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21화
21화
#6장 악의 발화 (1)
―고속 성장의 부작용입니다.
"……."
―사람들이 안전보다도, 사람의 생명보다도, 돈! 돈! 돈! 오직 돈만 외치다가 벌어진 일이죠.
"저…저기 사장님, 그 엘리베이터에서 발견된다는 어머니가 감싸 안은 아이는 사나요?"
―…몸에 상처하나 없이 죽은 상태로 발견됩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로…….
"맙소사!"
진지하게 말하는 강혁의 설명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생각해보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막아야 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강혁의 단호하면서도 절절한 심정이 전해졌다.
"어떻게 할까요? 사장님."
전화기를 쥔 이규철의 손에도 힘이 불끈 들어갔다.
―증거가 필요해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우선 삼양백화점을 비밀리에 조사해야합니다.
"……!"
―안전진단 업체에 의뢰해서 몰래 건물 외벽의 갈라짐과 구조적인 결함이 있는지를 조사해 주세요.
"그거면 됩니까?"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언론과 건물 안전을 담당하는 시청 공무원들을 움직이세요.
강혁이 생각한 방법을 알려주자 이규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규철의 묵직한 음성이 조금이나마 강혁을 편하게 해주었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볼 생각이다.
* * *
삼양백화점 1층 로비.
주말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 바글거렸다.
그들 대다수는 쇼핑을 즐기거나, 누군가와 만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일부는 그저 오락거리를 찾아 주변을 서성서리고 있었다.
라면 면발 같은 파마머리를 한 40대 중반의 키 작은 아저씨 하나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마치 시골 사람이 서울 구경 온 것 같은 모양새다.
회색 잠바를 걸쳤는데 아래쪽이 조금 불록 하다.
전형적인 배나온 아저씨였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아이쇼핑을 즐기는 남자의 눈빛이 한 번씩 날카롭게 빛난다.
'벽면의 색깔이 다르잖아? 이쪽은 새로 칠했네, 칠했어.'
남자는 보수 공사를 한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흔적이 상당히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다.
남자의 이름은 오희성,
국내 중견 건설사에서 일하고 있던 20년 경력의 건설 감리사다.
오희성은 반 년 전 음주로 인한 간질환으로 병가를 내고 입원을 했다.
젊은 시절부터 폭음을 한 것이 문제였다.
치료를 마친 후, 회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회사는 어음을 돌려막기 하다 부도가 난 상황이었다.
I.M.F 사태가 일어나기 일 년 전,
당시 이런 일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미국의 양적완화로 인해 넘치는 유동성 자금과 고도성장기의 샴페인에 취해있었다.
덕분에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균열들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희성은 백수가 되었다.
며칠 전 그는 일성 흥신소 대표라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의뢰를 하나 받았다.
"주말에 어디 놀러간다 생각하시고, 백화점 가셔서 쇼핑도 좀 하시고, 맛있는 것도 드시면 됩니다."
"그게 일입니까?"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죠. 건축 감리를 몰래 해주시고, 보고서를 작성해주십시오."
"예……?"
뭔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수가 땡겼다.
"착수금으로 우선 100만 원,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내주시면 200만 원 드리겠습니다."
"아, 뭐 그러죠. 어차피 주말에 할 일도 없는데."
오희성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의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던 오희성이 입맛을 다셨다.
흥신소에서 비밀리에 부탁한 일이라 뒤통수가 간질거렸던 것이다.
혹시나 이 일로 신상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에잉,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그건 그렇고 이상하네.'
불길한 생각은 버리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자 곳곳에서 문제점들이 보였다.
'지은 지 이제 5년밖에 안 된 곳이라고 들었는데, 뭔 보수 공사를 이리 자주 한 거야?'
눈을 돌려보면 건물 곳곳에서 보수한 흔적들이 보였다.
'쯧쯧, 어차피 보수할 거 처음부터 잘 할 것이지.'
오희성은 이런저런 욕설을 내뱉으며 건물 곳곳을 살폈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부실 공사의 징후에 눈살을 찌푸렸다.
살짝 한숨을 내쉰 오희성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닌 구석진 곳을 둘러보았다.
주로 외부에서 입점해 들어온 가게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얼씨구, 여긴 아예. 땜방도 안했네?'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벽면이 갈라져 틈새가 벌어져 있는 곳이 하나둘 발견되었다.
오희성은 외투에 숨겨 놓은 작은 카메라로 몰래 사진을 찍었다.
흥신소에서 출발 전에 미리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는 벨트를 착용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점퍼를 걸쳐 입은 것이다.
'어디 보자. 여긴 벌써 여러번 보수한 흔적이 보이잖아?'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다.
건설사들이 비용을 아끼고,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부실 공사를 벌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정도가 좀 심했다.
'허허, 이거이거, 괜찮은 건가?'
벽 위 갈라진 틈으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이미 보수공사도 몇 번 한 것 같은데 다시 갈라진 모양이다.
오희성의 눈에 비친 삼양백화점은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갈라진 틈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 저기 증축으로 인한 구조적인 비틀림이 관찰되었다.
이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오희성은 천천히 에스컬레이터 근처로 다가가 현장을 자세히 눈으로 확인했다.
'뭐야? 없잖아?'
오희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은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상해서 위 아래층을 왕복하며 확인을 했다.
그런데 기둥의 25%가 잘려나가고 에스컬레이터에 방화벽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헐, 이 사람들, 단체로 실성했나? 대체 나중에 이 화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건물을 이 지경으로 해놓은 거야?'
희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것만으로도 심각한 하자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하중을 지탱해야 하는 기둥도 일부 잘려나갔다.
오희성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확인한 바로는 삼양백화점의 구조는 확실히 원래의 설계에서 많이 벗어난 흔적이 보였다.
"저기는 분명 내력벽이 서 있었을 자리야."
내력벽이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고,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매장을 넓히기 위해 없애버린 건가?"
부족한 기둥이 홀로 하중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둥의 두께가 겨우 600mm라니, 적어도 800은 돼야 할 텐데.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이네."
수많은 부실공사 현장을 목격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건물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건물이 붕괴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꼬르륵~
"어라? 배꼽 손님이 밥 달라네? 어디보자?"
오희성은 배가 고파오자, 심각하던 얼굴을 풀었다.
위험한 건물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무너질 건 아니었다.
일단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배가 고파진 오희성은 주변을 살피며 식당을 찾았다.
마침 백화점 5층에는 여러 식당들이 입점해 있었다.
오희성의 눈에 북경루라는 고급 중식당이 보였다.
"어디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잡셔볼까?"
식당에 들어선 오희성은 주문을 해놓고 습관처럼 식당 건물 곳곳을 눈으로 살폈다.
'에구구, 여긴 더 심하네, 얼씨구 천정 벽이 경사가 졌는데?'
이대로 두면 천정이 갈라질 염려가 있었다.
오희성은 몰래 사진을 찍었다.
* * *
"하아? 이게 사실입니까?"
"예, 저희도 보고서를 받은 후, 따로 사실 확인 작업을 했습니다. 심각하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이규철은 흥신소 소장에게 수고비를 듬뿍 줬다.
이 일에 자금을 아끼지 말라는 강혁의 당부가 있었던 것이다.
보고서를 보니 강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규철은 눈앞에 있는 실체를 보게 되자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실감했다.
"정말로 무너진다는 말이지?"
지상 5층, 지하3층. 거대한 규모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백화점이다.
주말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수백 명이 오가는 곳이다.
'그런 건물이 폭삭 무너져 내린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상상이 안 갔다.
'그건 그렇고. 우리 사장님은 미국에서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아시는 거지?'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이 사고 후의 끔직한 상황을 말해주었다.
건물의 붕괴일도 정확히 찍어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복권 3연속 1등 당첨부터 생각하면 말 다했지.'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역시 강혁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도사님, 아니 사장님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닌 거야.'
규철은 강혁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을 모시게 된 것은 일생의 영광이라 믿었다.
이규철의 눈이 이글거렸다.
강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증유의 재앙이 닥친다는 뜻이다.
이규철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렸다고 생각했다.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이규철은 다음 날, 흥신소에서 받은 보고서를 여러 부 인쇄했다.
그리고 시청의 건축과와 신문사에 익명으로 투고 했다.
* * *
오전 10시 삼양백화점의 임원들은 업무 중에 갑자기 소집이 되었다.
그들은 삼양백화점 B동 4층에 있는 회의실에 모두 모였다.
그들은 왜 갑자기 임직원들을 모두 소집시켰는지 의아해 하며 김덕신 회장을 기다렸다.
"이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아!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다들 정신들 안차려?"
얼굴 몇 군데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는 김덕신 회장은 노란색 서류 봉투를 집어 던지며 쌍욕을 퍼부었다.
회장의 서슬 퍼런 분노에 임원들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까지도 북적거리던 회의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김덕신의 둘째 아들이자 삼양백화점 사장인 김인수가 서류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봉투에는 보고서 형식의 문서가 있었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서류를 살펴보던 김인수의 얼굴이 황망하게 변했다.
"이…이런 문건이… 아버님… 이걸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이런 식충이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래서 어떻게 마음 놓고 회사를 물려 줄 수 있겠어? 엉!"
"죄…죄송합니다."
김인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눔아, 너 대한일보 사장 서인태 그놈 알지?"
"예, 압니다. 저하고 같은 서울대 동깁니다."
대한일보 사장 서인태는 김인수와 서울대 동창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대한일보 회장 서성수를 대신해 대한일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보내 온 거야!"
"인태가 말입니까?"
"투고가 들어왔다고 하더라. 거기만이 아니야. 다른 신문사는 물론이고 시청에도 죄다 보냈어.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