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53화
53화
"무슨 생각해요?"
"응? 아무것도."
키가 182cm 쯤 되어 보이는, 미청년이 와인 잔을 들고 파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한참 뜨고 있는 신인 배우 민수린이 서 있었다.
육감적인 몸매에 특히 눈이 예쁜 여배우다.
예쁜 드레스에 오늘을 위해 한껏 힘을 준 화장과 화려한 장신구들.
과연 여배우라고 할 만한 클래스를 발휘하며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화려한 후광을 발휘하고 있다.
"저랑 만나는 거 싫으세요? 전 좋은데……."
"나도 싫진 않아. 하지만 오늘은 좀 삼가고 싶군."
청년이 민수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앞머리를 살짝 내린 댄디 컷 스타일에, 산등성이처럼 날렵하고 매끈한 턱선, 버터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 간혹 보이는 공허한 눈빛.
드라마 속 한류스타를 보는 것 같은 미모의 남자.
그를 아는 여자라면 누구든 한 번에 무장해제해버린다는 청년의 고혹적인 모습에 민수린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청년의 이름은 신상현.
재계 서열 1위인 삼강 그룹의 후계자이다.
"왜, 왜요?"
"오늘은 내 약혼자와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가볍게 웃으며 윙크를 날리며 자리를 뜨는 신상현의 뒤에서 민수린은 홍조 띤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약혼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상현이 남긴 매혹적인 미소의 여운을 즐겼다.
'약혼자라고? 흥 상관없어. 재력, 능력, 외모 삼박자를 갖췄잖아. 세컨드건 뭐든 상관없어. 그러니 내 사다리가 돼달라고요. 젊은 상무님.'
신상현은 파티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자기 자리로 지정해 놓은 테이블까지 이동했다.
그가 자리를 잡자 어느새 부나방처럼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둘러쌓다.
"어이, 상현이."
"왔냐?"
신상현의 옆으로 다가온 남자의 키는 178쯤 되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류층인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런 양복을 입고 있다.
팔목에는 부의 상징이라 불리는 롤렉스시계를 차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박광욱.
십대 그룹 중 하나인 매그너스 그룹의 삼남이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그의 두 형은 이미 그룹의 실세로 높은 자리를 꿰찬지 오래였다.
박광욱은 두 사람이 먹고 남은 작은 회사 한둘에 만족해야 할 처지였다.
지금은 어떻게든 더 올라가 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삼강그룹의 후계자인 신상현은 반드시 잡아야 할 동아줄이었다.
"야, 하지 마."
박광욱의 말에 신상현은 의아스런 눈빛을 보냈다.
"가끔씩 보여주는 그거. 여자들이 환장을 하더라."
박광욱의 말에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광욱이 말이 맞아. 네가 한 번씩 그런 눈빛을 지으면, 여자들이 정신을 못 차린다고."
"야, 저번에 내가 모임에 데리고 왔던 걔 있잖아."
"설수진?"
설수진은 최근 성공적으로 방영을 끝낸 한류 드라마의 서브 여주인공이다.
아직 연기력은 부족하지만 여주인공보다 오히려 미모가 뛰어나 드라마 방영 동안 많은 남자 팬들을 얻었다.
차기작에서는 주인공으로 발돋움 할 것이 분명하다고 소문난 라이징 스타다.
"모임 마치고 나서 걔가 상현이 이야기만 해서 기분 잡쳤었다고."
"훗, 진짜 좋아하는 애가 생기면 상현이 한 테는 보여주면 안 되는 거 몰랐냐?"
"흥, 가볍게 만난 거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그의 추종자들이 떠들어 되는 소리에 신상현은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도 알고 있었다.
곱상한 외모에 가끔씩 보여주는 공허한 눈빛에 여자들이 환장한다는 이야기다.
신상현으로서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그가 일상에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실상 그의 감취어진 살인 욕구 때문이니 말이다.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반대의 입장에 서서 공포에 떠는 약자들을 살육할 때의 폭식자의 감각.
살육의 감각.
그때 느껴지는 폭발적인 엔돌핀의 향연.
한 번 중독되면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출 수 없는 살인의 욕구.
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어서 생기는 공허이니 말이다.
그래서 여자들을 무장해제하게 만든다고 친구 놈들이 상찬하는 예의 공허한 눈빛은 사냥 현장에서는 오히려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생생한 활력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사냥꾼의 눈동자가.
"설수진은 그렇다 치고, 민수린이 꽤나 적극적이던데. 넌 어때 생각 있냐?"
"글쎄다, 난 영~ 그런 건 안 맞는 것 같아서 말이야."
"크~ 이 자식. 우리 영감님이 들으면 좋아할 말만 하는구나."
강동현이 한숨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재계 서열 20위인 KJ그룹의 차남으로 여자 문제로 어른들 속을 꽤나 썩였다가 일 년간 외국으로 유배를 당했던 경험이 있다.
"야, 너 좋다는 애들이 빗자루로 쓸어 담아도 될 정도인데, 그 중에서 한둘은 레이더에 걸려들지 않디?"
"글쎄다. 어차피 난 약혼자가 있어서 말이야."
"아직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약혼자 말이지?"
"오늘 볼 거야."
"어? 그래?"
상현 주변의 남자들이 술렁였다.
신상현의 약혼자는 재계 서열 3위인 TG 그룹의 영애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란데다가 국내에 있을 때에도 재벌3세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어서 얼굴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여기에 몇 년 전부터 묘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상현이 너, 소문은 알고 있지?"
"에이, 뜬소문이야. 광욱이 넌 그걸 믿냐?"
"뭔데? 요조숙녀로 소문난 TG가문 영애에게 가십이 있다고?"
"그런 쪽은 아니고. 어릴 때 보육원에서 컸다는 소문이 잠시 돌았어."
이야기를 꺼낸 강동욱이 말했다.
"보육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실인가 보더라."
상현의 갑작스런 말에 재벌3세들이 입을 닫았다.
"그… 그래도 괜찮냐?"
"과거가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아니냐?"
"그, 그건 그렇지."
"마침 오네. 저기."
파티장 안으로 묘령의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눈에 띠는 미모였다.
코랄베이지 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빛났다.
어깨너머까지 옆으로 자연스럽게 웨이브 치며 로맨틱하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섹시한 자태와 잘 어우러지며, 화려한 그녀의 미모를 한껏 돋보이게 만들었다.
"저거 아르멩이 직접 제작한 그 드레스잖아?"
"맞아, 세계에서 세 벌밖에 없다는…… 저 여자 대체 누구지?"
여인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긴 머리를 예쁘게 올린 묘령의 여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신상현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처음 뵙는군요. 약혼자씨."
"어른들끼리 정한거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그게 법이니. 약혼자 맞네요."
신상현이 추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미리 예약해 놓은 자리로 이동했다.
뒤에서 쏠리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세팅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다시 인사하죠. 이유라라고 해요."
"신상현입니다."
상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상당히 적극적이시군요. 좋은 의미로 말한 겁니다."
"훗, 제가 좀 그래요. 우물쭈물하는 건 질색이거든요."
이유라의 말에 신상현은 살짝 웃으며 상대를 관찰했다.
'뭐지? 이 기묘한 느낌은? 마치… 그래. 흠.'
신상현은 묘한 느낌에 이유라를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상대도 뭔가를 느꼈는지 눈빛이 묘하다.
'뭐야? 이 남자?'
이유라는 전신을 자극하는 묘한 느낌에 왠지 자리가 불편해졌다.
"오늘은 제가 일이 있어서 짧게 얼굴만 보게 되었지만, 다음에 정식으로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하죠."
신상현이 짐짓 미안한 기색을 내었다.
"아니요. 저도 그쪽 바쁜 거 아는 걸요. 오늘도 사업상의 필요 때문에라도 재벌3세 모임에 얼굴을 비추어야 해서였죠?"
"아시겠지만 제가 상무자리에 오른 지 얼마 안됐거든요."
"알고 있어요. 형님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의대 공부 중에 그만두고 오셨다고……. 그래서 후계자 수업 때문에 바쁘신 거고."
신상현에게는 원래 적자인 나이차 많이 나는 형님이 있었다.
6개월 전 출장지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기 전까지는 그가 그룹의 정식 후계자였다.
이미 오래 전에 일선에서 물러난 회장님을 대신해서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상현은 이유라와 첫 대면이라 나름 신경을 썼다.
일이 있다고 양해를 구해놓은 상황이지만 예정보다 30분을 더 지체하면서 이유라를 상대했다.
이유라 역시 그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자신과의 만남을 성사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웃으며 그를 놓아주었다.
"더 지체하시면 제가 나중에 원망을 듣겠는걸요? 이제 그만 가보세요."
이유라의 말에 신상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의 결례는 다음번에 꼭 보상해드리지요. 아무쪼록 좋은 시간되시길."
이유라에게 인사를 하고 파티장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에는 파란색 벤틀리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 어디선가 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그는 피식하고 웃었다.
"후훗, 깼나? 이제부터 우리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자고, 한세희씨."
그의 말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자동차 트렁크에서 탕탕거리는 소리가 더 거세졌다.
신상현은 그런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건 그렇고. 하필 이름이 이유라라니? 진짜 강혁 그 형사랑 나랑 뭔가 있기라도 한 건가? 묘한 대목에서 계속 엮이는군.'
신상현은 갑자기 짜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 자신이 죽인 강혁의 아내 이름이 이유라였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몇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분명히 강혁 형사와 결혼했던 그 여자. 고아였어. 그렇다는 말은 역시 고아원이나,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이야기지. 설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신상현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상현이 파티장에서 빠져나가자 재벌 3세들과 그들과 함께 온 파트너, 신흥재벌 등 인맥을 넓히기 위해 파티에 참가한 셀럽들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이유라에게 향했다.
그녀의 옆으로 박광욱이 마티니 한 잔을 들고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박광욱이라고 합니다. 상현이가 먼저 가면서 제게 심심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갔습니다."
박광욱이 마티니를 건네자 팔을 내밀어 받아들었다.
"이유라라고 해요. 상현씨는 듣던 대로 매너가 좋은 남자인 것 같군요."
"뭐, 반년 전까지만 해도 의대생으로 지내면서 공부만 했는걸요. 재벌 3세치고는 여기 물이 거의 안든 바른 생활 사나이죠. 이 약혼 잘하신 겁니다."
박광욱의 너스레에 이유라가 웃었다.
그녀의 목에는 십자가 모양의 금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세계에서 3벌밖에 없는 드레스를 걸친 공주님이 하기에는 수수해 보이는데?'
박광욱의 의아한 표정을 보았는지 이유라의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좀 수수하죠. 이 목걸이?"
"아, 아뇨. 아주 잘 어울립니다."
"후훗, 앞으로 광욱씨 말은 걸러서 들어야겠는걸요? 저도 잘 알아요. 그렇게 값비싼 목걸이는 아니죠. 하지만 제게는 소중한 목걸이랍니다."
이유라의 말에 박광욱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뭔가 사연이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뭔가 사연이 있는 물건 같네요?"
유라는 목걸이를 매만지며 잠시 추억을 회상하는듯하더니 광욱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