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52화
52화
"원래 누굴 돕는 건 몰래 하는 것이 제 맛이야. 래리."
커트가 살짝 윙크를 하며 말했다.
커트의 심장병 어린이 돕기 프로그램은 한국을 시작으로 러시아, 중국, 남아시아, 남미 등 많은 국가들로 확장되었다.
90년대부터는 미국의 의료진을 아동들이 사는 나라로 보내거나, 아동들이 살고 있는 곳의 의료진에게 맡겨 수술을 시켜주었다.
수술을 해야 하는 어린이들의 불편함을 덜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커트 와이엇이 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만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커트 덕분에 새로운 생명을 얻었지."
래리가 말했다.
"그건 또 너무 과찬이군. 생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나는 그저 작은 도움의 손길을 주었을 뿐……."
"커트에게 자녀는 없나요?"
강혁은 커트의 이야기에 놀라면서도 자연스럽게 커트의 자녀들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있지. 모두 세 명이 있어. 손자, 손녀도 여섯 명이나 되지."
아이들에 대해 말할 때 커트의 얼굴은 흐뭇함이 묻어 있었다.
"자선 사업도 좋지만 자녀나 손자 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시려면 돈을 좀 아껴야 하지 않을까요?"
강혁의 질문에 커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유산이라? 이보게 존, 대체 내가 왜 내 자식들에게 돈을 물려주지?"
"……?"
"자식들에게 돈을 유산으로 주는 건, 신이 내 자식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은총에 대한 배신이야!"
강혁은 커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신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요?"
"그렇고말고!"
커트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유산을 물려주는 건 신이 내게 선물로 주신 자식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일이야."
"……!"
충격적인 말이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강혁이 지금의 강혁이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에게 전달되어진 유산은 돈이 아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이유 없는 헌신.
비록 거지일망정,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당당한 삶.
곧 죽어도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단단한 마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은총……."
"그래, 신은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은총을 준비해두고 계신다는 것이 내 믿음이야. 하지만 돈은 말이네. 그런 은총을 파괴시키지. 난 내 아이들에게 적어도 대학공부까지는 시켜주었네. 다음은 자신들의 몫이지. 그 정도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주었다고 생각하네."
커트의 말에는 당장은 모든 것을 100% 다 받아들이기는 힘들어도 뭔가 모를 강력한 힘과 울림이 느껴졌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에요. 가난했던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생겼고요."
"그런가?"
커트가 유쾌하게 웃었다.
커트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래리 부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강혁은 커트와의 만남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요. 래리. 오늘 저에게 저런 분을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하군요."
"그래, 금융계에서 아이언페이스라 불리우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도 평생 저 양반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갔지."
래리가 예전 생각에 잠기며 빙긋이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래리, 은퇴하신 분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저도 재단을 하나 만들었으면 해서요. 꼭 커트가 한 말 때문만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한 번뿐인 인생…적어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재단이라고?"
"가칭으로 홍익 재단이란 이름을 생각해봤습니다. 래리가 이 일을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자네 진심인가?"
래리가 놀라며 물었다.
"예, 래리. 꼭 좀 부탁드립니다."
강혁이 입가에 지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달 후, 첫 시작은 자본금 10억 달러로 강혁이 만든 홍익 재단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래리는 자신도 이 재단에 천만 달러를 기부했고, 이사장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홍익 재단이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가난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전 세계의 고통 받는 어린이들에게 의약품을 무료로 제공하거나 병원 치료를 받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강혁은 커트에게 배운 대로 적게 벌어들인 해는 적게, 많이 벌어들인 해는 많이 이 재단에 기부를 해나가기로 결심했다.
"왠지 내 영혼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 드는군."
강혁은 아틀리에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서 허드슨 강변의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았다.
밤은 깊어가지만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원치 않는 장면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가 되어야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을 것인가?
밤바람을 맞으며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강혁은 서글픈 눈으로 창문을 닫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혁은 이날 밤만은 가족의 죽음을 꿈에서 보지 않았다.
꿈속에서 아내가 피아노를 치며, 딸아이는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강혁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어느 휴일의 정경이었다.
커트와의 만남 이후, 강혁은 재단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익명의 기부를 이어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커트의 인맥들이 강혁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국 주류 사회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커트의 인맥답게 죽을 때가 되서야 돈을 기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평소 공동체에 기여하는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혁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미국의 보이지 않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땅이 넓고, 사람이 많고, 경제와 과학이 발달한 나라라는 것 이상으로 사회 지도층이 가지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느꼈던 것이다.
한국에서 보았던 사회지도층들의 부패와는 결이 다른 모습에 솔직히 감명을 받았다.
'모순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지만, 적어도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와 기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회지도층들의 인식은 정말로 부럽다. 우리나라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혁은 이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일제 강점기 시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조국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잠겼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독립 운동한 사람들의 후손은 3대가 가난을 면치 못하니… 어떻게 나라를 위해 헌신해라,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있겠어. 다 헛소리라고 하지.'
생각해보니, 한국의 기득권 집단은 광복 이후, 재빨리 반공주의 노선으로 갈아타 살아남은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재 정권의 하수인들이 서로 얼기설기 엮여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강혁의 가장 큰 적수이자… 사회지도층의 헌신과 자발적인 기부 등으로 상징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강혁은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가능하다면 한국에 이런 문화가 정착되고, 악이 잠시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혁은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보다 분명한 비전을 가지기 시작했다.
* * *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웨이트리스 복장을 한 젊은 여성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맑은 젊은 여성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러 퍼졌다.
"……."
수화기 너머로 상대방이 아무런 말이 없다.
젊은 웨이트리스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요즘 부쩍 이런 전화가 늘었네?"
"무슨 전화? 아무 말도 없는 전화?"
같은 또래로 보이는 웨이트리스가 물었다.
"응, 장난 전화인가 봐."
"나도 한두 번 받았어. 무시해."
"그래."
두 젊은 여성은 거실을 청소 중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청결한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수시로 집을 청소했다.
거실이 정리되자 두 사람은 곧 서재로 이동했다.
그곳에도 정리하고 청소해야 할 곳이 많았다.
두 사람이 서재로 이동하자 어딘가에서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거실로 걸어왔다.
레이스가 달려 있는 고급스런 아동복을 입었다.
한껏 치장을 한 여자아이의 목에는 십자가로 된 금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여자아이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올라갔다.
이 집으로 온 후, 거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소파에 몸을 반쯤 기대자 커다란 소파 안에 여자아이의 몸이 폭 빠져들 정도였다.
무료한지 졸린 듯한 눈이다.
여자아이는 소파에 기대어 거실에 있는 예쁜 꽃들과 그림들을 감상했다.
언제보아도 아름다운 꽃들과 그림이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여자 아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반응하듯이 수화기 너머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있었니? 이세라.
낯익은 목소리에 여자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얼굴빛이 변했다.
"혹시? 그때 그 오빠?"
―맞아, 그동안 잘 있었니?
"응, 오빠 덕분에 잘 있었어. 멋진 고모님도 만나고. 예쁜 옷이랑,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오빠한테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정말 잘 되었구나. 정말 잘 되었어.
수화기 너머로 남자 아이의 목소리가 기이한 울림을 가지고 이세라에게 전달되었다.
이세라는 언제나 눈치가 빨랐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경험을 한 덕이다.
지금 이 남자아이가 자신의 목숨 줄을 거머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이다.
"오빠, 왜 이제야 전화했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랬어? 그건 좀 미안한데. 사실 내가 좀 바빴거든.
"그래? 그럼 앞으로는 자주 전화해줄 거야?"
―하하, 그건 미안한데? 지금은 우리 모두 자주 연락하기는 좀 어렵겠구나. 하지만 앞으로 몇 년만 기다리면, 좀 더 자주 연락할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럼 그때가 되면 자주 연락해줘야 해?"
―약속하지. 그럼 그때까지 잘 지내. 이세라.
신상현이 전화를 끊었다.
아이는 잠시 수화기를 들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내 이름은 이유라야. 오!빠!"
천사 같은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화를 끊은 신상현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회귀 전 자신의 약혼자였던 여자를 손아귀에 쥐고 농락하는 재미가 상당했던 것이다.
"똥줄 좀 탈거다. 이세라."
신상현은 회귀 전 처음으로 이세라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신상현은 25살의 대기업 상무였고, 이세라는 신상현의 약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