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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2화 (12/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12화

12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저씨는 모르지만, 세상에 나쁜 어른들만 있는 건 아니란다."

이세라는 강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아저씨를 찾으렴. 아저씨 이름은 강혁이야."

"네. 기억할게요."

"전화번호는 아차, 지금은 핸드폰이 없지."

강혁은 자신의 전화번호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음에도 아저씨가 찾아 올 거니까. 아니, 아저씨가 시간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이라도 보낼 테니까. 그 아저씨에게 말하렴."

강혁의 말에 이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혁은 아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육원 쪽으로 걸어갔다.

이세라는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에 동요했다.

강혁의 표정에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는 것을 이세라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겨우 8살.

하지만 태어난 지 오래지 않아 부모에게 버려진 이세라였다.

살아남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천사 같은 아이를 연기했다.

그러지 않으면 버림받으니까.

착하지 않으면 싫어 할테니까.

버려지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착한 아이를 연기했다.

사람들을 속이기만 하면 많은 것이 돌아왔다.

모두가 그런 착한 아이를 좋아하고, 원래의 자기는 싫어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신의 본모습을 본 어른이 그 모습이 더 좋다고 말해주었다.

이세라는 처음으로 세상에서 자신을 받아준 어른이 있다는 사실에 부르르 떨었다.

'어째서? 저 아저씨는 왜 착한 아이가 아니라도 좋다고 했을까?'

그때 이세라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기… 얘야."

낫선 여자 어른의 목소리에 이세라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이세라는 자신이 연기하던 최고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만 선택받을 수 있으니까.

버려지지 않을 거니까.

강혁은 먼 발치에서 보육원에서 놀고 있는 이유라를 발견했다.

아직 8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틀림없는 이유라다.

작고 앙증맞은 움직임은 마치 자신의 딸 경아와 닮아 있었다.

강혁은 유라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해 유라는 20살이었다.

강혁이 봉사활동을 하러간 단체에서 피아노 반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두 차례 만남을 가지던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결국 결혼까지 이르렀다.

"유라야~"

강혁이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선가 그녀의 환영이 나타나 강혁의 몸을 감싸 안았다.

공기 중에 그녀가 살고 있는 것 같다.

강혁의 정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날의 장소로 날아갔다.

과잉기억증후군이 그에게 내린 형벌이자 축복이다.

유라는 혼자 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드뷔시의 달빛.

시리도록 아름다운 음색에 왠지 모를 애달픔이 담겨 있다.

유리문 앞에 서서 피아노 연주를 듣던 강혁은 홀린 듯이 홀 안으로 들어갔다.

유라가 고개를 돌려 강혁을 바라보았다.

순수함이 하나의 형체를 갖춘다면 이런 모습일까?

강혁은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안, 안녕하세요? 강혁이라고 합니다."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예? 아, 전 이유라라고 해요."

유라가 연주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기 나경필 형사님 아시나요? 전 그분 후배인데 오늘 여기 와서 좀 도우라고 해서."

"아, 강혁 형사님! 저 말씀 많이 들었어요. 천재라고 하시던데. 우와~ 만나서 반가워요."

이유라가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공기 중에 달콤함이 떠다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몸에 향수를 뿌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강혁의 뇌가 그렇게 느낀 것이다.

유라는 존재만으로도 강혁에게 향기로운 사람이었다.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주치의가 과잉기억증후군의 부작용 중 하나라고만 했다.

실재하는 향기가 아닌 뇌가 일으키는 이상작용이라고 했다.

하지만 강혁에게는 실재하는 향기와 다른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강혁의 눈앞을 뿌연 안개가 가렸다.

기억은 거품처럼 흩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아니, 이런 거금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혁 씨."

강혁은 원장 수녀의 안내로 보육원 시설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강혁은 정기적인 후원을 약속하고 계좌번호를 알아냈다.

"저기 이곳에 이세라라는 아이가 있죠?"

"예, 혹시 아시는 아이인가요?"

"아뇨, 보육원에 들어오기 전에 만났는데… 사연이 많아 보이더군요."

원장 수녀님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 아이들 중에 사연이 없는 아이는 없답니다."

"그렇군요."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아픔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다들 착한 아이들이에요."

강혁은 원장 수녀와 함께 걸으며 먼발치로 이유라를 보았다.

까르르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강혁은 흐뭇한 얼굴로 그런 이유라를 바라보았다.

보육원에서 힘들게 자랐는데도 착하디 착한 아가씨로 자라는 그녀다.

그녀를 그렇게 키워준 원장 수녀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화재사고로 죽는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원장 수녀의 장례식에 아내와 함께 왔었던 강혁으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방 시설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 같던데. 잊지 말고 신경을 써야겠어.'

강혁은 원장 수녀의 안위를 위해 때를 놓치지 않고 도울 결심을 했다.

"아니… 어디 갔지?"

원장수녀에게 인사를 하고 보육원을 나선 강혁은 이세라를 만나기 위해 나무 밑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세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     *

"응? 그게 뭐니?"

삼강과 함께 대한민국 재계를 이분하고 있는 TG그룹이다.

죽은 회장의 유일한 핏줄인 이소윤 이사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세라가 먹고 있는 초코파이를 보았다.

"초코파이라는 겁니다. 이사님."

이소윤 이사의 수행원이 말했다.

"그래요?"

살짝 미소를 띠우던 이소윤 이사가 이세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맛있니?"

이소윤의 말에 이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이세라가 강혁에게만 보여주었던 미소를 지었다.

'어머? 이 애. 아까와는 또 다르네?'

남해에서 여행 중 사고로 죽은 남동생 부부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명을 어기고 평범한 일반인 여성과 결혼한 남동생 이유성을 마지막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유라야, 이제 서울로 가면 얼마든지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그렇고 말고."

이소윤이 웃으며 말했다.

이세라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유성아, 네 딸 유라는 내가 꼭 잘 키우마. 그래서 네가 물려받아야 했을 우리 그룹을 유라에게 맡길 거야.'

이세라의 목에 걸려 있는 십자가 목걸이는 어머니가 동생에게 물려주었던 목걸이었다.

'하늘나라에서 유라가 잘 크도록 지켜봐다오.'

보육원 앞에서 놀고 있던 여자아이의 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본 순간 이소윤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이름을 물어보자 동생 부부의 호적에서 찾은 이름을 말해주었다.

자신의 조카딸을 찾은 것이다.

이소윤은 TG그룹의 위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언론에 노출이 될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이유라를 곧바로 차에 태웠다.

보육원에는 차후에 따로 연락을 할 생각이다.

*     *     *

남해에서 돌아온 강혁은 자신의 작은 월세방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신상현이 아직 힘이 없을 때 제거한다는 계획이 무산되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 했다.

게다가 아직은 어린 유라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지만 언제 마수가 뻗을지 모른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아니 뭘 해야 할까?"

상대는 앞으로 18년 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주름잡는 삼강그룹이다.

눈앞에 거대한 적을 마주하자 강혁의 피가 끓어올랐다.

남들은 주눅 들지 모를 거대 기업이었지만 강혁은 타고난 반골이다.

만주 벌판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며 일본군들을 때려잡았다는 할아버지의 피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강혁은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삼강과 삼강이 한국 사회에 펼쳐놓은 강대한 영향력을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 내려했다.

"힘, 힘이 필요해. 삼강과 삼강의 영향력을 상회하는 힘이."

'그러고 보니, 승호. 그 녀석이 지금 몇 살이지?'

강혁은 회귀 전 자신을 도와주었던 국정원 출신 프리랜서 해커 최승호를 떠올렸다.

사실 최승호와 강혁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최승호가 고등학생일 무렵 가정사정이 어려워졌다.

국제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던 아이큐 180의 천재가 해커의 길로 빠져들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재미로 미국 국방성 서버를 해킹했다가 F,B,I의 추적을 당하게 되었다.

귀신같은 솜씨로 미국의 추적을 오랫동안 피했던 최승호였다.

그로 인해 미국은 결국 한국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당시 강혁은 수사팀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강혁은 미국 정부에 협조하라는 공식적인 정부의 명령 외에 국정원으로부터 은밀한 협조 요청을 받게 되었다.

미국 국방성을 뚫을 정도의 해커라면 국가를 위해서도 유용한 인재이니 우리 쪽에서 먼저 찾아내서 빼돌리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강혁은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F.B.I 요원들을 따돌리고, 미국이 모르게 최승호를 찾아냈다.

이후 그의 신분을 세탁하고 국정원 요원으로 발탁했다.

최승호에게 강혁은 미국에 압송되는 것을 피하게 도와 준 은인이었다.

최승호는 오랜 세월 국정원에서 해커로 일했다.

나중에는 의무 복무를 마치고, 국정원을 나와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아이큐 180의 해커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프로그래머이자 발명가였던 최승호였다.

그는 미국의 여러 기업체들에게서 보안 관련 프로그램과 각종 첨단 무기 등 여러 제품들을 테스트해주고 돈을 받았다.

최승호는 강혁을 도와 신상현의 정체를 밝혀냈던 당시에도 이미 준재벌이었다.

스스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며 지금보다 과거에 태어났다면 큰 기업을 일으켜 세계를 주물렀을 것이라 말했다.

그때 강혁은 최승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17살이야. 이미 3년 전에 해커로 데뷔 했겠군.'

중1 때 재미로 시작된 해킹은 고1이 되었을 때, 미국 국방성을 해킹할 정도로 발전한다.

강혁은 신상현을 찾아다닐 당시 최승호의 집에 머물며 그의 방에서 읽었던 책들을 떠올렸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의 국제 경제와 산업발전, IT버블 시대의 흥망과 기술적 혁신에 대한 책들이었다.

그 책의 내용들이 강혁의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가만… 그 책들의 내용을 잘 활용한다면…….'

세계 경제의 흐름이 그의 머릿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었다.

미래를 미리 알고 있다면 삼강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강혁은 이 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자신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계획을 세웠다.

강혁은 노트에 앞으로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들, 해야 할 일들을 빼곡하게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트를 불에 태웠다.

"좋아. 이거면… 삼강을 이긴다."

강혁의 두 눈이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다음 날, 강혁은 새벽 일찍 고속버스터미널에 올랐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부모님 댁을 찾았다.

"혁아? 무슨 일이고. 연락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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