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55화 (55/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55화

55화

#15장 이세라

"당시에 DNA 검사를 하지 않았던 이사님이 지금에 와서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까?"

박 조사관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이소윤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어릴 때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크면서부터 한번씩 유성이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걸리기 시작하더군요. 외탁을 했나 싶었지만… 불현 듯 불안감이 엄습해 왔어요. 나이를 먹으면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진다잖아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의 하나를 생각해서 해본 건데……결과를 보고 한방 맞은 느낌이에요."

이소윤의 말에 박 조사관은 그제야 수긍이 갔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DNA검사를 했어야 했다.

누구보다 일에 철저하고, 냉철한 철의 마녀가 이상하게 옛날부터 남동생의 일에는 감정이 앞서곤 했던 것이다.

"이 일을 부탁할 수 있는 건 박 조사관밖에 없어요. 대체 당시에 그 보육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이유라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아이가 우리 어머님이 유성이에게 물려준 목걸이를 하고 그 보육원에 있었는지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우리 유라를… 찾아주세요. 부탁해요. 박 조사관."

이소윤의 간곡한 부탁에 박철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일이 이렇게 어긋난 것에 대한 자책감이 더해지며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박철우가 자리에 일어나 방을 나가자 이소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소윤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박 조사관에게 조카의 행적에 대한 조사기록을 받아들고, 운전사를 시켜 서울에서 멀리 남해까지 내려갔다.

이유성이 남해로 가족여행을 떠났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이유라의 행적은 사고 지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해는 이유라가 5살. 그때로부터 3년이 지난 후였다.

"영감탱이가 인간성이 글러 먹었어. 고집 센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다 자란 아들내미가 사고로 죽었는데도 피붙이가 살아서 보육원에 있는데도 찾을 생각을 안 하다니. 이러니 내가 결혼을 안 하고 독신주의자가 됐지. 내가 이렇게 된 데에 영감탱이 지분이 5할은 넘을 거다. 아마."

자가용 뒷자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씹어대며 남해로 향한지 5시간.

안전을 위해 서행한 탓도 있지만 국도로 진입한 후부터 구불구불 한참을 돌아 들어가는 시골길의 특성 탓도 있었다.

직접 운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장거리 이동은 이소윤으로서는 자주 경험하는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이렇게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일이라면 자신이 아니라 남이 했던 것이다.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전무님."

"김 비서. 저쪽에서 좀 세워주겠나?"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머리가 아파서 그래. 잠시 바람이라도 세어야겠어."

"예, 전무님."

보육원 정문에 도착하기 3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차에서 내린 이소윤은 차가운 바람을 쐬기 위해 걸어서 조금 떨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 놓여 있는 평상으로 걸어갔다.

"휴, 살 것 같다. 유성이 애는 뭣 하러 이런 곳까지 내려와서는. 쯧."

먼저 간 동생을 타박하며 이소윤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떠다니는 구름이 동생의 얼굴처럼 보였다.

"알았어. 이것아. 내가 내 조카 유라. 꼭 찾아서 잘 키워줄게."

한숨 돌리고 있는 사이, 차에서 내린 김 비서가 이소윤에게 시원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이거라도 드시죠. 전무님."

"고마워. 김 비서."

차가운 음료를 머리에 대고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이소윤의 눈에 여덟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띠었다.

예쁜 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어딘지 오래된 느낌이, 보통 집 아이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인근에 제대로 된 인가는 없었다.

'보육원 아이인가? 그런데 왜 혼자지? 꽤 예쁘게 생겼네.'

유심히 아이를 바라보던 이소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아이가 노는 양을 바라보던 이소윤의 눈망울이 커졌다.

아이의 목에 어디서 많이 보던 십자가 목걸이가 보였던 것이다.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가 동생에게 남겼던 유품이다.

"얘, 잠깐만 아줌마 좀 보자."

고개를 돌려 이소윤을 바라보았던 아이의 눈망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이소윤은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이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네 이름이 뭐니?"

"이름요? 이유라. 이유라에요."

"그, 그래? 그럼 너 올해 몇 살이니?"

"8살이에요."

"그……그래?"

이소윤은 그길로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보육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신고할까봐 나중에 비서를 보내서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일은 18년간 잊고 살았다.

결과적으로 보육원에는 가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유라야, 넌 대체 누구니?'

이소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조카라고 믿고 있던 아이를 떠올리자 온몸에 오한이 느껴졌다.

"뭐라고요? 소망 보육원이 불에 타 전소되었다고요?"

박 조사관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벌써 5, 6년 전 일인데 왜 그러시오?"

보육원이 있던 자리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혹시 이전했나 싶어 보육원 터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부에게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들려온다.

"소망 보육원 관계자 중 연락이 닿는 곳이 혹시 없으십니까?"

"보육원에 화재가 나면서 그만 화를 당하신 원장수녀님이 알로이시아 수녀회 분이셨어요. 그쪽에 연락해보면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님."

박 조사관은 전소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보육원 터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5년 전에 일어난 화재라. 경찰서부터 찾아가 봐야겠군.'

경찰서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박 조사관의 마음에 뭔지 모를 돌덩이 같은 것이 올라간 느낌이었다.

'5년 전이라면 내가 퇴사했던 해로군.'

박 수사관은 수소문 끝에 당시 화재 현장을 조사했던 경찰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 화재로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군요."

"예, 그렇죠. 사람만 겨우 빠져나왔으니까요. 뭘 찾는지는 몰라도 문서로 된 건 하나도 없는 걸로 압니다."

"전산 기록 같은 건……?"

"기부 받아서 사용하던 오래된 PC 같은 게 하나있었는데, 화재로 다 타버렸으니, 남아 있는 전산기록 같은 것도 없을 겁니다."

"……."

당시의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병원에서 돌아가신 원장 수녀님 외에는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당시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은 다른 시설로 옮겨졌다.

교사로 일하던 젊은 수녀 한 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교구로 옮겨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젊은 수녀님이라. 18년 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단서는 모두 끊어진 셈인가?"

발걸음을 돌리는 박 수사관의 마음은 갈수록 더 무거워져갔다.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모든 단서가 사라졌다.'

박수사관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마음속에서 뭉게구름처럼 의혹이 솟아올랐다.

그의 얼굴에 단호한 표정이 어렸다.

며칠 후, 박 수사관은 마침내 당시 보육원에서 일했던 수녀님을 만날 수 있었다.

"소망 보육원에서 교사 일을 맡았던 적이 있죠. 원장 수녀님이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마리아 수녀는 성호를 그었다.

"당시 일을 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화재가 난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런 쪽으로는 특히나 주의를 기울였었거든요. 아이들이 실수로 불을 저질렀나 싶기도 했지만, 경찰에서 방화는 아니라고, 결국 단순 실수 쪽으로 결론이 났어요."

"그렇군요."

박 수사관은 오른손 검지를 툭툭 허벅지에 두드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그럼, 당시 기록들은 모두 사라졌겠군요."

"예? 아뇨. 저희들은 화재가 나기 오래 전부터 옛날 기록들까지 모두 전산화 시켜 놓았어요."

"……?"

"알로이시오 수녀회 본부에 모든 자료를 백업해서 올려놓았으니 찾으시는 아이가 있다면 거기에 기록이 남아 있을 거예요."

박 수사관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아 수녀의 손을 잡았다.

"복 받으실 겁니다. 분명히."

머리가 희끗거리는 중년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리아 수녀는 당황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찾는지 모르지만 꼭 찾으시길 기도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수녀님."

뜻밖의 정보에 돌아서 나가던 박 조사관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저기 혹시 18년 전에 이유라라는 여자아이가 보육원에 있었다는데 혹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나요?"

"유라? 18년 전의 유라라면……성인이 되어 저희 보육원에 온 적이 있어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원장 수녀님이 얼마나 반가워하셨는데요. 형사랑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산다고."

"결혼? 형사?"

"혹시 찾는 사람이 이유라씨인가요? 그런데 어쩌죠. 안 좋은 일로 몇 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어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죽었다고요?"

돌아서 나가려던 박 조사관은 마리아 수녀와 한참을 정체불명의 이유라에 대해 오랜 시간에 걸쳐 물었다.

"그러니까. 18년 전 보육원에 있었던 이유라라는 분이 성인이 되어 다시 찾아 왔는데, 당시에는 이미 결혼을 해서 딸 하나를 두고 있었고, 원장 수녀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찾아 왔었다는 말이죠."

"예, 장례식 때 남편분과 함께 왔었어요. 그러고나서 몇 년 후 안 좋은 일로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저도 마음이 참 안됐었는데."

"저기… 혹시 18년 전 소망 보육원에 또 다른 이유라가 있지는 않았나요?"

박 조사관의 물음에 수녀는 고개를 꺄웃거렸다.

"그런 소린 듣지 못했는데? 하지만 자료가 모두 남아 있으니 확인이 가능할 겁니다. 당시에 원생들 수도 많지는 않았고요."

"그… 그렇군요. 혹시 당시에 남아 있는 사진 같은 것도 있을까요?"

"아이를 찾아서 몇 년 후라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저희들은 사진자료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모두 디지털 작업을 해서 보관해 놓았으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생각 이상으로 수녀회의 일처리가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는 사실에 박 수사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만일 진짜 이유라를 찾게 되면 수녀회에 큰 기부를 해야 된다고 건의할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럼 여러모로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수녀님."

"아니에요. 조심해서 살펴가세요. 박 조사관님."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눈 박 조사관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수녀원을 빠져나왔다.

며칠 후 TG그룹 본사 이사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소윤 입니다."

―접니다. 이사님.

"박 조사관!"

처음 전화를 받을 때는 무미건조했던 이소윤의 목소리가 박 조사관의 전화에 활기를 띠었다.

―직접 만나 뵙고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화로 이럴 필요 없이 이쪽으로 오면 되지 왜?"

―그쪽은 보는 눈이 많아서요.

"……? 그게 무슨?"

―조카님을 너무 쉽게 보시면 안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