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34화
34화
신상현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지금 붕괴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영혜의 화려한 등장은 상현이 연출한 거대한 쇼였다.
과거 연쇄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처럼 이번 일의 모든 것을 막후에서 설계했다.
신상현은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미리 찾아서 제거하려고 움직였다.
이를 위해 실제 과거의 역사에 자신이 개입하면서 바뀔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계산했다.
모든 변수를 고려했던 신상현은 과연 역사와 다르게 흘러가는 조류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론 쪽에서 돌고 있던 삼양백화점 부실 건축에 대한 보고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삼양 건설과 라이벌 관계인 대진건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후 최영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향력을 발휘해 대한 일보와 여당 국회의원의 움직임을 막았다.
만일 신상현 쪽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예상과는 다른 역사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원래 알고 있는 역사와 다르게 흘러갈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박상현에게는 지하 매장 쪽 스피커의 선을 몰래 잘라놓도록 지시했다.
최영혜가 빛나려면 그만큼 희생도 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오른팔이 된 샤크 박광수의 활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삼양 쪽 시설 이사가 붕괴 위험을 발견하고, 임원들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던 것도 미연에 막았다.
하마터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뻔 했던 순간이었다.
신상현은 이번 일을 계기로 미래가 꼭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간섭함으로써 결국은 예정되어 있던 것과 유사하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흥미로워 했다.
"크크큭, 결국 나라는 존재는 역사의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시간의 흐름을 예정된 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일종의 시간의 간섭력이라고 할까?"
"……?"
샤크 박광수는 신상현의 어려운 말에 이해가 가지 않은 표정이다.
"흥미로운 쇼였어. 그럼 돌아가 볼까? 지금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오래 즐겨보고 싶군."
신상현의 말에 노집사가 천천히 차를 도로로 움직였다.
"도련님, 그럼 최영혜 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차를 움직이며 노집사가 신상현에게 물었다.
"어떻게 될 거냐고? 저 사람은 앞으로 선거의 여왕이 될 거야! 100전 무패의 여왕이."
신상현의 말에 노집사는 전율했다.
정말로 신상현의 말처럼 된다면… 이 나라를 움직이는 정치 권력이 신상현의 두 손에 쥐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한 번은 망해야 해. 그것도 철저하게."
"망한다고요?"
박광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상현은 박광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을 뿐이다.
지금 현재 여당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이 쉽게 최영혜에게 그들이 쥐고 있는 권력을 넘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여당은 곧 I.M.F 사태로 인해 정권을 야당에게 빼앗기게 된다.
"지켜보면 알게 될 일."
신상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보스."
박광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 * *
"이…이럴 수가?"
대한 일보 사장 서인태는 대한 사장실에서 현장을 중계하는 방송사의 특집 방송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삼양백화점이 붕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원래의 계획대로 특집 기사를 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때 시청과 구청의 특별 감사를 독촉했다면 지금과는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아나운서의 말을 들어보면, 붕괴 직전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탈출 했다고는 한다.
하지만, 지하 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탈출하지 못하고, 수천 톤의 콘크리트와 쇳덩이 아래에 갇혔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한다.
6.25 이후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폭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붕괴된 삼양백화점의 모습이 보였다.
현장 화면과 함께 고 최강수 대통령의 딸인 최영혜의 화려한 등장을 지켜보았다.
서인태 사장은 삼양백화점의 부실시공과 공무원들의 봐주기 식의 감사에 대한 특집기사가 나오기로 했던 전날 밤, 자신의 아버지와 했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아범이냐?
"예, 아버지.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너, 삼양백화점 관련해서 특집기사 준비하고 있지?
"아, 예. 아버지. 사실은 대진건설이라고……."
―그거 모두 접어.
"예? 아니 왜?"
자신이 대한 일보 사장에 취임한 후, 기사의 내용이나 방향과 관련해서 어떤 언급도 없었던 아버지다.
그런데 이 저녁에 갑자기 전화를 했다.
다짜고짜 기사를 내리라니? 대체 어느 선에서 청탁이 들어온 걸까?
"아버지, 삼양은 이제 지는 해입니다. 대진은 떠오르는 해이고요. 앞으로 우리와 좋은 협력관계가……."
―접어. 네가 모르는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예? 큰 그림이라고요?"
―지금은 자세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말해주기 어렵고. 하지만 내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네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앞으로 일어날 거다.
"……?"
―그럼, 이해한 걸로 알고 기사는 모두 내리거라. 삼양과 관련해서 단 한 줄도 우리 신문에 실리면 안 된다.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아버님."
서인태는 오랜만에 아버지 서성수 회장의 조용한 카리스마를 느끼고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절대로 뒤로 물리는 법이 없는 양반이었다.
만일 지금 자신이 반발하면 바로 내일이라도 일선에 복귀해서 자신을 사장 자리에서 내칠 그런 양반이다.
"큰 그림이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
서인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예? 박 의원님. 의원님도 말해줄 수 없다고요?"
―그래, 사실 나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라 솔직히 설명해줄 것도 없네. 하지만 자네 아버님 말대로 모처에서 뭔가 큰 프로젝트가 움직이고 있다고 해. 그러니 자네도 아깝기는 하지만 대진건설은 그만 손을 끊게.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서인태는 더 큰 의문에 빠졌다.
그날의 기억에서 돌아온 서인태는 TV속에 나오는 최영혜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영웅이 되어 있었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의 탄생이었다.
고 최강수 대통령 이후, 군인 집권 세력으로 전태우 대통령이 있었다.
하지만 87년의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며 권토중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한 일보는 오랜 군사 독재 시절,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오면서 대한민국 1등 신문이라는 지금의 지위를 확립했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등장 이후,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해오는 각종 세력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고 최강수 대통령의 무남독녀 외동딸의 등장은 대한일보에게도 호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숨죽이며 암약하고 있던 세력들에게도 권토중래의 기회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 최영혜가 깃발을 세울 것이다.
그때 그들은 일시에 그 깃발 아래 몰려들어 최영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큰 그림……. 이것이었나?"
서인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며 팔에서 닭살이 돋았다.
* * *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힘이 미미해서?"
하루아침에 주식으로 미국에서 억만장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자신의 영향력은 적었다.
'대한민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것이 뭐가 있어?'
그런 말이 절대적으로 통용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강혁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에서 기반을 마련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시작해서는 출발점부터 늦은 강혁이 아무리 용을 써도, 삼강을 이길 수는 없었다.
혈연과 학연, 지연으로 얽히고설킨 한국이다.
그들만의 이너 서클을 넘어서려면 더 막강한 힘이 필요하고, 강혁은 그래서 미국으로 갔다.
'만일 내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가진 인물이라면 조금은 달랐겠지. 야후의 기술이사로 억만장자가 된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자랑스런 한국인이라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면……그리고 대한민국 정계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미국에 강한 권력을 지닌 자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면…….'
강혁은 이를 악물었다.
신상현의 존재를 생각하면 자신은 아직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강혁은 자신을 대신해서 전면에 나서 줄 얼굴 마담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내게 1년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그랬다면 달랐을 텐데.'
강혁은 가슴을 시려왔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정적인 반전은 없었다.
돈으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소위 권력자들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애먼 돈만 잃었다.
허탈한 얼굴로 무너진 삼양백화점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울부짖는 목소리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강혁은 더 이상 사고현장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리고 현장을 조용히 빠져 나왔다.
돌아서는 강혁의 가슴 속은 비탄과 분노로 차올랐다.
강혁이 현장을 빠져나올 때, 포니테일에 커다랗고 둥근 안경을 쓴 젊은 여성이 강혁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난…난… 아, 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망연자실한 상태로 넋이 나간 듯한 여성의 모습에 강혁은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의 귓가로 이진주, 뭐하고 있어? 라는 남자의 말이 들렸다.
이날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이 여성을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것이다.
강혁의 머릿에서 이날의 참혹한 장면은 끝없이 재생될 테니 말이다.
* * *
이번 일은 큰 실패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서 강혁은 몇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인맥을 맺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각계각층에 거대한 인맥을 오랫동안 쌓아오고 있는 그들과 싸우려면 반드시 필수적인 일이야.'
마지막 순간 기대를 저버리고 움직이지 않았던, 정치인, 행정관료, 언론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그들을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
'날 대신해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얼굴 마담이 필요해!'
강혁은 자신의 대리인이 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강혁은 신상현을 속이기 위해 원래의 역사대로 형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어떤 한계를 넘어선 일의 경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이번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고 해도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이 과연 일개 형사 나부랭이의 말을 듣겠는가?
결국 자신을 대신해서 권력자들을 움직여줄 얼굴 마담이 필요했다.
'앞으로도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일은 많을 것이다.'
당분간은 미국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번처럼 항공사를 통해 오고가는 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동력이 필요해. 그리고 얼굴 마담뿐만 아니라 내 손발이 되어서 움직여줄 사람들도'
강혁의 머릿속에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한 준비들이 하나둘 보다 구체적인 그림이 되어 떠올랐다.
강혁은 두 번 다시 이번과 같은 실수를 겪고 싶지 않았다.
"기다려라. 내가 다시 돌아올 때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테니!"
강혁의 두 눈이 굳은 결의로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