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57화
57화
"그…그게 사실……?"
"예, 사실이에요. 어머. 미리 말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정말로. 믿어주세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죠."
이소윤은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결국 동생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괴로웠다.
죽어도 동생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성아, 미안해.'
이유라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소윤을 바라보며 자신은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지금 이소윤의 표정과 행동을 학습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유라가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저는 여기까지 하죠. 이후부터는 다른 분들이 고모를 상대해 주실 거예요."
"……?"
"고모 주식 말이에요. 저한테 모두 상속해 주시고, 해외로 떠나신 걸로 제게 문자도 보내 주시고 하셔야 할 일이 많아요.
이유라는 우아하게 자리를 떴다.
그러자 멀리서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하나같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자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그룹 실세가 되었을 때, 모두 쫓아냈던 자들이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이유라가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삼은 것이다.
"이… 이사님, 죄송."
정신이 든 박 조사관이 이소윤을 바라보았다.
"박 조사관!"
"…이사님, 어차피… 우릴… 죽일 겁니다."
"그… 그렇겠지."
"…그냥, 요구하는 걸 순순히 들어 주시는 것이 그나마 편히 가시는 길입니다."
"……!"
양복쟁이들이 다가오자 이소윤은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한적한 남국의 무인도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양복에 핏자국이 묻어 있는 남자가 다가와 서류를 건네었다.
이소윤이 보유하고 있는 TG그룹 주식 모두를 양도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군요. 아가씨."
오 팀장이 이유라 옆으로 다가왔다.
블랙 바지 정장에 흰 와이셔츠, 목에는 스카프를 걸치고 있었다.
화려한 여름 원피스를 걸친 이유라까지 두 사람이 같이 서자 상당히 그럴듯한 그림이 연출되었다.
"응?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오 팀장. 이제 시작일 뿐이야. TG그룹을 시작으로 삼강까지, 난 이 나라에 제국을 건설할거야. 나만의 제국을."
"꿈을 이루실 때까지 옆에서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아가씨."
"푸훗, 오 팀장이 내 옆을 든든히 지켜 준다면 제국의 2인자는 오 팀장 자리가 될 거야."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가씨."
남태평양의 따뜻한 바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에메랄드빛 파도가 하얀 백사장 위로 밀려왔다.
얼핏 기묘한 풍경이었다.
한쪽에는 눈에 확 띠는 미인 두 사람이 남국의 파도와 백사장을 배경으로 도원결의를 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양복쟁이들이 손가락이 부러지고, 몸 여기저기가 피투성이가 된 여성과 남성을 밑바닥이 바다와 연결된 호수를 향해 던지고 있었다.
이들의 육체는 섬 아래에 살고 있는 어류들에 의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질 터였다.
여름 잡지의 스페셜 특집 같은 화사한 장면과 범죄 영화 속에 등장할 만한 잔혹한 장면이 한 하늘 아래 동시에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 * *
"도련님, 말씀하신 이유라 아가씨에 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흐~응, 내 약혼녀 말이지? 이름이 이유라였던가? 하필 내가 죽인 여자랑 같은 이름이군. 예뻤는데. 급히 해치우느라 재미는 못 봤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허무함이 머물러 있는 눈동자에 얼핏 생기가 돌았다.
상현은 노집사가 건넨 자료를 말없이 읽어 내려갔다.
"흐응, 이 여자 걸작인데? 원래 이름이 이세라? 이거 대체 강혁 형사님과 나는 어떤 인연으로 엮인 거야? 신이 있다면 정말 악취미야. 그렇지 않아?"
"아시지 않습니까? 신은 죽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말이지요."
"큭, 할아범. 역시 신랄하군. 하긴 나도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해. 그 양반이 진짜로 있다면 어떻게 이런 부조리가 용납되는 걸까? 내가 내린 결론은 신은 역시 없다는 거야. 만에 하나 혹시 있었다고 해도 예전에 죽었던가. 안 그래? 이 세상은 강한 놈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그 속에 신이 있다면 돈과 권력이라는 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도련님."
"자신을 키워 준 은혜를 저버리고, 수장시켰단 말이지?"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전대 회장이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던 섬이거든요. 이미 그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바다와 이어진 호수라 그것 참 우아한 양반이군. 뒤처리도 깔끔하고 한 번 쯤 봐 두고 싶은 사람인데 말이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그러고 보면, 우리 괴물 아버지도 슬슬 돌아가실 때가 됐다고 생각지 않아?"
"원하신다면 언제든 실행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난번처럼 심장마비로 죽는 건 제 분이 안 풀려서 말입니다. 이런 건 어떻습니까? 그 양반의 최후에 어울리는 형벌은……."
"…큭,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그 노괴의 최후에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거, 그러고 보니 부창부수인건가? 이것 참 알고 보니 우리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환상의 커플이 아닌가?"
"도련님. 설마 이세라 양을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그쪽 약점을 잡고 휘두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너무 오만한 걸까?"
신상현의 말에 노집사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세라 아가씨는 결국 이유라 아가씨가 아니지요. 도련님께서 약점을 쥐고 있다면 다른 이야기가 되겠군요."
"부탁해. 할아범."
노집사가 웃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 * *
신상현은 회귀 전 별장에서 노집사와 이세라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를 회상했다.
그 당시에는 강혁과 함께 탈출한 여자의 뒤를 쫓다가 그만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것이다.
어찌나 비통했던지…….
하지만 이번에야 말로 TG그룹의 상속녀가 될 이세라를 자신의 손아귀에 두게 되었다.
한국의 재계를 양분하는 삼강과 TG 모두를 자신의 지배하에 둘 계획을 세우며 즐거워했다.
"크크크큭, 이번에야 말로. 이번에야 말로… 나만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거야!"
어린 신상현의 두 눈빛이 욕망으로 번득였다.
* * *
이리나는 회장 비서이지만 사실 아직은 수습사원이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육 개월 간 수습 기간을 거치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다른 경력직 사원들과 달리 정식 직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만 한다면 무난하게 정식 사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몇 개월만 견디면 돼.'
이리나는 현재 자신의 벌이로 동생들의 학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부모님이 힘들게 벌어서 자신을 먼저 대학에 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는 자기 차례였다.
다행히 좋은 회사에 들어오게 되어 행운이었다.
"이봐요. 거기 잠깐만 서 봐요!"
이리나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웬 여자가 자신을 무서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갈색 머리에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이리나는 저 여자와 안면이 있었다.
98층에 있는 유명 골프공 제조 회사의 비서실 직원 트레이시다.
나름 큰 기업의 비서라 평소에도 고압적인 태도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저 말인가요?"
"그래요. 당신! 이거 보여요?"
이리나가 살펴보자 트레이시의 정장 와이셔츠에 물기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당신 뒷모습이 딱 그대로인데!"
트레이시가 아주 화난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아, 아니에요."
이리나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막무가내다.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기웃거렸다.
그러자 더 기세가 당당해졌다.
하필이면 이리나가 있는 곳은 트레이시의 회사가 있는 98층이었던 것이다.
대학 동기가 98층의 유명 화장품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만나러 온 길이었다.
트레이시는 거침이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독설을 퍼부었다.
이리나를 자기 잘못을 사과할 줄도 모르는 몰상식한 여자로 매도했다.
사람들은 트레이시의 말을 듣고는 이리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 너무해. 난 애초에 화장실에 가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 정식 사원도 아닌데 잘못했다가는 정직원이 되기도 전에 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나는 골든 타워가 좋았다.
연봉도 수습사원치고는 좋았고, 정직원이 되면 상당한 수입이 예상되었다.
게다가 회장님 이하 임원들도 좋았고, 사원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이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몰상식한 애를 사원으로 두고 있는 회사가 불쌍하다!"
이리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힘없이 풀었다.
이리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흑, 흑!"
"흥, 꼴에 너도 여자다 이거냐? 누가 울면 불쌍하다고 봐줄 줄 알아? 이런 몰상식한 년!"
트레이시는 멈추지 않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우… 욱!"
이리나는 반격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슬픔이 울컥 치솟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어디서 이런 몰상식한 여자가 우리 이리나를 울리는 거야!"
이리나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청소 도구를 들고 있는 루시가 보였다.
'루… 루시? 여긴 어떻게?'
생각해 보니 여긴 루시의 지인이 청소하는 층이라 한번 씩 놀러 간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뭐야? 넌 뭔데 이 여자 편을 드는 거야?"
트레이시는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났다는 듯이 루시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흥, 난 너 같은 년 무섭지 않아."
"뭐… 년?"
트레이시가 루시의 말에 쌍심지를 켰다.
바야흐로 두 사람 사이에 막말이 쏟아질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난장판을 보고 있었던 골든 타워 직원이 있었다.
총무과 직원인 랜시였다.
"큰일 났어요. 지금 아래층에서 우리 여직원들이 당하고 있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트레이시라고 알죠?"
"아? 그 막말녀?"
"무슨 일인지 트레이시가 우리 이리나한테 욕설을 퍼붓는데 루시가 끼어들었어요."
"뭐야?"
총무과 여직원들이 모두 일어섰다.
"우리도 가자!"
"어이, 무슨 일이야?"
마침 지나가던 윌슨 사장이 물었다.
"아, 사장님."
일순 총무과 여직원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장님, 사실은……."
랜시가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다.
"뭐? 이런! XXX!"
윌슨이 소리쳤다.
"우리 다 가자!"
"야! 네가 애 엄마라도 되냐? 네가 뭔데 청소부 주제에 나서! 엉?"
"뭐라고? 넌 어디서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욕부터 해! 네 머리는 우동 사리냐? 엉?"
루시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피 터지는 욕설을 주고받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맨 앞에서 튀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윌슨 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