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29화
29화
"복서?"
"맞습니다."
사내가 씩하고 웃었다.
강혁은 이빨을 살짝 드러내는 사내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88 올림픽 라이트급 금메달리스트 신기찬.'
세계 선수권 2회 우승,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딴 실력자였다.
프로로 전향하고 불과 세 경기 만에 동양 챔피언에 올랐다.
다시 다섯 번째 경기에서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을 벌였던 전설적인 복서였다.
그러나 타이틀전에서는 같은 상대에게 두 번 연속으로 패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로 인해 많은 복싱팬들의 아쉬움을 샀던 선수였다.
"신기찬 선수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신기찬은 강혁이 자신을 알아보자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저도 이런 곳에서 제 펀치를 피하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네요. 복서들도 대부분은 못 피했는데 말이죠."
"하하, 피했다라?"
강혁은 벌써 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자ㅡ 한 번 더 갑니다."
그가 씨익 하며 웃는 순간 이미 주먹이 얼굴 앞에 닿았다.
강혁이 고개를 급히 옆으로 뺐다.
주먹이 강혁의 머리카락을 스쳐지나갔다.
상대가 복서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강혁의 반사 신경도 최고조로 유지되었다.
"뭐야? 이번엔 스치지도 못했잖아."
신기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기찬은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혁의 경계심은 더욱 올라갔다.
'저건 쫓기는 표정이 아니다.'
"하하, 고객님, 혹시 복싱 했어요? 으음, 아니야. 복서라고 보기에는……."
신기찬은 강혁의 양발 사이의 거리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강혁의 몸놀림은 분명 복싱의 스탭이 아니었다.
"아! 무도. 그쪽 사람이군요."
신기찬이 씨익 웃었다.
"그럼 좀 더 기어를 올려 볼까?"
신기찬이 양복 상의를 벗더니 팔을 빙빙 돌렸다.
"자, 갑니다."
신기찬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씨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히 하나의 주먹이 아니다.
강혁의 눈에는 팔이 여덟 개라도 되는 듯 시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빠른 주먹이 복부와 턱, 관자놀이를 노리며 무수히 쏟아졌다.
강혁은 여러 대의 펀치를 허용했다.
다행히 급소는 비껴 맞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체력이 갉아 먹혔다.
"하아, 잘 하시네요. 그래도 정타는 피하는군요."
신기찬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슬슬 끝내야겠어요. 기어를 한 단계 더 올리죠."
신기찬이 윙크를 건네었다.
쌔액~
주먹이 바람을 갈랐다.
신기찬의 주먹이 그의 눈동자에 살짝 비쳤다.
'위험해.'
하지만 반응이 늦었다.
눈으로 주먹을 확인 후, 몸으로 명령이 내려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각각 0.1초, 도합 0.2초가 걸린다.
문제는 그 전에 펀치가 강혁의 턱에 닿았다.
신기찬의 주먹이 0.2초보다 더 빠른 시간에 도달한 것이다.
과연 복싱 세계에서 정상에 오를 만한 스피드였다.
퍼억!
주먹이 강혁의 턱에 강타했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이 머리에 전해졌다.
그 직후 명치로 해머 같은 주먹이 다시 날아들었다.
퍼어억!
강혁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그 기회를 놓칠 신기찬이 아니었다.
복부를 때린 주먹이 다시 턱을 올려쳤다.
퍼어억~
강한 타격음과 함께 강혁의 상반신이 뒤로 크게 젖혀졌다.
강혁은 그대로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신기찬의 불꽃같은 트리플 펀치가 작렬한 것이다.
"자ㅡ, 그럼 가실까요?"
쓰러진 강혁을 보며 신기찬이 말했다.
하지만 강혁이 머리를 흔들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퉤."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에 고인 피를 바닥에 내뱉었다.
"너희들은 이래서 안 돼."
"……?"
"기회가 있을 때 완전히 제압했어야지."
강혁이 손으로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헐~ 터프한 고객님이네. 아직 할 마음이 남았어요?"
"복싱이라? 좋은 운동이지. 하지만 말이야. 전장에서 탄생한 무술은 이렇게 물렁하지가 않아."
신기찬의 이마에 작은 핏줄 하나가 섰다.
강혁의 말에 신경이 거슬린 것이다.
"물렁하다니? 내 주먹이 물렁하다고?"
현역 시절 돌주먹으로 유명했던 신기찬이다.
"뭐, 꽤나 쓸 만한 주먹이긴 하지."
강혁은 턱과 배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위험했어, 어퍼가 아니라 훅이었다면 기절했겠지.'
사람의 머리는 상하 공격보다 좌우 공격에 더 약하다.
신기찬의 마지막 펀치가 횡으로 턱을 쳤다면 뇌가 흔들려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뭐가 부족했는지 굳이 말이 필요한가? 직접 몸으로 느껴 보라고."
파악.
바닥을 박차고 강혁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오른팔을 뻗었다.
그런데 주먹을 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편 것도 아닌 형태다.
팔이 쭈욱 늘어나며 신기찬의 오른쪽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뭐야, 이건?'
이런 형태의 공격은 복싱을 시작한 후 처음이다.
찌르는 듯 날아들었지만 어느새 횡으로 베듯이 날아들었다.
'위험해!'
몸에서 위험 신호가 찌르르 하고 울렸다.
목 옆에는 경동맥이 있다.
맞으면 머리로 공급되는 혈액이 막혀 순간적으로 기절할 수 있었다.
신기찬은 재빨리 상체를 웅크린 채 상하좌우로 흔들었다.
복싱의 위빙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안으로 한 걸음 파고들려고 했다.
빠지직!
소리와 함께 신기찬은 발등에서 통증을 느꼈다.
강혁이 주먹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앞발로 발등을 밟았던 것이다.
한평생 복서로 활동하면서 거리 싸움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격은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주먹을 날리면서 동시에 발을 밟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신기찬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동시에 상체를 움직이며 경동맥을 노린 강혁의 팔을 겨우 피해냈다.
'이 자식, 이제 돌려주마.'
신기찬은 위빙동작으로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날카로운 잽을 날렸다.
슉!
'잽 다음은 옆구리에 훅이다. 갈비뼈를 부러뜨려주지!'
발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발등뼈에 금이 간 것 같았다.
옆구리에 훅을 먹이려던 신기찬의 몸이 갑자기 뒤로 휘청거렸다.
'헉.'
강혁이 어느새 신기찬의 무릎 바로 아래쪽 부위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한 발은 발등, 다른 한 발은 무릎을 눌렀다.
그러자 지렛대의 원리로 신기찬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아…안 돼!'
강혁이 이대로 무릎 아래를 체중으로 누르면 다리가 반대로 꺾일 상황이다.
자신의 발이 뒤로 꺾이는 장면을 상상하며 신기찬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어느새 무릎에 가해지던 힘이 사라졌다.
대신 강혁이 자신의 팔을 잡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어~ 억?'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강혁의 다른 쪽 손바닥이 날아왔다.
빠악!
강혁의 손바닥이 신기찬의 눈 부위를 쳤다.
그리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손가락을 한가운데로 쓸 듯이 모았다.
그의 손이 마치 사마귀의 손모양처럼 변화했다.
이름하여 당랑구수다.
"아아~ 악!"
신기찬이 통증에 울부짖었다.
강혁의 손가락이 눈두덩을 쓸어버린 것이다.
그 순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온몸의 허점이 드러났다.
강혁은 사정을 두지 않고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퍼어억~
강렬한 타격음이 옥상을 울렸다.
강혁은 위에서 아래로 신기찬의 가슴팍을 향해 팔꿈치를 내리찍은 것이다.
그것은 당랑권의 절초 중 하나인 첩주다.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걸쳐 전수되어진 세 가지 무술 중 하나가 당랑권이었다.
당랑권에는 여덟 가지 팔꿈치 사용법, 곧 팔주라고 알려진 기법이 전해진다.
첩주는 그 중의 하나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기법이다.
팔꿈치는 따로 단련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단단한 부위다.
그만큼 파괴력이 큰 기법이다.
팔주의 기법은 당랑권을 최강의 무술 중 하나로 올려놓았다.
"커헉!"
두 발에 스텝이 봉쇄당하고 가슴팍을 가격당한 신기찬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친 신기찬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필살! 넌 그게 부족해."
강혁이 정신줄을 놓은 신기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차가운 냉수를 뒤집어 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뭔가가 강하게 뒤통수를 가격했다.
따악!
타격음이 허공에 울렸다.
"크윽… 누… 누구?"
강혁은 미처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강혁의 뒤에는 검은 빛이 감도는 박달나무 목도를 든 오태산이 서 있었다.
오 전무는 검도로는 대통령기 대회에서 4강까지 올라간 적이 있는 고수다.
그는 쓰러진 강혁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직접 초빙한 신기찬이 맨주먹 싸움에서 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옥상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직접 목격했다.
강혁의 움직임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오태산으로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살인을 위해 탄생한 기술들을 종합해 놓은 듯한 수법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흘렀다.
만일 강혁이 마음만 먹었으면, 신기찬은 다리가 부러지고, 목이 부러져 죽었을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목검으로 강혁을 뒤에서 가격했다.
강하다고는 하지만 태생이 스포츠인인 신기찬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조폭과의 차이였다.
하지만 오태산도 나름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겁한 공격을 한 이후 수치심이 일었다.
'놈, 내게 이런 수치를 안기다니.'
오태산은 정신을 잃은 강혁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 * *
오전 12시.
"사장님, 우동집과 냉면집 천정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고 있답니다."
이 차장의 말에 김인수 사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지시를 내렸다.
"안 되겠어. 당분간 5층은 폐쇄해. 사장님들께도 연락하고, 보수공사가 완료 될 때까지 영업중지하시라고해."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5층 식당가로 들어가는 가스 공급도 막고, 옥상의 냉각탑도 운행을 중지해야 합니다."
"뭐? 가스 공급이야 그렇다 쳐도 냉각탑을 멈추면 에어컨이 가동 안 될 텐데?"
"천정이 내려앉고 있는데 냉각탑의 진동이 한몫하고 있습니다."
"끄응, 우리 백화점 체면이……."
강남 한복판에 있는 고급 백화점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할 수 있는 문제였다.
때문에 고민이 깊어졌다.
게다가 오늘은 유독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냉각탑의 진동 때문에 상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건물에 심각한 손상이……."
"알… 알았어. 에어컨 가동을 중지 시켜."
이미지 손상이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외부인은 어떻게 됐어?"
"오 전무님이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찾고 있다니 곧 잡아내겠지요."
"끄응,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 사람 하나 못 찾고 이게 되겠어?"
"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