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33화
33화
"어서!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요. 여자들과 아이를 가장 우선시 하세요."
빨간 원피스의 여성이 소리쳤다.
여인이 옆에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이 좀 경박해 보였다.
"영, 영혜 언니, 우리도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하는 거 아니유?"
"가만히 있어봐. 사람들을 대피시켜야지. 우리만 나갈 순 없어."
"하, 하지만 지금 나가지 않으면 우리도 위험해요. 언니."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울면서 엄마를 찾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이제 막 8살 정도 된 남자아이였다.
재빨리 아이에게 뛰어간 여성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얘, 뭐하니,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해."
여성의 말에 고개를 돌린 남자 아이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아줌마, 우리 엄마가 안 보여요. 엄마를 찾아야 해요."
8살가량 된 남자 아이가 울먹였다.
최영혜도 그 말에 울컥하는 눈치다.
"지, 지금은 빨리 여기를 나가야 해. 내가 엄마를 꼭 찾아 줄게."
최영혜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정말요?"
"그래, 내가 꼭 찾아줄 테니까. 어서 같이 나가자."
"이사장님, 더 이상 지체하시면 위험합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 봐요. 언니. 어서 나가자니까."
"그래, 알았어."
머리 위에서 벌써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분진이 떨어졌다.
최영혜는 자신을 이끄는 사내들을 따라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바깥으로 뛰었다.
"아, 알았다. 저 사람. 그 사람이야."
"엉? 누구?"
"최영혜, 최강수 대통령 딸."
김애자의 말에 밖으로 뛰어나가면서도 홍수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 대통령님 따님이라고? 그럼 저 사람들은 경호원?"
홍수진은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경호원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가는 최영혜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 * *
"이, 이봐! 정말 무너지는 거야?"
강혁은 오태산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해."
강혁은 오태산을 부축하고 A동 비상계단 쪽으로 걸었다.
그곳은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부축해서 비상계단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천정의 갈라진 틈을 통해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비상 계단에는 강혁과 오태산만이 아니라 급히 대피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건물 전체에서 들려오는 진동소리와 바람이 세차게 빠져나가는 소리에 패닉에 빠졌다.
우르르르?릉~
건물 전체가 진동하는 듯하더니 10초도 안되어 수천 톤의 콘크리트와 철근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쿠와와아아아앙!
엄청난 분진들이 휘날렸다.
비상계단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숙였다.
계단 쪽으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분진가루에 아무도 눈을 뜰 수 없었다.
* * *
B동 5층 임원 회의실.
한창 도면을 그려가며 보수 공사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라도 났는지 건물 전체가 우르릉하고 흔들렸다.
거대한 소음과 함께 진동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책상을 붙들고 흔들리는 몸을 지탱했다.
몇 초나 지났을까?
진동이 멈추자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김덕신 회장이 물었다.
"회장님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임원 중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센 바람이 사무실 안으로 불어 왔다.
사람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건물이 사라지고, 눈앞에 삼양 아파트가 보였다.
그 사이에 존재했던 삼양백화점 A동이 사라졌다.
거대한 5층 건물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털썩!
시설부 차장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맙…맙소사! 우린 이제 망했다."
"이… 이럴 수가?"
김회장이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김인수 사장이 급히 아버지를 부축했다.
임원들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문 밖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넋을 잃은 모습이다.
* * *
"국민 여러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 백화점의 대명사 삼양백화점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던 직원들과 매장을 찾은 손님들 수백 명이 지금 이곳 건물 잔해 속에 파묻혀 생사를 알 길이 없습니다."
방송국 아나운서가 비통한 목소리로 방송카메라를 향해 울부짖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분진을 뒤집어 쓴 채 겨우 살아난 사람들이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거리에 쓰러져 있자 사람들이 지나가는 차들을 세워서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 날은 지나던 차량 모두가 앰뷸런스가 되어 사람들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온 국민이 비통해할 이 사고의 한가운데서 그나마 우리가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붕괴 직전, 마침 백화점을 방문했던 고 최강수 대통령님의 따님 최영혜 재단이사장님이 재단직원들과 함께 붕괴 직전 당황하던 백화점 직원들과 손님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셨다는 겁니다. 잠시 최영혜 재단 이사장님을 만나 당시 상황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최 이사장님."
"그게… 안녕하다는 말은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네요."
"그렇습니다. 정말 전 국민이 분노하고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늘 현장에 계셨다는데요?"
"예, 오늘은 마침 재단에서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려고 왔었는데요. 한참 물건을 고르고 있는 중에 저희 경호원들이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건물 상태가 이상하다고, 여기저기에 금이 가있다고."
최영혜는 벅찬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지시를 했죠. 뭔가 문제가 있는 건지 알아보라고. 마침 건설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직원이 있어서 조사를 보냈는데, 엄청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내려오는 거예요.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건물이 붕괴 될 것 같다고."
"아, 붕괴 위험을 사전에 아셨군요."
"예, 그런데 그게 20분도 채 안 남았을 때에요. 그런데 직원들도 그렇고, 손님들도 모두 아무것도 모르고 쇼핑을 하고 있어서, 제가 경호원들을 모두 동원해서 대피를 시키라고 했죠."
"세상에… 정말 이사님이 아니었다면 더 큰 희생이 나올 뻔 했군요."
"아닙니다. 저야 한 게 뭐 있나요. 모두 재단 식구들이 고생을 했죠."
"아닙니다. 이사장님, 듣기로는 직접 어린 아이도 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붕괴되기 1분도 채 안 남았을 때에요. 빠져나가기 전에 혹시나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어린 아이가 엄마를 찾아서 울고 있는 거예요."
최영혜는 말을 잠시 멈췄다.
아직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했다.
"…다행히 제가 데리고 나왔는데, 걱정이에요. 엄마는 무사한지. 일단 저희 재단 측에서 아이는 보호하고 있습니다만……."
최영혜가 말끝을 흐리더니 울컥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최영혜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이 순간 전국의 시청자들이 최영혜와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그… 그렇군요. 그 아이도 이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나운서가 말을 하면서도 뭔가 울컥하는 것이 보였다.
영웅의 탄생이었다.
붕괴 20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만일 그녀가 나서지 않았다면 훨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방송, 신문 등 모든 언론이 그녀를 찬양했다.
아직도 죽은 최강수 대통령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많은 국민들이 있었다.
그녀의 인터뷰가 그들의 가슴 속 불길에 기름을 퍼부었다.
문민 정부가 탄생한 후, 해마다 사건 사고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부유해진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상처 나고 있었다.
국민들은 고도성장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와중에 생겨난 어두운 면을 똑바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국민들은 희생양을 찾는 동시에 훼손된 자존심을 만회시켜줄 영웅을 찾았다.
최영혜는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완벽히 채워 줄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정치권에 거대한 태풍을 몰고 올 백전 무패의 선거의 여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맙소사!"
서울 데일리의 왈가닥 기자 이진주는 사고 소식을 듣고, 사진기자인 박성배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왔다.
중간에는 차가 너무 막혀서 현장에서 10분 거리를 뛰어 와야 했다.
현자에 도착해서 본 삼양백화점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하 3층, 지상 5층에 달하는 거대한 건물이 폭삭 가라 앉아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나 폭격이라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박성배는 사진기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이런 젠장, 그때 취재를 멈추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진주는 울분에 차 양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현장에는 어머니를 찾는 아이가 울부짖고 있었다.
돌가루를 온통 얼굴에 뒤집어쓰고, 피를 흘리며 지나가는 여자도 있었다.
이진주는 만일 자신이 그때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면 이런 참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몸이 덜덜 떨려왔다.
* * *
강혁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선글라스 너머로 최영혜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최영혜와 재단 직원들의 활약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대피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의아했다.
원래의 역사 속에서 삼양백화점이 붕괴될 때 최영혜는 그 현장에 없었다.
당시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언론에도 보도된 적이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강혁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최영혜를 바라보았다.
한편 강혁과 수많은 시민들, 각 언론사 기자들, 구조대원들로 가득 찬 삼양백화점 붕괴 현장으로부터 100여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검은색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수고했어."
뒷좌석에는 이제 10살 정도 된 어린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배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검은 양복차림의 사내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흥미로운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본다는 듯 약간 들떠 있었다.
운전석에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노인이 단안경을 끼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뭘요. 보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상어턱에 쥐처럼 작은 눈을 가진 사내가 말했다.
"그런데 말씀하신대로 지하 매장 쪽 스피커를 미리 손봐놓지 않았다면, 일에 차질이 있었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래?"
"예, 여기 직원 중에 누군가가 방송으로 무너진다고 빨리 대피하라는 방송을 하더군요."
"흠? 그건 참. 놀라운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