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22화
22화
김덕신 회장이 두 눈을 호랑이처럼 크게 뜨고 매섭게 임원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러자 김인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임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들 뭘 넋 놓고 보고 있어요? 당장 뛰어나가서 시청 담당 공무원들 만나보고, 이 문건 들어간 신문사 확인해서 기사 막으세요!"
"예! 사장님."
"내일 일면에 우리 백화점 이야기가 한 줄만 나와도 당신들 모두 해고야!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사장의 해고 소리에 임원들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임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버님,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심려 놓으시죠."
"똑바로 해! 제대로 못하면 백화점도 모두 네 형에게 맡겨 버릴 거니까. 알겠어?"
"알, 알겠습니다. 아버지."
형 이야기에 고개를 숙인 김인수의 얼굴이 험상궂게 찡그러졌다.
"지켜보겠어. 그리고 아버지라니? 이눔아, 회사에서는 회장님이라고 불러! 몇 번을 말해?"
"예, 회장님."
김덕신의 호통에 급히 고개를 숙여 대답한다.
"끄응, 형만 한 동생 없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김덕수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김인수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야, 강 비서."
"예, 사장님."
깔끔한 양복 차림에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숙인다.
얼굴은 벌써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다.
"하루 준다. 누가 투고 했는지 알아내!"
"예?"
강비서는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올렸다.
"~예에?"
비서의 뉘앙스에 김인수가 눈꼬리를 올렸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 내일까지 꼭 알아 오겠습니다. 사장님."
황급히 고개를 숙인 강비서는 밖으로 나가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서울 데일리 신문사.
"아니,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편집장님!"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20대의 젊은 여기자였다.
그녀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편집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편집장은 어린 여기자와의 기 싸움에 지지 않겠다는 듯 얼굴에 인상을 잔뜩 굳히고 있다.
"딴 건 몰라도 이건 안 돼! 그냥 다른 거 취재해."
"뭐야, 이런 특종이 또 어디 있어요? 우리 같은 중소 신문사한테 얼마나 큰 기횐데?"
"야, 왜 안 되는지 몰라서 물어?"
편집장이 으르릉 거렸다.
"몰라요, 왜 안 되는데요?"
정말 모르는 것인지 여기자가 당차게 묻는다.
"이 자식이? 삼양백화점은 광고주야. 그것도 그냥 광고주가 아니라. 큰 손이라고."
"그래도 이건 특종이잖아요."
"야! 우리 신문사에 계절 바뀔 때마다 광고 때리고, 틈나는 대로 광고 넣어주는 큰 손을 건드리자고?"
"그래서 취재 안 하시겠다는 겁니까? 이렇게 확실한 증거도 있는데?"
여기자가 보고서가 있는 서류 봉투를 흔든다.
"정신 차려 인마. 네 월급이 어디서 나오겠냐? 삼양 같은 곳에서 광고 끊으면 너 하나쯤은 바로 그날로 사표야 인마."
"쳇, 자본주의의 노예 같으니."
"뭐야, 인마?"
편집장이 버럭 화를 내지만 여기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콧방귀를 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다른 책상의 기자들이 킥하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배 씨, 우리 가요."
"알았어요."
여기자의 말에 곱슬머리에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서려고 하자 편집장이 소리친다.
"야, 이진주.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취재해도 소용없어! 안 실어 줄 거야! 알았지?"
"알았어요. 알았어. 좀생이 같으니. 예이~씨!"
문을 꽝 닫고 나서는 여기자를 보며 편집장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저…저 새끼. 저거~ 아이고. 대학 후배만 아니면 벌써 잘랐어. 내가."
"키킥!"
책상에 남아 있는 기자들 몇이 입을 틀어막고 웃는다.
편집장은 그 모습을 보고 또 열이 받았다.
"뭘 보고들 있어! 당장 안 나가? 책상만 붙들고 있으면 기사가 나와?"
우당탕.
의자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모두가 나간 자리에서 편집장은 노란 서류 봉투에 눈길을 준다.
이규철이 보낸 삼양백화점 건물에 대한 안전 문제를 제기한 문건이다.
편집장은 몇 번을 다시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문건을 들어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어디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신문에는 한 줄의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시청에서도 삼양백화점 건물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언론도 공무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규철은 좌절감과 허탈함이 엄습해왔다.
"사장님, 시청이나 신문사나 모두 꿈쩍도 안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이규철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강혁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이 94년도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회귀 전이라면 방법이 없지 않았다.
인터넷의 발달로 1인 미디어가 범람하던 시대다.
그런 시기라면 삼양백화점의 실태를 세상에 알릴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강혁은 당시 사고 현장을 찾아, 시민들과 함께 현장 수습을 도왔다.
눈앞에서 훼손된 사람들의 사체가 쉴 새 없이 운반되었다.
어린아이가 재를 뒤집어 쓴 채 울면서 엄마를 찾는다.
결혼을 앞두고 예물을 보러 간 어머니와 약혼녀를 찾는 젊은 남자가 건물 잔해를 파헤쳤다.
남자가 약혼녀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그를 돕던 강혁도 시민도 함께 울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시멘트 재를 뒤집어 쓴 여성이 주변의 만류에도 잔해 위를 파헤친다.
손바닥이 피로 물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인은 폐허가 된 잔해 위에 꿇어앉아 아이의 이름을 끝없이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도 그치지 않는다.
강혁과 시민들은 도저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붕괴된 시멘트 잔해 위로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얼어 죽을……."
강혁의 한탄이 흘러나왔다.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돌아보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이 사회를 움직이기는 힘들다.
눈앞에서 어린아이와 젊은 남자, 재를 뒤집어 쓴 피투성이 아주머니가 어른거린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강혁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유라야?"
돌아본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
강혁은 고개를 돌려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할 수 없군요.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도 돈 지랄 한번 해봅시다."
강혁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보자고 결심했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은 돈이었다.
"예?"
"돈지랄을 부려보자고요. 그쪽에서 신문사와 공무원을 구워삶은 것처럼 우리도 해봅시다."
"하지만 가능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사람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두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치고 죽게 됩니다."
회귀 전 역사에서는 500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부상자만 900명 이상이었다.
강혁은 그런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장님."
이규철은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뇌물을 먹여야 하는 현실에 한숨이 나왔다.
적어도 공무원이라면 문건을 확인이라도 해야 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강남 시내 한복판에서 대형 백화점이 무너질 수 있다고 하는데도 기사 한 줄이 없다.
언론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혁의 회귀 전 '기레기'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이 시대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사람은 살려야지요. 맞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제가 선배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네요."
자신의 생명 같은 딸아이를 구해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지금 간절히 부탁을 한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과는 일면 관계가 없는 타인을 위해서 저리도 간절히 부탁을 한다.
마치 자기 가족을 구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강철 같은 사내 이규철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이 순간이었다.
규철은 강혁에게 진심으로 감복했다.
일생을 맡길 사람을 찾은 느낌이었다.
'보스,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내놓으라고 해도 기꺼이 하겠소.'
다음 날부터 이규철의 영업이 시작되었다.
시청의 담당 공무원들과 약속을 잡았다.
그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돈도 두둑이 쥐어 보냈다.
그러나 반응이 조금 오다가 만다.
다음날 꼭 알아보겠다고 한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전화를 걸어도 무응답이다.
아무래도 말단 공무원 선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윗선의 압력이 느껴졌다.
"하아, 더 윗선이라 이거지? 어딜 잡아야 움직일까? 과장? 아니면 시장?"
이규철은 다시 일성 흥신소를 찾았다.
그리고 삼양과 서울 시청 사이의 커넥션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의뢰비용이 훌쩍 뛰었다.
위험수당까지 요구해왔다.
삼양백화점은 삼양건설과 삼양백화점 두 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특히, 건설 쪽은 조폭들과도 연계가 되어 있어서 위험하단다.
"알겠습니다. 알아만 온다면 성공 수당도 두둑이 약속드리죠."
"역시, 사장님. 화통하시다니까."
흥신소 소장은 간만에 들어온 큰 건이라며 기뻐했다.
이규철은 시청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한쪽으로는 언론사를 건드렸다.
개인적으로 기자들을 만나려고 애썼다.
아무래도 무직이나 마찬가지인 이규철이라 높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문사 앞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신문사를 출입하는 기자들을 관찰했다.
기자로 보이는 한 사람을 찍어 뒤를 따라 나섰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의 해프닝 끝에 겨우 사회부 기자 중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규철은 막무가내로 그를 끌고 술집에 가서 술과 밥을 먹였다.
"아이고, 참 무데뽀네 이 사람. 주는 술과 밥은 고맙게 먹겠지만, 대체 사람을 이리 귀찮게 하는 이유가 뭐요?"
"그게 말이죠. 조 기자님. 제가 사실은 삼양백화점……."
술을 마시며 듣고 있던 사회부 기자가 삼양이란 두 글자를 듣고는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규철의 설명이 이어지자 이내 술잔을 딱하고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규철은 깜작 놀랐다.
"아니, 왜 일어나십니까?"
조 기자가 일어 선 채로 가만히 이규철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 사람이 누구 밥줄 떨어지는 거 보고 싶나? 겨우 밥하고 술 한 번 먹고, 내 명줄 내려놓을 줄 아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이규철에게 호통을 친다.
"삼양이 우리 회사의 큰 광고주라는 사실도 모르고 말한 거요? 삼양에서 나오는 돈으로 내가 밥 먹고 산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이해는 합니다."
"내 나쁜 말은 하지 않겠소. 이 일에 더 관심 가지지 말아요. 다칩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