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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6화 (16/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16화

16화

대구 수성동 명진 미술학원.

십여 명쯤 되는 학생들이 아그립바를 앞에 두고 데생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좀 더 이렇게 하면 좋겠다."

"예, 선생님."

10살 남짓 된 소년의 모습을 뒤에서 훔쳐보는 여학생이 있다.

나이는 이제 15살쯤.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은 뒷전이고 남자아이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이야, 정말 잘 그렸네."

남자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예쁘장한 중학생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안녕? 난 이나연이라고 해. 넌 누구니? 이 학원에서는 처음 보는데."

"상현이에요. 최상현."

"그래? 잘 부탁해."

이나연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상현은 이나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내면에 숨겨놓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말을 걸었다.

상현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나연은 황홀한 듯이 상현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     *     *

2개월 후. 서울 고시촌.

"젠장, 이번엔 진짜 붙을 자신이 있었는데… 여기서 물러나야 하나"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평상에 앉아 소주를 몇 병째 마시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곽재민.

벌써 7년째 고시공부 중이다.

"제기랄……."

그동안 뒷바라지를 해주던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신변을 정리한 후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어머니의 병은 암이었다.

자신이 내려가 병수발을 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곽재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께 너무나 미안했다.

아픈 어머니를 두고 고시시험에 미련이 남은 자신은 나쁜 아들이었다.

"어머니 소원이기도 했지만, 결국 인연이 아니었는가보지."

곽재민은 연거푸 소주잔을 입 안에 들이부었다.

차가운 알콜이 뱃속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기운이 확하고 치솟아 올랐다.

"젊은이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왜 그리 한숨을 쉬고 있는 건가?"

중후한 인상의 노인이 곽재민을 바라보고 있다.

"엉? 누…구……?"

"거두절미하고… 자네를 좀 돕고 싶은데, 내 애기를 좀 들어보겠나?"

"……?"

곽재민은 정신이 확하고 들었다.

노인이 자신을 후원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6번이나 떨어진 자신의 무얼 보고 이러는 것일까?

아무 대가 없이 고시에 붙을 때까지 돈을 주겠단다.

게다가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암 치료도 최고의 시설과 의사를 동원해서 고쳐주겠단다.

"뭐든 하겠습니다. 어르신.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흐흐,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거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반드시 붙겠습니다. 반드시. 그리고 이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겠습니다."

"그래, 그 마음 잊지 말게."

현금 다발을 받아들고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노집사는 골목 어귀에 세워둔 차로 돌아갔다.

깔끔한 슈트를 걸친 남자가 차에 타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다녀오셨습니까?"

노집사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내는 박광수였다.

아직 유행하지 않는 모히칸 머리 대신 옆과 뒤를 깔끔하게 깍은 모습이다.

"이제 돌아가지."

"도련님은 왜 저런 녀석을 챙겨주시는 거죠? 아무리 봐도 동네 백수인데 말입니다."

"헐헐, 우리 도련님을 네 알량한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거라. 같이 지내다보면 하나씩 느끼는 게 있을 거야."

"하긴 아직 어리지만 한 번씩 보여주는… 거시기, 아무튼… 장난 아니게 카리스마가 있더라고요. 우리 도련님."

박광수의 말에 노집사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신상현은 반드시 곽재민을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를 했었다.

'방금 내가 만난 인물이 앞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니.'

다소 어이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노집사는 신상현을 믿었다.

'우리 도련님은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으신 건지. 천인… 아니 그보다는 마인(魔人)이 더 맞겠군… 아무튼 역시 그 집안의 핏줄이라 이건가?'

지금도 각계각층에 삼강 장학생들을 키우고 있는 신철호 회장이다.

그리고 신상현이 같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집사는 신상현의 지시에 따라 확보해두어야 할 인재들을 만나러 다니고 있는 중이다.

이미 삼강장학생이 된 자들은 어차피 신상현이 삼강그룹을 계승하면 그의 손에 들어온다.

그렇기에 삼강의 적으로 등장했던 자들에게 미리 손을 써두려는 것이다.

지금 노집사가 만난 곽재민은 미래에 청와대 민정수석 자리에 올라 삼강과 대적하던 인물이다.

강직하고 충성심이 높아 대통령의 뜻을 따라 삼강의 비리에 칼끝을 겨누었다.

검찰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삼강이 큰 곤혹을 치렀다.

그런 사람이 신상현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허허허… 그러면 다음 인물을 만나러 가봐야겠지? 이번엔 미래의 경찰청장이라고 하셨던가?'

노집사는 신상현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청와대 민정수석이 될 사람부터, 경찰청장까지 손에 넣으려 한다.

검찰 총장은 삼강에서 관리를 하고 있으니 굳이 손을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찰은 삼강보다 TK그룹에서 관리중이다.

신상현은 경찰 쪽에도 자신의 사람을 만들려는 것이다.

지금은 대전의 지방 경찰서장으로 중앙에 이렇다 할 인맥도 없는 사람이다.

강직하고 청렴한 성격 때문에 지방을 전전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신상현은 그가 지금이 제일 어려울 때니 은혜를 베풀어 두라고 했다.

박광수는 미리 지시를 받았던 대로 대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강혁은 여권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부모님에게는 경찰고시 공부를 한다고 말해두었다.

사실 2년 후의 시험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강혁이었다.

굳이 다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이제 바야흐로 IT열풍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삼강을 능가하는 힘을 얻기 위해 강혁은 미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같은 시각, 서울의 한 식당.

"미…미친. 당첨됐어. 그 친구가 준 복권이 당첨됐어. 하하하. 이…이럴 수가?"

한 사내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복권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사내는 강혁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25층짜리 빌딩 옥상에서 한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맣게 탄 피부와 근육질의 잘 단련된 몸이 보인다.

그런데 눈빛이 어딘가 어둡다.

세상의 근심 걱정은 다 가진 것 같은 얼굴이다.

사내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제 어쩌지? 더 이상 어디서 돈을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 젠장!"

사내는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배어났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벽을 쳤다.

사내의 이름은 이규철.

생활고로 인해 아내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뒤, 홀로 아홉 살짜리 딸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학교에 보낸 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병명은 급성 백혈병.

현재 규철의 딸은 살균실에 들어가 면회도 제한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규철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주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딸이 아프다.

병원에서 화학요법으로 치료를 시작했지만, 완치까지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수중에 돈이 없던 규철은 결국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지금은 사채업자들을 피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아이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목돈은 계속 필요했다.

"장기라도 팔아야 하나?"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옥상 문이 거칠게 열리며 험상궂은 사내들 다섯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쇠파이프와 각목이 들려 있었다.

"선생님, 여기 계셨어요?"

"하아, 결국……."

"왜 그러셨어요? 우린 돈만 받으면 되는데? 잠은 집에서 주무셔야죠."

규철은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는 발을 문질러 끈다.

"돈 빌린 거 한 달 후에 갚는다고 했잖아요."

"어이구, 그러셨어요. 그런 사람이 집에도 안 들어오고. 연락도 안 되고. 그럼 안 되죠. 상도덕이 있지."

"돈은 갚는다고 했잖아요."

"선생님, 우리 사장님께서 일단 교훈을 내려주라고 하시네요."

"교훈이라뇨?"

"우리 사장님 돈은 절대 떼먹으며 안 된다. 절대 연락을 두절하고 사라지면 안 된다. 이 두가지죠. 그럼 선생님. 일단 먼저 맞고 이야기합시다~"

사내의 쇠파이프가 이규철의 다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부웅.

규철은 몸을 날리며 쇠파이프를 피하는 동시에 주먹으로 상대의 턱을 날렸다.

퍽.

"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왼쪽으로 날아갔다.

다시 머리를 향해 쇠파이프가 날아들었다.

이규철은 급히 몸을 피하며 곱슬머리 사내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크악."

갈비뼈가 나간 사내는 몸을 움크리며 바닥을 나뒹군다.

눈 깜작할 사이에 두 사람이 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사내들의 기세는 더욱 살기가 등등해졌다.

"이 새끼! 가만두지 않는다."

이제는 한두 사람 죽어 나갈 판이다.

이규철은 사내들의 공격이 더 거세질수록 몸놀림이 빨라졌다.

퍽, 퍼어억.

살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순식간에 세 사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허공에 피가 비산하고, 부서진 이빨이 바닥에 흩어졌다.

싸움이 시작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섯이 무너졌다.

"한 달 후에 갚아 준다고 했잖아요."

이규철이 드러누워 기절한 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그…그 약속… 꼭… 지…지켜요."

턱을 맞아 이빨이 날아간 사내 하나가 부들거리며 거품을 물다가 결국 기절했다.

짝짝짝!

"역시 듣던 대로 명불허전이네요. 선배님."

옥상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강혁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강혁을 바라보던 이규철이 물었다.

"누구세요? 마동태 사장님 쪽이신가요? 저기 한 달 후에 꼭 갚을게요. 지금은 가주시죠."

규철의 말에 강혁은 피식 웃었다.

"아뇨, 스카웃 좀 하려고 왔습니다."

"스카웃?"

"돈이 많이 필요하신 걸로 아는데. 제가 따님의 치료비를 모두 부담하겠습니다."

규철의 두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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