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81화
81화
이리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미슐랭 셰프의 요리에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하하,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며 자주 오는 건데 그랬어."
"회장님, 또 저녁을 사주실 건가요?"
이리나의 말에 강혁이 윙크를 하며 말했다.
"이리나의 일솜씨는 아주 만족하고 있어. 그러니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야호, 신난다."
이리나가 푸른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기쁜 듯이 말했다.
사실 이리나는 이제 겨우 갓 대학을 나와 성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생활의 시작이 회장 비서실이었다.
서양 문화가 많이 프리하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회장 비서로서의 격을 유지하느라 많이 참고 산 것이 약간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강혁 앞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하핫, 보기 좋은데. 우리 칼 같은 이리나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강혁은 어떻게 하든 이리나가 귀여운 모양이다.
마치 귀여운 토끼 인형을 들고 있는 성장한 딸 유경이를 보는 듯 아빠 미소로 그녀를 대했다.
"그럼 한국에서 근무를 하는 건가요?"
"그래, 여러 가지로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대신 급료는 지금의 두 배를 주지."
"두 배나 주신다고요?"
"언어, 음식, 잠자리, 모든 것이 이곳 뉴욕과는 다른 환경이라 특별 수당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군요."
강혁의 말을 들으면서 이리나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날 마음에 두고 계신 거였어. 이렇게나 날 생각하고 있었다니. 어쩌지?'
이리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떠올렸다.
* * *
16살이 되던 해에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미국으로 온지 8년이 지났다.
이제 겨우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해외 생활이다.
다시 처음부터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적응할 때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었다.
'하지만… 월급이 두 배나 오른다면 동생들 대학 학비도 쉽게 마련할 수 있다는 뜻이야.'
이리나는 아직 대학을 들어가지 않은 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다.
부모님이 자신을 대학으로 보낸 것은 빨리 취업해서 동생들의 학비를 감당하라는 뜻이 있었다.
이리나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갈등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바보 이리나, 회장님이 날 마음에 들어 하시잖아. 만일 내가 승낙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을거야.'
이리나는 비서실의 제인과 에바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자신과 달리 연애 고수들이다.
만일 기회만 생긴다면 어떻게 해서든 회장님과 엮이려고 노력할 타입이었다.
'억만장자의 연인이 될 수 있는 기회라며 덮어 놓고 GO할 언니들이야.'
이리나는 제인이나 에바가 혼자서 근무하고 있는 강혁을 유혹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사람들이 없다면 사무실 안이라도 기꺼이 몸을 던질 여자들이다.
'으으으… 안 돼. 순진한 존 회장님의 순결을 내가 지켜야 해.'
강혁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드디어 결심이 섰다.
'그래, 결심했어. 한국에서 회장님을 서포트하면서 우리만의 추억을 만드는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교회의 찰랑거리며 울리는 종소리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이리나의 옆에는 멋진 슈트를 입은 강혁이 서 있었다.
이리나의 두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뜨고 이리나는 강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할게요. 회장님. 한국에 가겠습니다."
"오! 고마워. 이리나."
강혁은 반가운 나머지 이리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이전에는 결코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존 회장님, 이렇게나 좋아하시다니. 제가 회장님의 마음을 너무 몰랐어요. 미안해요.'
이리나의 두 눈이 다시금 결의로 가득찼다.
뉴욕 맨해튼 거리로 나가 5분만 걸어도 모르는 남자들이 다가와 연락처를 물어보는 이리나다.
하필이면 마음속에 아내와 딸밖에 없는 돌덩이에게 단단히 잘못 걸려들었다.
결의에 찬 이리나의 눈빛을 보며 마음 든든하다 생각하는 강혁이다.
여자의 마음과 연예에 관한한 바보에 가까웠다.
평생 한 여자밖에 몰랐고 연애기간도 짧았던 부작용이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이리나의 험난한 한국 생활이 이날 결정되었다.
돌덩이와 착각대마왕이 환상조합을 이룬 신기한 파트너쉽의 탄생이었다.
* * *
"회장님, 이제 곧 한국입니다."
침대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강혁은 방송으로 들려오는 이리나의 음성에 잠에서 깼다. "드디어, 한국인가?"
8월, 경찰 공무원 시험 접수를 위해 한국에 잠시 들렸던 이후로 처음이다.
강혁은 샤워실로 들어갔다.
상당히 고급스럽게 잘 꾸며진 기내 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지상에서 수만 피트 떨어진 하늘에서 샤워를 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잠시 27살 원래의 나이로 돌아가 샤워를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샤워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온 강혁은 이리나가 차려주는 간단한 기내식을 먹었다.
옅은 금발 머리에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
백인이지만 동양인을 연상시키는 선이 고운 얼굴이다.
"이리나는 한국이 처음이지?"
"그럼요. 회장님, 사실 고향을 떠난 후로는 줄곧 미국에서만 있었는걸요."
"호텔을 예약해 두었으니 당분간은 관광이라도 즐기도록 해."
"어머, 그래도 돼요?"
이리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주는 휴가라고 생각하고, 우선 자신이 앞으로 지낼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강혁이 웃으며 말했다.
"본격적인 업무는 4일 후부터 시작하면 돼."
강혁의 말에 에바는 짐짓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기장이 김포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연락을 취했다.
공항 관계자들은 흔치 않은 슈퍼급 개인 전용기의 입국에 놀라 부산을 떨었다.
걸프스프림Ⅳ가 김포공항에 입국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뭐야? 어디 할리우드 배우라도 온 거야? 혹시 아는 거 있어?"
"아니, 난 들은 것 없는데? 어느 나라 대기업 회장이나, 아랍의 왕자가 아닐까?"
공항 관제탑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추측성 잡담이 오갔다.
그도 그럴 것이, 걸프스프림은 돈이 있어도 바로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슈퍼 리치들이 가장 선호하는 최고의 개인 비행기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슈퍼리치들이 걸프스프림을 사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릴 정도였다.
그렇기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보유하고 있다는 희소성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걸프스프림Ⅳ와 통신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자체가 관제탑에 없었다.
잠시 후, 날렵한 동체의 걸프스프림이 연청빛을 번쩍이며 사뿐히 공항에 착륙했다.
롤스로이드에서 엔진을 만든 고급 비행기답게 엔진소리조차 그르릉~ 부드럽게 울린다.
잠시 후, 비행기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선글라스를 쓴 강혁을 필두로 이리나와 몇몇 사원들이 뒤를 따랐다.
VIP 전용 출입구로 빠져나온 강혁과 에바는 나오자마자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갈라졌다.
강혁은 공항 화장실로 들어가서는 미리 준비해둔 허름한 잠바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완벽한 동대문 패션으로 환복하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잠시 후, 강혁은 택시를 불러 새로 계약해둔 자취방으로 향했다.
'휴―, 존 회장님.'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강혁을 살짝 돌아보았던 이리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선글라스를 쓰고,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은 후 공항을 가로질러 활기차게 걸어갔다.
눈부신 미모를 흩뿌리며 공항 리무진으로 걸어가는 이리나의 옆은 스티브가 지켰다.
큰 덩치에 검은 피부와 강철 같은 근육, 날카로운 눈빛은 경호원 포스가 풀풀 풍겼다.
스티브의 뒤를 따라 정장을 걸친 백인 남성들이 수행원처럼 뒤따랐다.
공항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쏟아졌다.
"헐리우드 배우가 왔나?"
이리나 일행의 모습에 공항에 온 일반 시민들의 두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게 중에는 막 일반에 퍼지기 시작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소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야, 진짜 예쁘다."
"그렇지? 그런데 모르는 얼굴인데? 저런 배우가 있었나?"
"글쎄 말이야. 배우가 아니라면 누구지?"
"모델인지도 모르지."
"이대로 그냥 두고 볼 거야?"
"흐흐, 내가 그럴 사람이냐? 따라가 보자."
막 비행기 출입구를 빠져나온 사람들 중에는 이리나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청년들이 있었다.
이리나의 옆을 지키는 커다란 덩치의 흑인 경호원을 보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보통의 젊은이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리나와 일행들은 잠시 후 몇 대의 공항 리무진에 올라타고 예약해두었던 힐튼 호텔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뒤를 지켜보던 청년들 몇이 고급 승용차에 올라탄 후 뒤를 쫓았다.
"저긴가 본데?"
차를 운전하는 젊은이의 옆에 올라탄 청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힐튼 호텔이군."
운전대를 잡은 청년은 익숙한 듯 호텔 주차장으로 지체하지 않고 들어갔다.
"잘 됐다. 여긴 네 안마당이나 마찬가지잖아."
"걱정마. 흐흐, 이거 뭔가 될 것 같은데?"
운전대를 잡은 청년은 태우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태우전자 사장의 아들이었다.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태우호텔에서 운영하는 힐튼 호텔이라 자신감이 상승했다.
청년의 옆에 앉아서 지시를 내리는 청년의 아버지는 여당의 3선 국회의원이었다.
함께 고급 승용차를 운전해 힐튼 호텔로 들어온 청년들 모두 있는 집 아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소문난 사고뭉치들이라는 점이다.
강혁은 감회어린 시선으로 이철규를 시켜 미리 계약해둔 자취방 앞에 섰다.
허름한 파란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실제로 회귀 전 강혁이 순경시절 사용했던 단칸방이다.
한 칸짜리 방에 샤워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 좁은 곳이지만 강혁의 청춘이 이곳에 있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강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저기 혹시 강혁 총각인가요?"
그리운 목소리.
오래 전, 익숙했던 주인집 아주머니의 목소리다.
강혁이 고개를 돌리자 기억 속의 아주머니가 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회귀 전의 주름 진 아주머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동안 안녕…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강혁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모습을 보네."
40대 중반의 주인집 아주머니가 살가운 미소로 강혁을 반겼다.
* * *
대구 수성동 최영혜의 자택.
신상현은 뜰 한쪽에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술 학원에 다니는 것은 신상현이 어릴 때 하지 못했던 일이다.
의대를 다니면서 우연한 계기로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회귀 후, 신상현이 홈스쿨링을 하면서 미술학원을 다닌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캔버스 위에 러프 스케치로 그리고 있는 것은 뜰 안의 잘 가꿔진 화단이었다.
신상현은 구도를 정하면서 그림의 정중앙에 하나의 나무를 두고 좌우를 대칭되게 했다.
작은 나무인데, 자세히 보면 주변에 있는 같은 종류의 다른 나무보다 조금 더 크기가 컸다. '흐흐흐, 잘 자라는 군.'
신상현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작은 나무의 뿌리와 맞닿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신상현만이 알고 있다.
상현은 나무뿌리가 강아지의 사체에서 나온 피와 살의 양분을 받아 잘 자라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 세상사의 이치가 다 그런 거야. 꽃이 피려면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하지.'
캔버스에 스케치를 해가는 신상현의 두 손은 깨끗하고 하얀 것이 참 예뻤다.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가던 상현의 손이 문득 멈췄다.
'젠장 또 그러는군.'
상현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회귀 이후, 이유 없이 가슴이 아릿하게 울릴 때가 있다.
심장이 있는 곳이다.
서늘한 감촉이 영혼을 울린다.
존재할 리가 없는 얼음처럼 차가운 나이프의 감촉이 심장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강혁, 그가 남긴 화인 같은 기억이다.
그의 투명한 유리알 같은 눈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귀 직전 신상현은 다 죽어가는 강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약간의 움직임.
방아쇠를 당기는 약간의 힘.
몇 밀리미터에 해당하는 움직임과 약간의 힘만으로 강혁은 머리에서 뇌수를 뿌리며 죽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죽은 것은 신상현이었다.
가슴에 꽂힌 나이프의 차가운 느낌.
그것을 끝으로 상현은 생을 마감했다.
이 땅에 자신만의 견고한 제국을 세우리라는 꿈을 접은 채.
"강혁 형사님, 공부는 무사히 마쳤나요? 이제 내년이면 꿈에 그리던 경찰이 되겠군요. 크크큭"
달그락 그리는 소리와 함께 캔버스에 연필이 춤을 춘다.
"기대해도 좋아요. 제가 형사님을 위해 멋진 선물을 준비해 두었답니다. 마음에 드실 거예요."
상현의 입가에 조소가 어린다.
그의 두 눈동자에 작은 불길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