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88화
88화
"끄응, 이놈의 자식이 끝까지 내 속을 뒤집어 놓는군."
눈에서 불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집에서 내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새로운 개각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여당의 3선 국회의원에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을 비롯해서 전국의 검사들을 지휘하는 막강한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진다.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아들놈이 말썽인 것이다.
"장호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심각한 일이야."
김대호는 전화기를 들었다.
* * *
양평 별장으로 출동한 경찰들은 아수라장이 된 건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야? 전쟁이라고 치른 거야? 뭐야?"
1층 벽 쪽에 나있던 창문들과 2층 창문 하나가 박살이 나있었다.
방 안에는 가구들이 부셔져 있었다.
조사를 맡은 강력계 계장이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는 중에 감식반 형사가 다가왔다.
"계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응? 이게 뭐야?"
"탄피입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이런 게 왜 여기 있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여기 총격사건이 있었나본데요?"
"아, 이거 골치 아프네?"
양평서 강력계 계장 안민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은 사건을 맡게 된 것 같았다.
신고접수를 받고 서장이 직접 자신을 지목해서 현장에 가보라고 한 것부터가 이례적이었다.
살인사건도 아닌데 말이다.
"싹 다 검사해봐. 집 안 곳곳 샅샅이."
"예, 계장님."
감식반 형사와 대화를 마친 안 계장의 눈에 뭐가 수상한 것이 보였다.
"엇? 이게 뭐야?"
테이블로 다가가자 하얀 가루 같은 것이 보였다.
손가락을 가져다가 찍은 후 혀에 갖다 대었다.
"…이런? 뽕이잖아? 그것도 아주 고순도의"
점점 사건이 복잡해지는 순간이다.
"이 집 주인이 누군지 좀 알아봐!"
"예, 계장님."
처음 형사들이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 건물 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별장에서 놀던 청년들이 누군가의 습격으로 납치되었다는 신고만 받았던 것이다.
한참 조사를 진행 중일 때, 부하 형사 중 하나가 안 계장에게 말을 건다.
"안 계장님. 여기서 일어난 일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안 계장이 밖으로 나가 목격자라는 사람을 만났다.
장전후의 부하인 강 부장이다.
어제 비밀 요정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왔던 사람이다.
"뭐라고요? 미군 특수부대?"
"예, 갑자기 우리 건물에 들이 닥쳐서 죄 없는 도련님들을 납치해갔습니다."
"당신. 그게 말이 돼? 왜 걔네들이 사람들을 잡아가?"
"그러니까요. 저희도 황당했다니까요."
김부장의 말은 안 계장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갔다.
"너 이 시키. 똑바로 말해. 너희들 어제 무슨 짓 했어?"
"무슨 짓이라뇨? 그냥 조용히 술만 마셨습니다."
"뭐? 술만 마셔? 내가 저기서 고농도의 뽕을 발견했는데?"
안 계장은 강 부장이 더욱 수상해졌다.
"아! 당신 어제 여기 있었다고 했지? 당신부터 잡아가야겠구만."
"저…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저는……."
"야, 이 사람 일단 경찰서로 데려가!"
"예, 계장님."
강부장은 졸지에 마약사범으로 잡혀가게 생겼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순순히 따랐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터졌다.
"응? 웬 호출이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삐삐가 울렸다.
그것도 서장이 호출한 것이다.
"이 양반이 또 왜?"
안 계장은 경찰 무전으로 서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이, 안 계장."
"예, 서장님. 무슨 일입니까?"
"우리 애들 거기서 철수시켜라!"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모르겠다. 저 위에서 내려온 지시야.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안 계장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서장님, 이거 나중에 우리 신고 받고도 수사 안 했다고 민원 들어오고 하면 어쩝니까?"
"걱정마. 더 자세한 건 말 못하는데. 자네 징계 먹을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철수해."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무전을 뚝 끊었다.
뭔가 말을 더하다가는 실수할까 몸을 사리는 거다.
"참네, 서장도 아침부터 바쁘시네. 가라했다가 오라했다가. 높은 분들 비위맞추느라 힘들어."
안 계장은 한숨을 쉬었다.
"야, 철수해라!"
안 계장이 형사들을 향해 외쳤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모르겠다. 까마득하게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하는데… 일단 철수하란다."
"그…그래도 괜찮을까요?"
형사들 중 하나가 물었다.
"분위기 파악 못해! 이거 우리 선에서는 감당 못하는 사건이야. 괜히 다치지 말고 철수해."
안 계장의 말에 그제야 움직인다.
'까라면 까고, 덮으라면 덮어야 하는 우리 신세. 휴―'
군사 독재에서 벗어 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일선 형사들이 윗사람 눈치 보는 것은 크게 달러지지 않았다.
부하 형사들이 모두 차로 돌아가자 안 계장은 파손된 건물을 보며 머리를 내저었다.
'진짜 미군이 출동한 거면 외교 문제로 번지겠군. 대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난거야?'
안 계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기 차로 돌아갔다.
"뭐야? 청와대에서?"
"예, 의원님. 제 선에서는 더 이상 도와드릴 수가 없게 됐습니다."
"끄응, 알았네."
김대호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과의 전화를 끊었다.
"이거 큰일났군. 대통령께서 아시게 된 모양인데?"
김대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잠시 후, 전화기가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기를 들었다.
―김 의원님, 저 박한결입니다.
"박 장관님! 어떻게 제 아들놈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캐리 대사가 대통령님을 뵙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드님 일 때문인 것 같아요.
"…예?"
박한결 장관의 말에 김대호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꿈에 그리던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청와대 수석으로의 영전을 바라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다 틀렸다.
"끄으응~"
―그러게 애들 관리 좀 잘 하시지. 에잉. 우리 정부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
"죄…죄송합니다. 박 장관."
―대통령님께서 곧 연락하실 겁니다.
"…그…그렇겠죠?"
김대호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까지 어떻게 이룬 지위인가?
대검 중수부의 특수통 출신으로 독재정권 휘하에서 수없이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독재 정권이 물러날 기미가 보일 때는 재빨리 줄을 바꿔 서서 지금에 이르렀다.
많은 선배 검사들이 이전의 죄를 물어 물러날 때 자신은 오히려 정치인이 되어 승승장구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위기가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지 않은가?
법무부 장관조차도 앞으로 자신이 이뤄 나가려는 큰 꿈의 디딤돌에 불과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박한결 장관과의 전화를 끊은 김대호는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대통령님이 날 내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해."
김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당의 전 원내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기용 의원.
현재 가장 유력한 다음 번 국회의장 후보 1순위였다.
현 대통령이 출마를 고민하던 시절, 대한국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도록 밀어준 사람이다.
―아, 김 의원? 자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전화기 너머로 노회한 정치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대호는 자신이 범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예, 의원님. 사실은 불민한 제 아들놈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김대호는 자초지정을 설명하며 이기용에게 읍소했다.
"이번 한 번만 절 살려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의원님."
―흠, 자네도 아들놈 때문에 고생이 많구먼.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의원님."
잠시 전화기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짧은 시간이 억만년 같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과연 이 늙은 여우가 날 도와줄까?
괜히 전화했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이기용 의원의 답변이 들려왔다.
―내가 움직인다면 못마땅하겠지만 대통령께서 자넬 아주 내치지는 않겠지.
"그…그렇습니다. 의원님께서 한 마디만 해주시면……."
전화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김대호는 순간 모멸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견뎌야 했다.
―내 몇 마디 말의 무게는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알고 있겠지? 김 의원.
"뭐…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의원님."
―그래, 그렇다면 알겠네. 다음 번 전화는 자네가 법무부장관이 된 후에 하도록 하지.
김대호는 이기용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제는 물 건너갔다고 생각한 법무부 장관 자리까지 보전 시켜 준다는 말이 아닌가?
"감, 감사합니다. 의원님."
―허허허, 그게 끝까지 감사한 일이 될지는 두고 봐야지.
이기용의 말이 섬뜩하게 들렸다.
'젠장,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김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내가 국회의장 선거에 나가려고 하는데 말이야.
"당연히 의원님이 되셔야지요. 그럼요. 의원님 외에 누가 있어서요?"
김대호의 혀가 기름이라도 바른 듯이 매끄럽게 굴러간다.
"이 정권이 누구 덕분에 대권을 잡았습니까?"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갔다.
"의원님의 선견지명으로 우리 당을 이끌지 않았다면?"
무릎을 탁 치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허허허!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린다.
김대호는 마음속으로 이때다 싶었다.
"다음번 국회의장은 당연히 의원님이 되셔야지요. 그게 정도 아니겠습니까?"
―크―험. 허허.
"안 그렇습니까? 의원님."
원래 항상 남들 앞에서는 무게만 잡던 김대호다.
이런 자일수록 자신의 위에 선 자에게는 자동으로 혀가 구른다.
기름장이라도 먹었는지 참으로 매끄럽다.
―허허, 그런가? 말이라도 고맙군. 하지만 경쟁자가 영 만만치 않아서 말이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드시 이 의원님이 되실 겁니다."
―허허허, 날 높이 사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의원님. 제가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건 그렇지.
"반드시 의원님이 되셔야 합니다. 그것이 강호의 도리고 정의입니다."
말을 하다 보니 자신도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변을 쏟아낸다.
이기용은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고맙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날 생각할 줄이야.
"의원님, 제가 의원님과 연이 짧아 그동안은 왕래가 크게 없었지만 항상 멀리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허허허, 그런가?
"앞으로는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의원님."
―그렇군. 그래. 알겠네. 그럼 자네에게 터놓고 부탁 좀 하지.
"예, 의원님. 뭐든지~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그래, 그래 알겠네. 사실 내가 아직 총알이 많이 부족하네. 자네가 좀 보탤 수 있겠나?
이기용의 말에 김대호는 가슴이 쓰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