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099화
99화
"……?"
채미라는 깜짝 놀랐다.
"아, 아냐. 이건 아니야."
"대체 뭐가 아냐? 뭐가 아니냐고!"
"이…이건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게 중요해? 오냐 말해주마. 내가 설치했다. 하도 이상해서 내가 설치했다고. 됐냐?"
박재호의 말에 채미라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박재호는 자신이 몰카를 설치한 것으로 하기로, 중년 사내와 동의했다.
이혼 소송을 용이하게 하고, 혹시 모를 일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과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에 강혁이 생각해낸 심리적 트릭이었다.
결국 박재호는 로펌 홍익과 정식 계약을 맺은 걸로 서류를 작성하고 올라왔다.
이제 모든 증거가 완벽한 법적 효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콩밥 먹고 싶지 않으면, 당장 경찰들한테 한 소송 취소하고, 이혼 동의해."
박재호가 거실 바닥에 이혼서류를 올려놓았다.
"당…당신?"
"지금 이혼 도장 안 찍어주면. 소송할거야. 이혼 사유가 당신한테 있으니 각오해."
"흑흑, 당신 어떻게 나한테 이래?"
"당신이야말로, 인간이냐? 네가 인간이야? 대체 애들한테 왜 그랬어?"
박재호가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품었던 의문이었다.
대체 아내는 왜 그런 것일까?
박재호의 말에도 그녀는 그저 흐느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 안해? 어휴. 됐다. 규리 챙겨서 당장 친정으로 돌아가!"
"뭐? 안 돼. 못 나가."
채미라의 말에 박재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다란 여행가방을 꺼내왔다.
그리고 채미라와 규리의 옷을 챙겨 넣었다.
"연지 아빠. 제발 이러지마. 한 번만 용서해줘. 응?"
"용서? 한 번만 용서?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그 어린 것이 너한테 빌 때는 왜 그랬냐?"
"흑흑흑! 나도 몰라. 나도 억울해. 난… 난… 나도 학대당했어."
"뭐? 무슨 소리야? 너네 엄마 아빠가 목사고 어린이집 원장인데 학대를 당해?"
"당신은 모르지. 내가 얼마나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한 번 물고가 트이자 채미라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그게 사실이야?"
"크흐흑, 나도 피해자라고… 어어엉."
박재호는 그래도 한 이불 덥고 살아왔던 정이 있어 그녀의 말에 마음이 약해졌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그런 사람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연지나 민우에게 한 짓은 다 내가 어릴 때 똑같이……."
"됐어. 그만해. 그렇다고 당신이 우리 애들에게 한 짓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박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하루만 줄게. 내일은 규리도 당신도 내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어."
박재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당신?"
"저녁에 들어올게. 당신하고 애 짐 챙겨놔."
박재호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도장도 찍어 놓고!"
박재호가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채미라가 목을 놓아 울었다.
박재호는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안을 돌아보았다.
거실 한쪽에는 여행용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흥, 잘 생각했어.'
경직되어 있던 얼굴표정을 살짝 풀었다.
"아빠!"
연지와 민우가 박재호를 향해 반갑게 다가왔다.
아빠가 집에 있는 동안에는 계모가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두 아이는 특히나 반가워했다.
"연지야, 민우야."
박재호가 두 아이를 끌어안고는 흐느꼈다.
"미안하다. 이 아빠가 못나서 너희들을 힘들게 했구나."
"아빠?"
연지가 의아한 얼굴로 박재호를 쳐다보았다.
"아니다. 아니야. 연지야, 민우야, 내일 이야기하자."
거실에는 채미라만이 아니라 규리도 있었다.
박재호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기가 불편했다.
"여보, 마지막이니. 우리 함께 저녁식사를 먹어요."
남편이 아이들을 끌어안고 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채미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전히 아내가 괘씸했지만 아이들이 지켜보는 중이라 참았다.
"애들아, 오늘은 엄마가 맛있는 걸 준비했다니 같이 먹자구나."
"예. 아빠."
연지와 민우가 활짝 웃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집에 온 아빠와 함께 즐겁게 식사를 했다.
박재호는 눈치를 보아하니 채미라가 마음을 정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잠에 들자, 채미라가 박재호에게 도장이 찍힌 이혼서류를 건넸다.
"경찰 소송도 취소해. 영상이 있는 한 어차피 지게 되어 있어."
"낮에 변호사한테 전화했어요."
채미라의 말에 박재호가 말했다.
"잘했어."
짧게 대답했다.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는 것도 싫었다.
이날 밤, 박재호는 혼자 소파에서 잠을 잤다.
채미라와 한 이불을 덥고 자는 것도 싫었던 것이다.
깊은 밤, 모두가 잠 들어 있는 한밤중에 채미라가 조용히 일어났다.
거실에 있는 디지털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채미라는 거실을 가로지르더니 아이들이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세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채미라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눈앞에 왔다 갔다 했다.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문을 잠그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는 박재호가 잠이 들어 있었다.
벽면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거실이 밝아졌다.
채미라는 천천히 소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박재호를 바라보던 눈이 매서운 눈초리로 변했다.
"이건 모두 당신이 잘못한 거야."
등 뒤에 숨겨놓았던 커다란 식칼을 꺼내었다.
"죽엇!"
칼날이 박재호의 가슴팍으로 내리 찍혔다.
퍼―억.
"뭐, 뭐지?"
채미라는 손에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당황했다.
덥섭.
갑자기 잠들어 있던 박재호가 채미라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칼을 놓고 거실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 설마 했는데, 너? 이런 무서운 여자였냐?"
"어… 어떻게?"
채미라는 망연자실하며 박재호를 바라보았다.
"왜? 이상해?"
박재호는 손에 든 식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그런데 칼이 들어가지 않는다.
놀라는 표정의 채미라를 향해 박재호가 옷을 벗어 보여준다.
겉옷을 벗자 안에 경찰들이 입는 방검복이 있었다.
채미라는 경악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당…당신 대체……."
망연자실해하는 채미라를 바라보며 박재호가 외쳤다.
"이제 들어와서 잡아가세요."
채미라는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며 경찰 정복을 입은 강혁이 보였다.
"채미라씨, 당신을 아동학대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합니다."
강혁이 다가와 채미라의 손에 수갑을 채우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다.
"어… 어떻게?"
채미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강혁이 채미라를 데리고 나가자 중년 남자가 박재호 앞에 나타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박재호가 방검복을 벗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제 목숨을 살리셨어요."
"박재호씨가 저희를 믿어 주신 덕분입니다."
박정철은 낮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 * *
"허어, 저 여자도 피해자였나?"
박재호와 채미라의 대화를 모니터로 보며 임호장이 한탄했다.
박정철은 눈에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학대당한 충격으로 어른이 되어서 자신이 당했던 학대를 대물림하는 경우가 있다더군."
"그래도 지은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신소희가 말했다.
역시 경찰출신이라 이런 점에서는 단호했다.
"불쌍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독거미 류수정도 채미라를 동정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휘유, 같은 여자들이 더 하네."
최요한이 이죽거렸다.
"너, 또 이 누나한테 맞고 싶은가 보다? 심심하지?"
"하하, 아니에요. 수정 누나."
"흥!"
깐족거리는 최요한을 두고 류수정이 말했다.
"어디 가는 모양인데 따라가 볼게요."
"요한이도 같이 데리고 가."
"……예."
흐느껴 울던 채미라가 돌연 울음을 멈추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류수정과 최요한은 서둘러서 간단히 변장을 하고 채미라의 뒤를 따랐다.
채미라는 마트를 갔다.
장을 보러 간 것이다.
'장을 본다? 남편을 설득해 볼 생각인건가?'
그런데 장을 보는 분량이 오늘 저녁 찬거리를 넘어섰다.
'떠날 생각이 없군.'
채미라가 약국을 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류수정이 앉은 자리에서 귀를 가볍게 터치했다.
"뭘 샀는지 알아봐."
소형무선통신기로 최요한에게 지시를 내렸다.
채미라가 장바구니를 들고 신호등을 기다릴 때였다.
모자를 눌러쓴 최요한이 채미라의 옆에 서 있다가 신호가 바뀌자 채미라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최요한의 손에는 어느새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수면제야. 불면증이 있었나?"
최요한이 귀를 터치하며 말했다.
"오케이, 별거 없네. 도로 갔다 놔."
류수정이 말했다.
최요한이 다시 채미라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자 그녀의 겉옷 주머니에 어느새 약봉지가 들어가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이다.
이규철이 최요한을 팀원으로 점찍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고기와 수면제?"
"예, 별다른 건 없었어요."
류수정의 말에 박정철은 뭔가 생각하는 모습이다.
"혹시 모르니 오늘밤은 다들 스탠바이 해."
"……?"
박정철의 말에 모두는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 팀의 팀장은 박정철이다.
모두는 박정철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억대의 계약금을 받았다.
"예? 잘 때 이걸 입고 자라고요?"
박정철에게 연락을 받은 박재호가 의아한 눈으로 방검복을 살폈다.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채미라씨가 낮에 수면제를 샀습니다."
"예? 수면제요?"
"채미라씨에게 불면증이 있나요?"
"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박정철이 말없이 박재호를 응시했다.
"서…설마?"
"확인해보죠. 자기 전에 이걸 드십시오."
"이건?"
"수면제를 중화해주는 약입니다. 몰래 먹여도 끄떡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자는 척만 하라는 건가요?"
박정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정말 무서운 여잡니다. 어떻게 날 죽일 생각을 했을까요."
"어릴 때 학대를 당한 트라우마로 공감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사이코패스라는 말을 아시나요?"
"아, 아뇨. 처음 듣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살인을 하는 데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그럴 수가?"
박재호는 자신이 그런 사람과 그동안 살을 맞대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끔직했다.
그리고 연지와 민우가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런데 이제 저 여자는 어떻게 되나요?"
"법의 심판을 받아야지요. 살인미수죄까지 저질렀으니 오랫동안 감옥에 있어야 할 겁니다."
박재호는 박정철의 말에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에게도 수면제를 먹인 모양이네요."
박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 소란에도 아이들은 아무도 방 밖으로 나와 기웃거리지 않았다.
"저도 이제 경찰서로 가봐야겠네요."
박재호가 일어났다.
살인미수 당사자로 경찰에서 진술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