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06화
6화
"도련님, 말씀하신 이유라 아가씨에 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흐응, TG그룹 상속녀이자 내 약혼녀가 된 여자 말이지? 이름이 이유라였던가?"
"예, 그렇습니다."
"하필 강 형사 아내와 같은 이름이군. 예뻤는데. 급히 해치우느라 재미는 못 봤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허무함이 머물러 있는 눈동자에 얼핏 생기가 돌았다.
상현은 노집사가 건넨 자료를 말없이 읽어 내려갔다.
"흐응, 이 여자 걸작인데? 원래 이름이 이세라?"
"그렇습니다. 도련님."
"이거 대체 강혁 형사님과 나는 어떤 인연으로 엮인 거야? 신이 있다면 정말 악취미야. 그렇지 않아?"
"아시지 않습니까? 신은 죽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말이지요."
"큭, 할아범. 역시 신랄하군. 하긴 나도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해. 그 양반이 진짜로 있다면 어떻게 이런 부조리가 용납되는 걸까?"
상현은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오래 전 신이 존재할까하는 소박한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신은 역시 없다는 거야. 만에 하나 혹시 있다고 해도 예전에 죽었던가. 안 그래? 이 세상은 강한 놈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그 속에 신이 있다면 돈과 권력이라는 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도련님."
* * *
강혁은 이수영의 도움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벽면이 뭔가로 막혀 있었다.
막혀 있는 벽면의 아래쪽으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들어 왔다.
벽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만져보고, 귀를 가져가니 뭔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벽이 그리 두꺼운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강혁은 수영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수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바깥에 사람이 아직 있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란 뜻인데?'
강혁은 팔과 다리가 묶여 있어서 여전히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럴 때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자신을 키워준 은혜를 저버리고, 수장시켰단 말이지?"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전대 TG그룹 회장이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던 섬이거든요.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바다와 이어진 호수라 그것 참 우아한 양반이군. 뒤처리도 깔끔하고, 한 번 쯤 봐두고 싶은 사람인데 말이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그러고 보면, 우리 괴물 아버지도 슬슬 돌아가실 때가 됐다고 생각지 않아?"
"원하신다면 언제든 실행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난번처럼 심장마비로 죽는 건 제 분이 안 풀려서 말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이런 건 어떻습니까? 그 양반의 최후에 어울리는 형벌은……."
귓가에 들려오는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강혁은 그들이 신철호 회장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신상현의 형 신석준 사장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의 짓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큭,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그 노괴의 최후에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부창부수인건가? 알고 보니 우리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환상의 커플이 아닌가?"
"도련님. 설마 이세라 양을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그쪽 약점을 잡고 휘두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너무 오만한 걸까?"
신상현의 말에 노집사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세라 아가씨는 결국, 이유라 아가씨가 아니지요. 도련님께서 약점을 쥐고 있다면 다른 이야기가 되겠군요."
"부탁해. 할아범."
노집사가 웃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이유라? 이세라? 무슨 이야기지?'
강혁은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자 더욱 귀를 기울였다.
한참 후,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정적만 감돌았다.
강혁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벽면을 밀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며 거실이 보였다.
강혁은 수영의 어깨에 기대어 밖으로 나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기 몇 번 온 적이 있어서 대강 알아요."
수영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강혁은 몸을 벽에 기대어 주변을 살폈다.
전형적인 상류층 별장 구조였다.
신상현은 이곳과 대외적으로 알려진 자택을 오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강혁이 강금실을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자리를 비웠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아저씨."
수영이 어디선가 과도를 찾아왔다.
강혁은 반가워하며 수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 팔 쪽의 플라스틱 바인더가 잘려나가고, 과도를 넘겨받아 발목 쪽도 잘라냈다.
자리에 일어선 강혁은 손목과 발목을 주물렀다.
"이제 여길 나가자."
"예, 아저씨."
강혁이 수영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였다.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소파 뒤에 몸을 숨겼다.
"찾았습니다. 도련님. 탁자 위에 두셨네요. 지금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강혁이 고개를 살짝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얼핏 툭 튀어나온 상어 턱이 보였다.
강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설마, 아니겠지?'
강혁이 뼈를 묻으려고 했던 군대를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사내가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박광수.
상어 턱 때문에 동료들에게 샤크라고 불렸다.
H.I.D와의 합동 훈련 중 그를 처음 만났다.
처음부터 불길한 인상을 풍겼던 그는 말 그대로 피에 미친 살인귀였다.
샤크는 북파 공작원으로서 이미 여러 차례 비밀 작전을 수행했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을 강간하고 죽였지만 고위층에서 처벌을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혁은 그런 소문을 흘려들었지만 동료들 사이에는 그를 경원시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그와 결정적으로 맞닥트렸던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 * *
"뭐하는 짓이야?"
"응? 강혁? 너도 같이 할래? 이 계집애 꽤 쌈쌈……."
퍼억!
샤크의 커다란 몸이 텐트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얼굴은 맞아서 부은 자국과 함께 옷이 반쯤 찢어져 있는 여대생이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골의 한적한 해변가로 놀러온 학생이었다.
강혁과 그의 팀원들은 인근 산속에 캠프를 차리고 야간 침투 훈련을 수행 중이었다.
샤크는 낮의 해변가에서 놀고 있던 그녀를 점찍어 두고는 밤중에 납치했던 것이다.
강혁은 조장으로서 평소 위험 인물로 분류해 놓고 있던 샤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덕분에 불시검문을 해서 변을 당할 뻔한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이봐요, 밖엔 위험해요."
야밤이라 산속은 위험한 것 투성이다.
샤크의 텐트는 특히나 뒤쪽으로 깍아지른 절벽이다.
강혁은 놀라서 도망친 여대생의 신변이 걱정되어 따라나서려 했다.
"개자식아!!"
몸이 뒤집혔다.
뒤에서 샤크가 덥쳐온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백태클에 이어서 네이키드 초크가 목덜미로 날아들었다.
팔이 턱 아래를 파고들자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싸늘한 감각에 황급히 샤크의 팔을 잡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경동맥을 졸려서 그대로 기절했을 것이다.
"이… 이, 시키……."
머리끝까지 분노에 휩싸였다.
강혁은 이번 합동 훈련 중에 조장을 맡고 있었고, 샤크 박광수는 그의 조원이었다.
훈련 중 민간인 납치 및 강간 시도는 매우 위중한 범죄다.
그런데 거기다가 하극상까지 일으킨 것이다.
안 그래도 강혁 역시 군에서 지휘책임을 묻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자신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시쳇말로 빡이 돌았다.
강혁의 완력은 팀원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양팔로 샤크의 팔을 억지로 잡아 뗀 후, 팔 사이로 머리를 빼내며 역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바닥에서 서로의 몸이 엉키며 치열한 그라운드 싸움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으며 엎치락 뒤치락하던 중 기회를 포착한 강혁이 샤크의 팔을 잡아당기며 암바를 시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자 샤크는 급히 몸을 뒤집었다.
강혁의 하반신 위로 몸을 돌리며, 남은 팔로 강혁의 복부를 가격했다.
퍼억
강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 시키……."
샤크가 다시 한 번 복부를 가격하려 하자 다리 하나를 빼서 샤크의 배를 가격했다.
퍼어억
타격음이 텐트 안을 울렸다.
명치를 가격 당한 샤크의 등이 다시 바닥에 닿는 순간 강혁의 암바가 완벽하게 들어갔다.
"이 개… 자식……."
뿌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샤크의 비명소리가 텐트 안을 울려 퍼졌다.
격통에 거품을 물고 반쯤 기절한 샤크를 두고 강혁은 여대생을 찾으러 나갔다.
야밤에 잘못하면 실족사할 가능성도 있는 곳이었다.
강혁은 소리를 지르며 여학생의 위치를 확인하려 시도했다.
"여, 여기예요. 군인 아저씨."
자신이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자,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괴성과 함께 샤크가 달려들었다.
"죽엇!!"
샤크의 왼손이 날아들었다.
강혁은 가까스로 얼굴을 돌려 피했다.
그와 동시에 샤크의 태클이 허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쿠웅
강혁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급하게 팔로 샤크의 가슴 쪽을 단단히 붙잡았다.
경사진 비탈길 아래로 두 사람이 굴러갔다.
바닥의 돌멩이들이 두 사람의 온 몸을 두드렸다.
격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갈 때, 강혁은 어딘가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까아악!!!"
여자의 비명소리가 한밤중의 야산에 울렸다.
두 사람이 서로 치고받다가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강혁은 그 사고로 대수술을 받았고, 목숨은 살았지만 과잉기억증후군이란 희기한 병을 앓게 되었다.
샤크 역시 수술 후 목숨을 건졌지만 군법재판소에 회부되었다.
강혁은 그 소식을 끝으로 그에 대해서는 잊고 살았다.
* * *
저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어 턱의 사내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빠드득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수영이 다리가 저려 조금 움직였는데 바닥과 마찰되며 소리가 난 것이다.
사내는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그대로 걸어서 거실을 나섰다.
강혁과 수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키는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아니다. 하지만 좀 더 있다가 움직이는 게 좋겠다."
"예, 아저씨."
두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이거 참 헛웃음이 나는군. 대체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사내가 거실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강혁은 사내의 본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상어 턱에 쥐 눈, 자신보다는 작지만 큰 키에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
강혁이 다시는 보지 않기를 바랐던 사내였다.
"샤크……."
"오랜 만에 듣는군. 그 별명."
"아, 아저씨. 아는 사람이에요? 저 사람. 무서운 사람이에요."
수영은 진저리를 쳤다.
자신을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음침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내다.
"군대에서 엮인 악연이야."
"악연이라. 맞아. 우린 악연이지. 그거 알아? 네 녀석을 지난 20년 동안 잊어버린 적이 없다는 걸."
샤크는 천천히 다가왔다.
두 눈은 눈앞에 먹잇감을 앞두고 있는 맹수처럼 광폭해져 있었다.
두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강혁은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겨누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녀석을 만났군.'
강혁은 아내와 딸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지 않았다.
근육질의 몸은 예전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군 시절 배운 스킬과, 큰 키와 리치를 이용한 펀치다.
문제는 눈앞의 사내에게 어설픈 기술은 통하지 않는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