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11화
111화
이진주는 편집장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이것도 기자라고. 얌마, 당장 가입해. 요즘 이거 안 하면 아무리 젊어도 구세대야. 한물 간 거라고."
"에이―씨, 취재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거 하고 앉아 있어요?"
"어이구, 지금이 돌아만 다닌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소셜 네트워크라고 몰라?"
파마머리를 한 50대 편집장이 거품을 물고 정보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아, 됐고.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이진주의 빈정대는 태도에 편집장은 열이 부글부글 끌어오르는 듯했다.
지난 번 삼양백화점 붕괴 사건 이후로 편집장인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야, 너 진짜… 어휴, 내가 참는다 참아. 아무튼 결론은 이거야. 아멜리아 패닝이 한국에 있다는 거."
편집장이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여주었다.
모니터 안에는 어느 가정집 거실에 앉아서 친구들과 함께 과일을 먹고 있는 아멜리아 패닝이 있었다.
"어? 진짜네? 여기가 어디예요?"
"너, 최승호가 누군지 알지?"
"응? 최승호? 혹시 페이스북 창업자?"
이진주가 편집장의 말에 사진 속 최승호를 알아보았다.
"아니,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래요?"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떡해? 이제부터 네가 알아내야지."
"알겠습니다. 당장 출발하죠."
"이봐, 이 기자."
몸을 돌려 나가려는 이진주를 향해 편집장이 갑자기 불러 세웠다.
"왜 그러세요?"
"너… 만족하냐?"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에요?"
"…아니, 아니다. 내가 잘못했다. 어서 가."
"쳇, 싱겁기는."
그녀는 어깨에 카메라를 둘러메고 사무실을 나갔다.
편집장은 그런 이진주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놈이 연예기자나 할 놈이 아닌데. 쯧."
원래 이진주는 서울데일리 최고 발 빠른 기자였다.
특종을 냄새를 맡는 속도가 기가 막히고 집념도 뛰어나서 사장이 주는 특종상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자타공인 서울데일리의 에이스였던 이진주가 지금은 왜 연예부기자가 되었을까?
1년 전, 삼양백화점 건물 붕괴 사건 이후, 스스로 사회부를 떠나 연예부로 옮겼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취재하러 다니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진주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사회부를 떠난 것일까?
편집장은 내심 그 이유를 짐작했지만, 자신도 지은 죄가 있었기에 상처를 헤집어 놓지는 않았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상처를 딛고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어둡고 컴컴한 방 안에 컴퓨터 모니터 화면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거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과일을 먹고 있는 아멜리아 패닝의 사진이 보였다.
"나의 천사, 나의 심장, 오, 아멜리아."
머리를 짧게 깍은 갈색머리의 20대 청년이 아멜리아 패닝의 사진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방을 살펴보면 아멜리아가 출연한 모든 영화의 포스터가 벽과 천장에 붙어 있었다.
장식장과 책장 위를 보면, 심지어 아멜리아가 영화에서 촬영할 때 실제 사용했던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가 아역 때부터 출연했던 모든 영화들의 비디오테이프가 책장에 꽂혀 있었다.
프린트기가 움직이며 사진이 컬러로 인쇄되어 나왔다.
청년은 가위로 사진을 오리기 시작했다.
아멜리아 패닝을 잘라내서는 스크랩북에 조심스럽게 붙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의 사진을 붙인다.
다음은 잡지의 사진과 펜을 사용해서 주변 배경을 꾸몄다.
잠시 후, 스크랩북에는 사내와 아멜리아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만들어져 있다.
스크랩북 종이에는 이미 많은 작품들이 존재했다.
하나같이 아멜리아와 사내가 서로 여러 장소에서 연애를 하는 장면들이다.
작품을 완성한 후, 사내는 스크랩북을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몰래 감추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스크랩북을 다른 장소에서 꺼내었다.
스크랩북을 펼친 후, 그곳에 최승호의 사진을 붙였다.
거기에다가 다시 잡지와 펜을 사용해서 기이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 속에서 최승호는 매우 다양하면서도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눈과 입이 찢겨져서 죽음을 맞이했다.
"흐흐흐, 감히 내 천사와 같은 집에서 지내다니 용서할 수 없지."
모든 작품을 다 완성시킨 후, 사내는 다시 스크랩북을 감추었다.
* * *
"하아, 서울은 정말 신기한 곳이야."
에밀리가 승호에게 말했다.
"……?"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런 산이 있다니? 뉴욕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인걸?"
"에밀리의 말이 맞아. 게다가 보통 산하면 생각했던 그런 곳이 아니야."
다나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응,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아멜리아가 다나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산은 엄청 크고, 깊은 숲이 있는 곳이다.
도시에서 멀리 벗어난 곳까지 가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울은 곳곳이 산이다.
그것도 간단한 준비만으로도 아무런 부담 없이 등산을 할 수 있었다.
신선한 산 공기를 마시며 모두 즐거워했다.
승호와 수지, 그리고 세 친구들이 등산을 즐기는 가운데 강혁이 보낸 경호원들이 그들을 보호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승호가 말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캠핑을 가보는 것은 어때?"
"캠핑?"
아멜리아가 봄바람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텐트에서 잠도 자고, 밥도 해먹는 거지. 어때?"
"난 찬성!"
에밀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즉각 찬성했다.
"오빠, 나도 찬성."
"나도야."
다나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귀족 그 자체인 다나는 언제나 도도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멜리아에게 향했다.
아직 의사를 밝히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쇼핑을 하러 가야겠네."
아멜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꺄르르 웃었다.
산을 타던 사람들이 흘깃흘깃 무리를 쳐다보았다.
"저… 저 친구 혹시 최승호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옆에 미인들은 대체 누구지?"
"저 여자는 아멜리아 패닝이잖아?"
"헉, 진짜네."
"아멜리아 패닝이 왜 최승호와 같이 있지?"
등산객들의 수근거림을 뒤로하고 모두는 오랜만에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끽했다.
수지는 집 앞에서 깜짝 놀랐다.
집 앞에 기자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었다.
"헉, 방송국에서도 왔어."
수지는 오빠인 최승호가 왜 하루만 집에서 묵고 장소를 옮겼는지 이해했다.
모든 것은 자신이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린 이후로 발생했다.
'과연 오빠야.'
최승호 자신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발견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바로 짐을 옮겼다.
지금은 수지도 오빠와 그 친구들이 어디서 묵고 있는지 몰랐다.
수지가 기자들 사이를 헤치며 지나갔다.
"저기요. 잠시만요. 집에 좀 들어갈게요."
"엇, 혹시 이 집에 사시나요?"
"예, 그러니까 길 좀 비켜주세요."
수지가 양해를 구하며 인파 속을 지나갔다.
"저기 최승호군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멜리아 패닝도 함께 있다고 들었는데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가요?"
"최수지양이죠? 오빠와 함께 있는 다른 두 여자분들은 누구인가요?"
수지가 이동하는 걸음을 따라붙으며 질문 세례가 퍼부어졌다.
수지는 잠시 몸을 멈췄다가 뒤로 돌아서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오빠를 기다리셔도 소용이 없어요. 오빠는 친구들과 함께 장소를 옮겼어요."
말을 마친 수지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요. 수지양, 오빠분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인가요?"
"스탠포드에 합격했다고 하던데,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요?"
"수지양! 수지양!"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뒤로 하고 수지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헉, 헉. 이게 대체 뭔 난리람?"
수지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왔니? 놀라지 않았어?"
엄마의 말에 수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마, 연예인들은 정말 대단해요. 이런 일을 항상 겪을 거 아냐?"
"글쎄 말이다. 저 사람들 때문에 나도 밖을 못 나가고 있어."
"오빠가 없는 걸 알면 금세 사라질 거예요."
"그렇겠지?"
엄마의 물음에 수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와 다나 그리고 에밀리는 힐튼호텔에 짐을 풀었다.
경호원들도 세 사람의 방을 중심으로 객실을 얻어 철통같이 경호에 들어갔다.
승호는 이들과 함께 있다가 새벽녘에 다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수지가 일부러 오빠가 장소를 옮겼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이유기도 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가족과 하루밖에 지내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자들이 집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건 가족들에게 못할 일이었기에 이런 연극을 꾸민 것이다.
"어느 나라나 기자들이란 정말 성가신 존재라니깐."
에밀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야. 난 파파라치만 없으면 세상에 바랄 것이 없겠어."
아멜리아의 말에 에밀리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우리 귀여운 아멜리아, 이 언니가 널 위로해주마."
"……에밀리~"
아멜리아는 자신을 위로해주는 에밀리의 팔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건 그렇고. 승호 넌 어떻게 할 생각인거야?"
다나가 물었다.
"응,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새벽에 몰래 집에 들어가기로 했어."
"미안해, 승호. 나 때문에……."
"아냐, 엄밀히 말하면 수지 그 녀석 때문이지 뭐."
"글쎄, 시기가 조금 빨랐을 뿐 언제든 이런 일은 일어났을 거야."
아멜리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멜리아, 그 거머리 자식이 없는 것만 해도 어디야."
에밀리가 말했다.
"거머리라니?'
승호가 의문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아멜리아를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있어. 아주 악질인 녀석이지."
다나가 말했다.
"그… 그래?"
다나의 말에 승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한… 몇 년 됐어. 그 사람이 집으로 이상한 우편물을 보내면서 알게 됐어."
아멜리아가 승호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편물 속에는 자신이 만든 스크랩북이 있었는데, 그게 너무 기분이 나빴어."
아멜리아는 기억을 떠올리자 진저리를 쳤다.
"어…어떤 내용인데?"
승호의 물음에 에밀리가 답했다.
"자기 사진과 아멜리아 사진을 가지고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망상들을 그려 놓은 작품집이었어."
에밀리의 말을 이해한 승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멜리아. 맘고생이 많았겠다."
승호의 위로에 아멜리아는 지긋이 승호를 바라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막 피어오르는 장미꽃마냥 화사했다.
그 모습에 승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승호는 자신의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