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10화
110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도쿄의 외환시장이 가진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일본의 금융당국은 도쿄 외환시장에 대해서 매우 과도한 규제를 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인지 독자적인 판단으로 상황을 보고 시세를 결정할 만한 역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전날의 뉴욕이나 런던의 외환시장의 시세를 따라 움직였다.
즉, 두 시장의 시세가 곧바로 도쿄의 외환시장에 반영되는 것이다.
문제는 뉴욕과 런던의 외환시장이 주말에 쉬었다는 데 있었다.
그 때문에 이날 도쿄의 시세를 결정한 곳은 바로 시드니 외환시장의 환율이었다.
도쿄의 시장보다 호주 시드니의 외환시장이 세 시간 앞서 개장하기 때문이었다.
강혁은 바로 이 점을 철저하게 공략했다.
일본 시간으로 새벽 6시, 강혁은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솔라스 회장님, 지금부터 엔화를 대량으로 매입하세요.
강혁의 지시에 솔라스의 입가에 큰 미소가 지어졌다.
―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이미 양동작전으로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 솔라스였다.
하지만 그의 탐욕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래요. 이제 마지막 판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판이기도 하지.
솔라스의 말에 강혁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역사를 한 번 만들어 봅시다."
―화끈하게 해보자고. 크크크.
전화를 끊은 솔라스는 퀀덤박스와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 국제투기자본에 연락을 취했다.
―솔라스와 국제투기자본이 시드니에 개입했다!]
개장 세 시간 전부터 이런 소문이 도쿄 외환시장에 쫙 퍼졌다.
외환 딜러들은 본능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감지했다.
"이…이럴 수가?"
모니터를 보던 딜러가 얼굴을 감싸 안았다.
거래가 시작되자마자 엔화가 강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20분쯤 지나서는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했다.
솔라스와 그를 따르는 국제적인 헤드펀드들이 보유하고 있던 마르크화를 팔았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엔화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왜 마르크화를 판 것일까?
한주 전, 독일은행의 금리 인하로 달러당 환율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엔화는 일본은행의 고집스러운 금리 인하 반대로 불안정했다.
둘 사이의 차이를 이용한 투기 공세를 펼친 것이다.
솔라스와 헤드펀드들의 공세에 마르크당 엔화의 값이 올랐다.
그러자 이에 대한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마르크화보다 취약한 달러화의 폭락이 시작된 것이다.
"젠장, 이제 어쩌죠?"
"…우리도 엔화를 산다."
코바야시 은행장은 달러화가 폭락하자 보유하고 있는 달러 화폐의 자산 감소가 우려되었다.
코바야시는 일본의 자산 순위 1위 은행인 미츠비시파이낸셜 그룹의 은행장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일본 각지의 금융기관에서는 동일한 결정들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혁의 노림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 전역의 금융기관, 종합상사가 움직였다.
그들만이 아니다.
솔라스를 필두로 한 유대자본에 이어 화교 자본이 대거 움직였다.
대만, 싱가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각국의 금융기관들이 엔화 사재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10시30분.
거래가 시작된 지 9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도쿄 외환시장에 30억 달러어치의 엔화 매입 주문이 들어왔다.
엔화는 달러당 83엔에서 다시 82엔으로 내려가더니, 곧 81엔 선을 순식간에 깨고 무서운 기세로 폭등했다.
달러당 환율이 80.15엔까지 폭등하는데 걸린 시간은 개장 후 90여분에 불과했다.
불과 90여분 만에 엔화 값이 5%가 오른 것이다.
일일 상승률로는 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8…80엔 선이 깨졌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맙소사!"
"…솔라스, 이 악마 같은 놈!"
"…크레이지~"
"…크읏! 빌어먹을!"
80엔 선이 깨지자 도쿄 외환 시장에 엄청난 공포감이 몰려들었다.
가공스러운 패닉의 시작이었다.
"이봐, 들었어?"
"말해봐!"
"일본은행에서 달러를 사들이기로 했어."
"그게 다가 아니야. 정부의 금리인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는군."
"뭐, 뭐야? 그건 완전 항복 선언이잖아?"
"…제길!"
일본의 금융맨들 중에는 굴욕감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1992년 9월 유럽 통화 위기 당시 영국은행이 그랬듯이 일본은행이 백기항복을 한 것이다.
[솔라스가 이끄는 국제 투기 세력에게 일본은행이 항복했다.]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이 사태를 급하게 보도했다.
―존, 일본이 항복했네!
솔라스 회장이 일본은행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즉각 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마무리를 하죠."
강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것이다.
강혁의 지시가 떨어지자 유대자본과 화교자본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태도가 돌변했다.
대대적인 엔화 매각에 나선 것이다.
결국 이날 도쿄의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는 시작할 때보다 더 떨어진 82엔 대에 거래를 마감했다.
쾅―
일본중앙은행장 다케다는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은행장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크으윽, 바보 같은 놈. 겐이치, 지금부터 우리는 달러를 사들인다."
"…알겠습니다."
다케다 중앙은행장의 말을 들은 겐이치는 힘이 빠졌다.
엄청난 환손실을 보게 생긴 것이다.
이 날 이후, 일본은행은 한 달에 걸쳐 지속적으로 달러를 구입했다.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최종적으로 221억 달러어치의 달러를 사들여야 했다.
그 와중에 어마어마한 환손실을 입었다.
또 한 차례 솔라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린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일본이 지난 20년간 세계 각지에서 힘들게 벌어들인 돈을 이번 공경게 잃어버렸다고 보도했다.
80년대의 기록적인 호황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버블이 꺼지며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게 된 시절이다.
강혁에 의한 일본 공략 작전을 통해 빠져나간 자본들은 그야말로 일본 경제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다.
이 일은 일본 경제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흐흐흐, 이번 공격으로 50억 달러를 벌었어."
솔라스는 기분이 좋았다.
다른 투자자들에게 이익금을 돌려주고도 50억 달러를 남겼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막판에 끼어든 놈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돈에는 국적이 없는 법이다.
정확히 어디에서 돈을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중에는 자신의 헤지펀드 못지않게 많은 돈을 벌어들인 자들이 있었다.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돈이 몰려들었고, 그것은 힘이 되었다.
작전을 수행하기 더 좋은 환경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솔라스는 자신의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노출시켰다.
그 덕에 일본은 솔라스에 대해서는 이를 갈았지만 강혁의 존재는 전혀 몰랐다.
이번 공략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강혁은 일본의 알짜 기업들을 인수했다.
특히 반도체 생산과 관련된 기술들을 보유한 기업들이었다.
강혁은 이들 회사의 인수에 성공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플리이미드 기술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 외에도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각종 부품산업 기업들을 싹쓸이했다.
가마우치 경제라고 불리던 한일 간의 경제 관계를 뒤바꿀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97년 현재 한국의 경제는 계속해서 도약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만간 외환위기로 부도사태를 맞이하지만 앞으로도 그 기조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한국 경제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한 기술과 부품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경제의 규모는 성장했으나 실익은 일본이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강혁은 그 악순환을 미리 꺾어버릴 셈이었다.
소재와 부품 등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의 획득을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할 계획을 세웠다.
* * *
―존, 이번에 정말 큰 도움을 입었네. 자네가 우리 그룹을 살렸어.
"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에."
―자네에게 황룡패를 준 것은 정말이지 내 생애 최고의 결정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물론이지. 첸."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 첸이 강혁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말레이시아 경제가 박살이 나면서 황룡그룹도 큰 손해를 입었었다.
그런데 강혁 덕분에 기사회생한 것이다.
첸 가문과 객가의 내부에서 강혁에 대한 평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부 객가인들은 강혁을 백년의 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객가인들 사이에서 첸의 지위마저 올라갔다.
이런저런 연우로 두 사람의 관계는 한층 더 돈독한 사이가 되어갔다.
―그건 그렇고. 대륙에서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음, 그래. 지금은 40대 중반쯤 되지."
―그 사람이 누군가?
"시진풍. 푸첸성 부서기야."
―한번 알아보지.
"부탁하네."
―그래. 알았어.
첸과의 전화를 끊은 강혁은 시진풍에 대해서 생각했다.
시진풍은 자신이 회귀하기 전 시대의 중국 주석이다.
그가 주석이 되기 전, 그가 주석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혁은 지방 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를 미리 만나 관계를 맺을 생각이었다.
'…시진풍. 미래의 독재자. 하지만 내가 미리 그를 만나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면…….'
강혁은 미래의 한중 관계를 위해서라도 시진풍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싶었다.
쉽지 않겠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 * *
최수지는 집 거실에서 오빠와 금발의 미소녀들이 함께 다과를 나누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헤헤, 페이스북에 올려야겠다."
전학 간 학교에서 항상 존재감 없이 살다가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수지는 이 기회를 잘 살려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좋아, 앞으로의 내 학교생활이 걸려 있어. 영란이 몫까지 힘내자.'
수지는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자신과 아멜리아 패닝이 함께 있는 사진을 올렸다.
서울 데일리 신문사.
"자, 여기요."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고, 청바지 차림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여기자가 사진 몇 장을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
사진에는 유명 인기 스타 천수영의 밀회 장면 찍혀 있었다.
밀회 대상은 요즘 한참 인기가 오르고 있는 여배우 이미라였다.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이 조금씩 돌고 있는 중에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것이다.
"해냈구나. 이진주."
파마머리의 편집장이 입을 함지박하게 벌렸다.
"이걸로 판매부수 좀 올리겠군. 잘했어."
편집장의 칭찬을 듣는 둥 마는 둥 여기자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자신이 잡아낸 특종이지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가 특이했다.
"그럼 전 이만 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잠깐만 이진주, 너 아멜리아 패닝이 한국에 있다는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리에요? 그 친구가 한국에 왜 와요?"
여기자가 의뭉스런운 눈으로 편집장을 바라보았다.
"너 혹시 페이스북 안 하냐?"
편집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