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11화
11화
가끔 신상현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10살밖에 안 된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어휘들도 많았다.
노집사는 신상현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노집사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은 삼강그룹 신철호 회장의 사생아인 신상현을 데리러 간 날이었다.
농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가운데 서 있던 상현을 발견하고 노집사는 차를 멈춰 세웠다.
사진으로 본 신상현이 틀림없었다.
노집사가 차에서 내리자 신상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다렸어. 할아범."
신상현의 말에 노집사는 깜짝 놀랐다.
"저를 아시는 겁니까?"
"알고 말고."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집사에게 다가간 신상현이 집사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비밀을 하나 말해줄게."
"……?"
"나도 할아범처럼 마음이 망가진 사람이야."
"……!"
상현의 말에 노집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노집사는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날이라 기억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의를 내려 주었다.
'마음이 망가진 사람.'
그렇다.
삶의 희망을 넘어. 삶의 모든 것이었던 존재가 자신이 신처럼 모시던 사람의 손에 철저하게 짓밟혔다.
손녀딸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한 이후, 노집사는 영혼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후,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더 이상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인형일 뿐.
자신은 마음이 망가진 것이었다.
노집사는 그날 1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신상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어린 신상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노집사에게 약속했다.
자신을 주군으로 모신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노집사는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노괴물의 목숨을 원했다.
상현은 웃으며 약속했다.
그 후, 신철호에게는 상현이 가출했으며,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노집사의 말에 여전히 활기가 넘치는 노괴물은 더 이상 상현의 거처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애초에 10살이 될 때까지 찾지 않았던 아들이다.
이제 와서 왜 그를 불러들이려 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회상에서 돌아온 노집사의 눈앞에 어린 상현이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순수한 악은 너무나 순수해서 마치 신이나 악마 같았다.
"궁금한 모양이군."
"예, 도련님."
"여기 이사장이 최영혜야."
"아, 그 최강수 대통령님의……."
최강수 대통령은 10년간의 군부독재시절을 거치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을 들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근대화의 기반을 놓았다는 평가와 함께 수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 문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최강수의 유일한 피붙이가 최영혜다.
"독재자였지만,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국민들이 많은 나라지."
"……?"
"나, 그분의 아들이 될 생각이야."
"그…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돌아가신 지 오래인데?"
"쯧, 그분이 아니라 그 따님."
"…예?"
"최영혜 이사장의 양아들이 될 생각이야."
"대…대체 왜 그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노집사를 바라보며 악마처럼 순수하게 웃었다.
상현은 노집사의 귀에 다가가 속삭였다.
"…이 될 거야. 그 사람이"
노집사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만일 상현의 말 대로 된다면, 신상현은 신철호의 핏줄이면서 동시에 최영혜의 법적 아들이 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을 생각하자 엄청난 미래가 그려졌다.
노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도련님의 뜻대로 되시길……."
노집사의 말에 신상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 커다란 음모가 꿈틀거렸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안의 어둠을 느낀 것은. 처음 엄마가 날 버리고 떠난 날이었을까?
아니면 외할아버지 집에서 외삼촌과 이종사촌들에게 얻어맞았을 때?
날 버러지 보듯 바라보았던 눈초리가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삼촌이 키우던 개에게 몰래 쥐약을 먹여 죽였던 건 삼촌이 담뱃불로 내 허벅지를 지졌을 무렵이었다.
아무도 내 짓이란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멍청한 것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덜떨어진 가족이었다.
외할아버지나 빌어먹을 삼촌자식과, 벌레 같은 사촌들까지…….
하나같이 덜떨어진 가족이었다.
내 피의 일부가 그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암울해질 정도니까.
그래서 나는 종종 그런 사실들을 잊으려고 노력한다.
아무튼 삼촌은 개똥이가 실수로 쥐를 잡으려고 놓아두었던 쥐약을 먹고 뒤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후로 점점 더 대담해졌다.
동네에서는 들개들과 들고양이들이 길거리에 배를 뒤집고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불이 난 집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금세 몰려들었고 또, 얼마가지 않아 소방차가 와서 화재를 진압했다.
아름다운 불꽃이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모습은 내게 특별한 인상을 주었다.
강렬함과 지배력. 그리고 슬프게 흐느끼는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 학교에서 유독 집요하게 날 괴롭히던 뚱보도 있었다.
나는 희열을 느꼈다.
오줌을 지릴 만큼의 희열.
나는 누군가에게 내 표정을 들킬 것이 염려되어 인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후,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내 평생 그렇게 웃었던 적이 몇 없었다.
그리고 동네에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야뇨증이 찾아와서 아직도 오줌을 싸냐고 외삼촌에게 얻어맞았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라 구타가 일상이었다.
거기서 맞을 거리가 하나 더 늘은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이던 시절이다.
열 살이 되었을 때, 날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할아범.
나는 그를 그렇게 부른다.
이름? 박… 음… 모르겠다.
아무튼 할아범은 할아범이니까.
굳이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다.
할아범은 친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집사라고 했다.
그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이종사촌들은 내게 친절하게 굴었다.
할아범이 그들에게 건넨 수표는 적지 않게 큰돈이었으니까.
사실 그들은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없다.
정말이다.
어린 나를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았으니까.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어떤 구실을 삼아서든 나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린 딸을 꾀어서 미혼모로 만든 내 아버지를 저주하며 괴롭힘을 방조했다.
하지만 그날로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 * *
저격용 라이플을 야산에 숨긴 강혁은 집으로 돌아왔다.
강혁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달라진 신상현의 행적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하나는 자신의 회귀로 인해, 알 수 없는 영향으로 신상현의 미래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상현 역시 회귀자라는 거다.
둘 모두 문제였다.
신상현이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르게 행동할지라도 그 본질은 사이코패스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가 신철호의 핏줄이라는 것이다.
미래에 막강한 권력을 지닐 사이코패스. 그것이 신상현이다.
최악의 경우는 신상현 역시 회귀자라는 가정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유라도 위험하다.'
지금쯤이면 이유라는 8살이고 남해의 작은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유라는 어린 시절 남해의 외진 길을 혼자서 울며 걷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그때부터 인근에 있던 보육원에 맡겨졌다고 한다.
신상현은 강혁을 숭배하며 스토킹했던 자였다.
당연히 이유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신상현이 노집사와 함께 나타나 이유라를 보육원에서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이 아니라 해도 언제든지 이유라는 표적이 될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의 아내가 될 거라는 이유만으로…….
강혁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팠다.
강혁은 결혼 후, 이유라와 함께 방문했던 남해의 작은 보육원을 떠올렸다.
다음 날, 강혁은 새벽에 남해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8시간이 지나 남해에 도착한 강혁은 택시를 타고 보육원으로 향했다.
자신이 방문했을 당시와는 길이나 주변 풍경이 많이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혁이 보육원을 방문한 것은 두 사람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이후였다.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주었던 원장 수녀님이 보고 싶다며 자신을 끌고 남해까지 갔었다.
너무 멀어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이유라에게 원장 수녀님은 마음의 양식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강혁은 보육원이 가까이 보이자 택시에서 내렸다.
"응… 저 아인 혹시?"
강혁은 마당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놀고 있는 여아의 뒷모습을 보았다.
혹시 이유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년 전의 이유라는 8살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인기척에 아이가 돌아보았다.
강혁을 본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잠시 이유라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 아이는 이유라가 아니었다.
한 점의 티끌도 없이 해맑은 아이의 웃음은 연기였다.
그런 아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유라일 수는 없었다.
"안녕, 이름이 뭐니?"
강혁을 본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이세라라고 소개했다.
강혁은 아이가 처음에는 거짓말을 하려다가 솔직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저씨는 누구?"
"나? 난 강혁. 오랜 친구를 만나러 왔단다."
"그래요?"
강혁은 천사처럼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대체 이 아이는 어떤 과거가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런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 왔던 강혁이다.
아이의 가면 같은 미소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아이가 이렇게 거짓 미소를 짓게 되었는지를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방울이 맺혔다.
"아저씨?"
강혁은 말없이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 필사적으로 웃을 필요 없어."
갑작스런 강혁의 말에 이세라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해맑은 얼굴 표정이 잠시지만 균열을 일으켰다.
"무…무슨 말이에요. 아저씨."
"아니, 아니야. 자 이거 먹을래?"
강혁이 아이를 안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초코파이를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건?"
"하하, 군대에서는 엄청 인기 있는 건데. 네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초코파이를 본 적이 없는지 아이는 조금 고개를 꺄우뚱했다.
하지만 이내 껍질을 까고 초코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함이 소녀의 입가에 스며들었다.
아이의 표정이 변했다.
"응, 맛있어요."
"그래, 그거야."
"예?"
"방금 표정 좋았어. 정말 예쁜데?"
이세라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무슨 말……."
말을 이어가려 했던 이세라는 더 이상 말을 연결할 수 없었다.
강혁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모습이 조금 전보다 훨씬 좋아. 세라야."
"…눈치챘어요?"
"응, 힘들었겠다."
강혁의 말에 이세라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세라의 눈에 작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처음이에요. 눈치챈 건."
이세라는 자신에게 선뜻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이유라를 떠올렸다.
'그 애도 알고 있는 눈치였어. 그래서 거절도 하지 않았지. 치~'
목걸이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목걸이의 주인은 이유라였다.
이세라가 목걸이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 이유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