다."

노집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본색을 상현의 앞에 드러낸 날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질색 했을 노집사의 기이한 표정.

마음이 망가진 사람의 차가운 광기.

상현은 오히려 기뻐했다.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부류를 만난 날이었다.

노인의 마음이 망가진 원인은 삼강그룹 때문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혼자가 된 손녀를 노인이 거둬들였다.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그녀의 자립을 도왔다.

어느덧, 성인이 된 손녀는 취직할 나이가 되었다.

노인은 신철호의 집사라는 점을 이용해 편법으로 삼강전자의 반도체 공장에 취직시켰다.

물론 신철호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아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의 주인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알고 있었기에, 조금도 그에게 흠을 잡히려고 하지 않았다.

손녀가 기뻐하는 모습에 노인도 행복했다.

그녀는 직장을 가지게 된 후, 얼마 안 가 결혼 할 남자가 생겼다.

그리고 일 년 후, 결혼을 앞두고 백혈병에 걸렸다.

회사는 손녀의 백혈병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언론과 법원도 삼강의 편이었다.

본인이 잘못해서 병에 걸려놓고서는 회사 측에 책임을 전가한 파렴치한 사람으로 전락시켰다.

이번 일로 한몫 벌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결국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손녀는 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와 회사의 냉대 속에서 그녀의 억울한 죽음은 철저히 묻혔다.

그녀의 약혼자도 돈에 매수당해 그녀를 끝까지 외면했다.

노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손녀를 죽게 만든 삼강을 벌하겠다고.

눈앞의 소년은 그런 그의 맹세를 이루게 해줄 최상의 파트너였다.

노인의 눈에 소년은 거대한 불길이었다.

삼강이란 거대한 성을 잿더미가 되게 만들어 줄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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