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73화
73화
"뭐, 네 말이 맞겠지……."
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니 아닐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끝까지 짚고 넘어갔다.
"그런데 아키라가 원래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 중국인이 있었다고?"
"왕… 왕웨이요?"
"그래, 그리고 그 애 아버지는 뉴욕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신다고?"
"예, 그리고 그 애 아버지한테 불량한 부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아무도 그 애는 건들지 않아요. 차이니즈 마피아의 아들이라면서요. 물론 과장된 이야기죠."
"흐흥, 과장이라?"
승호의 말에 강혁의 눈이 번득거렸다.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경우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아무튼 일단은 수사를 하고 있는 경찰에게 가 보자."
강혁의 말에 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승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겠지."
강혁이 승호를 보며 웃었다.
"이게 CCTV에 찍힌 사진입니다. 안타깝게도 얼굴이 정확하게 찍힌 건 없네요."
사건을 조사 중인 경찰이 말했다.
단순 도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수사를 하는 경찰 입장에서도 딱히 그렇게 범인을 잡으려고 열을 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건 현장에 있던 CCTV에 범인의 인상 착의가 찍혔다.
키가 168에서 170정도 되고,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동양인 남성이었다.
정확하게 얼굴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대충의 인상은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 복사본은 제가 가지고 가도 될까요?"
"아, 예. 가져가십시오. 쿠퍼 형사님한테는 이미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형사요?"
"하하, 죄송합니다. 워낙에 입에 익어서. 쿠퍼 형사님은 원래 이곳에서 십 년간 근무했었거든요."
지금은 F.B.I요원이지만 원래 쿠퍼 포웰은 뉴욕시의 유능한 형사였다.
이미 이 일에 뉴욕 지부의 F.B.I에 협조를 요청했더니 쿠퍼가 친정집에 연락을 해 놓은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형사님."
강혁은 사건 담당 형사에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들고 나왔다.
"혁이 형. 여긴 왜?"
강혁은 최승호를 데리고 다시 차이나타운으로 왔다.
강혁의 뒤를 따르던 최승호가 말했다.
"여기예요. 제가 소매치기를 당한 곳이……."
승호의 말에 강혁이 잠시 멈춰 서서는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범인이 도망친 장소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점검했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엇, 어딜 가세요. 형."
승호의 질문에 고개를 돌린 강혁이 부드럽게 웃었다.
"어딜 가긴? 노트북을 찾으러 가지."
"예에?"
황급히 강혁의 뒤를 따라나선 최승호는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강혁이 노트북을 찾으러 간다면서 들어간 곳은 평범한 중화 요리점이었던 것이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건물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었다.
"형, 혹시 저녁을 못 드셨나요?"
의아한 표정으로 최승호가 물었다.
하지만 강혁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일단 앉아봐. 앉아서 차라도 마셔."
테이블에 두 사람이 앉자 점원이 나왔다.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었다.
길게 찢어진 치파오 치마 옆으로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아가씨, 혹시 이걸 알아보시겠습니까?"
강혁이 묘령의 젊은 중국 여성에게 여의주를 움켜쥐고 구름을 타고 날고 있는 황용의 그림이 그려진 동그란 패를 건네었다.
강혁이 갑자기 동그란 패를 건네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여인이 패 속의 그림을 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갑자기 주방으로 달려갔다.
"어어, 저 누나 왜 저러는 거죠?"
최승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후, 머리에 검은 중국식 모자를 쓰고, 비단으로 된 전통 복식을 입은 노인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작은 키에 턱에는 두 가닥의 긴 수염이 나 있었다.
테이블에 가깝게 온 노인이 잠시간 강혁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놀란 표정이 지었다.
"어르신, 왜 그렇게 놀라시는지?"
강혁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놀란 표정을 수습하고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황용 패의 주인을 뵙습니다."
"존 강이라고 합니다."
강혁 역시 노인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대답했다.
"저는 이곳 쌍용각의 주인인 진화명라고 합니다. 모두들 진역관이라고 부르니 미스터 강께서도 저를 진역관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진역관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사실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입니다."
"황용 패의 주인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슨 일이든 도와드려야지요.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노인이 말했다.
강혁은 최승호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고 진역관에게 경찰서에서 받은 사진들을 건네었다.
사진을 받아 든 진역관이 잠시 살펴보더니 강혁을 향해 말했다.
"모처럼 오신 것이니 저희 쌍용각이 자랑하는 음식을 좀 드시면서 기다리시지요."
진역관이 강혁에게 고개를 조아리더니 사진을 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그야말로 산해진미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강혁 역시 정통 중국 음식은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눈앞에 여러 가지 음식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최승호와 함께 젓가락을 휘두르며 연신 감탄을 터트리고 있을 때였다.
중국 전통 복식을 걸친 중년의 남자들이 강혁과 최승호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모두 세 명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키가 상당히 큰 편인데, 근육질의 체격에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중간정도의 키에 동그란 안경과 챙이 있는 모자를 썼는데, 전형적인 학자풍의 얼굴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동네 아저씨 같은 매우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리 기분이 좋은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십 년 만에 뉴욕 차이나타운에 황용 패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소. 나는 이곳에서 지하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는 팽소문이라 하오. 잘 부탁드리겠소. 대인."
지하 카지노.
듣기 좋게 말했지만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험한 일을 하는 사람답게 험상궂은 얼굴과 강한 완력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존 강이라고 합니다. 대인이라뇨. 저를 너무 높이시는군요."
"황용 패의 주인이라면 대인이라 불릴만하지요. 제 이름은 이국충이라고 합니다. 대인. 여기 골목길에서 작은 환전소를 운영하고 있지요. 이곳 친구들은 모두 저를 제임스 리라고 부릅니다."
학자풍의 중년인이 말했다.
"존 강입니다."
작은 환전소.
사실은 십중팔구 차이나타운으로 흘러 들어오는 음성적인 자금들을 돈세탁하는 곳일 터였다.
강혁은 이국충이 뉴욕 차이나타운의 실력자 중 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강혁이 두 사람과 인사를 마치자 세 명 중 가장 키가 작고, 동네 이발소 주인처럼 생긴 중년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진역관께 듣기로 이번에 나타난 황용 패의 주인이 천룡의 상을 타고 났다는데 내가 보기에도 과연 대단한 관상을 지니셨군요. 저는 장삼이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지요. 여기 친구들은 모두 테리 장이라고 부릅니다."
"존 강입니다."
강혁은 장삼과 인사를 나눈 후,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앞의 두 사람과 달리 눈앞의 남자를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운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단전에서 저절로 내기가 움직이려 해서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강혁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내공 단련법을 전수받아 내기를 쌓아 오고 있었다.
'생긴 건 딱 동네 이발소 주인인데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듯이 십 년 내공의 내기가 움직였다? 이 사람이 나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내가고수란 말인가?'
강혁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장삼을 바라보았다.
"아니, 형님. 그게 사실입니까? 진역관께서 그런 말을 했다고요?"
학자풍의 사내 이국충이 놀라며 물었다.
"그렇다네. 이 아우."
작은 여행업을 한다는 장팔이 말했다.
"천룡의 상이라고요?"
강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그래도 진역관이란 노인이 자신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관상을 보고 그랬던 모양이다.
"저 역시, 관상에 대해서는 작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잠시 후, 진역관이 오기로 했으니 그때 자세히 물어보시죠."
"그런데 진 노인께서는 관상에 조회가 있는 분이신가 보군요."
강혁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띠었다.
"하하, 역관이란 말은 원래 주역 등을 공부하여 관직에 올랐던 분들을 일컫는 옛 명칭이지요. 진역관께서는 조상대대로 관상학에 정통한 집안의 출신이라 저희들 모두 진역관이라 부르며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국충의 말에 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국충의 말대로 오래지 않아 진역관이 돌아왔다.
"강 대인께서 부탁하신 일은 잘 풀릴 것 같더군요.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알아보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식사가 끝날 때쯤에는 데려 올 수 있을 겁니다."
진노인의 말에 최승호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박, 환전, 여행업을 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영화에서 보던 뒷세계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황용 패라니?
강혁이 내민 용이 그려져 있는 작은 패에 차이나 마피아 같은 뒷세계의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절로 긴장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진역관님."
강혁이 양손을 내미는 중국식 인사를 취해 예를 표했다.
"헐헐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황용 패의 주인은 객가가 인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상전이나 마찬가지지요. 저를 비롯하여 여기 모인 장삼, 이국충, 팽소문 모두 언제든지 마소처럼 부리셔도 됩니다."
진역관의 말에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 모두 황용 그룹과 객가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저희만이 아닙니다. 그곳이 어디든 중국인 사회가 있는 곳이라면 황용 그룹과 객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지요. 앞으로 대인께서는 언제든 이 황용 패를 내밀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황용 패는 그런 맹약이 담겨있는 물건이니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국충이 황용 패에 대해 설명을 마치자 진 노인이 다시 강혁에게 패를 돌려주었다.
강혁은 황용 패를 돌려받으면서 이런 작은 패에 자신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힘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으로 자신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황용 패를 건네주었던 헨리 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진역관님, 조금 전 테리 장께서 제가 천룡의 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떤 상이니 궁금하군요."
강혁이 다시 진역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룡의 상이라."
노인이 잠시 허공을 향해 눈을 돌렸다.
"원래 이 상은 여간해서는 인세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일 이 상을 지닌 귀인이 등장하면 반드시 그 주변에는 풍운이 일고, 천지를 뒤바꿀 만한 엄청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고 합니다."
"……!"
진역관의 말에 강혁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진역관은 그런 강혁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공을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천룡의 주인에게는 그를 돕는 무리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지만, 천룡의 주인과 대항하는 자도 그에 상응할 만한 역천의 운과 실력을 타고나 하늘의 별을 흔들어 떨어뜨릴 만큼 큰 세력을 이루기 때문에 결국에는 두 사람이 세상의 운명을 걸고 천지가 경동하는 대결을 나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