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03화
103화
최대한과 이향숙은 언론을 통해 전해지기 전에 전화로 승호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향숙이 엄한 눈빛으로 승호를 노려보았다.
'죄송해요. 엄마. 모두 얘기하면 괜히 걱정할까봐.'
승호의 표정을 본 이향숙은 한숨을 쉬며 누그러졌다.
'무사하니 됐다. 이 녀석아.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짓 하면 안 돼.'
누그러졌던 얼굴이 다시 엄한 표정이 되었다.
승호는 재차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최대한은 조금 달랐다.
그 역시 위험한 순간들에 대해 들으며 마음이 철렁했지만, 무사하지 않은가?
오히려 자랑스러운 마음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에밀리를 보니 아무래도 아들인 최승호에게 푹 빠진 모양새다.
게다가 그걸 전혀 숨기지 않는다.
확실히 애정 문제에 있어서 숨김이 없고, 적극적인 서양 애들다웠다.
그런데, 아들 문제라 그런지 유심히 세 사람을 살핀 최대한과 이향숙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에밀리만이 아니라 아멜리아와 다나까지 모두 최승호에게 보통 이상의 관심을 보인 것이다.
셋 모두 승호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친인 이향숙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자의 감, 아니 엄마의 감이라는 것이 발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 사람의 관계도 금세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승호가 처해 있는 상황도 판단이 됐다.
'우리 아들이 아주 여복이 터졌구나.'
이향숙 여사는 이런 상황이 매우 당혹스러웠다.
물론 아직 나이들이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장래에 최씨 집안에 노랑머리 며느리를 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반면 최대한은 이런 상황이 약간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이 녀석이 날 닮아서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구나. 아주 세계화의 기수네. 크ㅤㅋㅡㅅ.'
당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나온 세계화라는 단어가 언론에서 회자되던 시대다.
최대한과 이향숙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여보, 이제 우리 어떡해요?'
'어쩌긴 뭘 어째? 어차피 이 녀석 사업체가 미국에 있어. 우리 운명이다, 생각하고 받아들여.'
두 사람이 이렇게 눈빛으로 대화하고 있을 때였다.
"승호, 우리 한국어 선생님이 학교 앞 분식집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가볼 수 있을까?"
귀족적인 마스크의 다나 무어가 한국의 분식집 이야기를 하며 눈을 빛냈다.
"맞아, 승호. 우리도 모두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어. 정말 그렇게 맛있니?"
"아아, 그렇지. 그 맛은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소울푸드지."
최승호는 학교를 마치고 출출할 때 먹었던 떡볶이, 김밥, 어묵, 쫄면 등을 떠올렸다.
아멜리아 등은 승호가 황홀한 표정을 떠올리며 입가에 침이 고이자 눈빛을 교환했다.
"승호, 우리도 데려가줘."
"응? 지금 분식집에 가자고?"
승호의 물음에 세 사람이 모두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지는 영란과 함께 가방을 정리한 후, 교실을 나섰다.
두 사람은 서로 잡담을 나누며 수정 분식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디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수지가 의아해하며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엉? 저게 뭐야?"
골목 공터 어귀에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쉐보르 밴이 대기하고 있었다.
장거리 호화 리무진이라고 불리는 스타크래프트 밴답게 차의 넓이와 높이가 모두 컸다.
수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서울 외곽의 골목에서 보기 쉽지 않은 차이기 때문이다.
"뭐야? 태지 오빠라도 온 건가?"
스타크래프트 밴을 타고 다니려면, 국내에서 원탑을 찍는 연예인이 아니면 어렵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히야, 이런 곳에서 저런 엄청난 차를 보네? 대체 어느 연예인이 온 거지?"
수지와 영란 역시 사람들 틈에 섞여 누가 온 건지 추측하기 놀이를 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저런 차를 타는 탑 연예인이 여기엔 왜 왔을까?"
"글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수정 분식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모, 떡볶이 2인분하고, 김밥 한 줄 주세요."
"그래, 저기서 조금만 기다려."
"예, 이모. 많이 주세요. 헤헷."
"큭, 알았어. 학생."
주문을 하고,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최수지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온다던 오빠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쁜 금발 미녀 세 사람과 함께 앉아 있었다.
게다가 그들 주변에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과, 매니저로 보이는 여자들이 함께 있었다.
수지는 자신이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 볼을 꼬집어보았다.
"앗, 아야. 뭐야? 꿈이 아냐?"
옆에 서 있던 영란 역시 얼마나 놀랐는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오, 오빠?"
"엇? 수지야?"
승호는 아멜리아들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 앞 분식집으로 온 것이다.
집이 교외에 있기 때문에 차로 움직였다.
공항에서 내렸을 때, 강혁이 스타크래프트 밴을 보냈다.
운전대를 잡은 것은 알파팀의 프로 카레이싱 선수였던 캐리 박이었다.
밴의 앞뒤로는 검은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운전하는 검은색 자동차가 두 대 서 있었다.
밴 안에는 근접 경호를 위해 흑거미 류수정이 통역 겸 경호원으로 함께 했다.
"누구? 승호 동생이야?"
아멜리아가 물었다.
봄바람 같은 아멜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소개할게. 내 동생 최수지야."
"안녕? 난 아멜리아야. 네 오빠 친구지."
"알, 알아요. 아멜리아 패닝. 믿을 수 없어."
수지는 잠시 숨이라도 멈춘 것처럼 심장부근을 잡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빠와 함께 10번 넘게 봤던 영화, '하와이안 어드벤처'의 여주인공 아멜리아 패닝이 눈앞에 있었다.
원래 아멜리아의 팬은 승호보다 수지가 먼저였다.
그 역시 동생 때문에 보게 되었던 모험영화에서 아멜리아를 알게 되었다.
수지는 자신의 우상이 오빠와 친구가 되어 분식집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현실감이 없었다.
"야, 정신 차려. 최수지."
"엇! 오, 오빠."
최승호의 목소리에 잠깐 정신이 나갔던 최수지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야, 네 친구. 정신이 나간 것 같다."
"응?"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친구 영란의 눈에 흰자위가 보이고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야, 김영란, 정신 차려. 야!"
일련의 소등이 지나간 후, 수지와 영란은 테이블을 두 개 붙인 후, 즐겁게 분식을 먹었다.
아멜리아뿐 아니라 에밀리, 다나와도 서로 소개를 나눈 것은 물론이다.
알고 보니, 영란 역시 아멜리아의 찐팬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당시 아멜리아는 전 세계 십대들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그 팬덤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특히나 여자아이들에게 있어서 아멜리아는 일종의 워너비였다.
십대 여자아이들이 즐겨보는 잡지에는 온통 아멜리아의 화보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입는 옷, 악세서리, 화장품 등 모든 것이 하나의 동경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은 한국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그런데, 수지 오빠가 설마 오빠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김영란이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수지를 보며 살짝 눈을 흘겼다.
"미, 미안."
수지가 양손을 모으며 살짝 눈을 찡긋거렸다.
"서…설마, 그걸로 끝내는 건 아니겠지?"
"으응?"
"적…적어도 다음 번 분식은 네가 쏴야하지 않겠니?"
"무, 물론이지. 다음번엔 내가 사줄게. 화 풀어. 영란아."
"아…알았어."
수지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짐짓 화를 내는 영란이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과 함께하면서 조금씩 자신을 되찾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기쁘기까지 했다.
'화이팅, 김영란 좀 더 밀어붙여도 돼. 넌 내 친구잖아. 당연히 화를 내야지.'
"어때? 먹을 만해?"
승호는 사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야 정말 좋아하고 맛있어하는 음식이었지만 외국인인 이들의 입맛에 맞을지는 미지수였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승호가 보기에도 이곳 분식점 음식이 상당히 맛있다는 점이다.
떡볶이도 매운 것이 아니라, 소스가 달콤짭짤했다.
"하아, 세상에 이런 맛이 있는 줄은 몰랐어."
다나가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내며 말했다.
세 사람 모두 예쁘지만 특히나 다나는 귀족적인 얼굴로 기품 그 자체인 아이였다.
그런 여자아이가 떡볶이를 먹고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던 터라 승호는 머리를 끄적였다.
'다행이다. 좋아해서.'
"정말이야. 이런 맛있는 게 있는 줄 모르고 18년을 살았어. 아, 억울해."
에밀리가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에밀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코리아타운에 가면 먹을 수 있을 거야. 다만 조심해야 할 건 소스가 다를 수 있어."
"그래? 어떻게 다른데?"
아멜리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이건 사실 달고 매콤하지만, 매운맛이란 것도 있거든."
승호의 설명에 모두들 흥미진진한 표정들이다.
"흐흐, 난 한 번 그 매운 맛에 도전하고 싶은 걸?"
에밀리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이다.
이러니 세 사람이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이다.
에밀리가 행동대장 격으로 먼저 움직이지만 사실 다른 두 사람 모두 도전적인 성격이다.
세 사람 모두 죽이 맞는 것이다.
"좋아, 세 사람. 각오해 두는 것이 좋을걸. 한국인의 진짜배기 매운맛을 보여 줄 테니 각오해."
승호가 눈 한쪽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좋아. 그 도전. 이 에밀리양이 기꺼이 받아들이지."
"우리도야. 승호."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밝게 웃으며 도전 의사를 밝혔다.
한편 수지는 세 사람과 대화하는 오빠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공부야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오빠였지만, 성격은 매우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공부 빼고 다른 면은 볼만한 게 없었던 오빠가 미국생활 1년 만에 많은 것이 변했다.
저렇게 윙크를 하면서 금발의 미소녀에게 말을 거는 오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빠, 멋있어.'
수지는 새삼 최승호가 달라보였다.
그때였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일련의 학생들이 우르르 분식점 안으로 들어왔다.
'엇, 쟤들은?'
모두 같은 학교 사람들에, 같은 반 친구들도 여럿 보였다.
"이모, 떡볶이하고. 김밥이요."
"저는 쫄면요."
"그래,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요."
쏟아져 들어온 수지의 학교 학생들이 주문을 하고, 테이블로 들어올 때였다.
낯선 외국인들의 모습에 잠깐 의아해하던 학생들의 입에서 놀란 감탄성이 터졌다.
"아, 아멜리아 패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멜리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학생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꺄―악! 진짜야!"
그때 문이 열리며 또 한 무리가 들어왔다.
수지의 눈이 커졌다.
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여자아이들 그룹이었다.
평소 인기도 많고, 마음씨도 착해서 수지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아이들이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