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31화
31화
빈 사무실을 찾아 두 사람을 두고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10분이 흘렀다.
'붕괴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7분.'
강혁은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방송실의 위치를 확인하고 뛰었다.
방송실은 A동 4층에 있었다.
강혁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시설 이사 차준배는 회의실을 나와 다시 한 번 현장을 방문했다.
긴급보수로 침하현상이 멈추었다고 보고를 들었기에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미 지시가 내려가서 3층 이상에는 영업을 중지하고 매장을 지키는 직원들만 있었다.
"어머, 이사님."
"응? 아, 김애라 양. 이야기는 들었네. 가을에 결혼한다지?"
"아이참. 이사님 귀에까지 그 말이 들어갔어요?"
"하하,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여기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호호호, 진짜 빠르긴 하네요."
김애라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쩐 일이지? 자네는 2층 매장에 있지 않나?"
"맞아요. 명품 브랜드 매장에 있어요. 지금은 교대 시간이라 3층에 잠시 와봤어요."
"응? 아니. 왜?"
"사실은… 낮에 이상한 사람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요."
"이상한 사람?"
차분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김애라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했다.
"예, 사실은 그 사람이 오늘 오후 5시 30분에 건물에서 대피하라고 했거든요."
"대피?"
"예, 그 사람 말이 우리 백화점이 무너진다지 뭐에요, 호호호, 우습죠?"
"응? 그…그렇군. 하하하."
차준배는 김애라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걱정이 되어 와본 것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백화점이 무너질 거라는 소리를 했다고 하니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김애라도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에어컨을 안 튼다고 하지. 3층 이상은 영업중지를 한다니까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애라 양. 너무 걱정 마. 우리 백화점 안 무너져. 아직 5년밖에 안 되는 건물이야. 그런데 무너진다니 말이 돼?"
그제야 김애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그렇죠? 호호, 저도 아는데 괜히 그런 말을 들으면 좀 없던 생각도 들고 그렇잖아요. 호호."
"그래, 그래. 걱정 말고. 교대 시간이라는데 쉬어요."
"예, 이사님."
김 애라가 인사를 하고, 다시 2층 매장으로 내려갔다.
차준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백화점이 무너져? 대체 어떤 녀석이야?'
삼양백화점은 차준배 이사의 직장이었다.
청춘을 바친 삼양그룹이다.
삼양그룹의 매출 절반 이상이 여기서 나온다.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될 곳이었다.
"빌어먹을 놈! 육시를 할 놈!"
차준배는 누군지 모르는 남자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편 김애라는 2층으로 내려가 홍수진을 만나러 갔다.
"이사님 만났어? 뭐래?"
"아무 일 없대, 걱정말라고 하시는데!"
"그래?"
홍수진은 김애라에게 말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불안해진다.
"진짜, 괜찮겠지? 그런데 이사님은 여긴 왜 오신거래?"
"앗, 그거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다."
김애라는 손으로 이마를 때리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에휴, 네가 그렇지."
홍수진은 웃으며 친구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괜찮겠지?'
수진의 마음에 불현 듯 불안감이 스쳤다.
"이, 이럴 수가? 저게 뭐야?"
5층 식당의 탁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기울었다.
바닥에 침하현상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 붕괴가 일어나고 있어!'
차준배 이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사람이 오늘 오후 5시 30분에 건물에서 대피하라고 했거든요'
차준배 이사의 머릿속으로 김애라와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알려야 해."
차 이사는 임원 회의실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5층의 직원실로 달려갔다.
회의실로 연결되는 전화기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차 이사가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차 이사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차 이사가 고개를 뒤로 돌리려 했다.
그의 머리를 사내가 강타했다.
기절한 차 이사를 사내가 어깨에 둘러메고는 물품 창고에 던진 후,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오태산은 회의가 길어지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오태산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오태산이 하는 일은 건설 쪽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회의실 바깥으로 나가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오태산도 회의가 자신과 무관한 것이기에 밖으로 나간 것이기도 했다.
복도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때였다.
그때, 그의 눈에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응?"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힘든 사내였다.
오태산은 옥상에서 보았던 사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저 놈이 어떻게 나왔지?'
정신을 잃은 강혁의 팔과 다리를 침대에 끈으로 묶어두었다.
거기에 부하 둘을 붙여 놓았는데도 강혁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하는 놈이야?"
오태산은 검은 박달나무 목검을 들고 강혁의 뒤를 쫓았다.
"헉헉, 여기다."
강혁은 마침내 방송실을 발견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여는데 덜컥거리기만 하고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이 잠겨 있었다.
"젠장."
강혁은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휴대용 간이 소화기가 눈에 띄었다.
소화기를 들고 소화기 아랫부분으로 손잡이를 내려 쳤다.
쾅쾅!
몇 번의 시도 끝에 손잡이가 부서져 나가며 문이 열렸다.
"됐다."
문 안을 살피자 한쪽 구석에 방송 시설이 보였다.
강혁이 들어가려 할 때였다.
"남의 백화점에서 이게 무슨 짓이지?"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천으로 된 검집이 보였다.
검집에는 한자로 낙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구나!'
강혁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사내가 눈앞의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뒤에서 습격을 당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전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다.
눈앞의 사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뜻이었다.
"당신이군."
"내 사람을 때려눕힌 건 자네니. 사과는 하지 않겠네. 발등과 가슴뼈 부러뜨린 죄값으로는 아주 부족하지."
"그래서 지금 부채를 받으시겠다?"
"난 빚지고는 못 살거든? 몇 배로 갚아야겠어."
오태산이 검집을 풀고 검은 빛이 감도는 목검을 꺼내었다.
목검의 중앙에는 낙일이라 적혀 있었다.
"낙일이라……."
"내 애검은 진검이라 평소에는 이걸로 대신하지."
"호오, 그것 참. 대단하군."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오태산이 검을 오른쪽 귀 옆으로 바로 쳐들었다.
그것은 시현류의 동작이었다.
일본의 많은 고류검술 중에서도 실전적이라 일컬어지는 검술이었다.
진검을 사용할 때 시현류의 검사들은 상대의 몸을 반쪽으로 갈라버렸다.
피비린내 나는 살인검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검법이 바로 시현류다.
조폭의 길로 들어선 오태산에게 안성맞춤인 검술이기도 했다.
"시현류?"
살인검의 대명사인 시현류를 알아본 강혁은 긴장했다.
'맞으면 뼈가 꺾이고, 살이 터진다.'
"시현류를 알아보다니, 아직 젊은 나이에 생각보다 견문이 넓군 그래?"
이제 2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강혁이다.
그런데 고류 검술을 알아보자 오태산이 살짝 놀란 모습이다.
'시현류의 일격은 일격 필살이다. 반드시 첫 번째 일격을 피해야 한다.'
강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오태산은 재빨리 뛰어들어 간격을 좁혔다.
"키이이잇!"
기괴한 기합 소리와 함께 필살의 내려베기가 시전됐다.
괴성이 울려 퍼지며 강혁의 목덜미로 쾌속의 검날이 날아든다.
만일 진검이라면, 몸을 일격에 반으로 갈라버렸을 위력의 검격이었다.
쇄애애애액!
공기를 가르며 날아든 목검이 강혁의 목덜미를 양단할 듯 내리쳐졌다.
검은 목검이 강혁의 목에 닿을 찰나 강혁의 몸이 허깨비처럼 꺼졌다.
정확히는 몸을 아래로 급속히 숙인 것이다.
부퇴라는 자세로 다리를 최대한 벌려 순간적으로 몸을 아래쪽에 바짝 붙였다.
그 덕분에 파괴력이 가장 정점일 때의 검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등과 어깨 위로 검격이 가해졌다.
퍽!
첫 번째 타격음은 목검이 강혁의 어깨와 함께 등을 때리는 소리였다.
"크윽."
강혁이 몸을 순간적으로 낮추며 주먹을 날렸다.
퍼어억.
오태산의 명치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
당랑권의 구명절초(위기 중에 목숨을 구하는 수법) 중 하나인 봉황삼점두의 두 번째 동작이었다.
원래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명치를 때리고, 다시 목덜미의 경동맥을 타격하는 초식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어깨와 등에 받은 타격 때문이었다.
오태산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 역시 정확하게 명치를 맞고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다.
'크윽, 지독한 놈. 그 와중에 주먹을 날리다니. 역시 보통 놈이 아니구나.'
오태산은 강혁을 경계했다.
"대단하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건 인정해 주지. 하지만 이제는 항복해야 할거야."
강혁은 지금 지독한 통증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깨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깨만이 아니다.
등짝에도 깊은 상처를 입어 근육이 손상당한 상태였다.
상당히 위력을 죽이고 맞았는데도 이 모양이다.
게다가 상대는 아직 힘을 쓸 만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낭패다.'
강혁은 자신이 코너에 몰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 어쩌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에 더 있다가는 자신도 붕괴에 휘말려 죽을 수밖에 없다.
"이봐! 여긴 곧 붕괴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서 대피 방송을 해야 해!"
"오라, 그래서 이곳으로 온 거였나?"
"시간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나갈거야."
오태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백화점 붕괴는 없어. 보강 공사를 해서 침하현상을 멈추었거든. 그런데 누가 시킨 거지? 대한일보 서인태 사장인가?"
강혁은 삼양백화점 붕괴사건 보도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태산이 말한 침하현상이 멈추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임시방면으로 막아 둔 효과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쯤 침하현상은 다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백화점 전체의 붕괴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