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42화
42화
"이번에는 오랜만에 오시네요."
30대 중반의 젊은 부인이 강혁을 반기며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강혁이 부인이 내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인자한 얼굴을 한 남자가 앨범을 가져왔다.
"여기 제니의 사진이에요."
강혁은 이제 10살이 된 이유라의 사진들을 살펴보며 더 할 수 없는 기쁨과 씁쓸함을 함께 맛보았다.
이유라는 자신이 고용한 이규철에게 보호받다가 반년 후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이 부부는 강혁이 직접 고른 이유라의 양부모였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이 부부를 우연히 알게 된 강혁이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도록 권유했던 것이다.
"이사님이 야후를 그만 두신 건 정말 뜻밖이에요. 회사지분도 거의 다 처분하셨다면서요."
"응, 그렇게 됐어. 찰리. 하지만 IT업계를 완전히 떠난 건 아니야. 사실 조만간 새로운 회사를 하나 세우려고 해."
"와우, 그러면 혹시 경쟁자가 되는 건가요?"
찰리의 말에 강혁이 씩 웃었다.
"그럴지도."
제리 양이 듣는다면 펄쩍 뛸 소리였다.
사실 강혁이 야후의 주식을 거의 다 팔고 지분을 정리한 이유에는 투자회사를 운영할 목돈이 필요했던 것도 있지만, 새로운 검색사이트를 만들 생각이 컸다.
강혁은 앞으로 야후가 지고 구글이 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현시점에서 강혁은 구글을 세운 래리와 세르게이보다 더 강력하고 발전된 검색엔진을 만들 능력이 있었다.
여기에 굳이 래리나 세르게이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적어도 기회는 줄 생각이었다.
"제니는 지금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어요."
찰리가 웃으며 말했다.
"행복한가?"
"예, 존 그 애는 우리의 보물이에요. 고마워요. 존."
"잘 부탁해. 내게도 소중한 아이거든."
"이번에도 만나지는 않을 건가요?"
"응, 멀리서 보고 갈 거야."
"제니가 궁금해 하고 있어요. 자신을 후원해주는 아저씨가 누구인지."
찰리의 말에 강혁은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잘 부탁해. 찰리."
존은 행복한 얼굴로 천천히 앨범을 살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혁은 안젤라를 만난 후, 이유라를 보기 위해 뉴욕에서 실리콘밸리로 날아왔다.
유라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 * *
"좋아, 제니. 이번엔 이 부분을 다시 쳐보렴."
"예, 선생님."
피아노에서 유려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엠버 여사는 지금은 은퇴한 유명 피아니스트이다.
한 시간 레슨을 받는데 드는 금액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돈을 낸다고 아무나 레슨을 받을 수도 없었다.
어린아이일수록 직접 면접을 보고 재능이 있는 아이만 가르쳤다.
이유라는 엠버 여사의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것만으로도 장래가 유망한 피아니스트로 주변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유라의 연주가 끝나자 엠버 여사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지난주보다 좋아졌구나."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 전부 고쳐왔어요."
"흐흠, 그래. 네 연주는 기분에 따라 박자나 리듬감이 제멋대로 달라졌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악보를 보고 있는 것 같구나."
"헤헷!"
제니가 혀를 내밀며 웃었다.
"지금 이 말을 해도 네가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억해주면 좋겠구나. 예술이란 완벽한 기교 위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거란다. 감정이 없는 기교는 삭막한 사막과 같은 것이지만 기교가 무너진 연주는 듣는 사람들을 오히려 불쾌하게 만든단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지."
제니, 아니 이유라는 엠버 여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엠버 여사는 그만 웃고 말았다.
엠버 여사의 제자들은 대다수가 이미 나이가 조금은 있는 학생들이라 항상 근엄하게 지도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10살인 제니 앞에서는 그만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크크큿, 이 아인 정말 너무 귀엽다니까. 정말 아까워. 먼저 알았다면 내 쪽에서 입양하고 싶을 정도야.'
"음,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때가 올 거야. 그러니 지금은 그냥 기억해두렴."
엠버 여사가 제니의 콧잔등을 살짝 터치하며 말했다.
레슨을 마친 유라가 엠버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으로 나왔을 때였다.
마당에서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제니가 마당으로 나왔을 때는 차가 이미 빠져나갈 때였다.
제니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누가 엠버 여사의 집을 방문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지? 아무 말 없이 왔다가 간다니? 혹시 케이 아저씨?'
제니는 빠져나가는 차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 멀리 미국으로 입양을 왔을 때 많이 불안했지만 자신이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양부모님에게 한글로 써져 있는 카드를 받았다.
그때 유라는 자신에게 후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엠버 여사에게 가는 비싼 레슨비도 그 사람이 지급하고 있었다.
[유라에게.
안녕, 유라. 지금쯤 많이 불안하겠지? 낯선 나라에 왔으니 누구라도 그렇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저씨는 언제나 널 지켜보고 있단다. 그러니 넌 아무 염려하지 말고, 새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면 돼. 내가 언제나 널 지켜줄 테니.
K로부터.]
"K 아저씨, 당신인가요?"
유라는 급히 차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다 그만 넘어졌다.
"아얏!"
유라는 팔뚝과 무릎에 통증을 느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울지 않으려 애썼다.
부모님을 잃어버리고 보육원에 맡겨진 후, 유라는 많이 울었다.
하지만 친절한 원장 수녀님과 친구들 덕에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미소를 짓는 법을 배웠다.
지금도 울기보다는 미소를 지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리 서러운 걸까?
"이런? 어디 다치지 않았니?"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
눈을 들어보니 선글라스를 낀 젊은 청년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상당히 큰 키에 슈트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아직 어린 유라였지만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케이 아저씨?"
유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혁은 아무 말 없이 유라를 일으켜주며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많이 컸구나."
"아아, 케이 아저씨군요."
유라는 환하게 웃으며 강혁에게 달려들어 그를 꼭 안았다.
아직 어린 유라였기에 키가 큰 강혁의 허리쯤에 머리가 닿았다.
강혁은 당황하며 아무 말 없이 어린 유라를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심경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뉴욕 킹스 카운티 외곽 그린우드 묘지에서 마크의 장례식이 열렸다.
뉴욕의 유명 인사들 중 다수가 이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곳이다.
묘지 입구로 들어서는 곳에 서 있는 웅장한 건축물은 이곳을 관광 요지로 만들기도 했다.
장례를 맡은 목사님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목사님의 말씀이 끝나자 마크의 친한 친구가 나와 그와 함께 했던 추억들을 말했다.
마크가 얼마나 삶에 충실하고, 인생을 사랑하고, 멋진 미래를 꿈꾸어 왔는지, 그와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크를 알고 있던 사람들과 친척들은 손수건을 꺼내들고 눈물을 닦아 내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묵묵히 침묵을 지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마크의 아버지인 레비 위더슨이었다.
레비 위더슨은 자녀의 죽음 앞에서도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런 레비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아이언 페이스(iron face) 레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는 냉혈한, 기업 운영의 달인, 냉철한 승부사 등의 별명을 가진 위더슨이다.
하지만 그도 아들이 죽었으니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리라 생각했다.
"엄마, 아빤 정말 너무해요."
마크의 여동생 신시아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리 오빠와 사이가 나빴다고 해도, 저럴 줄은 몰랐어요. 오빠가 불쌍해."
"신시아, 너희 아빠는… 아니다."
에밀리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지금은 너희 아빠를 모르겠구나. 그래도 속으로는 마크를…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레비의 부인인 에밀리는 남편이 아들과 의견 다툼이 잦기는 했지만 부자간에 정이 두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레비는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다.
부인인 자신 앞에서도 조차 아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에밀리는 냉혈한인 남편에게 크게 실망하고 이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마크의 동생 신시아는 슬퍼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신시아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였다.
어머니를 닮아 약간 회색빛이 도는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길게 꼬아 내렸는데, 매우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검은 장례복조차 일부로 꾸민 컨셉처럼 보이게 만드는 요정같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신시아는 정치인을 꿈꿨던 오빠 마크와 달리 연예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지금도 고등학생 모델로 유명 패션 잡지에 몇 차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완고한 아버지 위더슨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시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집을 나와 꿈을 위해 독립할 생각이었다.
장례식을 모두 마쳤지만, 사람들은 금방 떠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고인이 된 마크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장례식에 초대받은 강혁과 마크의 약혼자였던 안젤라도 있었다.
안젤라는 식이 마치자 에밀리 여사와 신시아에게 다가갔다.
"에밀리, 신시아."
안젤라가 다가가자 두 사람은 모두 반가움과 슬픔을 동시에 드러내며 안젤라를 감싸 안았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안젤라는 생명의 은인인 강혁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쉽게 눈에 띠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존, 어디에 있는 거죠?'
안젤라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존을 찾았다.
"그런데 아빠 앞에 있는 저 동양인은 누구죠?"
신시아의 말에 안젤라는 신시아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위에 존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이에요. 날 구해주고, 마크를 그곳에서 데리고 온 사람이……."
안젤라는 존이 래리 위더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위더슨이 저런 식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사람들도 하나둘, 언덕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존 강이라고요? 언니를 구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