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47화
47화
#13장 약진 (2)
"이것도 인연인데, 동창생들끼리 노래방이라도 가는 건 어때? 오늘은 특별히 내가 쏘지."
강길태가 민예린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뭐, 뭐야, 나 난 엄마 심부름 중이라서 그럴 시간은……."
"네가 같이 가준다면 저 녀석은 그냥 보내줄 수도 있는데 어때? 우리랑 한두 시간 같이 놀아주는 대신… 넌 저 녀석을 구해 주는 거라고……."
"그… 그렇지만……."
민예린이 고민하는 표정을 보며 강길태는 씨익 웃었다.
하필 자신 때문에 민예린에게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떠오르자 말자 승호는 외쳤다.
"바보야, 그냥 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로 민예린을 향해 소리쳤다.
깜짝 놀란 민예린이 최승호를 바라보았다.
'……승호, 왜?'
민예린은 승호의 얼굴에 떠오른 절박한 표정을 보았다.
더 이상 고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민예린은 뛰어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승호를 바라보았다.
예린의 얼굴 표정에는 승호의 신변을 걱정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거면 됐어. 민예린. 네가 무사할 수 있다면 나 같은 건…….'
"이 자식아~"
매서운 펀치가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승호의 고개가 뒤로 획하고 넘어갔다.
일방적인 폭행의 시작이었다.
조금 전 까지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던 강길태가 제일 설쳤다.
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승호의 몸이 핀볼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그만둬! 내가 같이 놀아줄게. 노래방 가면 되잖아. 그만둬!"
민예린이었다.
도망가던 민예린이 최승호가 걱정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강길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그래? 야, 애들아. 놓아줘."
강길태의 말에 일진들이 최승호를 놓아주었다.
이들은 벌써부터 얼굴들이 희희낙락이다.
하지만 순진한 민예린은 그들 사이에 뛰어 들어 최승호를 감싸 안았다.
"승호야, 승호야. 야, 정신 차려! 최승호!"
최승호가 눈을 떴다.
"민… 민예린……."
"야, 괜찮아?"
최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강길태가 끼어들었다.
"그 정도 맞았다고 사람이 죽진 않아. 봐, 벌써 괜찮아졌잖아. 네가 재 살린 거야. 그럼 이제 약속을 지키셔야지?"
"뭐, 뭐야? 민예린 너 미쳤어?"
최승호는 정신을 차린 후, 어떤 상황인지를 깨닫고 민예린에게 소리쳤다.
"바보야, 어서 도망쳐. 재들이 어떤 애들인지 알고?"
"워, 워, 그만 하지 않으면 또 날아간다. 최승호, 엉?"
강길태가 최승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긴 것일까?
최승호가 벌떡 일어나 민예린의 손을 잡았다.
"뛰어!"
민예린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손을 잡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예린은 볼을 붉히며 뒤를 따랐다.
"야! 잡아."
뛰어가던 두 사람은 얼마 못가 잡혔고, 최승호는 예린을 자신의 뒤로 보냈다.
곧 일진들이 두 사람을 둘러쌓았다.
"야, 승호. 이 새끼 아직 덜 맞았지?"
최승호의 뺨을 향해 주먹이 날아갔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예린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야, 너 가."
강길태가 다가와 말했다.
"이제 넌 볼 일 없으니까 가! 예린인 우리하고 놀 거야."
"그래, 가. 빙신아. 예린이는 두고."
일진들의 상스러운 욕설과 날아드는 손바닥에 최승호는 연신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예린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햐아, 이놈들 봐라. 재미있게 놀고 있네."
주먹질이 멈추며 모두의 고개가 골목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보였다.
무스를 많이 사용해서 머리를 완벽하게 정돈한 사내, 큰 키에 다부져 보이는 체격,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포스가 느껴졌다.
강길태와 아이들은 약간 찔끔한 기색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자신들은 다섯이고 저쪽은 하나다.
일 대 오, 이 숫자가 강길태로 하여금 약간의 껄끄러움을 이겨내게 했다.
게다가 원래 이곳에 모여 있는 다섯이 전부가 아니다.
같이 PC방에서 모이기로 한 녀석들이 곧 올 시간이었다.
모두 모이면 열둘이다.
이 인원은 아무리 주먹질에 자신이 있어도 한 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강길태는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이봐요. 아저씨. 힘 좀 쓰나 본데 우릴 그냥 동네 양아치로 보면 좀 곤란한데? 괜히 피 보지 말고 가시던 길 가셔."
강길태가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는 혀로 입술을 핥는다.
일종의 기선 제압용이다.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최대한 불량스러운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이규철을 보고 처음에는 조금 주춤했던 일진들도 강길태의 태연함에 곧바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래 우린 다섯이다.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다.
거리싸움에서 불변의 진리인 이 단순한 문구가 이들을 움직였다.
"그건 좀 곤란한데? 내가 아무래도 저쪽 꼬마랑 해야 할 이야기가 좀 있거든."
"……?"
강길태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다.
"야, 가! 예린이는 두고 가!"
강길태의 말에 승호의 어깨를 잡은 민예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호는 예린의 손길을 통해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 예린아.'
"아저씨, 도와주세요. 그러면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해드릴게요."
최승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이규철(?)에게 자수하겠다는 뜻을 돌려서 말했다.
"호오, 뭐든지 한다고?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이규철이 강길태를 바라보았다.
최승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었냐? 도와달라는데?"
이규철의 말은 결국 최승호와 민예리을 모두 데리고 가겠다는 이야기다.
순간 보낼까했지만 부하들이 자신을 보는 표정을 보았다.
이대로 그냥 보내면 가오가 죽는다는 생각에 강길태는 땅바닥에 침을 찍하고 뱉고는 이죽거렸다.
"애들 데리고 가려면, 그쪽 지갑 내놓고 가!"
강길태의 말에 일진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래, 데리고 가고 싶으면 돈이나 내놔. 지갑채로 던져. 키킥킥."
이규철이 천천히 일진들에게 다가왔다.
"돈이야 있지. 요즘 내 주머니 사정이 제법 괜찮거든. 그렇다고 네 놈들 같은 쓰레기에게 쓸 돈은 없지."
뭔가가 움직이는 듯싶더니 일진 한 명의 몸이 뒤의 벽으로 처박혔다.
사방에서 욕지거리가 쏟아졌다.
선글라스를 낀 사내를 향해 남은 일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다구리에 이기는 장사는 없다.
강길태 패거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일진 한 명이 이규철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선글라스 사내는 살짝 고개를 비틀어 피한 후, 상대의 팔을 따라 미끄러지듯 접근했다.
그리고 명치를 팔꿈치로 찍었다.
단 한 방이었다.
그 한 방에 주먹을 날린 일진이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입에서 하얀 거품이 분수처럼 흘러나왔다.
규철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연이어 날아드는 발차기를 잡아채더니, 남아 있는 다리를 발로 후리는 것과 동시에 팔꿈치로 가슴을 찍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일진의 가슴이 함몰되며 뒤로 넘어졌다.
일진들의 공격도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반응은 물이 흐르는 듯 일절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낭비 없는 움직임 그 자체였다.
하나의 공격에 하나의 반격이 이어졌고, 순식간에 네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쓰러진 일진들은 일절의 비명소리도 없었다.
그저 입가에 나와 있는 침과 거품, 뒤집어진 흰 눈동자가 그들의 상태를 말해줄 뿐이었다.
끽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기절한 것이다.
"이… 이 새끼가?"
두 눈이 충혈되고, 분노와 공포가 뒤범벅이 된 강길태는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네모난 쇳덩어리를 누르자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햇빛에 번쩍이는 것이 나이프였다. 선글라스 아래 이규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죽어, 이 새끼야!"
나이프를 휙휙 휘두르며 공기를 갈랐다.
나이프가 선글라스 사내의 얼굴을 향해 횡으로 날아들었다.
최승호가 입을 벌렸고, 민예림은 두 눈을 감으며, 꺅! 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이규철의 양팔이 원을 그렸다.
"으아악~"
비명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강길태였다.
팔은 이상한 각도로 꺾였고, 어깨에는 나이프가 꼽혀 있다.
견딜 수 없는 격통에 비명을 질러대는 강길태를 향해 이규철이 넌지시 말했다.
"이런 놈은 본인이 직접 칼침을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비명을 지르는 길태의 낭심을 걷어찼다.
고통이 한계를 넘겼는지 강길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두 눈은 뒤집어지기 직전이고, 쉴 새 없이 몸을 가늘게 떨며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강길태가 기다리던 친구들이 나타난 것은 때마침 그때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복수니 뭐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공포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어깨에 칼침을 맞고, 팔이 뒤틀린 강길태가 간질병 환자처럼 몸을 부들거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규철은 지렁이가 땅을 기어다니는 것처럼 바들바들 거리는 강길태를 내려다보며 선글라스 아래로 입술을 이죽거렸다.
그런 이규철을 지켜보는 강길태의 친구들은 완전히 기가 죽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났다.
곧 나타날 이들을 믿고 싸움을 걸었던 강길태는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다.
"자, 그럼 우리 할 이야기가 있었지?"
이규철의 잔인하기까지 한 낭심 차기를 눈앞에서 본 두 사람은 얼이 빠졌다.
최승호는 이규철의 말에 그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민예린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낸 후, 두 사람은 인근의 롯데리아로 가서 마주 앉았다.
"너, 어제 미 국방성 서버를 해킹했지?"
이규철의 말에 최승호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너무 그렇게 쫄지 마. 널 잡으러 온 건 아니니까."
"예? 잡으러 온 게 아니라고요?"
"그래."
그제서야 최승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그… 그럼 왜?"
"일단 들어봐~"
"아, 예."
"미국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신 분이 계셔. 내가 모시는 분이지. 그런데 어제 저녁이었어. 내가 그분의 전화를 받은 건."
잠시 뜸을 들인 후, 이규철이 최승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국에서 최승호란 아이가 미국 국방성 서버를 해킹했다고 하더라. 바로 너지."
최승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이야기를 하시는데, 아이큐가 180에 국제 올리피아드 수학 부문 금메달도 딴 녀석이라더군. 한마디로 머리가 엄청 좋은 녀석이란 거지. 하지만 이대로 두면 결국 그 끝이 좋지 못하다는 거야. 평생 미국 감방에서 썩든지. 아니면 평생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노예처럼 부려 먹히든지. 둘 중 하나래. 네 미래가."
이규철의 말에 최승호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등골이 섬뜩했다.
"그… 그 분은 제가 해킹한 걸 어떻게 아셨나요? 혹시……."
"뭐, 그건 나도 모르지. 대충 짐작이 가는 건 있지만, 중요한 건 그분이 알아냈다는 것 아니겠니?"
이규철은 복권 번호를 맞추었던 강혁의 신비한 능력을 생각했다.
"그…그렇죠."
대답을 하는 최승호는 이규철과는 달리 아마도 미국에서 사업한다는 사람이 보안업계의 관계자일거라 생각했다.
지극히 정상적인 추론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는 생각지 못한 반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