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90화
90화
#24장 어린 방문자 (1)
"사람이 죽었는데 11년 형이라니……."
강혁은 수사기관에 오래 몸을 담았던 터라 이번 판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사실 대한민국 법정에서 11년 형은 많이 나온 것이다.
만일 언론과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훨씬 형량이 가벼웠으리라.
하지만 강혁은 성에 차지 않았다.
1심 선고가 내려진 법정에 참관인으로 참석한 강혁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우리나라는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는 너무 처벌이 가벼워.'
강혁은 법을 만드는 국회와 법을 선고하는 법원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던 미래에서는 명백한 마약사범인데, 재벌 딸이라고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왔다.
성범죄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경우 평생을 세상 구경하기 어려운 범죄들도 한국에서는 고작 몇 년 형이 다였다.
강혁은 선고가 내려진 법정을 나서며 굳은 표정으로 법원을 바라보았다.
'한 번 바꿔보자. 내가 가진 힘을 모두 동원해서.'
강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려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 * *
6개월 후.
파출소 문이 열리며 순경 제복을 입은 강혁이 들어왔다.
"어, 왔냐? 미안하다. 혁아."
"아이, 무슨 소리예요, 형. 마침 시간이 있어서 왔는데요."
"짜식, 넌 항상 시간이 있냐? 아무튼 고맙다."
"형수님하고 100일 된 날이잖아요. 오늘은 같이 지내셔야죠."
강혁이 자신의 사수인 나경필에게 말했다.
경찰 시험에 합격한 강혁은 은하 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회귀 전의 기억과 동일하게 자신의 영원한 형님이 된 나경필을 사수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경장이었던 나경필은 이제 막 경찰에 입문한 강혁을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사람이다.
"참, 너 강력계 지원 했다며?"
"예, 그렇게 됐어요."
강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흐, 하긴 강력계야말로 경찰의 꽃이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걱정 마세요. 저 강혁입니다."
"짜식,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 아무튼 오늘 당직 잘 부탁한다."
나경필이 손을 흔들며 당부를 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강혁의 인사를 뒤로 하고 나경필은 파출소 문을 나섰다.
"아, 참! 그리고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100일 그냥 놓치고 지나갈 뻔 했어."
"뭘요. 형수님하고 좋은 시간이나 보내세요."
강혁의 말에 나경필이 손으로 인사를 하고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흐흐, 잘 돼야 할 텐데."
오늘은 나경필이 장래 그의 아내가 되는 김남숙과 만난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원 역사에서 나경필은 100일 기념일을 깜빡했었다.
기념일을 놓치는 바람에 김남숙에게 차였다.
이후에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기는 하지만 헤어진 동안 나경필의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당시 기억이 생생했던 강혁은 일부러 지나가는 척 100일 기념일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하필 기념일에 당직인 나경필을 대신해 그가 대신 당직 근무를 자원했던 것이다.
"경필씨!"
"어서 와요. 남숙씨."
김남숙은 미리 약속 시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나경필에게 살짝 미소를 보냈다.
만나기 시작한지 100일째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직 깊지 않았다.
어리숙하지만 그만큼 순수해 보여서 한 번 만나보기로 한 것이 시작이었다.
아직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시기다.
다만, 잊지 않고 100일을 기념하는 것을 봐서 조금 점수를 더 주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유, 아니에요. 금세 지나갔어요. 오는데 길이 막혔다면서요."
"어휴, 저쪽 도로에서 막혀서 30분은 늦었어요."
"배고프시죠. 제가 좋은 음식점을 예약해 놓았는데 가시죠."
"어머? 정말요? 어디예요, 거기가?"
김남숙은 안 그래도 차가 밀려 30분이나 지각을 하는 동안 배가 고파왔다.
"그런데 예약을 해놓았다면……."
자신이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으니 예약 자리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일단 가보죠. 남숙씨."
"그…그래요."
남숙은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나경필을 따라갔다.
"어머? 여기는 신라 레스토랑이잖아요?"
"예, 혹시 아세요?"
"그럼요. 저도 여기 와보고 싶었어요."
"잘 됐네요. 제 후배가 여길 소개해줬거든요."
"하지만 여기 비쌀 텐데?"
"제게 할인 쿠폰이 들어왔거든요."
"어머? 그래요?"
신라 레스토랑은 반년 전 오픈한 후, 지금은 매우 유명해진 유러피언 레스토랑이었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유럽의 최고급 요리들을 맛볼 수 있었다.
유명인들도 많이 찾았고, 그 뛰어난 맛에 큰 인기를 끌었다.
두 사람이 신라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다.
김남숙은 잘 꾸며진 건물 외벽에 눈을 빼앗겼다.
레스토랑 입구에는 제복을 입은 남자 종업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레스토랑이 만석입니다. 혹시 예약하고 오셨나요?"
"예, 나경필이라고 예약했는데요."
경필의 말에 직원이 수첩을 보더니 말했다.
"예약 시간이 많이 지나셨군요."
"혹시 안 됩니까?"
경필의 말에 남숙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남숙씨 잘못이 아닌걸요."
수첩을 닫은 종업원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늦으셨지만 지배인님이 두 분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그게 정말입니까?"
"예, 지배인님 특별 지시사항입니다. 그러니 시간은 걱정 마시고 마음껏 즐기다가 가십시오."
"그, 그래요. 지배인님께 감사 인사라도."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경필 경장님."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에 나경필이 고개를 돌렸다.
나경필은 잘 차려입은 말쑥한 복장의 남자를 발견했다.
"혹…혹시 지배인님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손님께서는 현재 경찰 재직 중이시죠?"
"그…그렇습니다."
나경필은 예약 전화를 했을 때 접수원이 직업을 물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경찰, 소방관, 군인 우대가 있다고 직업을 물었는데…….'
"나라를 위해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서 오시죠."
"감, 감사합니다."
나경필은 식당에서 경찰이라고 이런 대접을 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청탁이나 접대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경찰을 존중해주는 것이라 더 기분이 좋았다.
김남숙 역시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 이렇게 존중받는 것을 보자 기분이 남달랐다.
자신도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갑자기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경필의 직업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자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주문도 안 했는데?"
나경필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테이블 앞에 예쁜 유니폼을 입은 여종업원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두 분은 오늘 저희 레스토랑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예?"
"두 분이 저희 가게가 개점된 후, 만 번째 예약 손님이셨습니다."
"그… 그래요?"
나경필과 김남숙은 종업원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저희 가게 이벤트 당첨을 축하드리며 어떤 특전이 있는지 안내드리겠습니다."
여종업원이 다시 수첩을 잠시 보더니 미소 띤 얼굴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우선 오늘 메뉴는 저희 가게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특선 요리와 최고의 와인을 무료로 드립니다."
"예? 공짜라고요?"
"그렇습니다."
여종업원이 살짝 윙크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죠?"
김남숙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부부에게는 하와이 여행권 티켓을, 연인이라면 2박3일 제주도 콘도 사용권을 드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박!"
"두 분은 보아하니 부부는 아니신 것 같고, 연인 사이시죠?"
"예!"
나경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 드리지요."
여종업원이 예쁜 봉투를 건네었다.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서라벌 호텔 2박3일 숙박권과 비행기 티켓이 들어 있었다.
"하하!"
나경필과 김남숙은 뜻밖의 행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테이블로 말쑥한 제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케이크가 놓인 카트를 끌고 왔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꽃가루가 떨어지며 종업원들이 외쳤다.
"두 분의 100일을 축하합니다. 부디 두 사람의 좋은 인연에 축복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짝짝짝!
박수갈채와 함께 두 사람은 100일이라고 적혀 있는 양초에 불을 껐다.
나경필이 직접 케이크를 커팅해서 접시에 담아 김남숙에게 주었다.
"…경필 씨!"
김남숙은 경필의 자상한 행동에 살짝 감동을 받았다.
"드셔보세요."
"예, 경필씨."
남숙이 포크를 꺼내어 케이크를 맛보았다.
"우와! 정말 맛있어요."
당시에는 흔하지 않던 생크림 케이크다.
남숙은 처음 맛보는 생크림 케이크의 맛에 반해 한 입을 더 입에 넣었다.
"아얏!"
부드러운 케이크 속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왜 그러세요?"
"그…그게."
남숙이 입 안에서 이물질을 꺼내었다.
"아, 아니?"
남숙이 입에서 꺼낸 것은 작은 은반지였다.
"남숙 씨, 우리 100일을 기념해서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받아주세요."
"경…경필씨?"
김남숙은 깜짝 놀랐다.
투박하고 순진하기만 한 줄 알았던 나경필이 이런 이벤트를 할 줄이야?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울컥한 김남숙이 살짝 눈물까지 훔친다.
'이 남자, 이런 면이 있었나?'
"정말 못됐어!"
"예?"
"여자를 울리다니요. 못됐어요. 경필씨!"
눈가의 눈물을 훔친 김남숙이 나경필을 향해 생글생글 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남숙 씨!"
연애 중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태양처럼 밝은 미소였다.
나경필은 자신의 이벤트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스! 혁아! 네 조언이 통했다!'
"제가 끼워 드릴게요."
나경필은 반지를 김남숙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남숙 씨!"
"경필 씨!"
누가 안 보면 서로 뽀뽀라도 할 기세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차례대로 나온 음식들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음식 맛에 대한 호평은 물론이고, 와인도 최고급이었다.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던 김남숙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필 씨, 정말 고마워요.'
남숙은 100일 기념일을 기점으로 나경필을 자신의 남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