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56화
56화
박 조사관의 말에 이소윤은 멈칫거렸다.
이소윤이 누구인가?
TG그룹의 대주주이자, 상속녀인 이유라의 후견인이며, 지금 그룹을 이끌고 있는 CEO들도 모두 이소윤이 직접 데리고 온 사람들이다.
그녀의 입김은 그룹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제 20대에 불가한 조카를 조심하라니.
TG그룹의 상속녀라고는 하지만 그룹에 대한 장악력과 위상을 생각하면, 박 조사관이 너무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딸처럼 생각하며 키워온 이유라가 오랫동안 자신을 속여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윤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 * *
3일 후, TG그룹 본사 임원 회의실.
"회장님, 이소윤 이사님이 정말로 모든 주식을 아가씨에게 양도하고, 해외로 출국하셨다는 겁니까?
"음, 사실이야. 내가 직접 아가씨께서 보여주시는 주식 양도 증서와 출국 메시지를 확인했어."
TG그룹을 이끌고 있는 CEO 최 열은 당혹스러워하는 임원들에게 이소윤 이사의 갑작스런 해외 출국과, 그동안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회사 주식을 이유라에게 넘겼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임원들은 결국 이유라가 하루아침에 기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주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있는 이사실을 비워드리고, 새 주인이 들어올 수 있게 인테리어 싹 새로 해서 바꿔드려. 명실 공히 우리 그룹의 주인이야. 누가 방문해도 부끄럽지 않도록 세련되고 기품 있게. 알겠어?"
최 열의 말에 비서진들이 고개를 숙이며 지시사항을 직원들에게 전달했다.
CEO 최 열은 누구보다도 이소윤 이사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소윤 이사가 전무시절 직접 발탁하여 회장 자리까지 올린 인물이니 그 충성심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사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야. 어떻게 모든 걸 내려놓고 그렇게 홀연히 떠나실 수 있는지."
TG건설 사장 이호창의 말에 최 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사님이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지. 지금 중 어느 하늘 위를 날고 계시려나."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그러신지 아가씨를 그렇게 이뻐하시더니. 결국은 모든 걸 물려주고 가시는군요."
"우리가 이사님의 몫까지 아가씨를 보필해서 이사님이 돌아오시면 부끄럽지 않게 합시다."
TG전자 사장이 단호한 얼굴로 말하자 그룹 계열사 사장 일동 그 말에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재벌 기업과 달리 오랫동안 윤리 경영을 주창해왔다.
해당 업무에 능력 있는 인물들을 CEO로 발탁해온 TG그룹은 사장단 대부분이 이소윤이 발탁한 인물들이었다.
이소윤이 내린 결정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것으로 TG그룹은 무사히 아가씨 손에 들어왔군.'
회의석에 앉아 있는 기라성 같은 임원들을 바라보며 정장을 입은 보좌진들 사이에 서 있는 오 팀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임원석을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다 당신 잘못이에요. 이사님. 내 능력을 인정한다고 하시면서 계속 이 바닥에 처박아뒀으니 말이죠. 난 저들 못지않게 잘해낼 능력이 있다고요.'
그녀의 눈은 이미 그룹의 노란 자위, 사장직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욕망어린 눈빛 위로 탐욕스런 꿈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 *
이소윤 이사는 박 수사관의 전화를 받으며 그날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알았어요. 어디서 만날까요."
"신라 호텔 3303호 시간은 오후 3시입니다. 이사님께 꼭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말해주긴 곤란한 일인가요?"
"말로만 해서는 선뜻 믿기 어려우실 겁니다. 이사님."
"그럼, 시간을 좀 늦춰줘. 3시에는 중요한 미팅이 있어."
"그럼. 아예 업무를 모두 마치시고 저녁에 만나죠. 8시는 어떻습니까."
"알았어. 그렇게 하지."
박철우와의 전화를 끊고 이소윤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지금의 이유라가 친조카가 아니라고 해도 오랫동안 키워왔던 정이 적지 않은 아이였다.
자신의 피붙이가 아니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내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랜 세월 그녀를 자기 친딸처럼 키워오지 않았는가?
이소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사실 확인부터. 나머지는 나중에."
이소윤은 자신의 업무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3시까지는 1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30분가량 시간이 남을 정도의 거리였다.
이소윤은 남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늦는 것보다는 빠른 것이 좋았다.
"장 비서. 차 준비해."
"예, 이사님.
전화를 끊은 박철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이소윤 이사가 호텔로 오기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피곤이 쌓여 있던 박철우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몇 차례나 차임벨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음, 뭐지?"
잠에서 덜 깬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문가로 다가간 박철우가 물었다.
"뭐죠?"
"손님, 호텔에서 드리는 무료 룸서비스입니다."
박철우가 문을 열어 보자, 문 앞에 있는 커다란 이동식 포터 위에 동그란 모양의 집기들이 보였다.
철제 집기들 사이에서 구수한 냄새에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조금 출출했는데. 잘 됐군. 들어와요."
"예, 손님."
박철우가 등을 돌리고 걸어 들어가는 사이 뭔가가 뒤에서 덮치는 느낌이 들었다.
"엇, 뭐야?"
입가로 향하는 손수건에서 마취제 향이 났다.
박철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종업원과 몸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상대는 겉모습과 달리 완강한 완력을 지닌 숙련된 솜씨를 지닌 자였다.
경찰 출신인 박 조사관이지만 완력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제압을 당한 박 수사관은 마취제에 당해 정신을 잃었다.
"유능한 조사관이라더니. 하마터면 내가 오히려 당할 뻔 했어."
한숨을 내쉰 종업원 복장의 남자가 어딘가로 전화하자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박철우를 어딘가로 옮겼다.
"호텔 쪽 CCTV는 처리했겠지?"
"여기 호텔 우리 계열 회사야. 안심하라고. 이미 처리했으니."
남자의 말에 종업원 복장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안됐군. 따지고 보면 우리 선배인데 말이야."
"우리완 달리 양지에서 일하던 사람이야. 뒤처리 전문인 우리와는 결이 다르지."
* * *
저녁 8시 신라호텔 로비.
"그런 사람이 여기 온 적이 없다고요?"
"예, 예약도 된 적이 없습니다. 이사님."
박철우가 말했던 룸으로 이소윤은 찾아갔다.
룸의 방문이 잠겨 있었고,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해지된 번호라고 뜨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호텔 로비에 물어도, 예약은 물론 그런 사람이 온 적도 없다고 하자 황당함은 극에 달했다. 그때 이소윤의 핸드폰으로 발신자 불명 번호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이사님, 박철우입니다. 원하시는 정보를 얻고 싶으시면, 제가 보내는 계좌로 십억을 입금시키시죠.]
이소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박 비서. 오 팀장 불러요."
박 비서는 평소 그녀를 수행해 왔던 장 비서가 호텔로 출발하기 전 갑작스럽게 배탈이 일어나 위기 관리팀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예, 이사님."
이소윤은 자가용에 올라 탄 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상념에 잠겨 있던 이소윤은 눈을 떠서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응? 박 비서, 이 길로 가도 되는 건가?"
"예, 이사님. 저 쪽 길이 좀 막혀서 말이죠. 걱정 마십시오."
"그래? 하지만 이 길은 본사 방향과는 반대 길인데?"
"곧 도착할 겁니다. 잠시 주무시죠. 이사님."
박 비서가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의 얼굴을 향해 수면 스프레이를 뿌렸다.
"이…이게 무슨?"
이소윤은 당혹스러워하며 팔을 들어 저항했으나 곧 눈꺼풀이 잠기며 정신을 잃었다.
이소윤의 상태를 확인한 사내가 귀에 장착된 초소형 통신기를 살짝 터치하며 말했다.
―처리했습니다.
―좋아. 이동시켜.
통신기 사이로 오 팀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8시간 후.
소금기가 실려 있는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두드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자, 눈앞에 조카의 얼굴이 보였다.
따뜻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시원스러운 바람에 나풀거리는 여름 원피스, 버들 나무같이 잘록한 허리와 아름다운 얼굴.
누가 보면 한류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럴 때도 넌 참 천사 같구나.'
이소윤은 온몸이 오싹거렸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이 커다란 열대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엔 커다란 저수지가 보였다.
자신의 옆에는 박 조사관이 팔다리가 묶인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전신이 이미 피투성이다.
그 주위에는 자신과 박 조사관 그리고 이유라. 이 셋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소윤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유라를 향해 물었다.
"여긴 어디니?"
이소윤의 물음에 이유라의 볼에 작은 보조개가 생겨났다.
"남태평양에 있는 이름 없는 섬이에요. 돌아가신 할아버님 시절에 많이 이용했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이소윤이 피식 웃었다.
"뭐가 우습나요?"
"…내 꼴이."
"어머, 죄송해요. 고모. 고모를 꽤나 좋아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유라가 한 줌 구김살 없이 해맑게 웃었다.
전에는 예쁘게만 보였던 미소가 지금은 소름이 끼쳤다.
이소윤은 어떻게 지금까지 모를 수 있었을까 싶은 심정이었다.
'저 미소로 그동안 사람들을 속여 왔던 거야.'
"하나만 물어보자. 너 내 조카 아니지?"
"어머, 이미 확인하셨던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 분을 시켜서 진짜 이유라를 찾으신 거고요."
이유라가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말했다.
이소윤의 눈에 원독이 피어올랐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주겠니?"
이유라의 볼에 보조개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 작은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설명을 듣는 이소윤의 얼굴이 점점 더 허탈해졌다.
"그럼, 그 아이. 내 조카는 어떻게 되었니?"
"음, 그 아인. 잘 자랐어요. 착한 원장 수녀님 밑에서 바른 성품을 가지고 컸죠. 재수 없게~"
특이한 광경이었다.
입을 삐뚤거릴 법도 한데 재수 없게라는 말까지 밝게 웃으며 말한다.
뭔가가 아주 심하게 비틀려 있었다.
이소윤은 그제야 눈앞의 시리도록 예쁜 여자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다행이구나."
이소윤은 비록 자신이 키우지 못했지만 나름 본인의 삶을 살았구나 싶어 그나마 안도가 되었다.
"하지만 어쩌죠? 너무 착해 빠진 나머지. 자신이 아끼던 목걸이도 선뜻 빌려 주었던 그 아이는 커서 나이차 많이 나는 아저씨랑 결혼해서 딸까지 낳고 잘 사는 듯싶더니. 어떤 미친놈에게 그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하네요. 그것도 딸아이와 같이. 낫 해피엔딩~"
해맑게 웃으며 잔인한 진실을 담담히 털어놓는 이유라는 어딘지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대체 이 아이는 어떤 일을 겪었던 것일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불행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소윤은 진짜 조카의 불행과 눈앞의 불길한 이유라.
둘 모두에게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