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54화
54화
유라의 말에 박광욱은 TG그룹의 장남이 오래 전 부모와의 불화로 연을 끊고 지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차,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맞아. TG그룹 장남이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이유라가 그분의 외동딸이 되겠군. 이거 상현이 말마따나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게 사실일지도.'
유라와 대화를 나누며 광욱은 닳고 닳은 여자와는 다른 순진한 유라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광욱은 예의 화려한 화술을 자랑하며 유라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광욱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순수하게 반응하는 유라는 꽤나 즐거운 대화 상대였다.
광욱이 건네 농담에 이유라가 까르르거리며 웃었다.
청순 발랄한 모습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상현이 자식. 복 받았네. TG그룹 상속녀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예쁘고 순진하기까지 하잖아.'
박광욱은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슬그머니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를 이유라는 슬쩍 바라보았다.
'훗, 표정을 보니 거의 넘어왔네.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어. 그건 그렇고, 신상현 걘 뭐야? 진짜 순진한 재벌 3세?'
이유라는 상현을 떠올리자 이유 없이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했다가는 큰 코 닥칠 여자였다.
'흥, 뭔 진 몰라도 내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면…….'
이유라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 * *
[재계 서열 3위 TG그룹의 상속녀. 오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 재벌 3세들의 친목 모임에 참여하자마자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오르다.]
주로 연예계나 스포츠 스타, 재벌3세와 셀럽들의 동향에 대해 가쉽성 기사를 올리는 유명 유튜버의 방송에 이유라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
개인방송이지만 30만 명 이상의 구독자가 있는 채널이라 나름 사람들 사이에 이유라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고, 다양한 댓글들이 올라왔다.
[세상에 이 옷 진짜 예쁘다! 얼마정도나 할까?]
[모르긴 해도 억대는 할 듯.]
[드레스 한 벌에 억? 진짜 억소리나네.]
[음, 억대는 좀 오버고. 수천 만 원 정도는 할 것 같네요.]
[아니 무슨 자동차도 아니고, 옷 한 벌에 무슨.]
[그렇죠? 비싼 건 사실이겠지만 억대는 너무 오버인 듯.]
[그래도 세계에서 세 벌밖에 없는 옷이라던데요?]
[사고 싶어도 못 산다고 들었어요. 아르멩이 직접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흠, 그렇다면 진짜 그 정도 할지도.]
[헐, 그럼 외제차 한 대 값을 걸친거네?]
[님들, 그건 약과고 이 상속녀. 약혼자가 무려 삼강그룹 후계자라는데 그게 더 대박 아님?]
[크~ 재계 1위와 3위 상속자들끼리 정략결혼인가?]
[흠, 그냥 직계 가족끼리의 결혼도 화제가 될 만한 이야기지만 두 사람은 모두 직접 그룹을 물려받는 걸로 알려졌는데 그러면 두 그룹이 합병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걸요?]
[흐흠, 꼭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두 그룹이 하나로 합치지 않아도 두 사람의 결혼만으로도 시장에 주는 메시지가 크잖아.]
[맞아. 내일 주식시장 동향이 볼만 하겠어.]
[그런데 님들, 그거 앎? 상속녀가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소문이 있음.]
[뭐? 그게 무슨 소리?]
[얼레? 댓글이 사라졌네?]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댓글이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댓글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 *
TG그룹 본사 빌딩 내 위기관리팀.
"모두 한순간도 긴장 늦추지 말아요. 만일 밝혀야 하는 시점이 온다면 그건 우리 쪽에서 먼저 밝혀야 합니다. 내 말 명심해요."
"예, 팀장님."
블랙에 흰 와이셔츠, 스트레이트 핏의 바지정장 차림, 모델처럼 날씬한 체형.
얼굴에는 고집과 단호함이 느껴지는 커리어 우먼의 말에 양복을 걸친 십여 명의 성인남녀가 일제히 복명했다.
짝짝짝!
"우리 오 팀장 없으면 우리 TG그룹 시가 총액이 얼마나 손해를 볼까?"
"이사님."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오 팀장이라고 불리는 여성에게 다가와 그녀를 격려했다.
목에는 스카프를 걸치고, 가슴에는 중앙에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달았다.
입고 있는 옷도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것이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수제 정장이다.
오 팀장이라 불린 여성이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그녀의 옆에 섰다.
"오 팀장, 내가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지?"
이소윤 이사의 말에 오 팀장은 커다란 노란색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데 이소윤 이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 팀장, 보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팀장의 똑 부러지는 말투에 이소윤 이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봉투 안의 내용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먼저 알기 전에는. 서류 봉투를 건넨 오 팀장조차도 내용을 알지 못했다.
* * *
이소윤.
올해 52살인 그녀는 TG그룹의 상속녀인 이유라의 고모다.
지금은 죽은 이유라의 아버지. 이유성의 하나 밖에 없는 누나다.
동시에 이유라의 후견인이며, TG그룹의 대주주로서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녀는 그룹 회장인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마자 곧바로 동생 부부의 행방부터 찾았다.
평생 독신을 고집해왔고, 앞으로도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보다는 장래에 그룹을 이끌 후계자로 동생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오래 전 결혼 문제로 아버지와 절연하고 집을 나갔다.
이소윤은 눈앞의 서류봉투를 바라보며 오래 전 일을 떠올렸다.
"뭐? 유성이가 죽었다고?"
"예, 사실입니다. 여기 당시 사고 현장을 찍은 사진입니다."
TG그룹 직속 오너 가족 담당의 위기관리팀 조사원이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완파된 자동차와 피를 흘리며 실신한 상태의 이유성과 처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사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찍은 사고 직후의 사진입니다."
"아이는? 아이는 어떻게 됐어?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무래도 사고 당시 차를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당시 사고를 조사했던 경찰은 사고 차량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사건을 종결한 것 같습니다."
"뭐야? 그럼 유성이 아이를 잃어 버린 거야?"
당시 동생의 딸이 사고 당시 실종된 것 같다는 조사원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미 사고로부터 몇 년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기에 실종된 조카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 들어요."
"예, 전무님."
"우리 TG그룹의 정통한 상속자가 될 아이에요. 얼마나 돈이 들어도 상관없으니 반드시 내 조카딸을 찾아내세요."
"알겠습니다."
조사원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TG그룹의 위기관리팀은 삼강그룹이 국정원 계통의 사람들이 많은 것과 달리 경찰 계통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일에는 좀 더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기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기대를 걸었다.
"벌써 18년이나 지났나?"
당시의 일을 회상하던 이소윤은 노란 서류 봉투를 응시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봉투를 개봉하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었다.
봉투 안에는 몇 가지 서류가 들어 있었다.
서류를 살펴보는 이소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대체 어디서, 어디서 잘못된 거지?"
서류에는 이유라와 자신의 유전자 검사 결과 친족이 아닐 확률이 99% 이상이라는 결론이 적혀 있었다.
"유라가 내 조카가 아니라고? 그럼 대체 그 애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소윤은 큰 충격을 받고 몸을 의자 뒤로 눕혔다.
이유라는 조사원이 준 정보를 확인하고는 자신이 직접 보육원을 찾아가 찾아낸 아이였다.
당시 보육원에는 자신의 조카와 같은 이름, 같은 나이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동생에게 물려준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엉뚱한 아이를 찾았다니. 아아, 이를 어쩌지?"
이소윤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이유라를 발견한 후, 더 이상 자세한 확인은 하지 않았다.
TG그룹과 돌아가신 아버지와 동생 부부의 위신을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내밀한 가족의 일을 가십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소윤은 당시 보육원에 사실을 밝히지 않고, 단순히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했던 일을 후회했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이라도 밝혀야 해. 유성이 아이를 찾으려면."
이소윤은 전화기의 호출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이사님.
"박철우, 5년 전쯤 퇴사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을 찾아서 내 앞에 데려다 놓아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3일 후, 이소윤은 이제는 퇴직한 옛 부하를 만날 수 있었다.
머리는 희끗하고, 이마에는 주름도 제법 많이 졌다.
겉으로 보면 이제는 제법 나이가 든 은퇴한 중년 남자지만 노련한 민완 형사 출신이다.
지금도 일반인 한두 명은 능히 상대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절 찾으셨다고요. 전무님. 참 지금은 일을 내려놓으셨다고요."
"그룹일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지금은 이사가 됐어요. 사실 나보다 잘해요. 진작 그럴걸."
거침없는 말에 박철우는 빙긋 웃었다.
"이사님다우십니다."
나이가 든 박철우는 희끗거리는 흰머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젊은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이소윤은 감회가 새로웠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죠. 18년 전 제가 시킨 일 때문에 불렀어요."
이소윤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18년 전이라? 제가 기억하는 한 이사님이 제게 직접 일을 시키신 건 몇 건 없었죠. 그리고 그 중에서 18년 전의 일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박철우의 말에 이소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엿보였다.
"조카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박철우의 말에 이소윤은 한동안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애를 잘못 찾은 것 같아."
이소윤의 말에 박철우 역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고개를 똑바로 든 그는 이소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두 번 세 번 확인한 일입니다. 조카님의 이름은 이유라, 당시 나이는 8살, 사고 장소에서 3km 떨어진 과수원 농가 주인에게 발견되었고, 인근의 보육원에 보내졌습니다. 보육원의 이름은 소망 보육원. 원장 수녀님이 적은 운영비로 힘겹게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죠."
박철우는 당시 조사했던 내용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비밀리에 DNA검사를 했어요."
"그 말씀은?"
"불일치가 나왔어요. 나와 친족관계일 수가 없더군요."
"……!"
잠시 침묵하던 박 조사관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