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13화
13화
#4장 악의 씨앗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재개발 계획만 있고 10년째 묶여 있는 달동네에 사시는 어머니.
강혁은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며 오랜 만에 어머니를 안았다.
"그냥 엄마 보고 싶어 내려왔지."
"혁이 왔나."
"아버지."
듬성듬성 보이는 검은 머리보다 하얀 머리가 더 많아진 아버지가 나왔다.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와 너무 달랐다.
어느새 주름이 얼굴에 한가득이었다.
강혁은 자신이 두 분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책감에 가슴이 시렸다.
"아버지 저 왔어예."
"어서 들어와서 밥 무라."
마침 점심 때였다.
강혁은 마루에 올라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점심을 함께 먹었다.
부모님과 식사를 하며 강혁은 몇 번이나 가슴이 울컥 거렸는지 몰랐다.
몰래 눈시울을 적셨지만 두 분은 알면서도 모른 척 묻지 않았다.
군대에서 불의의 사고로 제대를 한 아들의 마음고생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이다.
'아버지, 어머니. 못난 아들 강혁. 이번 생에서는 행복하게 해드릴께요.'
며칠 전만 해도 신상현을 죽이고 자수할 생각이었던 강혁이다.
부모님을 보면서 자신이 그날 신상현을 죽이고, 자수를 했더라면 부모님이 겪었을 고통이 어떠했을지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지만 괜시레 더욱 죄스러웠다.
"밥도 먹었고, 이제 네 생각이나 함 들어보자."
"예."
"이제 어쩔끼고? 할 일 없으면 서울 생활 접고 마, 그냥 내려온나. 부산 천지에 찾아보면은 네 할 일 하나 없겠나."
"그래, 혁아. 내려와. 엄니가 네 일은 알아봐 줄게. 용택이 엄마 알제?"
"예."
"용택이가 사상에서 공장장으로 있다아이가. 내가 용택이 엄마한테 말해서 일자리를 알아봐 줄게."
"아, 용택이요? 가~가. 공장장이라고? 출세했네!"
불알 친구 소식에 강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한때 자신의 꼬봉 노릇을 했던 친구다.
"근데 나 공장 안 다닐란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하고 싶은 일? 그게 뭔데?"
강혁의 말에 아버지가 물었다.
"경찰 시험 볼라고예."
강혁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경찰시험?"
"내가 사고로 그만두긴 했어도. 707특임대 출신 아닙니까?"
"그렇지."
"아버지. 원래 같으면 경찰특공대 그런데도 들어갈 수 있어예. 근데 사고가 있어서 거기는 들어가기 어려워도, 순경시험은 볼라고요. 가산점도 있고. 시험만 잘 보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 그래?"
강혁의 아버지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나랏밥 먹는 일이라 선뜻 반대는 않는다.
할아버지 때부터 소원이 나랏밥 먹는 일이었다.
비록 자신은 고물 장사하는 사람이지만 아들까지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할 수 있겠나? 네가 고등학교만 하고 군대 갔다 아이가?"
"그래서, 한 2년 산에 들어가서 경찰고시 시험공부 하려고요. 그리고 여기 받으세요."
강혁이 두 사람 앞에 통장 하나를 내놓았다.
"이기 뭐꼬?"
"마, 그만 묻고, 열어보세요."
강혁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통장을 열어보고는 놀란다.
"혁이 아버지. 이거 좀 보이소."
"와 그라노?"
강혁의 아버지도 눈이 함지박 만하게 커졌다.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은 8천 만원이었다.
"내가 지난주에 복권 안 됐나. 세금 빼고 1억 3천5백 받았다. 일단 8천 받으소. 나머지는 내가 고시공부 할라꼬 뺏어예."
"진짜가? 1등 복권이라고? 아이고 조상님이 도우셨나보다."
"며칠 전에 아버님이 꿈에 보이더만. 혁이 네가 복권탈라고 그랬나보네."
"그래예?"
"그래, 그것도 네 할아버지. 한창 때 모습이더라. 장대한 체구, 형형한 눈빛. 동네 아가씨들 맘을 싹 뺏어갔다던 너희 할아버지 젊을 때 모습으로 나와서는. 내 어깨 한 번 치고 아들네미 잘 뒀다고 칭찬하고 가시더라."
강혁은 아버지의 뻥 섞인 말에 피식하고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공교롭게 꿈을 꿨겠는가?
하지만 뭐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군대서 받은 월급하고 사고 보상비도 좀 있고. 5천 만원이면 2년은 끄덕 없으니께는 소식 없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간간히 편지는 보낼게요."
"그래마, 사내 자식이 한 번 결심을 했으면 뿌리를 뽑아 뿌라. 뭔 말인지 알제?"
"그럼요. 걱정 마세예.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못했지. 머리가 나빠서 안 한 건 아니잖아예."
"그렇지. 네가 딱 중학교 전까지는 동네에서 신동소리 들었다 아이가. 중학교가서 노는데 정신 팔더만. 마, 이렇게 됐지."
"죄송합니더 아버지."
강혁이 머리를 푹 숙였다.
"아이다.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면 됐지. 그런데 혁아."
"예, 아버지."
"만일 네가 경찰이 되면은 절대로 좋은 경찰이 돼야지. 나쁜 경찰이 되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음, 그래. 우리가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는 집안이 아니다. 네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그라면 안 된다. 내가 이래 살아도 평생 남한테 죄 짓고 안 살았다."
"알지예. 우리 집안이 자존심 빼면 시체 아닙니까."
"그렇지. 곧 죽어도 우리는 자존심이다. 폼생폼사."
"흐흐흐."
강혁과 아버지는 서로 마주 앉아 크게 웃었다.
* * *
강혁은 부산의 집에서 하루를 묵은 후,
서울로 올라가기 전 자신의 고등학교 때 스승을 찾았다.
공부는 안하고 매일 싸움만 하러 다니던 자신을 다잡아 준 스승이었다.
"김강욱 선생님 계십니까?"
"응? 어머나, 혹시 혁이 학생?"
"사모님, 안녕하셨습니까?"
"여보, 나와 보세요. 혁이 학생 왔어요."
"응? 혁이가 왔다고?"
마루로 나온 사람은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노년의 스승이었다.
강혁은 그 자리에서 크게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뭐하노. 다 커가지고 어서 일어나라. 들어가자."
이제는 성년이 된 제자를 일으켜 세운 선생은 강혁을 자신의 거실로 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 술을 대작하며 한참을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네가 그때는 진짜 대단했지."
"제가요?"
"어떻게 갓 들어온 1학년이 등교 하루만에 3학년 대장이던 녀석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칠 생각을 했는지. 결국에는 잡혀서 다구리를 당했지만 말이다. 매일매일 싸움만 하고 다니는 네놈 때문에 내 흰머리가 많이 늘었지. 크크크."
"그때, 제가 좀 그랬지예~"
"흐흐, 그래 네가 좀 그랬다."
강혁은 싸움을 하고 나면, 항상 김 선생에게 잡혀가 한 시간 동안 서예를 했었다.
그렇게 글씨를 쓰고 있노라면 김 선생에게 항상 듣던 이야기가 있었다.
강혁이 결국 싸움을 그만두고 마음을 잡은 것에는 어머님의 눈물과 김 선생의 훈육이 있었다.
1학년 담임이었던 김강욱 선생은 3학년이 될 때까지 강혁을 데리고 학년을 올라갔다.
김 선생의 끈질긴 훈육은 부산 시내를 쩌렁쩌렁 울렸던 미친개 강혁을 결국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선생님, 제가 비록 군대에서 사고로 제대했지만, 군대 가서 나름대로 사람대접 받으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다 선생님 가르침 때문입니다."
"내가 뭘 가르쳤는데?"
"언제나 제가 사고치고 나면 선생님이 해주시던 말씀 있지 않습니까?"
"음, 아직 기억하고 있나?"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 말해봐라."
"절대로 빨간 불에는 건너지 말고. 파란 불에 건너라."
강혁의 말에 김 선생은 잔을 내리고 흐믓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 지키고 있나?"
"간단한 말이긴 한데, 어려울 때도 많아예. 그래도 최대한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 그게 간단한데, 의외로 지키기가 그렇게 싶지 않다."
김 선생은 말을 마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지키라. 알겠나. 사람 사는 세상. 복잡한 것 같아도. 결국은 이게 다다. 알겠나?"
"예, 선생님."
강혁은 김 선생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빨간 불에는 건너지 말고 파란불에는 건너라.'
간단한 말이다.
그런데 신상현을 죽였던 것은 파란불이었을까? 아니면 빨간 불이었을까?'
강혁은 김 선생의 앞에 머리를 숙이면서 불현 듯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잠시 어지러웠다.
'그때는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었다.
신상현, 그 녀석은 법위에 올라있는 권력자였으니까.'
비명에 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 * *
94년 5월.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아침부터 보육원 안팎을 쓸고 닦더니 중요한 사람이 오는 모양이다.
기자들도 온다는 소문에 보육원은 열띤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린 신상현은 그런 아이들 가운데서 묘하게 눈에 띄었다.
차분하면서도 기품 있는 모습은 군중에 둘러싸인 왕자 같았다.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와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태도, 공허한 눈빛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라 신상현은 수많은 원생들 사이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흥분하고 있는 아이들과 달리 무심한 듯한 상현의 눈에 고급 승용차가 보육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차에서 상당히 기품이 있는 중년의 여성이 내렸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색감이 곱고, 세련되었다.
한 무리의 기자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여자가 최영혜구나!'
앞으로 대통령이 될 여자.
상현이 기다리던 사람이 보육원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대통령 시절의 최영혜보다 훨씬 젊고 예뻤다.
어린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자랐으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서 여러 해 동안 대외활동을 한 적이 있다.
몸 전체에 우아함과 기품이 배여 있다.
청와대 시절, 어린 나이에 혹독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자세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장님."
보육원 원장이 최영혜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계셨어요? 박 원장님."
최영혜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예, 아가씨. 아니 이사장님. 저는 염려해주신 덕분에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그래요. 박 원장님이 있어서 저도 재단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어요. 건강에 언제나 유념하세요. 아셨죠?"
"…아가씨."
최영혜의 따뜻한 말에 박원장은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박원장은 이제 60대 초반으로 머리 가장자리가 휑했다.
젊은 시절의 그를 기억하고 있는 최영혜는 마음이 짠했다.
"이런, 아저씨. 왜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눈물만 느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최영혜가 떠오른 박원장이 눈물을 지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울린다.
박 원장과 인사를 나눈 후 최영혜가 시설 여기저기를 살피자 기자들이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이런 모습이 상현의 눈에 띄었다.
'하하, 조만간 정치계에 입문할 생각이군. 오늘은 그 밑밥을 까는 건가?'
상현의 눈에 최영혜의 뒤를 따르며 기자들의 사진 촬영을 제지하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하는 여자가 보였다.
'호오~ 왕림하셨군. 아버지 이태성의 뒤를 이어 최영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는, 대한민국을 뒤에서 조정했던 불여우가.'
40대 중반의 나이,
강남 부유층들이 선호하는 최신 유행의 패션에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기자들을 아래로 보는 도도한 눈빛.
대외적으로 최영혜의 집안 살림을 맡고, 대소사를 관장하는 이영자였다.
이영자의 옆에는 정장 차림에 무스로 머리를 잘 단장한 중년 남자가 있었다.
상현은 그 남자가 이영자의 남편이자 국회의원 시절 최영혜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성민이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최영혜 이사장님께서 대한국당에 입당하실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요. 사실입니까?"
"우리 이사장님께서는 아직 정치를 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김성민의 대답에 기자들이 실망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이지요. 아무튼 지금은 여전히 재단 일로 바쁘십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김성민이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김성민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듣는 기자들은 없었다.
이미 최영혜의 정계 입문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김성민이 기자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 최영혜는 주위를 모두 물리고, 혼자 잘 꾸며진 정원을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