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75화
75화
트리니티 스쿨의 교장 프레드릭 올슨은 50대 후반으로 반쯤 벗겨진 머리에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 오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12학년 학생과 그들의 학부모를 앞에 두고는 사정이 달랐다.
프레드릭 올슨은 오늘 오전 자신 앞으로 온 한 통의 편지와 작은 소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편지와 소포 속에는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앤드류, 아키라, 왕웨이가 그동안 학내에서 저질렀던 악행들과 그에 대한 증거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편지에 적혀 있는 악행들은 프레드릭 올슨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세 사람이 이 정도로 연류 되어 있고, 뒤에서 주도했던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올슨 교장이 편지를 다 읽었을 때는 충격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작년 인도에서 유학을 온 천재 소년 로한 싱.
올슨 교장도 기대가 컸던 학생이다.
그런데 그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자퇴 하더니 노이로제에 걸려 전학을 간 학교에서 자살 미수 소동까지 일으켰다.
편지를 읽어 보니 이 세 사람이 주동이 되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게 괴롭혔다고 하지 않는가?
소포에는 로한 싱이 직접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담겨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래전 학교에는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 역시 오래지 않아 학교를 자퇴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갔는데, 당시에도 이 셋이 주동해서 아이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왕웨이가 자필로 적은 진술서가 소포 안에 들어 있었다.
"이걸로도 퇴학 사유가 분명하지만, 마지막은 심각한 이야기야."
편지의 마지막에는 최승호의 노트북을 절도한 사건이 적혀 있었다.
앤드류가 부추기고, 왕웨이가 주도하고, 아키라가 도운 사건이었다.
이들은 노트북에 있는 소스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최승호가 만든 페이스북을 도용한 유사 서비스를 만들 생각이었다고 한다.
프레드릭 올슨 교장은 세 명의 학생을 바로 교장실로 호출했다.
"무슨 일이시죠? 교장선생님?"
앤드류 레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올슨 교장에게 물었다.
아키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왕웨이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자네들, 여기 적혀 있는 글들이 모두 사실인가?"
올슨 교장이 세 사람 앞에 편지지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자신들이 일주일 전 감금된 상태에서 적어 내었던 악행들이 모두 적혀 있었다.
앤드류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휩싸였다.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어둠 캄캄한 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 달랑 전등 하나가 전부였다.
자신의 주변에는 커다란 덩치에 군복 바지, 국방색 셔츠를 입은 사내들이 팔뚝을 내놓고, 얼굴에는 검은 두건을 쓰고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장의 종이와 볼펜을 던져 주고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벌였던 악행들을 모두 적으라고 했다.
만일 다른 친구들의 글에는 있는데 자신의 종이에는 없다거나 거짓을 적었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혼자서 이 컨테이너 박스 안에 감금되어 평생 있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공포감에 앤드류는 적어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배신을 때리면 자신만 감금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을 다 적어 내었다.
그 후, 다시 잠이 들었는데, 잠이 깼을 때는 차이나타운 골목에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그때의 악몽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제길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앤드류는 재빨리 얼굴 표정을 바꾸며 매끄러운 혓바닥을 굴렸다.
"이건 모두 모함이에요. 교장 선생님! 우리들을 시샘하는 누군가가 헛소문을 꾸며낸 거라고요."
"맞아요. 교장 선생님. 이건 모함이라고요. 저희 아버지를 부르겠어요."
아키라가 앤드류의 말에 동조했다.
"야,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앤드류가 왕웨이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그… 그게… 교장 선생님. 저도 아버지를 부르겠어요."
왕웨이가 약간은 기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식은땀도 흘렸는데 왕웨이는 일주일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이… 이게 어디야?"
왕웨이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과 친구들이 차이나타운의 골목길에서 버려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앤드류와 아키라도 마침 정신이 드는지 머리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 세 사람은 패닉 상태였다.
누가 그들을 납치했으며 이제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당황해 하다가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웨이는 두 사람과 달리 그날 한차례 더 풍파를 겪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와 조직원들이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포박된 채로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빠!"
"왕… 왕웨이! 대체 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왕방이 왕웨이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고, 어깨에는 피를 흘렸는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왕방만이 아니라 조직원들 대다수가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다.
"네가 왕웨이냐?"
중절모에 동그란 안경을 낀 학자풍의 중년인이 물었다.
"이… 이 대인!"
왕웨이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맨허튼 차이나타운의 3대장 중 하나인 이국충이었다.
맨허튼 차이나타운에서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뉴욕의 지하 카지노 사업을 장악하고 있는 팽소문이 보였다.
팽소문은 맨허튼에서 가장 세력이 큰 차이니즈 마피아 조직의 두령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용맹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아 누구도 그와 적이 되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왕웨이의 눈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얼굴은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허옇게 백지장이 되었다.
장삼.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옆집 아저씨.
하지만 그 실상은 중국 최대의 마피아 조직 삼합회의 암살자였다.
왕웨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뉴욕에서 절대로 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세 사람에 대해서 들었는데, 지금 자신의 집에는 그 세 사람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람이 바로 저 장삼이었다.
"왕웨이, 네 놈이 벌인 일 때문에 네 아버지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이국충이 왕웨이를 향해 엄포를 놓았다.
왕웨이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 것을 넘어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었다.
"꿇어라!" 이국충의 말에 왕웨이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한 시간 후, 교장실에 세 사람의 아버지가 모두 모였다.
앤드류의 아버지 해리슨 레인이 가장 기세가 등등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해리슨 레인은 오랫동안 트리니티 스쿨의 재정에 상당한 기부를 해 왔고, 학교 이사회에서 임원을 역임한 적도 있었다.
"아니,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지금 우리 앤드류가 저 녀석들과 함께 그런 짓들을 저질렀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증거 있어요? 이런 종이쪼가리 말고 진짜 증거 말입니다."
앤드류의 아버지 해리슨 레인이 올슨 교장을 향해 핏대를 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아키라의 아버지 카나타 코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 아키라 역시 마찬가지예요. 교장선생님. 낯선 환경에 부적응해서 노이로제에 걸린 아이의 말만 믿고 우리 아키라를 퇴학시킬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아요. 아니면 우리 애들이 했다는 증거를 내 놓던가요!"
카나타 코우가 으름장을 놓자 해리슨 레인은 왕웨이의 아버지 왕방을 바라보았다.
이미 세 사람은 이런 일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적당히 위협하면 마지막으로 왕방이 쐐기를 박는 말로 학교 당국이 아이들에게 손을 못 대게 막아왔다.
'자, 왕 방 사장. 저 머저리 올슨에게 본때를 보여 보라고.'
"저…저기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게 다 제가 잘못 가르친 덕분입니다. 저와 제 아들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책임을 인정합니다. 그저 퇴학 조치보다는 자퇴를 할 수 있도록 선처를 바랍니다."
왕방이 왕레이와 함께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의 뜻을 나타냈다.
그 모습을 본 해리슨 레인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왕방이 누군가?
뉴욕 부동산계의 큰 손인 동시에 사실은 차이나 마피아를 움직이는 녀석이었다.
맨허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여섯 개의 차이나 마피아 중 하나를 움직이는 두목이 왕방이었다.
그런 왕방이 저렇게 고개를 숙일 거라고는 일말도 상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연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지 않는가?
"이… 이 봐. 왕 방. 자네 왜 그러나?"
놀라기는 카나타 코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깜짝 놀라 왕방을 만류했다.
"아, 아니야. 나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네. 나는 가능하다면 자퇴를 시키고 아들을 당분간 홍콩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낼 생각이야."
왕방의 태도는 그동안 보아 왔던 당당하면서도 오만한 표정과는 달랐다.
얼굴에는 뭔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왕방의 말에 대해 왕레이 역시 그저 식은땀을 흘릴 뿐 일말의 반항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두 부자의 모습에 해리슨 레인과 카나타 코호 두 중년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크, 크흠. 왕레이가 잘못이 큰 가 본데. 우리 아들은 그저 어울려 다녔을 뿐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해리슨 레인은 다시 신색을 회복하고 올슨 교장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흠, 우리 아키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책임을 인정할 수 없어요."
카나타 코호 역시 단호하게 말했다.
"음, 저희 측은 될 수 있으면 이 사건을 학교에서 마무리 했으면 하는데, 두 분께서 끝까지 이들의 책임을 부인하시면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 수사? 이봐요. 교장.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하는 것이요?"
해리슨 레인이 발끈하며 외쳤다.
올슨 교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잠시 후 이번 사건의 또 한 사람의 당사자인 승호 초이의 보호자가 오실 겁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시죠."
문이 열리며 강혁이 들어왔다.
강혁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해리슨 레인이었다.
"아, 아니. 회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강혁이 해리슨 레인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해리슨 실장, 여기서 뵙는군요."
강혁의 말에 앤드류가 크게 당황했다.
설마하니 최승호의 보호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회장일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