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38화
38화
마크는 안젤라의 손목에 있는 혼전순결 팔찌를 지적했다.
혼전순결 서약은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안젤라는 순결무도회라 불리우는 파티에서 혼전순결 서약을 했다.
서약식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턱시도를 입은 중년의 신사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10대 소녀에게 다가가 묻는다.
"저와 춤을 추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두 사람은 사실 아버지와 딸이다.
이들이 서로 춤을 춘 후, 결혼 전 혼전 순결을 맹세하면 아버지가 순결 반지와 순결 팔찌를 딸에게 끼워주는 것이다.
안젤라는 10대 시절 뉴욕의 유명 호텔의 홀에서 열린 순결무도회에 참가했고 당시 아버지에게 이 팔찌를 받았다.
"마크, 너도 명심해. 교회에서 웨딩마치가 울리기 전까지는 안 된다는 걸 잊지 마."
안젤라가 짐짓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 세상에! 너 진짜 그럴 거야?"
"마크!"
"알았어. 안젤라. 뭐 앞으로 한 달만 참으면 되는데 안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난 내가 한 맹세를 쉽게 깨고 싶지는 않거든."
안젤라는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매우 심지가 굳은 학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말자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아이를 낳고 육아에 힘쓰기보다는 법학 전공을 살려 뉴욕에서 검사보로 일할 생각이었다.
장래의 그녀는 본격적으로 법조계에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법조계에서 멋진 커리어를 쌓은 후, 정계에 진출해서 미국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거나 적어도 영부인이 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다.
그녀의 외모를 보자면 정치인보다는 배우나 모델이 되는 것이 성공하기에 더 쉬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안젤라는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에는 예전부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이 아직 하지 않은 일, 쉽게 이룰 수 없는 일.
이런 것이야말로 안젤라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었고, 성취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일이었다.
마크 역시 안젤라의 선택을 받은 만큼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야심만만한 젊은 정치학도였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마크는 졸업 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인 삼촌 밑에서 경험을 쌓을 생각이었다.
그런 그에게 안젤라는 끊임없는 영감을 주는 멘토이자 동반자였다.
"자, 그럼. 마을까지 걸어가기로 결정!"
두 사람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젊은 두 사람에게는 이런 일도 하나의 해프닝이고 즐거운 추억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빵빵~
어디선가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도로가에 작은 밴 하나가 섰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잘 됐어."
두 사람이 차로 다가가자 밴에서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작업복을 입고 있고, 밴에는 전기, 전화 각종 수리라고 적혀 있었다.
인근에 있는 마을 사람인 듯 했다.
"무슨 일이죠? 차가 섰나요?"
차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 뒤편에 있는 자신들의 차를 보며 물었다.
"아, 당신 주유소 직원 아닌가요?"
안젤라가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물었다.
"하하, 아니에요. 그 집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라 잠시 일을 봐주고 있었을 뿐이죠. 제 이름은 벤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벤."
마크가 벤과 악수를 나누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모르겠어요. 차가 계속 시동이 꺼지더군요."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그럼요. 오히려 부탁드리고 싶군요."
마크의 말에 벤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차의 범퍼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마크가 범퍼를 열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마크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안젤라의 비명소리가 숲 속을 울렸다.
몸을 돌린 벤이 웃으며 말했다.
"이리와. 이쁜이, 내가 귀여워해줄게!"
안젤라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 뛰었다.
그런데 몇 발자국 가지 못해서 그녀의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다리를 보았다.
길다란 침 같은 것이 다리에 꽂혀 있었다.
안젤라는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바닥으로 쓰러졌다.
* * *
"존, 존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럼요. 존슨 여사님."
"호호, 저도 그냥 마릴린이라고 불러주세요."
"마릴린, 오늘 파티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부군인 존슨 씨도 다음 선거에 꼭 붙으시길 바라요."
"감사해요. 그런데 야후의 기술이사이자 투자 회사를 운영하신다고요? 젊은 분이 대단하시네요."
"뭐, 사실 별거 아닙니다. 제 진짜 재주에 비하면."
"어머나, 야후의 기술이사이기도 하고, 윌 가에서 투자 회사도 운영하시는 분이 진짜 재주는 따로 있다고요?"
"사실 제가 영감이 좀 발달한 편이거든요. 제 투자회사가 잘 나가는 것도 그런 영향이 좀 있죠."
마릴린은 영감이란 말에 눈빛이 반짝거렸다.
금세 호기심이 어린 눈동자로 변했다.
강혁은 마릴린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마릴린, 웃고 계시지만 슬퍼 보이는군요."
강혁의 말에 마릴린이 살짝 놀란 표정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다.
멘탈리즘은 만능이 아니다.
시도하는 자가 상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강혁은 이미 파티를 하면서 멀리서 마릴린을 관찰하고 있었고,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어두운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중년의 여자가 수심에 잠길만한 일은 무엇이 있을까?
남편? 자녀? 재산? 마릴린은 외가 쪽이 텍사스 석유 재벌이었다.
윌 존슨이 상원 의원이 되기까지 그녀의 재산이 큰 몫을 했다.
자녀들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훌륭히 잘 컸으니 그런 문제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이다.
"남편께서……."
벌써부터 표정이 살짝 변한다.
강혁이 맞혔다는 뜻이다.
"여자……."
얼굴 표정이 살짝 경직된다.
앞서 강혁은 윌 존슨의 여자 비서를 본 적이 있었다.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비서……."
빙고!
확연히 경직되었다.
만일 잘못 짚었을 때는 재빨리 말을 이어서 다른 방향으로 비틀면 된다.
"…비서에게 빠져있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곧 아내 분께 돌아올 거예요."
"대단하시군요."
마릴린의 톤이 조금 전과는 달리 확연히 한 옥타브 가라앉았다.
"어떻게 아신 거죠?"
"말씀 드렸잖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 보다 영감이 강하거든요."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마릴린은 더욱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데 제 남편이 돌아온다니, 그게 정말인가요?"
"확실합니다."
강혁은 점쟁이가 따위가 아니다.
그러니 남편이 돌아올 거라는 걸 알 방도는 없다.
하지만 강혁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마릴린의 표정에서 남편이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혁이 여자 비서에게 빠졌다는 말을 할 때였다.
마릴린의 얼굴에는 동요는 했을지언정 비참함이나 체념을 읽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당당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읽었다.
강혁은 마릴린이 쉽게 보기 힘든 멋진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뜻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당차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래요."
마릴린은 두 번 묻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그 말을 음미할 뿐이었다.
강혁은 단지 그녀 속에 있는 믿음에 확신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다.
남편을 돌아오게 할 매력은 그녀에게 이미 있었다.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그보다. 자녀분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칠 겁니다."
갑작스런 이야기에 마릴린이 놀라 강혁을 바라보았다.
강혁은 차분하게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이 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강혁은 마릴린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고는, 약간 놀란 표정의 마릴린을 뒤로 하고 조용히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 * *
"그게 무슨 소리야? 위더슨?"
"윌, 당장 대통령에게 전화를 드리게. 우리 아이들이 실종되었어."
윌 존슨은 위더슨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여행 계획에는 없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차 안에는 돈과 짐은 그대로 있고 사람만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을 찾기 위해 지역 경찰이 나섰다.
하지만 경찰은 두 사람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더슨은 미국 대형 은행 순위 4위인 시티그룹 은행의 총재였다.
미국 금융계의 손꼽히는 큰 손이다.
윌 존슨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신의 딸 안젤라를 위더슨의 아들인 마크와 결혼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마크가 장래성 있는 젊은 재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태계 금융 기업의 후계자이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위더슨이 잘 뒤를 받쳐 준다면 장래 미국의 대통령도 될 수 있는 남자라고 보았다.
윌 존슨은 급히 수화기를 들고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절차를 걸쳐 대통령과 통화가 연결되었다.
비록 윌 존슨은 공화당 상원 의원이지만 민주당 대통령인 클린턴은 같은 대학 출신의 후배로서 동문회에서 안면을 튼 사이였다.
이후 정치계에 입문해서 대통령이 된 지금까지도 막역하게 지내고 있었다.
"윌, 이 시간에 무슨 일이죠? 뭐라고요? 세상에! 위더슨 씨의 아들과 선배의 딸이? 알겠어요. 내 최선을 다해서 돕지요."
전화를 끊은 대통령은 즉시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법무장관과 F.B.I 국장을 부르게."
대통령의 협조를 약속받은 윌은 아내인 마릴린을 불러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윌의 설명이 끝나자말자 마릴린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불현 듯 며칠 전 파티에서 만났던 동양인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