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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97화 (97/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97화

97화

#26장 어린 방문자 (3)

"아니에요. 그 애들이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하 수연이 심 계장과 이 경장을 향해 항변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강혁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애들을 구슬렸군.'

사실 이런 식의 진술 철회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실제 아이들에게 부모는 우주의 중심이다.

아무리 자신들에게 나쁘게 했다고 해도, 진술을 철회하는 일이 있었다.

혹독하게 학대를 한 후에 사랑한다고 말하면 오히려 아이들은 거기에 더 매달리게 된다.

심리조작의 달인인 강혁은 계모가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을 구슬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연지가 모두의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모두들 들으셨죠?"

채미라의 변호사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변호사의 말에 심 계장은 두 눈을 감았다.

"연지야, 아니잖아. 대체 왜 그러니?"

"어허,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변호사가 하수연을 향해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하수연 그만해."

심 계장이 재빨리 나섰다.

"하, 하지만."

심계장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 그럼. 저희 측은 하수연 순경과 강혁 순경에 대한 고소를 진행할겁니다. 그럼 법정에서 만나죠."

변호사가 연지를 데리고 경찰서를 나섰다.

"최악이군."

심계장이 한숨을 쉬었다.

*     *     *

"누가 집에서 화장실 사용하라고 했어! 학교에서 누고 오랬지!"

채미라의 앙칼진 목소리가 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서슬 퍼런 채미라의 모습에 민우는 잔뜩 겁을 집어 먹었다.

손에는 커다란 매를 들고 있다.

"잘, 잘못했어요.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민우가 울상을 지었다.

채미라는 그런 민우를 쏘아 보았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해. 엉?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리와."

채미라가 민우의 귀를 잡아 당겨 화장실로 끌고 갔다.

"엄마,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민우의 사정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변기 옆에 있는 휴지통에 버려진 휴지를 꺼내 민우의 입에 들이밀었다.

"뭐해! 물어!"

"엄마, 잘못했어요."

민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바닥을 비비며 빌었다.

연지는 채미라를 말려 보았다.

"엄마, 한 번만 봐주세요. 예? 이번 한 번만 봐주시면 다시는 집에서 화장실 안 쓸게요."

연지의 말에 채미라가 코웃음을 쳤다.

"이게 다. 너네 아빠가 돈을 못 벌어 와서 이러는 거야. 알아?"

넓적한 막대기로 연지의 어깨를 밀쳤다.

"아얏!"

"너도 같이 물어 볼래? 엉?"

"잘못했어요. 엄마. 용서해주세요."

거실 한쪽에서는 채미라의 친딸 박규리가 곰인형을 꼭 껴안고 떨고 있었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뭐야? 이 시간에?"

채미라는 누가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사모님, 주문하신 치킨 왔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헬멧을 쓴 배달원이 문 앞에 있었다.

"잘못 오셨어요. 우리 주문 안 했어요."

"그럴리가요? 504호 아닌가요?

"맞는데 우린 주문 안 했어요. 다른 곳하고 착각하신 것 아니에요?"

"이상하네? 진짜 여기 주소 맞는데?"

그 때 옆집에서 문이 열리며 새댁이 나왔다.

"여기에요. 제가 실수로 호실을 잘못 말했어요."

"아, 그래요. 사모님."

배달원이 옆집으로 치킨을 가져가자 채미라는 새댁에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험상궂은 얼굴로 변했다.

"민우, 이 녀석!"

앙칼진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다시 벨이 울렸다.

딩동댕동.

렌즈를 통해 보니 새댁이었다.

"무슨 일이야? 동생?"

"언니 너무 많이 시킨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요. 우리 같이 먹어요."

"아, 아냐. 우린 괜찮아. 동생이나 먹어."

"에이, 언니 이러기에요. 신라 치킨이에요. 요즘 엄청 유명한 곳."

새댁이 치킨과 콜라를 흔들며 웃었다.

채미라는 신소희가 그냥 갈 것 같지 않아 당황하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민우에게 달려가 엄포를 놓았다.

"너, 빨리 그쳐. 그리고 옆집 아줌마 오면 알지?"

"훌쩍… 예, 엄마."

"연지 너도!"

"예, 엄마."

"빨리 눈물 닦아."

연지와 민우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채미라가 문을 열자 신소희가 치킨과 콜라를 들고 들어왔다.

"미안해. 사실은 애들이 좀 말을 안 들어서 혼내고 있었거든."

"뭘 미안해요. 애들은 다 그러면서 자라는 거죠."

"후훗, 어서 들어와."

"애들아, 안녕!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아줌마야. 같이 치킨 먹자."

거실에는 치킨과 콜라가 놓이고, 험악했던 거실에 짧은 평화가 찾아왔다.

"어휴, 저 여자. 진짜. 달려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걸 겨우 참았네."

모니터를 보며 독거미 류수정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옆에는 아직 헬멧을 벗지 않은 최요한이 서 있었다.

"아휴, 난 문을 여는 순간 한방 먹여버릴 뻔했다니깐, 독거미 누나."

퍼―억!

최요한은 자신의 급소를 감싸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류수정의 유령 같은 발차기에 급소를 가격당한 것이다.

"내가 독거미라고 부르지 말랬지?"

"저거, 내가 언젠가는 당할 줄 알았지."

꺼억 거리는 최요한을 보며 캐리 박이 고개를 흔들었다.

"채미라, 바깥에서는 어땠어?"

흥분하는 다른 팀원들과 달리 박정철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 여자, 완전 여우에요. 이웃들은 집에서는 저런 짓 하는 줄 전혀 모를걸요."

류수정은 채미라가 외출할 때, 은밀히 따라가서 행동을 촬영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선할 수가 없어요. 완전 변신 수준이야."

"그렇군."

박정철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도 박정철은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정보기관에서 일해 온 자의 습성이었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독거미 누나, 진짜 이럴거예요!"

고통이 가셨는지 최요한이 일어서며 류수정을 향해 항변했다.

"이게 아직 덜 맞았지?"

류수정이 최요한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최요한이 양손을 들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어쭈, 대항하겠다는 거냐?"

"이씨, 내가 맨날 맞고만 다닐 줄 알아?"

"말이 짧다."

쉬이익!

퍼―억!

다시 최요한이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어느샌가 날아온 유령 같은 발차기에 소중한 두 개의 알이 가격당한 것이다.

캐리 박은 그 모습을 보며 절대로 류수정에게 개기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명불허전이군. 독거미."

"이씨, 팀장님이라도 안 봐줘."

"실례. 조심하지."

"흥!"

류수정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박정철은 머릿속으로 류수정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별명은 독거미.

여군 특전사 출신. 적진 잠입, 암살, 탈주의 프로페셔널.

고공 침투 훈련 100회 달성,

수중 침투 프로페셔널.

학창시절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

프랑스 유격 훈련 파쿠르 뒤 콩바탕을 위탁 연수.

당시 연수생 중 최우수 점수로 수료.

파쿠르 뒤 콩바탕은 파쿠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장애물을 뛰어 넘고, 벽을 자유자재로 타고 오르며,

옥상과 옥상 사이를 뛰어 넘는다.

그렇다.

류수정은 침투 및 탈주의 스페셜리스트였다.

박정철은 우수어린 눈동자의 캐리 박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그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고아 출신.

어린시절 네덜란드로 입양.

프로 카레이싱 선수로 데뷔,

네덜란드 F3000 경기 챔피언 2회, 준 챔피언 1회 달성, 1년 전 챔피언쉽 우승.

F1급으로 승급.

여자 친구에게 추근거린 스폰서를 상대로 주먹을 휘둘러 레이싱 계에서 반강제로 퇴출.

명예와 부를 내려놓고 지킨 여자 친구는 그를 차고, 부자에게 시집감.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있음.

캐리 박은 작전 수행 후, 탈주를 위해 필요한 인재였다.

박정철의 시선이 최요한을 향했다.

최요한은 간신히 일어나더니 다시 류수정에게 껄떡거리다가 다시 얻어맞았다.

'훗, 포기를 모르는군. 천성인가?'

최요한에 대해서는 그를 뽑은 이규철에게 직접 설명을 들었다.

겉모습만 보면 전형적인 강남 오렌지족으로 보인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귀티 나게 생긴 얼굴이다.

전과 17범. 23세. 소매치기, 절도, 결혼 사기 다수.

특이사항 보육원 출신.

사기 절도 등으로 번 돈 모두를 보육원에 보내고 정작 본인은 단칸방에서 생활함.

최요한은 15살 무렵 보육원을 뛰쳐나와 종로의 앵벌이 조직인 왕귀 밑에 들어갔다.

왕귀는 자기 밑에 있던 앵벌이 몇 명을 은퇴한 전설적인 소매치기 선수에게 맡겼다.

최요한은 그의 밑에서 1년 만에 모든 것을 배우고, 종로 바닥에서 소문난 선수가 되었다.

요한의 소매치기 솜씨는 당한 사람이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18살이 되었을 때는 입에 기름을 바른 것 같은 뛰어난 말솜씨와 매력적인 외모로 사기를 쳤다.

유명 대학의 학생 등을 사칭하며, 부유층 자녀들을 상대로 미남계로 돈을 뜯어낸 것이다.

"어떻게 찾은 녀석인가요?"

"강남 부동산 재벌 딸을 감쪽같이 속였더군요."

"……?"

"동부지검 검사로 재직 중인 것으로 사칭하고 스폰을 받고 있었습니다."

"흐흠."

사진을 보며 박정철은 흥미를 보였다.

"제가 형사로 위장해서 현장체포 후, 사정을 설명했는데도, 그 여자는 그녀석을 쉽게 잊지 못하더군요."

"허허!"

"나이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것을 알고 나서도 오빠, 오빠 거리는데… 아무튼 대단한 녀석이에요."

이규철의 말을 듣더니 박정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쁜 녀석은 아니더라고요."

"어떤 점이 그렇죠?"

"보육원에 지속적으로 돈을 보내고,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흐흠."

'근본이 썩은 놈은 아니군.'

박정철은 그렇게 최요한을 자신의 팀원으로 받아들였다.

*     *     *

은하 파출소.

"혁아, 어서 와라. 고생했다며?"

나경필 경장이 파출소로 복귀한 강혁을 보며 반가워했다.

"아뇨, 제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따라다닌 게 다인데요."

"왔냐? 된통 깨지고 왔다며?"

배덕만이 실실 웃으며 강혁을 바라보았다.

"아이씨, 형님 또 왜 그래요?"

"뭐, 인마. 내가 뭐 어쨌다고. 이 녀석이 선배들 충고를 안 듣고, 잘난 척 하다가 깨진 거잖아."

"배 경사님 말이 틀린 건 없어. 우리가 얼마나 말렸다고."

그날 같이 있었던 박경장이 배 경사를 두둔했다.

"에이, 선배님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우리 막내가 좋은 경찰되려고 노력한건데."

김 순경이 강혁을 두둔했다.

"그쪽 부모가 고소했다며? 애들은 진술 번복했고?"

배덕만이 쯧쯧 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강혁과 하수연이 당한 일은 이미 북천경찰서 전체에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하이고 마 이제 고마 하이소. 안 그래도 속상할건데."

"인마, 이런 일은 선배들이 충고한대로 따라야지. 우린 뭐 양심이 털 나서 안 나선 줄 아냐?"

배덕만이 실실 웃으며 타박했다.

"막내야, 이번 일 잘 처리해야 한다. 안 그러면 너 정직당할 수 있어."

이경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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