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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20화 (20/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20화

20화

94년 10월 20일. 오전 10시.

"헤이, 존. 조금 쉬엄쉬엄 해. 윗사람인 네가 그러면 직원들이 눈치를 보게 된다고. 너, 어제도 여기서 잤지?"

제리가 다가와 강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옆에서 봐도 조금 무리할 정도로 일에 매달리고 있었나보다.

강혁은 일종의 몰입 상태에 빠져 있다가 제리의 말에 그제야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들 뭔가 질린 표정이다.

'이런? 내가 또 그랬나?'

회귀 전 과잉기억증후군 때문에 만났던 강혁의 주치의는 강혁이 비극적인 일로 가족을 잃은 후에도 그의 치료를 담당했었다.

과잉기억증후군의 저주라고 할까?

가족을 잃은 후,

조그만 계기로도 가족이 죽었던 밤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단순히 기억을 하는 것을 넘어 시간 여행을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강혁은 생방송에 출연했고, 차를 타고 가다가 범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아내와 딸의 죽음을 목도하고 입 안에 권총을 물고 자살을 시도할 때 경찰들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족의 죽음이 매일 밤마다 반복되었다.

잠이 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강혁은 서서히 미라처럼 몸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치료의 방편으로 강혁에게 최면시술을 소개했다.

강혁은 복수를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주치의에게 최면술을 배운 후,

매일 밤 자신에게 암시를 걸고 잠이 들곤 했다.

지금과 같은 일은 최면 시술을 받은 이후로 종종 일어난 일이다.

어떤 일에 집중을 하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최면에 빠진 상태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심한 경우에는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 혹은 시간까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만일 제리가 어깨를 두드리지 않았다면 밤낮이 바뀐 것도 모르고 계속 일을 했을 것이다.

"어어, 혹시 지금 몇 시야?"

"벌써 오후 3시야. 점심은 뭐 먹었어?"

"엉?"

강혁은 그제야 자신이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를 세운 초장기라 사원들이 많지 않았기에 강혁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하루 종일 코딩 작업에 매달리고, 중간 중간 신입사원 교육도 시켜야 했다.

앞으로는 강혁 대신 이들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부터 강혁은 시스템에서 버그를 잡아내는 일에 매달렸다.

"이런… 밥 먹으로 가야겠어."

"맙소사~ 안 되겠어. 내일부터는 점심때는 핑계 대지 말고 꼭 우리랑 같이 가자고."

제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데이빗과 매일 런치타임을 가지자고 종용했다.

처음에는 거절하려던 강혁도 매일 점심을 걸렀다가는 건강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승낙했다.

"좋아, 지금부턴 여긴 내가 지킬 테니까. 넌 오늘 오후는 그냥 쉬어. 강제 휴가다."

"뭐?"

"사장 명령이야. 그러다 너 일찍 죽는다."

윙크를 날리며 제리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강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2시간 쉬고 올테니까. 휴가는 반납하지."

"하아~ 네가 정 그렇다면……."

강혁의 말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리는 강혁의 등을 두드렸다.

강혁은 머리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멋들어진 금문교 그림이 눈에 띄었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사무실 동료를 부른다.

강혁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보였다.

[94년 10월 20일]

강혁은 급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PM 3시 30분.

강혁의 기억은 일종의 정리된 거대한 서랍과 같다.

자신이 원할 때와 뭔가가 계기가 되었을 때 해당 기억이 떠오른다.

금문교와 94년 10월 20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봐, 누가 한국 시간으로 몇 시인지 좀 알아봐줘."

강혁이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사람들은 평소와 다른 강혁의 모습에 놀라는 동시에 황급히 한국 시간을 확인했다.

야후의 서비스 중 세계 시간이란 것이 있다.

어떤 직원들은 강혁이 불시에 시스템 점검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전 7시 30분이에요."

제일 빨리 찾은 신입사원 제임스가 외쳤다.

"며칠이야?"

"10월 21일이에요. 여기 보다 16시간 빨라요."

한국은 지금 94년 10월 21일 오전 7시30분이다.

머릿속 서랍장에서 회귀 전 오늘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94년 10월 21일. 오전 10시.

"이런 벌써 10시잖아?"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머리맡의 탁상시계를 본 강혁은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대충 차려 입은 강혁은 아침 거리를 사기 위해 동네 슈퍼로 향했다.

"쯧쯧,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멀쩡하던 다리가 갑자기 무너지다니."

동네 슈퍼에서 라면과 계란을 골라서 카운터로 간 강혁은 사장님의 한탄어린 표정과 심각한 말투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사장님, 무슨 말이세요? 다리가 무너져요?"

"아, 저기 좀 봐."

고개를 돌려 바라본 TV에는 다리 한가운데 교각이 떨어져나간 모습과 붕괴된 차량이 보였다.

잠시 후, 아나운서가 침통한 표정으로 사고 내용을 브리핑했다.

[오늘 오전 7시 38분 성수동과 압구정을 연결하는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한강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긴 다리의 일부분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충격적인 말이다.

하지만 영상은 아나운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성수대교 정중앙의 교각 한 마디가 사라져 있었다.

중간이 텅 비어 있는 다리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에잉~ 이거 무서워서 운전하겠어? 대체 공무원이란 작자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에잉……."

사장의 한탄 너머로 강혁의 두 눈에 강물 위에로 떨어진 교각과 찌그러진 차량들의 모습이 보였다.

승합차 한 대와, 승용차 4대, 버스 한 대가 거의 동시에 교각과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다.

TV로 보여주는 버스의 모습은 더 참혹했다.

바닥과 천정이 거의 닿을 듯이 보이는 찌그러진 버스가 보였다.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온 학생들의 가방과 도시락도 보였다.

사고의 참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고, 저런. 학생들이 저런. 쯧쯧쯧, 부모들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아이고. 쯧쯧."

그날 등교하던 학생 9명을 포함, 모두 32명이 목숨을 잃었고, 17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강혁의 기억은 이어서 그를 경찰학교의 감식 교육 시간으로 데리고 갔다.

"모두들 주목, 이 사진들은 당시 사고 현장에 투입되었던 동부 경찰서 감식반 소속 경찰이 찍은 거다. 원래 당일 아침에 표창장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더군. 사고 소식을 듣자 카메라를 짊어지고 바로 현장으로 출발했다. 며칠에 걸쳐 흩어진 팔, 다리를 찾아서 찍은 거다."

교각으로 떨어진 버스에서 튕겨져 나간 학생들의 사체는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있었다.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체는 평범한 사람들도 쉬이 잊기 어려운 기억이다.

강혁은 그때의 기억이 정확하게 되살아났다.

학생들의 훼손된 사진에 대한 기억을 끝으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온 강혁은 급히 시계를 보았다.

PM 3시 38분.

"이런 지금이다."

시계가 오후 3시 38분을 가리켰다.

한국 시간으로 오전 7시38분.

총길이가 1,160미터에 이르는 다리에서 48미터 길이의 구간이 갑자기 떨어져 내렸을 것이다.

차량 6대와 함께.

"맙소사!"

강혁은 얼굴을 감싸 안았다.

머릿속으로 절규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떠오른 것이다.

무너진 다리와 사람들의 시체들이 떠올랐다.

강혁은 토기를 느끼며, 간신히 고개를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그날 강혁은 더 이상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집으로 돌아간 강혁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자책했다.

자신의 복수에만 매달리다가 어쩌면 구할 수도 있었던 목숨들을 내팽개쳤다며 후회했다.

"강혁 이 염병할 새끼.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강혁의 절규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지킬 수 있었던 생명.

그들의 울부짖음이 먼 이역만리 미국 땅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     *     *

95년 5월. 야후의 주식 상장 다음 날.

―이규철 씨,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강혁은 국제전화로 이규철에게 연락을 취했다.

"예, 사장님. 말씀하십시오."

오랜만의 전화에 반가우면서도 진중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이규철은 자신의 딸을 구해준 강혁에게 그야말로 충성 모드였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보육원을 감시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강혁이 손을 써서 이유라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간 후로는 그만둔 상태다.

그래서 하루 중 대부분을 병원에서 딸을 돌보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이규철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는 하루하루였다.

그렇기에 강혁의 지시라면 지옥불이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 한 달 후, 정확히 6월 29일, 오후 5시 56분 서초구에 있는 삼양백화점이 무너져 내립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건물 한 동 전체가 폭삭 내려 앉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 죽습니다.

"삼양이라면… 그… 삼양 입니까?"

낮은 목소리에 약간의 놀람이 배어 있다.

―맞아요. 얼어 죽을…….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회귀 전 형사 시절에 즐겨하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그 삼양백화점이 맞습니다.

이규철은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강혁의 말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삼양백화점은 개장한 지 5년이 되어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백화점이었다.

하루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녀가는 화려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무너진다고?

어떻게 20세기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철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폭삭 내려앉는다고?

아무리 강혁이 한 말이지만 쉬이 믿기지 않았다.

"북한… 놈들의 테러인가요?"

이규철은 되물으면서 폭탄테러를 상상했다.

707특임대 출신인 이규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아뇨.

강혁은 순간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하고 생각했다.

―부실시공과 무리한 증축으로 인한 인재입니다.

"아……."

―최소한 500명 이상의 사람이 죽고, 900명 이상의 사람이 크게 다칠 겁니다.

"…예?"

―무너진 잔해를 파면 끝도 없이 시체가 나옵니다.

"……!"

―흙더미 아래에서 마치 시루떡처럼 압착된 시체 더미가 발견 됩니다.

꿀꺽.

―아이는 엄마를 잃어버리고, 아버지는 출근한 딸을 잃을 겁니다.

규철은 할 말을 잊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도 죽고, 직원들을 먼저 대피시킨 점포 사장도 죽을 겁니다.

"……!"

―엘리베이터에 갇힌 어머니는 아이를 감싸 안다가 등뼈가 모두 부서진 채 발견될 겁니다.

"…사… 사장님."

사고 당시의 처참한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말했다.

강혁의 예언에 이규철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작년에 이미 성수 대교가 무너졌다.

생각해보니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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